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43화 (43/47)
  • 43. 하이퍼리얼, 내 삶의 아이덴티티를 묻다

    “하이퍼리얼리즘은, 현대 미술에서 참 특이한 사조인 것 같습니다.”

    이원은 미술관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간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원미술관 개관 15주년 특별 기획전’이라는 글자 아래, ‘하이퍼리얼, 현대 미술의 아이덴티티를 묻다’라는 제목이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극사실주의 회화 특별 기획전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외국의 명망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152점이나 들여왔고, 국내 화가들의 대표작과 신작도 적지 않았다. 전시실 어딘가에 걸려 있을 우연의 신작들을 상상하며, 이원은 조금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사진의 등장 이후로 대상을 사진처럼 똑같이 그릴 이유가 없어졌는데, 난데없이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림들이 쏟아져 나와서 미술계를 휩쓸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원의 말에 뒤에 서 있던 홍연이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무님, 이번 전시회 주제가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음, 실장님, 이번 전시회 테마 제안은 제가 했는데요.”

    “주제 카피는 제가 뽑았습니다, 전무님!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가자고, 분명 대박 칠 거라고 관장님한테 소맥을 말아 가며 열심히 로비를 한 것도 바로 접니다!”

    이원은 어깨 너머로 최 실장을 슬쩍 내려다보며 비죽 웃었다. 이번 전시회의 카피 문구가 채택되어 전 상사에게 50만 원의 특별 수당을 부득부득 받아 낸 최 실장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잠시 학예사 모드로 돌아선다.

    “현대 미술이 대상의 재현만으로는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인간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던 건 당연한 수순일 겁니다. 현대 미술은 이제 완전히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지요.”

    이원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이 좋아 철학이지. 기존의 무언가를 깨뜨려야 한다는 현대 미술가들의 강박은, 점점 그들을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을 넘어선 특이점으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극사실주의 사조는 현대 미술의 정체성을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관람객들도 사진과 똑같은 그림을 보며 현대 미술의 존재 가치를 자문자답하게 되겠죠.”

    “……음.”

    “존재할 이유와 필요가 없는 무언가를 기꺼이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고유한 속성 중 하나 아닙니까.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한 열광도 그런 맥락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하.”

    이원은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래도 설명이 길어질 듯했다.

    대부분의 학자가 그렇듯, 홍연 역시 쉬운 작품을 어렵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이원은 이럴 때마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큐레이터나 화가는 못 되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이 미술관의 이사장이었지만, 접근 방식은 속물적이기 짝이 없었다.

    “실장님. 너무 난해한 그들만의 리그에 일반 관객들이 지친 거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아…… 뭐. 일단 그런 면이 없잖아 있죠.”

    “홀딩스 본사 로비나 우리 집 거실에 작품을 하나 전시해야 한다 치면, 실장님은 여기서 뭘 고르시겠습니까. 같은 값이라는 가정하에, 뒤샹의 ‘샘’하고 앵그르의 ‘샘’ 중에서.”

    홍연은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이건 물어볼 것도 없다. 뒤샹의 작품이 아무리 미술사적 가치가 크고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해도, 백 년 묵은 변기를 사 와서 회사 로비나 집에 전시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이발소 달력 그림이라는 오해를 살망정 나신으로 서 있는 샘의 요정 그림이 백만 배는 더 적절하다.

    홍연의 당황한 얼굴에 이원이 빙긋 웃으며 말을 덧댄다.

    “안목 높으신 분들이 이원미술관의 컬렉팅 방향을 마땅찮아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중의 입맛에만 맞춘다, 수준이 낮다, 철학적 함의가 부족하다. 심지어 강 관장님도 그런 불만이 살짝 있는 것 같고.”

