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42화 (42/47)
  • 42. 더 누드―디 엔드 오브 에로스(The Nude―The End of Eros)

    우연은 집에 없었다. 이원을 따라온 최 실장이 관리인에게 우연의 행방을 물었다. CCTV를 확인한 관리인이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글쎄요. 요 앞에 편의점에 간 것 같은데요. 요새 하루 한두 번씩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라면 같은 걸 잔뜩 사 들고 들어오더라고요. 인사도 꼬박꼬박 하는데, 손녀딸 같아서 얼마나 귀여운지.”

    최 실장이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리는 게 보인다. 그간 극도로 불안정했던 심리 상태를 접어 두고라도, 우연은 애초에 그렇게 붙임성 있는 인종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가끔 컵라면을 하나씩 나눠 주기도 하는데, 걔는 왜 그렇게 매운 것만 먹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맛있다면서 꼭 먹으라고 야단인데, 나는 걔가 준 불닭면만 먹으면 설사를 해서 아주 미치겠어요.”

    최 실장이 입술을 실룩대며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뺀다. 이원도 고개를 돌리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지만, 어깨가 들썩대는 건 들킨 것 같다.

    너는 이제 혼자서 일상을 살아 나가고 있는 거니?

    네 삶은, 이제 제대로 자리를 잡아 가는 거니?

    이원은 혼자서 자리를 잡아 가는 우연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욱이 가사 도우미에게도 ‘이제 안 오셔도 된다.’ 했다는 걸 보면, 그동안 뭔가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이원은 혼자 4층으로 올라가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오늘은 원래 도우미가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날이었는데, 도우미에게 대신 가겠다고 말해 둔 참이었다. 종이 가방 안에는 송 여사가 싸 준 반찬 찬합과 도시락, 수제 쿠키와 케이크도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는지 걱정이 되어, 송 여사에게 부탁해서 우연이 좋아할 만한 반찬으로 싸 온 참이었는데, 관리인의 ‘불닭라면’ 이야기를 들으니 영 헛수고를 한 게 아닐까 싶다.

    “아…….”

    이원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깊게 탄식했다.

    ……이럴 줄 알았다.

    문제는 반찬이나 끼니가 아니었다. 문을 열자마자 마루 가득히 널려 있는 옷가지와 양말, 수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나동그라진 책들은 나름 가상하다 할 것인데, 싱크대는 도무지 답이 없었다. 밥알이 말라붙은 그릇과 컵, 일회용 용기가 12층 석탑처럼 여기저기 쌓였고, 컵 대신 사용된 밥그릇 국그릇 간장 종지가 커피 얼룩을 묻힌 채 탁자 위에서 굴러다녔다. 집이 이 지경인데도 벌레가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이곳의 방역을 책임지고 있는 세스코의 공로일 것이다.

    이원은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웃었다. 이 난장판을 보는데도 왜 이렇게 안심이 되고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너무너무 그 아이다워서, 이제 제대로 그 아이다운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이원은 반찬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한 후, 냉장고도 청소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침구도 반듯하게 각을 잡아 정돈하고, 빨랫감을 모조리 모아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현관의 신발도 신발장에 반듯하게 각을 맞춰 넣었다. 대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도 시키고, 청소기도 빡빡 돌렸다. 가사 도우미 대신 오겠다고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셈 싶었다.

    거실 청소를 시작한 이원은 탁자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아크릴 물감과 물통, 붓을 정리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새 그림을 그리고 있었나?

    자신과의 계약 그림은 끝났다. 아직 받지는 못했지만, 이원은 다섯 번째 그림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우연은 그 그림에 더는 손대지 않으리라. 하지만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페이퍼 팔레트의 잔해와 붓, 목구멍까지 바짝 눌려 비틀어진 물감들을 보면 뭔가 작업 중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왜 그림은 안 보이지?

    거대한 캔버스도 보이지 않고, 지난번과 같은 작은 스케치북 더미도 없다. 이젤도 얌전하게 접혀 구석에 박혀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이원은 사방을 둘러보다가 한쪽 벽을 덮고 있는 커다란 커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면을 채운 책장과 선반을 가리기 위해 쳐 둔 커튼이었다.

    촤르르. 커튼을 젖힌 이원은 그대로 숨을 멈췄다.

    “……이런.”

    그곳에 있던 책장과 선반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대신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두 개의 거대한 그림이었다.

