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18화 (18/70)
  • 제18화

    4층 화장실, 셔츠를 빨아 탈탈 털고 임석영의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사이즈가 얼마나 큰 건지 옷소매가 손을 덮다 못해 흘러내렸다. 대충 팔을 걷고 젖은 셔츠를 들고 나왔다. 화장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임석영이 보인다.

    체육복 받아 들고 교실을 나설 때부터 졸졸 따라오더니, 누가 화장실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며 망보는 것을 자처했다.

    “야, 무슨 인간 세탁기냐. 대충 빨지. 오래도 걸린다.”

    누가 기다리라고 그랬나.

    무릎을 펴고 일어난 임석영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다가왔다. 앞에 서서 고개를 뒤로 빼고 체육복 입은 모양새를 살피더니 입술을 늘여 웃는다.

    “너한테 크다.”

    그럼 이게 맞을 줄 알았니….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떼려는데 한쪽 팔이 임석영에게 잡혔다. 걷어붙인 옷소매를 쭉 끌어 내리더니 한 단 한 단 반듯하게 접어 올린다.

    눈을 내리고 임석영의 손에 의해 접혀 올라가는 소맷자락을 보았다. 접히고 접히면서 체육복 안감이 드러났다.

    소매를 잡는 임석영의 손톱이 말끔하고, 손가락이 기다랬다. 이 새끼는 왜 손도 잘생겼어.

    반듯하게 접어 올린 옷소매가 손목을 가렸다. 임석영이 반대쪽 팔도 잡아 올려 걷어붙인 옷소매를 끌어 내리고 똑같은 모양새로 접었다.

    흘긋, 눈을 올려 임석영을 보았다. 숱이 많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이마를 가르고 내려왔다. 꼭 맞물린 입술이 도톰한 게 어떻게 나보다 더 붉은 듯했다.

    “뚫리겠다, 내 얼굴. 그만 봐.”

    임석영이 말했다. 시선은 접어 올리는 소매에 둔 채였다. 하필 입술을 보던 차에 들킨 것 같아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네 얼굴 안 봤는데….”

    “보던데, 계속.”

    “아닌데…. 자연모인가, 하고 그냥 머리 본 건데.”

    내 말에 임석영이 피식 웃는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소매의 단을 접어 올리는 그 짧은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복도가 조용해서인지, 말이 없어서인지, 공기가 괜히 어색하다.

    양쪽 소매를 모두 접은 임석영이 눈을 내리고 두 팔을 번갈아 보았다. 뻣뻣하게 차렷을 하고 서 있자 임석영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야, 그런데 이렇게 막 도와줄 필요는 없어. 나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는데.”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왜? 불편해?”

    “아니, 그런 것보다도. 안 귀찮아?”

    임석영이 웃는 얼굴로 돌아본다.

    “뭐. 화장실 앞 지키고 소매 접어준 것 때문에?”

    “아니, 그냥. 뭐.”

    “내가 너를 귀찮아하는 거 같아?”

    아니, 그야 나는 모르죠.

    고개를 젓기도 끄덕이기도 뭣해서 입술을 꿈틀댔다.

    임석영이 나와 엮이지 않았으면 내 비밀을 알 리도 없었을 테고, 그럼 오늘처럼 제 친구들과 민망한 상황이 생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화장실 앞에서 망보라고 시킨 것은 아니지만, 괜히 찜찜한 마음에 따라온 것이 아니겠나. 어쩌면 같은 반으로 전학 온 아이의 비밀을 알게 된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일 수도 있었다.

    2층 복도에 다다랐을 때, 임석영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가 멈춘 탓에 그 뒤를 따라 내려가던 나의 걸음도 멈췄다. 계단 한 개를 더 밟고 서서 임석영을 보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딱히 돕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불편하면 말해.”

    임석영이 손에 있는 교복 셔츠를 뺏어 들고 등을 돌렸다.

    “이건 내가 널게.”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임석영의 뒷모습을 보았다. 종이 울렸다. 계단을 폴짝 뛰어내려 교실로 향했다.

    점심을 그다지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5교시 때부터 배가 쿡쿡 쑤시기 시작하더니 6교시가 되자 식은땀이 줄줄 났다.

