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뜨거운 홍차-17화 (17/70)
  • 제17화

    점심시간,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식단에 만두가 있었다. 소심하게 한 개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했더니 두 개를 더 주었다. 한 개를 더 달라고 했는데 두 개가 오다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싱글벙글 웃으며 숟가락을 드는데 누군가 앞자리에 식판을 놓고 앉았다. 고개를 들고 보자 임석영이다.

    나는 혼자 먹는 게 마음이 편한데, 임석영이 식판을 놓고 앉으니 남윤수와 김찬영도 식판을 놓고 앉는다. 내 앞으로 임석영이, 내 옆으로 김찬영이 앉고 대각선에 남윤수가 앉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야, 빈자리 많은데.”

    “여기도 빈자리였는데.”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해 뭐 하냐.

    임석영에게 홍차연이 아닌 걸 들켜서인지, 조심성 없이 그의 친구들에게 비밀이 흘러갈까 불안했다. 항상 붙어 있으면 뭔가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튀어나온 것은 누군가 알아채기 마련이니까.

    그러면 이제 너도나도 어 그러네, 너 수염이 안 났네, 울대뼈도 안 튀어나왔네, 꼬추도 없는 거 아니냐! 하겠지.

    “야, 나 만두 봐봐.”

    남윤수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식판을 눈짓했다.

    “학교 뒤에 있는 뒷산처럼 주시면 안 될까요, 라고 했더니 이렇게 줌.”

    남윤수의 식판에 만두가 산처럼 쌓여 있다. 나는 고작 두 개 더 받았는데, 남윤수는 네 개를 더 받았다. 대단한 놈.

    “홍차연 너도 만두 좋아하는구나. 더 받았네.”

    숟가락을 들며 남윤수가 물었다.

    “응. 좋아하지.”

    그러다 뭔가가 불현듯 생각나 임석영의 눈치를 살폈다. 임석영이 남윤수의 식판을 숟가락으로 툭툭 치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야, 얘 홍차연이라고 부르는 거 안 좋아해. 갈비만두라고 불러. 홍갈비만두.”

    “홍갈비만두?”

    다리를 움직여 임석영의 발을 툭 쳤다. 임석영이 어억, 소리를 내며 나를 본다. 소리 없이 표정을 굳히자 임석영이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야, 오늘 체육 시간에 축구 했는데 반장이 김찬영 이 새끼를 골키퍼 시킨 거야. 진짜 이렇게 느려터진 새끼 처음 봤다. 나무늘보인 줄. 공이 이미 들어가고 움직여.”

    남윤수가 고발하듯 조잘조잘 떠들었다. 임석영이 어, 어, 하고 대꾸하며 이야기를 들었고 김찬영은 남윤수를 보지도 않았다.

    “지는 자책골 넣은 주제에.”

    김찬영의 말에 남윤수가 민망한 듯 소리 내 웃는다.

    “나도 모르게 찬영이 있어서 그쪽으로 날림.”

    남윤수의 말에 나도 모르게 툭 웃음이 터졌다.

    이러나저러나 몸 사리는 게 좋을 판국이니 혼자 다니는 게 신상에 좋았다. 그걸 알지만, 그런 마음과 별개로 다 같이 밥을 먹는 시간이 또 좋았다.

    누군가와 함께 떠들며 밥을 먹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별로 중요할 것 없는 대화가, 쉬지 않는 소음이 마음에 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고는 늘 혼자 밥을 먹었고 그 공간은 너무 고요했다. 위잉, 위잉, 가전제품 돌아가는 소리만 나와 함께할 뿐.

    “자책골이라니. 수치다, 윤수야. 어디서 나랑 축구 한다는 말 하지 마라.”

    임석영이 웃지 않는 얼굴로 남윤수를 보며 말했다.

    남윤수가 억울하다는 듯 아니, 김찬영이 막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니까? 하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열을 올렸다. 김찬영은 묵묵히 밥을 먹는 데 열중했고, 임석영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듯 보였는데, 갑자기 제 식판의 만두 하나를 집어 내 식판에 놓았다.

    “음?”

    뭐냐는 얼굴로 임석영을 보았다. 임석영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세 글자였는데, 그 입 모양을 복기해보니 홍만두였다. 절로 눈이 가늘어져서 노려보자 임석영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린다.