    하나는 이원에게 주기로 했던 다섯 번째 계약작이었다. 백 장의 조각 그림으로 구성된 한 점의 그림, <비아 돌로로사>였다.

    길이 3미터가 넘는 거대한 그림이 한쪽 벽면을 꽉 채우며 붙어 있었다. 아틀리에 용도로 설계된 아트빌리지는 일반 아파트보다 천장이 훨씬 높았지만, 이 그림의 높이까지 감당할 수는 없어서, 마지막 한 줄은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이렇게 작은 방에서 가까이 보아도 각 장의 형체가 합쳐져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형태에 숨을 쉴 수 없는데, 만약 이게 제대로 갤러리에 걸리면 그 반응이 어떨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림은, 그 그림 바로 옆에 걸려 있었다.

    이원은 천천히 뒤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모자랐다. 세 걸음, 다섯 걸음. 벽에 등을 기댔다.

    벽의 나머지 절반을 꽉 채우고 있는 걸 보면, 신작은 <비아 돌로로사>와 비슷한 크기인 듯했다. 나무틀을 주문 제작 하기 곤란할 정도로 큰 사이즈여서 그랬는지, 우연은 커다란 캔버스 천 여러 폭을 이어 타카로 나무 벽에 박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원의 누드였다.

    그림 속에서 이원은 완전한 나신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다. 한쪽 다리를 올리고 몸을 느슨하게 풀어 버린 채,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살짝 내리깐 눈, 풍성하고 짙은 속눈썹, 속눈썹 그늘 아래 반쯤 감춰진 짙은 갈색 눈동자는 옆에 누워 있는, 이불에 폭 파묻혀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게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우연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 날 새벽. 과격한 흥분도, 성급함도, 들끓는 성욕조차 완전히 연소해 희고 깨끗한 재만 남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원은 그림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우연아, 너 혹시 그때 깨어 있었니?

    내가 정말 ……이런 얼굴로 너를 바라봤었니?

    흐트러진 머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 위장하지 않은 그대로의 표정. 그곳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려 줄 어떤 것도 없었다. 우연이 물어뜯어 놓은 가슴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고, 우연이 할퀴고 긁은 팔다리의 붉은 자국도 선명했다. 다리 사이에서 축 늘어진 검붉은 성기와 쭈그러든 고환, 그 주변으로 이리저리 엉킨 음모 뭉치, 그리고 그곳에 허옇게 말라붙은 정액 자국도 전혀 감춰지지 않았다.

    이원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 세세한 묘사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많은 화가들이 인간의 육체와 남녀의 사랑을 찬미하는 누드를 숱하게 그려 왔지만, 이렇게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치부를 묘사한 그림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그림에선 지저분하거나 역겹거나 음심을 자극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에로틱한 느낌조차 완전히 소거된 화면은 고아하고 정결한 분위기로 꽉 차 있었다.

    그림 속 사내는 아래에 누운 작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지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눈가,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은은한 웃음, 부드러운 시선, 다정한 손길, 그 모든 것은 주변의 복잡한 일을 모조리 덮어 버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여자만 바라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후우.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니, 우연을 처음 만난 후부터, 그녀로 인해 겪었던 무수한 사건과 극단의 감정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연이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치고 들어온 과정은 기껍고 반갑기만 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도 결코 단일하지 않았다. 사랑, 행복 같은 낱말부터 자괴감, 좌절, 증오 따위의 낱말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한계까지 맛보아야 했다. 우연을 사랑하는 과정은 자신의 내면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깨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은 이제 해탈이라도 한 듯, 초연하고 평화로이 웃고 있었다.

    난 ……어떻게 저렇게 웃고 있을 수 있었을까?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 전의 일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희미하다. 다만 새로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마음이 몹시 평화로웠던 것만은 기억난다.

    “……혹시?”

    이원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래.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이 그림을 그렸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랑은 기쁨과 행복이라는 달콤한 말로 포장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처와 고통, 혼돈, 상실, 부서짐으로 점철된 여정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길에는 감정이 부서지고 깨진 사금파리 무더기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보기만 해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땅속 깊이 파묻고 잊으려 애썼다.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던 고통이, 깊이 파묻은 감정의 파편들을 완전히 녹여 버릴 거라고 애처롭게 믿으면서.

    그래서, 원하던 대로, 잠시는 잊은 것도 같았고, 마그마에 녹아서 한때 사라진 듯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마그마에 녹은 돌과 사금파리들은, 결국 새로운 광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더욱 견고하고 아름답고 눈부신 결정으로.

