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60화 (60/70)
  • 외전 2화

    코코아를 홀짝거리며 캠퍼스를 걸었다. 목적지 없이 그냥 걷는 걸음이었다. 나를 찾아온 석영이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걷는 내내 침묵했다. 코코아를 다 마셔갈 즈음 석영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침묵이 깨져서인지 자연스레 걸음이 멈췄다. 몸을 돌려 마주 보자, 석영이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네가 가는 자리를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어.”

    “…….”

    “강수인지 광수인지, 그 변태 새끼가 너를 그렇게 잡고 있어서 순간 말이 헛나왔어. 그건 내가 잘못했어.”

    석영이를 보다가, 시선을 내려 손에 들고 있는 컵 안을 들여다봤다. 밑바닥에 남은 코코아가 새카맣게 보였다.

    “화 많이 났어?”

    고개를 숙인 채, 눈만 흘긋 올렸다. 스스로도 새침한 표정을 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얼마 못 가 웃고 말았다.

    “코코아 마시고 다 풀렸어.”

    석영이가 내 손을 잡는다.

    “네 일에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같아서 그렇긴 한데, 나는 진짜 네가 그 사람 있는 술자리는 안 갔으면 좋겠어. 이건 좀 들어주면 안 돼? 불안해서 그래.”

    “뭐, 알았어.”

    “우리 강수인지 광수인지 망할 놈 때문에 싸우지 말자.”

    “응.”

    그렇게 하루 걸려 화해한 거였는데. 남윤수 이 새끼 때문에 좋았던 분위기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

    “아,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내 말에 석영이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시 빨대를 입에 문다. 징, 핸드폰이 진동했다. 꺼내 보자 동기 연주의 메시지다.

    [언니 어디십니까! 저희는 지금 빵빵주막 가고 있습니다!]

    빵빵주막. 학교 후문에 있는 막걸리 집으로, 빈대떡이 예술이었다.

    오늘 동기 지은이의 생일이라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시며 생크림 케이크를 먹기로 했다.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싶었지만 애들의 초대를 거절하기도 뭣해서 며칠 전에 가겠다고 응한 약속이었다.

    막걸리도 술인데. 이 상황에 또 술 마시러 간다고 하면 왠지 며칠 전에 애써 묻은 감정들이 다시 튀어 올라 다투게 될 것 같았다.

    “오늘 뭐 해?”

    “어?”

    석영이가 빨대로 스무디를 휘휘 저으며 눈을 맞춘다.

    “학교 끝나고 약속 있어?”

    “오늘 지은이 생일이라 같이 밥 먹기로 했어.”

    “과 애들이랑?”

    “응.”

    빨대로 남은 음료를 푹푹 찌르며 석영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몇 시에 가야 되는데?”

    “어, 지금?”

    “빨리도 가네.”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인 석영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친다.

    “김누리. 나 너랑 싸우기 싫어.”

    빤히 보다가 손바닥을 뒤집어 녀석의 손을 잡았다.

    “난 뭐 너랑 싸우고 싶냐.”

    “그 생일 파티에 망할 선배도 오는 거 아니지?”

    “동기들끼리만 보는 거야. 것도 몇 명 안 돼. 한, 일곱 명?”

    “기다릴까?”

    석영이가 상체를 살짝 앞으로 당기며 묻는다.

    “됐어. 어차피 우리 내일 오전 수업 있잖아. 괜히 피곤하다고 지각하지 말고 가.”

    석영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샌다.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게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애다.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석영이의 손목에 있는 고무줄을 잡아당겨 그의 손에서 빼냈다. 카페에 들어와서 꼼지락거리며 장난치다가 내 손목에서 빼 간 고무줄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고무줄을 끼우고 머리를 올렸다.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주워 올리는 나를 석영이가 바라본다.

    “왜?”

    고무줄로 머리를 묶으며 물었다.

    “예뻐서.”

    뜬금없는 말에 픽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앞머리 안 자르네. 기르려고?”

    “응. 자꾸 자르는 것도 귀찮아서.”

    석영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머리를 다 묶고 손을 내리자 석영이의 손이 얼굴 쪽으로 다가온다. 가까워진 손가락이 이마를 가르고 내려온 앞머리를 집어 옆으로 넘겨준다.

    “집에 갈 때 연락해.”

    “응. 알았어.”

    물끄러미 나를 보던 석영이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

    “어! 누리 언니 왔다!”

    연주가 입구에 들어선 나를 가리키며 손뼉을 딱 쳤다. 오긴 왔는데, 그대로 굳었다. 분명 동기들 몇 명만 온다고 했는데. 테이블 다섯 개가 기차처럼 붙어 있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자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정신을 깨웠다. 뒤돌아보자 선배가 담배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다.