    만두가 한 개 더 늘어난 식판을 보았다. 갑자기 만두 부자가 됐다. 내 식판으로 옮겨 온 만두를 다시 되돌려 놓기도 뭣해서 대꾸 없이 밥을 먹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웃고 싶지 않은데 자꾸 웃음이 났다. 나도 어딘가 속해 있구나, 같이 흘러가고 있구나, 그런 안도감이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안도라고 생각하면 못내 마음이 먹먹해졌지만, 이런 순간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남윤수는 계속 혼자 떠들었고 우리들은 이따금씩 웃었다.

    밥을 먹고 나와 운동장으로 갔다. 운동장 옆 난간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다들 후식으로 나온 오렌지주스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쪽, 소리를 내며 주스를 다 빨아 마신 임석영이 팩을 구기고 옆에 놓았다.

    “야, 곧 체육 대회인데. 석영이 너 혹시 다 나가냐?”

    남윤수의 물음에 임석영이 어깨를 으쓱인다. 곧 체육 대회구나. 쪽쪽, 주스를 빨며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윤수가 작년 체육 대회 이야기를 해줬다.

    작년에 셋이 같은 반이었는데, 반 애들이 영 운동에 소질이 없었다고 한다. 팡팡! 응원 봉을 두드리며 임석영이 반 아이들에게 기합을 불어 넣었고, ‘얘들아, 잘하자, 어? 잘하자!’ 하던 놈이 나중에 가서는 ‘포기하는 새끼 다 죽어!’ 하며 고래고래 악을 질렀단다.

    가장 먼저 포기한 새끼가 김찬영이라고 했다. 이 말을 하며 남윤수가 김찬영을 가리켰고, 김찬영이 무표정하게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승부욕이 미쳤다니까, 이 새끼는. 쓸데없이 강해.”

    남윤수가 임석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승부욕에 질려 버렸다는 투였다.

    “야,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게 낫지. 못하는 애들 멱살 잡고 끌었더니, 어이가 없다?”

    “멱살? 머리채 아니고? 반 애들 다 임석영이 지옥 열차 태웠다고 그랬는데. 나는 진짜 죽다 살아났다.”

    남윤수가 괜스레 몸을 떨며 말했다.

    임석영이 승부욕이 쓸데없이 강한가 보네. 이야기를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대를 입에 물고 주스를 들이켰다. 무표정하게 먼 곳을 보고 있던 김찬영이 “어.” 하고 입을 벌리더니 무언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음?”

    빨대를 문 채 눈썹을 올렸다. 왜, 왜 보냐, 그런 뜻이었는데, 김찬영이 불쑥 손을 내밀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순간이었다.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몸이 앞으로 쏠렸고, 중심이 무너지며 그대로 김찬영 품에 얼굴을 박았다. 팡, 소리를 내며 무언가 바닥을 맞고 튕겨 나갔다.

    “야이쒸! 사람 맞을 뻔했다! 공 똑바로 안 차냐!”

    남윤수의 목소리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니까, 눈앞에 뭔가가 있는데.

    “내가 너무 세게 당겼나.”

    머리 위에서 김찬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올리자 그의 턱이 보인다.

    헉, 숨을 삼키며 몸을 뒤로 뺐다. 저도 모르게 내 허리를 감았는지, 등을 받치고 있던 김찬영의 손이 자연스레 풀렸다.

    돌아보니 축구공이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찬 아이가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1학년인 듯했다.

    공을 굴려 난간 아래로 내려간 남윤수가 운동장 중앙으로 공을 뻥 차올렸다.

    “여기로 한 번만 더 떨어지면 뒈진다!”

    남윤수가 운동장에 있는 1학년들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날렸다.

    손에 든 팩이 가벼웠다. 김찬영 품으로 날아들면서 손에 힘을 주며 팩을 구긴 탓에 안에 든 내용물이 빨대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당연히 빨대의 방향은 나였고, 노란 주스가 교복 셔츠를 물들였다.

    “아….”

    고개를 숙이고 처참한 꼴을 살피는데, 불쑥 앞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다 튀었다.”

    김찬영이 젖은 교복을 털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흠칫 놀라며 내밀던 손을 살짝 뒤로 거두는 걸 봤는데, 손이 멀어지기도 전에 김찬영의 손목이 잡혔다. 얼마나 세게 낚아채듯 잡았는지 마찰음이 둔탁하게 났다.