    이 그림 속에서 평온하게 웃는 사내는, 눈부시고 투명하며 단단한, 새로 만들어진 결정체였다. 자신은 이제 예전과 동일할 수 없었다. 이미 우연이 없이는 온전한 삶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어지럽혔던 것들은 그 단순한 명제 앞에서 힘을 잃었다. 유언, 유산, 나이 차이, 가족, 구설, 오해, 불안정, 화가로서의 가치 따위의 걱정이나 계산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결혼이든 비혼 동거든, 혹은 그저 ‘연인’으로 평생을 살아가든,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미래 계획이 있든 없든, 모두 부차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성적인 욕구마저 아주 작은 것으로 느껴진다.

    그저,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했고, 지금 현재 서로의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한다. 그림 속의 이원은 그 순간, 이미 그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내가 이런 형태의 사랑을 품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데.

    “……너는, 그걸 나보다 먼저 알았구나…….”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었구나. 감히 말하지 못했었구나.

    나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아서.

    그까짓 것들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무너지는 듯 아팠다. 이원은 미지근한 무언가가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눈물로 일그러진 거대한 그림에서는 자신을 파괴하고 재구성하는 격렬한 고통과, 그 고통에서 추출된 단 하나의 감정만 오롯이 보인다.

    이원은 그것이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 누가 왔다고요?”

    아이스크림이 가득한 비닐봉지를 들고 오던 우연은 관리인의 말을 듣자마자 미친 듯이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경황조차 없었다.

    “아…….”

    우연은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청소라도 하는 중이었는지 현관문이 열려 있다.

    현관에는 검은 구두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낯익은 구두였다. 우연은 그 구두의 끈 묶은 모습과 뒷굽만 봐도 아저씨의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살금살금 거실로 들어서니 아저씨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저씨는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대리석 조각처럼 움직임이 없다.

    우연은 아저씨가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는 아저씨가 자신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상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림을 본 직후의 생생한 소감을 단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다.

    아저씨가 왜 왔는지는 모른다. 그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 무섭다.

    초조하고 긴장이 된다. 점점 호흡이 가빠진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닌 것 같다. 가슴이 죄어들고 숨이 막히는 것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몸은 이 순간을 버텨 주었다. 우연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우연아.”

    아저씨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우연은 화들짝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네가 집에 놔두고 간 <재의 수요일>이 네 번째 계약작이고, 이 <비아 돌로로사>가 다섯 번째, 마지막 계약작이니?”

    “네.”

    “그리고 이건 계약과 상관없는 새 그림이고?”

    “……네.”

    기대했던 감탄이나 놀라움, 찬사는 나오지 않는다. 아저씨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조용조용 물어볼 뿐이었다.

    “네가 나를 그리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구나.”

    아저씨는 알고 있었다. 우연이 아저씨를 그렸던 이유는, 계약 때문이었지만, 사실 그건 핑계였다. 첫 번째 그림부터 계약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우연 역시, 언젠가 아저씨에게 이것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 <뫼르소>, <재의 수요일>, <비아 돌로로사>. 이 초상화들에서 이원 아저씨는 아름답고 색기 넘치는 모습이기도 했고, 금욕적인 동시에 탐욕하는 야누스의 얼굴이기도 했으며, 정욕에 넋이 나간 꽤 적나라한 그림이기도 했다. <재의 수요일> 같은 경우는, 같이 본 사람이 있으면 수치스러우셨을 것이고, 당혹감을 느끼셨을 것이며, 어쩌면 신성 모독이라 느끼고 격분하셨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난 왜 기어이 그 그림들을 그리고야 말았을까?

    우연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냥, 그게 우연이 발견한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하지만 우연의 눈에는 너무나 또렷하게 보였던 아저씨의 모습. ‘한이원’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선명하게 주장하는 장면이었다.

    그냥 그 장면을 그려야 한다고 느꼈다. 그에게 수치를 주려는 것도 아니고 신성 모독을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의무감처럼, 열병처럼, 본능처럼, 혹은 거룩한 사명처럼 그 모습을 그려야만 했다. 그게 자신이 본 아저씨의 진짜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 그림들은 진우연이라는 인간이 한이원이라는 인간의 심연에 어느 깊이까지 도달했었는가에 대한 기록이었다. 달에 처음 도착한 우주 비행사들이 월면에 발자국을 남기고 온 것처럼, 우연은 아무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한이원이라는 사람의 내면에 자신의 방식으로 발자국을 찍은 것이다. 공기와 바람이 없는 달의 표면에 찍힌 발자국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처럼, 우연은 자신의 발자국이 그의 깊은 심연에, 그리고 자신의 그림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를 부질없이 소원했다.