    이사장님의 가시 박힌 농담에 홍연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미술계에서 ‘노가리깨나 깐다.’는 명사들 중 홍연에게 공공연히 그런 불만을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원미술관은 패기 넘치는 신인 화가들의 가장 유명한 등용문 역할을 하지만, 현대 미술다운 실험 정신이 넘치는 작품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흥, 돈이라도 한 푼이나 내고 그따위 소릴 하지. 꽃구름 속에 사는 노인네들 같으니.

    홍연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지만, 이원은 그걸 속에 담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원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장님, 전 장사꾼이라 장터에 내놓으면 팔릴 만한 그림을 먼저 수집하게 되네요. 아무리 인간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작품이라고 해도, 구매력 있는 일반인이나 기업이 사서 걸어 둘 만한가를 먼저 따지게 되거든요.”

    “아, 예.”

    “대중의 직관적 이해 수준보다 딱 한 걸음만 앞서 나가는 그림이 돈 벌긴 제일 좋죠. 저는 예술 애호가라기보다 말 그대로 장사꾼이라 그런 쪽이 끌리네요.”

    홍연은 속으로 비죽 웃었다. 정말 스스로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맞는데, 겸양도 저 정도면 얄밉다.

    이원은 훌륭한 예술 후원자라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는 혜안, 다음 세대를 이끌 화가를 발굴하는 능력과 사명감, 용기 있는 시설 투자까지, 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후기 인상파와 피카소, 마티스를 키워 냈던 위대한 컬렉터 세르게이 슈킨이나 그가 부러워하는 메디치와 비견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빙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극사실주의 회화도 그런 영역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제가 이번 전시회 테마를 하이퍼리얼리즘으로 택한 이유죠. ……우연이 때문이 아니라.”

    “아무렴요, 전무님.”

    홍연의 참하고 예의 바른 반응에 이원은 그가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원은 좀 더 강력하게 주장하려다 그만두었다. 사실 자신도 자신의 말이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연에게 ‘이원미술관 특혜’ 따위 소리를 씨불일 사람은 미술계에서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아니, 솔직히 말하면 일이십 년 후면 이원미술관이 우연의 작품 덕을 본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런 주제에 이원은 이번에 출품한 우연의 신작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해외 화가들의 전시작들은 미술관으로 옮겨 온 날 바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우연의 신작은 어림도 없었다. 우연이 아예 출품할 때부터 관장에게 단단히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혹시 한이원 이사장님이 얼쩡대면서 먼저 보겠다고 하거나 그림을 떼겠다고 하면 절대 참가 안 할 거예요! 영원히 참가 안 할 거예요! 얼굴도 안 볼 거예요! 정말이에요!’

    우연의 출품작을 전시회 중간에 억지로 떼어 낸 전적이 있는 이원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원이 이 전시회 오픈을 손꼽아 기다렸던 데에는 그런 마음 아픈 이유가 있었다.

    이원은 입구를 확인하고,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고, 시계를 보고, 전화기를 확인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락가락하다가 다시 입구를 본다.

    “테이프 커팅에 참석할 사람들은 다 왔습니까?”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만 진우연 화백께서는 아직인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지 눈치챈 홍연은 얼른 앞질러 대답했다.

    우연은 테이프 커팅을 할 화가 중 한 명이었다. 이원은 테이프 커팅 명단에서 우연을 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우연은 이원미술관이 배출한 신예 화가 중 가장 어리면서, 가장 유명세가 높았고, 하이퍼리얼리즘 화가로는 한국에서 벌써 세 손가락 안에 꼽히고 있었던 것이다. 낭중지추, 도저히 감춰지지 않는 재능과 불우한 개인사, 이원과의 인연 때문에 전시회 때마다 화제를 불러 모으는 화가이기도 했다. 지금 여기 포진하고 있는 기자들은, 대부분 진우연을 취재하기 위해 온 것이 틀림없다.

    강 관장이 난감한 얼굴로 와서 작은 목소리로 보고한다.