    마치 배 안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천둥이 무겁게 울리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안에서 무언가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당장 열어라! 우리들은 이곳을 탈출할 것이다! 명령을 받았다! 문을 열지 못할까! 지금 당장 열지 않으면 부수고 나가겠다!

    안 돼. 부수는 건 절대 안 돼. 그렇게 허락 없이 나오면 안 된다고.

    무릎을 꼭 붙이고 앉아 연필을 힘주어 잡고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벽에 붙은 시계만 노려봤다. 째깍, 째깍, 넘어가는 초침이 유난히 느려 보였다.

    탁, 마지막 초침이 12시를 지나고 끝종이 울렸다. 종이 울리자마자 핸드폰을 챙겨 들고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후다닥 계단을 올라 4층 화장실을 박차고 들어갔다.

    구석진 칸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화장실 한 칸, 그 작은 공간이 내게 평화를 가져다줬다.

    조용하기만 한데 새 소리가 들리는 것은 나의 착각인가.

    “후….”

    이것은 안도의 한숨.

    다행히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마음의 안정이 빠른 속도로 찾아왔다. 턱 끝까지 찬 숨을 고르고 송골송골 맺힌 인중의 땀을 닦았다. 손으로 땀을 훔쳐 닦고 화장지를 잡았다. 잡아당기는데 탁 끊어졌다.

    한 칸.

    “…뭐야.”

    휴지 걸이 안에 손을 넣어 휘저었다. 다 쓴 휴지심이 뱅글뱅글 돌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현실을 부정하며 휴지 걸이를 들여다봤다. 없는 게 맞았다. 있는 거라곤 내 손에 있는 한 칸.

    이 한 칸으로는 코도 못 풀어. 절로 입술이 휘어 내려간다.

    “살려주세요….”

    칸막이 안에서 우울한 음성을 흘렸다. 듣는 사람도, 들어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바지를 어정쩡하게 내린 채 옆 칸으로 이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화장실 칸막이 안 모서리를 모두 살폈다. 휴지통이 없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제야 문짝에 붙어 있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휴지통이 필요 없는 깨끗한 화장실. 휴지는 변기에 버리세요.]

    “사람 살려….”

    우울한 낯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어디?]

    임석영이다. 힘없이 키패드를 두드렸다.

    [왜]

    [안 보여서]

    임석영한테 화장지 달라고 해볼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그럴 수 없어. 아무리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지만 그럴 수 없지.

    우선 재빠르게 옆 칸으로 이동해볼까.

    그런데 그건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진짜 재수 없게 문 열고 나간 그 찰나에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고. 바지를 허벅지에 어정쩡하게 내린 채로. 상상만으로도 최악이었다.

    그럼 바지를 입고 옆 칸으로 이동해?

    교실에 들어갔을 때 어디서 똥 냄새 안 나냐고 자꾸 킁킁거릴 임석영이 그려졌다.

    그건 안 될 일이지.

    “하…. 왜 휴지가 없냐고.”

    한숨을 뱉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고개를 내리고 보자 액정에 임석영 이름이 떴다. 이마를 문지르다가 통화를 연결했다.

    “왜….”

    ― 어딘데 읽고 답장도 안 하냐.

    “왜….”

    ― 혼자 뭐 먹으러 갔지?

    “아니거든….”

    ― 종 치자마자 달려 나갔잖아. 어디야.

    학교야. 학교라고.

    휴지 한 칸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음? 하며 임석영이 묻는다.

    ― 너 목소리가 울린다? 화장실이야?

    “…….”

    ― 일 보냐?

    “…….”

    ― 미안. 집중하렴.

    통화를 종료할 것 같은 분위기에 급하게 임석영의 이름을 불렀다.

    “석영아….”

    대답이 없다.

    “여보세요?”

    ― 아, 어. 무섭게 왜 이름을 그렇게 부르고 그래.

    내가 너무 다정하게 불렀나.

    “그게 있잖아.”

    ― 어.

    “…없어.”

    ― 뭐가?

    “화…장지… 없어….”

    ― 똑바로 말해봐. 잘 안 들려.

    한숨이 나왔다. 숨을 고르고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나 화장실인데… 화장지가 없다고….”

    ― ….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소리도 안 넘어오고,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만 들렸다. 흑, 절로 고개가 다 익은 벼처럼 수그러든다.

