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1화 (61/70)

외전 3화

뭔가를 고민하던 김찬영이 느지막이 입을 연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하면 되지 않아?”

“아, 그런데 모르는 게 더 나으니까….”

김찬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여기 지금 눈이 몇 개야. 너 혼자 알고 있는 게 아니면 완벽한 비밀도 아니지 않아? 나중에 알게 되면 더 기분 나쁠걸.”

여기 석영이를 아는 사람이라곤 너랑 나밖에 없는데. 너랑 나만 입을 다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저 안에 김찬영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을 상기했다.

맞는 말이네.

“그래도 네가 비밀로 해달라면 그렇게 할게.”

김찬영이 작게 몸을 떨며 나를 본다. 이 추위에 애를 계속 붙잡고 있었네.

“아니야.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잘 생각했어.”

김찬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가게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웬 여자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그러더니 나와 김찬영을 번갈아 본다.

“오빠, 안 들어와요?”

“들어갈게.”

“네…. 빨리 와요.”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나를 힐끔 보고는 들어간다.

뭐야, 이 분위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찬영을 봤다. 김찬영이 무심한 낯으로 나를 보다가 눈가를 찌푸린다.

“그런 거 아니거든.”

“누가 뭐래?”

픽 웃고는 가방을 고쳐 멨다.

“들어가. 나 갈게.”

“응.”

혹시라도 가게 문을 열고 김광수가 튀어나올까 봐 후다닥 길을 벗어났다.

[석영아 나 집 도착]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탓에 집에 오는 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석영이에게 메시지를 보내놓고 훌러덩 옷을 벗어 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 보금자리에 들어왔다 이건가. 삽시간에 취기가 올라왔다. 몸이 자꾸 휘청거려 세면대를 붙잡고 양치를 했다.

“와 씨, 힘드네….”

대충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침에 침대에 벗어둔 티셔츠를 꿰어 입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핸드폰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하고 연거푸 거친 숨만 내뱉다가, 눈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연달아 울리는 진동에 눈을 비볐다.

“으음….”

이불 위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진동하는 핸드폰이 손에 잡히고 그대로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 김누리.

“응.”

― 너 진짜 이럴래?

뜬금없이 뾰족하게 날아오는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응?”

― 너 내가 전화를 몇 통이나 한 줄 알아?

눈을 끔벅이다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시간을 확인했다.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벌떡 상체를 세워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친! 오전 11시! 오전 수업 날려먹었다.

“아, 나 알람 못 들었나 봐.”

― 나 지금 너희 집 가고 있어. 가서 이야기해.

뚝, 전화가 끊겼다.

망연히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보다가 부재중으로 들어온 통화와 메시지를 확인했다.

[ㅇㅅㅇ♡ (17) 수요일

ㅇㅅㅇ♡ (1) 화요일]

어젯밤에 온 부재중 전화가 1통, 오늘 온 부재중 전화가 17통이었다.

[전화 안 받네? 씻고 있어?]

[설마 자?]

[기절 수준이네 어떻게 톡 보내고 바로 자냐….]

[잘 자♡]

[일어났어?]

[누리야 왜 전화 안 받아]

[나 버스 탔어]

[김누리]

[준비하고 있어?]

[일어나면 연락 줘]

[왜 확인도 안 해 너 무슨 일 있어?]

아아, 일 났다. 힘없이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얼마 안 있어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입술을 말아 물고 현관문을 봤다. 띠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석영이가 들어온다.

나를 보지도 않은 채 신발을 벗고 들어오더니 가방을 내팽개치듯 바닥에 놓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탁, 그의 손이 내 이마 위로 올라온다.

“열은 안 나네.”

얼굴에서 손을 거둔 석영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본다.

“어디 아파?”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이 쉬는 시간만 줬으면 도중에 오려고 했어. 너 집에 있는지 확인하러.”

“…….”

“너 오전 수업 있는 날에는 1분 간격으로 알람 열 개 설정해두는 거 내가 다 아는데. 그걸 못 들었다고?”

“응, 그게….”

“네가 알람 못 듣는 날은 술 마신 다음 날뿐이잖아.”

귀신같은 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쳐다만 보자 석영이가 고개를 돌려 방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옷가지를 본다.

“어제, 마셨어. 술.”

방바닥으로 향해 있던 석영이의 눈이 내게로 온다.

“말하려고 했는데, 씻고 나와서 바로 잠들었나 봐.”