    “전무님. 도착이 늦을 것 같다고 합니다. 공동 과제 작업 중에 도망 나오다가 4학년 조장한테 걸렸답니다. 지금 ‘대차게 깨지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원의 얼굴이 주글주글 구겨진다.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들어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깨지기는 왜 깨져. 그동안 그만큼 호구 짓을 해 줬으면, 오늘 같은 날엔 좀 보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조장 누구야. 4학년이라고? 아직 졸작 전시회도 안 한 생초보 주제에 감히 누구를 구박해.”

    “이원 신인 공모전에 그림 내기만 해 봐라. 예심에서 바로 떨어뜨려 줄 테다.”

    “괜히 복학하라고 했어. 그냥 자퇴하게 내버려 둘걸.”

    우연을 학교로 돌려보내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복학을 위해 학교에 간 우연은 학점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때 전과목 F를 두려워 않던 용감한 학생은 순식간에 학업에 대한 열의를 잃고 비굴해졌다.

    ‘아저씨, 이참에 그냥 자퇴하면 안 될까요? 왜 한 학기에 21학점이나 들어 가며 복학을 해야 하는데요?’

    ‘고흐나 피카소가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 따지는 사람 있나요?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는 거예요.’

    ‘아저씨, 어떤 사람이 제 그림을 100년 동안 사 준대요. 그걸로 먹고살면 되지 않을까요?’

    ‘이제 저도 시세 정도는 알거든요? 저는 데뷔 전시회도 했으니까 호당 20만 원은 받을 수 있을걸요? 그럼 50호짜리 1년에 하나만 팔아도 1,000만 원인데 그 정도면 충분히 먹고살 거 같은데요?’

    너무 이른 나이에 고정 수입이 생겨 버린 게으른 화가는 경제 감각과 생활감이 바닥이었다. 1,000만 원으로 1년을 살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그랬고, 자신의 1년 수입을 고작 1,000만 원으로 한정하는 것도 그랬다.

    숫자에 극도로 취약한 우연은, ‘회계사 한이원’에게 재무 관리를 일임하고 카드 한 장만 받은 후, 모든 세상 시름을 잊게 되었다. 그 덕에 자신의 작품에 이미 적잖은 컬렉터들이 달라붙었으며, 뉴욕 화랑가에서도 새로운 블루칩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원은 그녀가 다른 또래들이 차곡차곡 거치는 과정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뭉텅 날리는 것이 마음 아팠다. 중고등학교 시절도 엉망이었는데, 대학이라도 제대로 졸업시켜서 또래들과 그 나이대에 맞는 사회에서 어울리게 하고 싶었다.

    그러잖아도 화가라는 직업 자체가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일 아닌가.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평생 제대로 된 친구나 동료 하나 없이 아틀리에에 박혀 고립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졸업을 시키자니 그동안의 학점이, 그게,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이원은 재수강 과목으로 꽉 찬 테트리스 판을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짜야 했고, 우연은 그의 등에 착 달라붙어 지지재재 떠들어 댄다.

    ‘아저씨. 전공 영어가요, 되게 잘생긴 교수님이었는데, 저한테 32점을 주셨더란 말이에요. 100점 만점에 32점! 아무리 잘생겨도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요? 그건 다트로 찍어도 나오는 점수 아닌가요?’

    ‘자랑이다! 전공 영어 패스 못 하면 졸업 못 하는 건 알아?’

    ‘아이, 누가 자랑이래요? 그냥, 이번 생에 전공 영어 패스하긴 글러 먹은 것 같다 이거죠.’

    ‘왜 해 볼 생각도 안 하고 지레 포기부터 해? 외국인 선생님 붙여 줄 테니까 제대로 해 봐.’

    ‘아저씨이이잉, 그러지 말고 나랑 놀아요, 아저씨, 응?’

    아무리 조급증을 내 봐야 헛수고였다. 우연은 헤실헤실 웃으며 목을 답삭 끌어안고 뽀뽀를 하는 것으로 이원의 입을 틀어막곤 했다. 이쯤 되면 그냥 속수무책이었다.