    임석영 씨, 통화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 이라는 인사를 남기고 통화를 끝내려는데 임석영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무슨 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웃고 있었다.

    스끄야… 읏즈 믈르그…. 나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다….

    혼자 숨이 넘어갈 듯 웃더니 4층이지? 기다려, 하며 전화를 끊었다. 수치스럽다. 수치스러워.

    곧 이곳에 당도하게 될 휴지 배달자 임석영을 기다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엄지를 바쁘게 움직여 임석영에게 카톡을 보냈다.

    [숨은 안 쉬고 들어오는 게 너의 건강에 좋을 것이다]

    얼마 안 있어 핸드폰이 진동했다. 임석영이다.

    “여보세요?”

    ― 화장실 문 앞에 두면 네가 나와서 가져갈 수 있어?

    “장난하냐.”

    ― 아니…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

    “뭐라는 거야. 가지고 온다며.”

    ― 오긴 왔어.

    “그럼 빨리 줘. 곧 종 쳐.”

    ― 응…. 그러니까 내가 들어가야 되는 거겠지?

    이 새끼가 진짜 왜 이래. 장난치는 건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입술을 꾹 물었다.

    “앞으로 말 잘 들을게….”

    ― 어?

    “제발 빨리….”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짜증 나는 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휴지 한 칸을 손안에 꼭 쥐고 숨을 삼켰다.

    지금 들어온 사람은 임석영인가, 임석영이 아닌가.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아무리 뚫어지게 보아도 투시되지 않는 문짝을 바라보았다.

    화장실에 들어온 당신, 누구이신가요. 휴지 배달자 임석영 씨인가요? 생각하는데 문 너머에서 임석영 목소리가 들린다.

    “갈비만두?”

    그거 지금 암호라고 대는 거냐.

    “야, 빨리 아래로 던지고 나가.”

    임석영에게 빠른 후퇴를 권했다. 혹시나 나를 놀린답시고 휴지 안 주고 밖에서 놀려대면 어쩌나 했는데 문짝 아래로 훅 휴지가 미끄러지듯 넘어오더니 쾅, 하고 화장실 문 닫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화장실 문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허리를 숙여 휴대용 티슈를 주웠다. 절로 눈이 휘고 입술이 휘어 내려간다.

    만두… 이게 다 만두 때문이다.

    울상이 되어 팍, 팍, 휴지를 뽑았다.

    주머니에 휴대용 티슈를 꼽고 칸막이 문을 열고 나왔다. 좀 오래 머물렀다고 아무도 없는 화장실이 내 방처럼 느껴졌다. 망할 놈의 익숙함.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 레버를 올리고 비누거품을 팍팍 내서 손을 씻었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겹쳐 씻은 뒤 수도 레버를 내리고 물기를 털었다.

    전쟁을 치른 느낌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저만치 서 있는 임석영이 보인다.

    “시원하냐.”

    “…….”

    교복 셔츠 빨 때는 화장실 바로 앞에서 문을 지키고 서 있더니, 지금은 왜 그리도 멀리 떨어져 서 있는 거니. 그냥 가버리지 그랬니.

    “야, 너 만두 많이 먹어서 그래.”

    “뭐래….”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복도를 걷자 임석영이 냉큼 옆으로 붙어 섰다.

    “남윤수도 화장실에 갇혀 있대.”

    “헐? 진짜?”

    나만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 눈을 번쩍 뜨고 임석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지금 2층 남자 화장실은 화생방이야.”

    임석영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소리 내 웃으며 임석영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더니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본다.

    “너는 아닌 줄 알지.”

    웃음을 싹 거두고 걸음을 빨리했다. 등 뒤에서 임석영이 놀리듯 말했다.

    “야, 너 아무래도 만두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아.”

    거리를 벌리며 빨리 걷는데도 임석영의 목소리가 계속 따라왔다. 만두 좋아하지 마라, 좋아하지 마, 홍만두 하지 마라, 하고.

    후다닥 뛰어 계단을 내려와 교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데, 교실로 돌아온 임석영이 조용히 자리에 앉나 싶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만두 말고 다른 거 좋아해.”

    그만해….

    “만두는 너랑 안 맞아.”

    그만하라고….

    “상극이야. 상극.”

    이 새끼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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