    “안 들어가고 뭐 하냐.”

    “아? 아….”

    뭐야. 어쩌다가 우리 과 사람들의 잔치로 바뀌었어.

    연주의 옆으로 가 앉았다.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귀에 대고 속삭이자 연주가 똑같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아니, 우리 오고 몇 분 뒤에 선배들이 와가지고, 합석하게 됐어요. 지은이가 현우 오빠 좋아하잖아요.”

    아, 망할. 괜히 왔다, 생각이 드는 찰나 내 앞으로 술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놓인다. 고개를 들자 술잔을 놓은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후배님, 늦었다?”

    김광수. 아, 미친, 개 망할.

    차마 오자마자 간다고 할 수는 없어서 한 시간만 있다가 가려고 했다. 지은이의 생일은 정말 너무 축하하고 싶지만, 김광수가 있으면 석영이와 싸울 확률이 커진다.

    [누리야 뭐 먹어?]

    석영이의 메시지에 빈대떡, 하고 쓰다가 누가 봐도 술안주라서 내용을 지우고 닭발이라고 입력해 전송했다. 빈대떡도 시켰고 닭발도 시켰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닭발? 생일 파티 메뉴치고 과격하네]

    석영이는 닭발을 못 먹었다. 과격하다는 표현이 웃겨서 픽 웃자 앞에서 김광수가 내 술잔을 툭툭 두드린다.

    “매너 없게 핸드폰만 보네?”

    술자리에서 제일 매너 없는 사람이 매너를 찾고 있으니 웃기는 노릇이다.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김광수가 넘칠 듯 막걸리를 따른다.

    개새끼야….

    입술을 꾹 문 채 어색하게 웃었다.

    “아! 맞다. 지은이 생일 케이크 안 잘랐다!”

    이제 생각난 듯 연주가 손뼉을 쳤다. 그러곤 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케이크 상자를 가져와 부랴부랴 초를 꽂았다. 기다란 초 두 개와 작은 초 한 개가 생크림 케이크에 푹 꽂혔다.

    “어? 이거 쓰라고 챙겨 온 거 같은데?”

    마침 지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현우 선배가 테이블 위에 있는 고깔모자를 건넨다.

    “으아… 이거 써야 돼요?”

    지은이 낯간지럽다는 듯 모자를 건네받지 않자 현우 선배가 직접 지은의 머리 위에 모자를 씌워준다. 그 모습을 보며 연주가 헙, 소리를 내며 입을 막고 내 몸을 쿡쿡 찌른다.

    “언니, 곧 사귀겠는데요.”

    그러곤 그렇게 속삭인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다, 하면서.

    박수를 짝짝 치면서 생일 축하 노래까지 부르자 지은이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초에 붙은 불을 끄고, 케이크를 커팅하고, 그렇게 생일 파티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끝낸 것 같아 슬슬 일어날 타이밍을 살피는데 갑자기 김광수가 생일주를 말기 시작했다.

    염병, 지금 뭐 하는 짓?

    “이거 안 마시면 우리가 불러준 노래 다시 토해내야 돼.”

    무슨 되도 않는 말을 하면서 막걸리 잔에 소맥을 말고, 케이크를 넣고, 빈대떡을 넣었다. 그걸 보는 지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더 하라며 동조했고, 배를 잡고 웃었고, 몇몇 아이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만하라고 했다.

    “선배, 지은이 술 약해요….”

    연주가 의기소침하게 말하며 끼어들자 김광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래? 했다.

    “네.”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것을 아무리 말아도 지은이는 마시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만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마시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뜻이었다.

    우리 모두 그 말을 알아먹었는데, 김광수 이 미친 새끼만 못 알아먹은 모양이었다.

    “그럼 지은이 대신 다른 사람이 마셔주면 되겠네.”

    김광수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생일주를 완성했다. 네가 마시면 되겠네.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엉망진창이 된 막걸리 잔이 지은의 앞에 놓였다. 지은이가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생크림으로 범벅이 된 생일주를 바라봤다.

    “광수 형, 이걸 어떻게 마셔요.”

    현우 선배가 웃는 얼굴로 말하자 김광수가 야, 나 신입생 때는 이런 거 매일 마셨어, 하며 거들먹거린다.

    새끼야, 우리가 너냐고.

    눈치 없는 애들이 마셔라, 안 마시면 어깨가 빠진다, 어쩌고저쩌고 하며 노래를 불러재꼈다.