    우연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애교가 늘었다. 이원은 그녀의 막무가내식 애교와 애정 공세, 선물 공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밸런타인데이 때는 직접 만든 커다란 초콜릿에 이원의 얼굴을 조각도로 새겨서 보냈고―그것도 표정별 포즈별로 12개나. 12면 관음상도 아니고 대체 먹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생일에는 커다란 꽃다발과 풍선 다발, 송 여사와 함께 만든 딸기 무스케이크를 대표이사실로 직접 배달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원은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을 모조리 내보낸 후, 토끼 옷, 토끼 모자 차림의 우연이 생일 축하 메들리를 부르고 깡충깡충 춤을 추며 축하 공연을 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우연은 이원과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깊은 곳도 많고, 놀고 싶은 것도 많아서, 학점 복구는 난항을 거듭했다.

    무엇보다, 우연의 학점 복구를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거였다.

    ‘나랑 한 번만 해요 아저씨, 네? 이렇게 좋은 날, 섹스 안 하고 공부만 하면 신의 저주를 받을 거예요.’

    ‘한 번만요, 네? 정말 이번엔 딱 한 번으로 끝낼게요.’

    ‘아저씨, 이번엔 야한 장난도 안 칠게요. 아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칠게요. 한 번만 해 주면 저녁때는 얌전히 공부할게요. 네?’

    이원은 이 거래에 번번이 넘어갔다. 이성은,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선 안 된다, 절대 유혹에 넘어가지 마라,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데, 몸뚱이는 마리오네트라도 된 것처럼, 너무나 무기력하게 끌려가곤 했다.

    물론 한 번만으로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우연의 ‘야한 장난’ 없이 넘어간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기본이 서너 번이었고, 이원은 그녀의 ‘몹시 창의적인’ 야한 장난으로 인해 매번 크고 작은 멘탈 붕괴와 초감각 신세계를 만나야 했다.

    이원의 서초동 자택에선, 키 작은 화가 아가씨가 놀러 오는 날마다 집주인의 기겁한 고함과 비명 같은 신음, 그리고 손님이 깔깔대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우연도 우연대로, ‘뼈와 살을 불태우며’ ‘밤드리 노닐다가’ 새벽에 졸도하듯 쓰러지고 나면, 적어도 3일은 쥐약 먹은 병아리처럼 해롱해롱 기어 다녀야 했다.

    이원은 어느덧 우연의 논리에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 대학을 꼭 4년 만에 졸업해야 할 필요가 뭐 있나? 사람이 살다 보면 공부나 과제보다 섹스가 더 좋을 수도 있는 거고, 대학을 7년이나 8년쯤 다닐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어때서, 그게 뭐 어때서.

    포기하면 세상은 이렇게 평화롭고 편안한 것을.

    띵, 문자 알림음이 뜬다.

    [♡♡♡♡아저씨♡♡♡♡]

    [무사히 달출햇어요]

    [정시 도착 어쩌면 아마도가능! 아저씨돈워리돈워리]

    이원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글자만 보는데도 도무지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뒤이어 두다다닥 문자가 빠르게 올라온다.

    [끝나면 맛잇는거사조요 나 손해가 막심이요]

    [무슨 손해?]

    답문을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두두두두 문자가 올라온다. 우연과 이원의 문자 보내는 속도는 거의 대여섯 배쯤 차이가 났다.

    [조장이 조별과제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준댓는뎅.]

    [경영대 후배 남자애들이랑 소개팅도 해준대욤ㅋㅋㅋㅋㅋㅋ.]

    [2, 3학년 트웨니원트웨니투 완전 풋풋ㅋㅋㅋㅋㅋㅋ.]

    [사진 보니 다 연예인이에요. 다 눈돌아감.]