“닭발 먹는다고 할 때 술도 마신다고 말 좀 해주지.”

“…미안.”

고개를 푹 숙인 석영이가 한숨을 뱉더니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를 본다.

“너 혼자 사니까, 연락 안 되면 걱정된단 말이야.”

“알아… 미안….”

“아는 애가.”

석영이가 뒷말을 삼킨다. 엄한 얼굴에 입술을 휘어 내리며 그의 손가락 하나를 슬그머니 잡았다.

“미안해. 내가 완전 잘못했어.”

“진짜. 혼나야 돼.”

석영이가 내 손을 잡아 올려 깨문다.

“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잡아 빼자 녀석이 침대 한쪽에 있는 인형을 들고 내 얼굴에 그대로 들이민다. 몸이 그대로 뒤로 기울었다. 퍽, 침대로 쓰러져 얼굴을 누르고 있는 인형을 잡아 던졌다. 인형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어? 내 선물 막 던진다?”

인형, 그러니까 저 인형은 군 휴가를 나왔던 석영이와 술을 진창 마시고 거리를 배회하다 업어 온 것이었다.

1년 전, 겨울.

“아, 그만 좀 우세요. 좀.”

둘이서 감자탕에 소주 세 병을 마시고 남은 국물에 밥까지 볶아 먹은 뒤 만족하며 나온 길이었다. 석영이가 이제 그만 가자, 하는 말에 마음이 낮게 가라앉더니 결국 눈물이 터졌다. 내일 석영이가 다시 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하고, 또 아쉬웠다.

“밤 다 갔다….”

어깨를 떨며 훌쩍이자 석영이가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제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 닦아준다.

“왜 매번 만날 때마다 울어. 또 나올 건데. 네가 이러면 나 꼭 평생 군대에 박혀 있는 놈 같잖아.”

“슬픈 걸 어떡하라고….”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자 석영이가 내 손목을 잡아 내린다. 울상이 되어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자 상체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 석영이가 보인다.

“진짜, 우는 것도 귀여워.”

“장난하냐….”

운다고 놀리는 것 같아 앞에 선 석영이의 배를 툭 쳤다. 가볍게 웃은 석영이가 제 외투 안에 나를 집어넣었다. 그러곤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몸을 덮었다.

“울지 마, 누리야. 그렇게 내가 보고 싶으면 너도 군대 오는 건 어때.”

흐어엉, 하는 소리를 내며 흐느끼자 석영이가 작게 소리 내며 웃는다.

휘적휘적 밤공기를 가르며 걸어가는 길, 구석에 불을 밝히고 있는 뽑기 기계를 발견했다.

“어! 이 토끼 완전 귀여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토끼 인형을 가리켰다. 석영이가 기계 안을 들여다보더니 이거? 하고 묻는다.

“내가 뽑아줄게.”

그렇게 말한 석영이가 제 주머니를 털었다. 천 원 한 장을 넣고 스틱을 움직였는데 인형을 잡는 데 실패했다.

“어어, 이러면 안 되지.”

석영이의 주머니에서 오천 원이 나온다.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오천 원이나 넣게?”

“응.”

“야, 무슨 여기에 오천 원씩이나 넣어. 돈 아깝게. 안 뽑아도 돼.”

지폐를 꼭 쥐고 있는 손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하자 석영이가 힘을 주며 버틴다. 그러더니 내 머리를 꼭 붙잡고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춘다.

“기다려. 내가 저거 꼭 너 줄 거야.”

오천 원이 그대로 기계로 들어갔다. 스틱 하나를 붙잡고 방향을 조준하는 석영이의 옆에 딱 붙어 서서 자꾸만 인형을 놓치는 광경을 구경했다.

“오른쪽. 어어, 거기서 조금 더 위로.”

내가 지시하고, 석영이가 집게를 옮겼다. 집게가 내려가고, 인형의 머리를 잡았다가 놓치면 아아! 하고 동시에 탄식했다.

뽑기 기계는 석영이가 만 이천 원을 수납했을 때 인형을 우리에게 내어줬다.

“내가 너 준다고 했지?”

석영이가 내 품에 인형을 밀어 넣으며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춘다. 찬 공기에 술 냄새가 섞였다.

“그런데, 인형은 앞으로 돈 주고 그냥 사자.”

왠지 모를 씁쓸한 표정을 석영이 짓고 있다. 내가 그러니까 그만하랄 때 그만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인형을 품에 꼭 안고 걷는 나를 보며 석영이가 웃었다.