    “지은아, 선배들 목쉬겠다. 언제 마셔? 내일 마실 거야?”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앉은 김광수를 노려봤다.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에휴, 하는 한숨이 샌다.

    “선배님, 이 자리 선배님이 쏘시는 건가 보네요? 생일주도 말아주시고.”

    내 말에 김광수의 안색이 어둡게 변한다.

    “뭐?”

    “자기 돈 내는 자리에서 이런 강요 받으면 억울하잖아요. 안 그러냐, 연주야?”

    옆에 있는 연주를 돌아보자 잔뜩 언 연주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렇, 그렇죠. 요즘 시대가….”

    김광수와 눈이 마주쳤는지 점점 작아지던 연주의 목소리가 뒷말을 삼킨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이럴 때마다 나는 애매한 기분이 되고는 했다.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일삼는 김광수에게 엿을 날려주고 싶다가도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것 같아서 눈치를 보게 됐다.

    어디서 남의 생일에 초를 치는 거냐, 맛도 없이 괴상하게 섞어놓은 이 술은 너나 마셔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새끼 김광수야, 별의별 욕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 결국 한 마디도 뱉지 못했다.

    “지은아, 내가 대신 마셔줄게.”

    테이블 위로 손을 내민 것은, 아마도, 반은 충동적이었다.

    “…언니.”

    지은이 울먹이며 나를 본다.

    “오? 흑기사 하는 거야?”

    “네. 제가 합니다. 대신 지은이가 제 소원 하나 들어주면 되는 거잖아요.”

    “오, 그렇지. 그렇지.”

    김광수가 재빠르게 지은의 앞으로 내밀었던 생일주를 내 앞으로 옮겨 온다.

    아,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은 비주얼의 생일주다. 생일주도 꼭 지처럼 말아놨네.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잔을 들었다. 막걸리 잔에 입술을 대는 순간 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입술에 닿는 생크림의 촉감이 영 별로였다.

    “오오오!”

    “누리 누나! 대박!”

    다 마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잔이 부서지진 않았고 쨍, 하는 소리가 울렸다. 연주가 잽싸게 티슈를 뽑아 건네준다. 생크림이 묻은 입술을 문질러 닦고 얼굴을 찌푸렸다.

    맛 더럽게 없네.

    “자, 저 마셨으니까 지은이한테 소원 빌게요.”

    “뭐든지!”

    지가 들어줄 것도 아니면서 김광수가 큰소리를 친다. 의자에 걸어둔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은아, 생일 축하해. 나는 이만 갈게. 이게 내 소원.”

    “어엉?”

    김광수가 김빠진다는 얼굴로 나를 봤지만, 소원 무르는 거 없습니다! 하며 후다닥 막걸리 집을 빠져나왔다.

    미닫이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이런, 씨….”

    너무 역겨웠던 탓일까. 속이 울렁거렸다. 입을 막고 얼굴을 찌푸린 채 몸을 돌렸다. 걸음을 떼려는데 ‘빵빵주막’이라고 써진 입간판 앞에서 누군가 담배를 입에 문 채 이쪽을 돌아봤다.

    “지금 가?”

    입간판 앞에 서 있는 김찬영과 방금 내가 문을 닫고 온 가게의 문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 가게를 손가락질했다.

    “너 여기 있었어?”

    김찬영이 담배 불씨를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순간 난감해졌다. 김찬영도 이 술집에 있었다면, 내가 누구와 함께 술을 마셨는지 봤을 것이다. 만약 이걸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지 않으면 석영이 귀에도 흘러들어 가게 될 텐데. 그건 아마 싸움의 불씨가 되겠지.

    “언제 왔어? 난 너 못 봤는데.”

    “아, 나 안쪽 자리에 있었어. 난 너 들어오는 거 봤는데.”

    나보다 먼저 와 있었구나. 망했다.

    김찬영이 입간판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버렸다. 뭔가 다시 안으로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에 그의 옆에 붙어 섰다.

    “야, 이거 석영이한테 비밀이야.”

    “응?”

    비밀을 만드는 게 마음이 불편하긴 하지만, 괜한 일로 싸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 여기서, 그… 과 사람들이랑 술 마시고 있던 거.”

    외투도 없이 밖으로 나온 김찬영이 어깨를 움츠리며 나를 본다.

    “왜?”

    “어?”

    “왜 비밀인데. 여기 온다고 말 안 하고 왔어?”

    “아니, 말했는데. 내가 말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져서. 석영이가 싫어하는 사람이 저기 있거든…. 같이 술 마신 거 알면 안 돼.”

    작게 입을 벌린 김찬영이 다시 입을 다문다. 작게 벌어졌다 닫힌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