    [나도 맛있는거 먹고 더늙기전에 소개팅하고 싶은데.]

    얼굴이 확 우그러들었다. 장난이야, 넘어가면 안 돼. 한두 번 겪어 보나. 휩쓸리면 안 돼.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속이 가라앉지 않는다. 우연이 자신을 살살 찔러 대며 수작을 거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마냥 진지하기만 한 이원은 그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나잇값도 못 하고, 한심하게.

    이놈의 연애에는 나잇값이 전혀 의미가 없었다.

    행사 진행 요원이 입장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린다. 이원이 오프닝 인사를 해야 할 것이고, 강 관장의 전시회 설명과 감사 인사가 있을 것이고, 몇몇 유명 인사들의 축하와 이원의 축사가 이어진 후, 테이프 커팅이 있을 것이다.

    예쁘게 장식된 리본이 늘어져 있는 정문께를 흘낏 살펴보았다. 우연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 정장 차림을 한 사람들이 야외 행사장 이곳저곳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행사 진행 요원의 안내에 따라 의자에 앉는다. 오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었다. 여기저기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4대 일간지와 3대 포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한 덕에 벌써 많은 사람이 이 전시회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옆에서 홍연이 조그맣게 속삭인다.

    “도착할 때까지 오픈을 조금 미루라고 할까요?”

    “아뇨. 그럴 일은 아닙니다. 커팅을 할 사람이 열두 명이나 되잖습니까.”

    식이 진행되고 짤막한 축사들이 이어질 때까지 우연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원은 단상에 올라 간단하게 환영 인사를 하고, 작품 전시를 허락한 화가와 미술관, 수고한 직원들과 참가해 주신 내외 관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이어 나갔다.

    “……아?”

    이원은 말을 잇다 말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미술관 정문으로 체구가 자그마한 누군가가 들어선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커다란 배낭을 멘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 이원은 축사를 잠시 멈췄다.

    저 가느다란 팔다리의 엉성한 움직임이나 엄지공주만 한 체구만 봐도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크고 무거운 가방에 매달린 작은 몸뚱이가 가방이 흔들릴 때마다 기우뚱기우뚱한다. 뛰지 마!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이원은 간신히 집어삼켰다.

    힘껏 달리는 와중에 머리에 헐렁하게 얹힌 야구 모자가 휭 하니 뒤로 날아간다. 모자로 고정해 놓은 긴 머리카락이 등 뒤로 촥 흩어진다. 우연은 급하게 뒤를 돌아 모자를 주우려 쪼그려 앉다가 가방의 무게 때문인지 뒤로 벌렁 자빠진다.

    “우연……!”

    ……우연아, 까지 튀어 나가려던 것을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붙잡은 이원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느끼며 그는 황급히 말을 덧붙여 어물쩍 넘겼다.

    “진우연 씨, 괜찮으십니까. 담당자님, 얼른 부축해서 모시고 오세요.”

    그는 등으로는 폭포처럼 진땀을 쏟으며, 관람객들을 둘러본 후 여유 있는 척 우연을 소개했다.

    “이번 전시회에 다섯 점의 작품을 출품하신 진우연 화백입니다. 국내에선 아직 저변이 넓지 않은 하이퍼리얼리즘 회화 쪽에서 최근 눈부신 행보를 보여 주고 계시죠. 천천히 오십시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맙소사.

    이틀간 밤샘 작업을 했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우연의 흰 티셔츠는 아크릴 얼룩이 묻어 있었고 눈가는 시커멓고 얼굴은 퀭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얼룩진 티셔츠가 다른 사람들의 슈트와 성장 사이에서 몹시 튄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우연은 눈치를 슬슬 보며 커팅용 가위를 받아 들더니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원 옆으로 가지는 못하고 제일 가장자리 꼬랑지에 가서 선다. 그러면서도 이원의 움직임을 힐끗힐끗 엿보며 조심스럽게 리본 뭉치를 자른다. 이원은 포기하고 한숨만 삼켰다. 이번 기념사진은 역대급 화제를 불러일으키겠구나.