“좋아?”

“응. 좋아.”

“이러면 손 추워.”

내가 들고 있는 인형을 뺏더니 제 옆구리에 끼운다. 그러곤 비어 있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깍지를 껴더니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손 내놓고 다니지 마.”

고개를 끄덕이며 석영이의 손을 꼭 잡았다. 체온이 맞붙은 손가락 사이에서 올라가는 듯했다.

불을 끄고 침대 위에 인형과 함께 누웠다. 인형을 가운데에 놓은 채 석영이가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잠들었다.

유달리 짧은 밤이 아쉬워 술 냄새를 풍기며 자는 석영이의 밤톨 같은 머리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전에는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는데, 느낌이 많이 달랐다.

“으음….”

몸을 뒤척이는 석영이가 내 몸을 끌어당긴다. 석영이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그대로 안았다. 새근새근 내뱉는 숨이 따뜻하게 가슴께로 닿았다.

“석영아,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꼭 붙은 몸이 따뜻했다. 바깥에서 맞았던 바람과 상반된 온도에 기분이 이상하다. 술에 취해 자다 깨기를 반복했고, 깰 때마다 밤톨 머리를 쓰다듬었다.

뺨을 매만지는 손길에 눈을 떴다. 낮은 곳에서부터 해가 떠오르고 있는지 어슴푸레 새어든 빛이 공간을 밝혔다. 끔벅끔벅 느리게 움직이는 눈에 석영이의 얼굴이 담겼다. 언제 깼는지 나를 보고 있었다.

“깼어?”

“응. 누가 하도 머리통을 만져대서.”

깊이 잠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픽, 웃음을 터트리자 석영이도 따라 웃는다.

웃음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물끄러미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무 말 없이 뺨을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럽다. 동그란 엄지가 광대 부근을 문지르며 내려가더니 목덜미에 닿는다.

석영이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온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다물고 있던 입술 위로 석영이의 입술이 가만히 내려앉는다.

숨과 함께 혀가 얽히고, 석영이의 팔 대신 손에 잡히는 인형을 꼭 쥐었다.

그렇게 쥐었던 인형이 지금 바닥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워 있는 거다.

“네가 얼굴에 들이밀었잖아. 숨 막혀서 나도 모르게 그런 거야.”

허? 하고 웃은 석영이 침대에 드러누운 나를 내려다본다.

“밥은 먹었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너 다음 수업 오후 3시던가?”

“응. 교양인데. 지은이한테 대출 부탁하고 너랑 놀까?”

“아니.”

석영이가 단호하게 거절한다.

“씻어. 밥 먹으러 가자.”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20분.

“10분만 있다가 씻을게.”

“어어? 그냥 바로 씻지?”

“아아, 10분만.”

석영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 팔을 잡아 올린다. 낚싯대에 딸려 올라오는 물고기처럼 상체가 들렸다. 허엉, 하고 우는 소리를 내다가 두 팔로 석영이의 목을 감아 그대로 침대로 고꾸라졌다. 이번엔 석영이가 내 두 팔에 딸려 내려온다.

“조금만 있다가.”

석영이의 허리를 껴안고 품으로 파고들자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이불 안으로 석영이가 들어왔다. 석영이의 손이 허리에 닿는다. 그대로 티셔츠 안으로 밀고 들어와 등을 매만진다.

“그런데 어제 술 많이 마셨어? 걔들 술 별로 못 마신다며. 또 너 혼자 부어라 마셔라 했냐.”

“어? 아, 그게 있잖아.”

김찬영과 어제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했다.

“갔는데 과 사람들 있었어. 우연히 거기에서 만났대.”

척추를 따라 부드럽게 올라오던 손이 멈칫한다.

“그 자리에 김광수도 있어서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지은이 생일이라 또 그럴 수가 없어서….”

“그래서, 취했어?”

“아니이!”

석영이가 상체를 뒤로 물리고 나를 본다.

“한 시간만 있다가 나왔어. 진짜.”

“잘했어.”

팔을 당겨 석영이의 품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의 손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고 내려간다.

“네가 술 마시고 노는 게 싫은 게 아니라, 그런 새끼들이 너한테 술 마시라고 따라주는 게 싫은 거야. 이거 구속 아니다?”

전에 다투면서 나 좀 그만 구속해라! 하고 소리쳤던 게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이 와중에 구속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걸 보면.

“응. 구속 아니야.”

석영이의 품에서 기분 좋은 향이 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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