    김찬영과 나의 눈이 손의 주인에게로 향한다.

    “안 돼.”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임석영이 사나운 눈을 하고 김찬영의 손을 잡아 제자리에 놓았다.

    김찬영 딴에는 저 때문에 내가 주스를 흘린 것 같아 챙겨주려는 것 같았는데, 난데없이 임석영이 사나운 기류를 흘리며 그의 손을 저지하니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밖에.

    김찬영이 임석영을 보았고, 임석영이 뒤늦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눈가를 문질렀다.

    “아니, 그, 막 그렇게, 아무 데나.”

    “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김찬영이 되물었다.

    아, 세상에. 지금 나만 초조하니?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한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

    김찬영은 알아듣게 말하라는 얼굴로 임석영을 보고, 임석영은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닥을 보았다.

    눈가를 문지르던 그가 흘긋, 눈동자를 돌려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난감하다는 듯 문지르던 눈가를 쓸어내린 임석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만지지 마.”

    작고 낮은 목소리에 김찬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고?”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 순간 임석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김찬영을 보았다.

    “얘, 건들지.”

    “야! 종 치겠다!”

    임석영이 나를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소리를 내질렀다. 차마 내가 여자라는 것을 말할 수는 없고, 어떻게 포장은 해야겠는 임석영의 고군분투를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다.

    하하하! 뜬금없이 호탕하게 웃으며 임석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보다 키가 큰 그의 어깨에 팔까지 걸고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웃는다고 해서 따라 웃는 사람은 없었다.

    “뭐래. 방금 급식 먹고 나왔는데.”

    남윤수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셔츠는 빨아야겠다. 체육복 없으면 빌려줄게.”

    김찬영이 말했고, 임석영이 내 목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있어. 체육복.”

    “그럼 뭐, 됐네.”

    어쩌다 보니 네 명이 모두 서서 서로를 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남윤수와 김찬영이 나와 임석영을, 나와 임석영이 남윤수와 김찬영을.

    별생각 없어 보이는 남윤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오늘 은근 덥다. 얼른 교실로 들어가자!”

    어디를 찌르는 줄도 모르고, 검지를 길게 빼고 앞을 가리켰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목을 휘감은 임석영의 팔에 제지당했다.

    “우리 교실은 이쪽이거든.”

    “아….”

    임석영이 한 팔을 들어 흔들었다.

    “이따 보자.”

    그 말에 남윤수가 핸드폰을 보며 건성으로 답했고 김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관 현관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기 전, 고개를 숙여 목을 계속 감고 있는 팔을 보았다. 연막작전 같은 건가. 우리 이렇게 스스럼없이 친해서 다 안다! 다 알아서, 얘가 여자 아니라는 것도 안다! 얘 진짜 남자임. 뭐, 그런 거.

    계단을 밟고 올라가다가 고개를 올렸다. 바로 위에 임석영 머리가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임석영이 고개를 숙이더니 눈을 맞춘다.

    “왜?”

    “이 팔은 언제 풀어?”

    손을 올려 임석영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작 손목에서 팔꿈치로 이어지는 부분인데도 단단했다.

    임석영의 시선이 물끄러미 얼굴에 닿았다. 말없이 여기저기 뜯어보는 듯 보더니 머리칼을 헤집고 들어와 헝클어트렸다. 큼지막한 손이 머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안 풀어.”

    “왜?”

    “이래야 애들이 의심을 안 하지.”

    “아아.”

    그런데 다른 의심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니?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 라고 말하려는 찰나 임석영의 입이 먼저 열린다.

    “딴 놈들이 다가오거든 냅다 튀어.”

    “뭐?”

    “못 건들게 도망가라고.”

    아니, 도망까지? 나한테 누가 다가온다고. 반에서 말 거는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는데.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하고 눈을 올렸다. 내게서 시선을 거둔 임석영이 팔을 더 단단히 고정했다.

    “아니다. 됐다. 그냥 내가 붙어 다니지, 뭐.”

    꼭 붙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흡사 이인삼각이었다. 절대 팔을 안 풀어줄 것 같던 임석영은 교실에 들어선 뒤에야 팔을 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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