    커팅이 끝난 후 우연은 이원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전시실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오픈 행사에는 기자들이 워낙 많이 오기 때문에 따로 다니자고 합의를 본 참이었다. 기자들은 백번 조심해서 나쁠 일이 없는 족속들이었고, 우연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원은 우연과 거리를 두고 다른 관객들을 따라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작품들은 도착했을 때 확인차 보았기 때문에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연의 출품작 다섯 점 중 세 점은 미공개 신작이었다. 이원이 아는 것은 <뫼르소>와 <비아 돌로로사> 두 점뿐이었고, 세 점의 신작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궁금함이 턱 끝까지 치밀었다. 제일 먼저 보고 싶어 속이 자근자근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물론 도록 정도는 볼 수 있었지만, 일부러 보지 않았다. 전시장에서 제대로 첫 대면을 하고 싶었다. 대형 작품일수록, 도록만으로는 원작의 압도적인 힘과 위광을 느낄 수 없다.

    “아…….”

    이원은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 있는 그림 앞에 걸음을 멈췄다.

    ……역시나 <비아 돌로로사>가 사람을 끌어모을 것 같았다.

    26×36, 스케치북 사이즈의 그림 백 장으로 이루어진 초대형 초상화. 하나하나는 전혀 형체를 알 수 없지만, 전체가 모였을 때, 거대한 반신상이 사각 무늬 유리를 투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진도 없이 순전히 기억만으로, 그것도 전체 스케치를 해서 나눈 것도 아니고 컴퓨터 출력하듯 그려 낸 작품이라는 큐레이터의 설명에 관람객들은 다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림을 구경하다가 앞다투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뫼르소>에 매혹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우연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출품작으로 <비아 돌로로사>와 <뫼르소>를 택한 듯, 그 앞에 선 강 관장의 설명이 길었다.

    “실제 모델의 열 배가 넘는 크기의 극도로 사실적인 인물화 앞에 서면 그 자체가 초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보시죠. 극도로 사실적이며 충분히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것은 현대 미술에서 자주 사용되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찰칵, 찰칵. 찰칵.

    극도로 엇갈리는 내면과 외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한 사내의 무섭도록 매혹적인 모습에, 다들 넋 잃은 표정을 짓는다.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 화가와 어떤 관계인지 아는 사람도 적지 않은 눈치였다. 다만 이원의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대놓고 힐끔대거나 의아한 표정을 짓지는 않는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뒤통수가 근질근질 따끔거릴 뿐이었다.

    강 관장의 목소리가 점점 열기를 띠어 간다.

    “……진우연 화백의 초상화들은 보시는 바와 같이 극도로 사실적인 동시에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제공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피사체의 가장 깊은 내면을 밖으로 적나라하게 끌어낸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 화백의 작품들은 조선 초상화의 전통도 충실하게 잇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뒤로 멀찍이 걷던 이원은, 낯선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도 궁금해하던 우연의 신작이었다.

    눈앞에 있는 그림은 두 개의 동그라미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정사각형의 캔버스에는―우연의 키보다 살짝 커 보이는 걸 보면 100호 정도가 되지 않나 싶었다.― 그것을 꽉 채울 정도로 거대한 갈색 원이 그려져 있었다. 갈색의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어두운 갈색을 베이스로 해서 밝은 갈색, 짙은 고동색, 갈색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색이 오묘한 물결무늬를 그리며 사방으로 파도치며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새까만 동그라미가 박혀 있었다. 아무 무늬도 장식도 없는 새까만 동그라미는 보는 사람을 깊은 지하, 심연, 미지의 공간으로 안내하는 통로나, 모든 것을 빨아들여 삼키는 블랙홀처럼 보였다.

    풍부한 갈색과 검은색, 두 개의 원이라는 형태만으로 구성된 그림.

    이건 실재하는 형상이 아니라 비구상화인데……?

    물론 우연이 꼭 극사실화만 그려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하이퍼리얼리즘 전시회 아닌가? 강 관장은 왜 이걸 극사실화라고 인정했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이원은 멀찍이서 얼쩡얼쩡 자신을 훔쳐보던 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우연이 배시시 웃으며 눈을 찡긋하는 순간, 이원은 눈앞의 그림 역시 극사실주의 회화가 맞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관객들을 이끌고 그림 앞으로 온 강 관장이 관객들에게 “이 그림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하고 퀴즈를 내는 소리가 들린다. 이원은 그 자리에서 정답을 듣고 있을 수 없어서 황급히 다음 그림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여 있는 관람객의 침묵을 뚫고, 강 관장의 목소리가 껑충 뛰어오른다.

    “……사람의 홍채입니다!”

    우연의 두 번째 신작은 이라는 제목의 풍경화였다.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아니 잘 정돈된 모양새를 보면 공원이 아닐까 싶은 곳이었다.

    봄, 아니, 초여름일까. 살짝 따가울 것 같은 햇살이 느껴진다. 나무와 풀, 노랗고 빨갛고 하얀 꽃들이 바닥에 구름처럼 깔렸고 그 뒤로 야트막한 구릉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의 풀과 잎들은 돋은 지 며칠 되지 않는 듯, 옅고 부드러운 녹색을 띠고 있었다. 포커스가 정확하게 맞춰진 앞쪽의 꽃과 풀, 잎사귀들은 눈부시게 반짝이며 광원을 향해 한껏 손을 내뻗고 있었는데, 잎사귀, 꽃잎, 풀잎 하나하나가 새로 얻은 생명의 환희에 가득 차 함성을 지르며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원은 앞에서 잠시 고개를 기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약간 의외였다.

    “왜 하필 풍경화를……?”

    물론 생생하고 살아 있는 듯한 묘사는 여전했지만, 사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우연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그녀의 그림은 정물화라 해도 잎사귀 하나하나가 맹렬한 적의를 불러일으킬 만큼 날 선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작품의 제목과도 바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생일 축하? 생일 축하 파티에서 본 창밖의 풍경인가? 꽃다발도 아니고 공원 풍경이?

    약간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그림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바닥에 길쭉한 그림자가 하나 깔려 있다. 이원은 생뚱한 그림자를 한참 살피며 중얼거렸다.

    “저건 무엇의 그림자일까. 나뭇가지……인가?”

    “나뭇가지는 아닌 듯합니다. 굵기도 뻗은 형태도 나뭇가지와 다르고, 모서리도 둥글고요.”

    뒤에 서 있는 최 실장이 끼어든다. 이원은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 역시 우연답지 않은 화풍에 살짝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허공에 이 그림자의 형태로 길게 뻗어 나온 거라면…….”

    이원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머리가 갑자기 멍해지는 것 같다.

    “팔하고 손가락……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바로 확실하게 보였다. 팔을 쭉 뻗고 손을 허공에 느슨하게 펼친 상태에서 나온 그림자가 틀림없었다. 쥐면 부러질 것처럼 느껴지던 가는 손목과 긴 손가락.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원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트빌리지 인근의 어느 공원에라도 갔던 걸까? 팔을 활짝 펼쳐서 약동하는 봄의 기운을 느끼고 있던 걸까? 그건 라는 제목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봄기운에 돋아나는 풀과 나무, 식물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느꼈다는 건가?

    그건 너무 우연이답지 않은 해석인데……?

    <비아 돌로로사>와 <뫼르소>에 충격을 받은 관객들은 같은 작가가 그린 풍경화에는 큰 감흥 없는 얼굴로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원은 멀찍이 서서 그림을 계속 관찰했다. 이상한 것은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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