    더듬더듬 이어지는 긴 설명에도, 아저씨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꼼짝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얼굴도 볼 수 없고, 움직임조차 전혀 없어, 우연은 아저씨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우연은 조용히 덧붙였다.

    “전 아무래도 초상화 화가로는 글러 먹은 것 같아요. 아저씨같이 멋진 사람을 더 멋지게 포장해서 그리는 데 전혀 재주가 없는 걸 보면…….”

    하, 하하. 드디어 아저씨의 반응이 돌아온다. 그가 뒷짐을 진 채 웃는다. 짤막하지만 맑은 웃음소리 끝자락에,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묻는다.

    “이 마지막 누드화 제목이 뭔지 물어도 될까?”

    “아직 안 정했어요. 아저씨.”

    아직 이름이 없는 새 그림에는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었다. 돈도 없고, 나이도 없고, 권력도 없고, 기억도 없고, 지식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오로지 깨지고 부서진 상처를 나누어 가진 남자, 여자, 현재, 그리고 사랑만 있었다.

    자신이 절절히 느꼈던 것을, 아저씨는 그림에서 읽을 수 있었을까. 우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목, 아저씨가 붙여 주시면 안 돼요?”

    “내가 붙여 줘도 되겠니?”

    “네.”

    제목은, 아마도 저 그림에 대한 아저씨의 첫 번째 감상이 될 것이다. 우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 부탁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저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디 엔드 오브 에로스.”

    우연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아저씨는 똑같은 어조로, 담담하게 되풀이했다.

    “에로스의 끝, The End of Eros.”

    우연은 아저씨가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읽었음을 알았다. 그는 우연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을 기꺼이 끌어안고, 그로 인해 모질게 부서지고 깨어진 마음도 깊이 품에 안고, 이제 사랑의 가장 강력하고 최종적인 욕구인 성적인 욕구마저 넘어선 곳에 초연히 서 있었다. 우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림 마음에 드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은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아저씨의 침묵은 마음에 들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대답하지 못하리라. 우연 역시 대답하지 못했으리라. 이 그림은 단순히 마음에 든다, 안 든다로 판단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역시 호불호 대신 다른 대답이 흘러나온다.

    “……우연아, 너와 새로운 계약을 하고 싶은데.”

    “이 그림을 사시려고요? 아니에요. 드릴게요. 그냥 드릴게요! 전 당연히…….”

    우연은 순간적으로 목이 막혀 말을 멈췄다.

    내가 어떻게 감히 이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아니, 앞으로 그리게 될 그림들도 모두 아저씨의 몫으로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우연의 재능은 그의 호의로 개화되었고, 우연의 목숨은 그의 희생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스무 살의 겨울에, 제대로 된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병들고 불안정하던 마음은 그의 헌신으로 치유되는 중이고, 영혼을 짓누르던 속박과 공포는 그의 손으로 끊어졌다. 그리고 우연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도록 자신의 품에서 놓아주기까지 했다. 그에게 갚아야 할 것은, 이미 인간의 계산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나의 모든 재능과, 나의 모든 사랑과, 나의 모든 영감과, 나의 모든 작품이 그에게 바쳐져야 할 이유였다.

    하지만 아저씨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지, 진우연 씨. 이런 건 제대로 계약을 해야지.”

    “계약이요? 아,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내가 나이 많다고 무시하니? 내가 가끔 꼰대 아재 소리는 좀 듣지만, 그래도 너하고 똑같은 성인인데?”

    우연은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쌕 웃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저씨와 처음 만났던 그날, 그들을 하나의 운명으로 묶었던 마법의 언어는 이제 너무나도 친숙하고 그립게 느껴졌다.

    새로운 계약이라면 정식으로 응해야 도리지, 당연히.

    “하, 참. 그럼 파릇파릇한 한이원 씨가 써서 주시죠. 계약서.”

    우연은 웃음을 참으며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누가 협상의 달인 아니랄까 봐, 아저씨는 새로운 딜을 시도한다.

    “음, 이 그림뿐 아니고, 저번처럼 몇 점 묶어서 계약을 하고 싶어.”

    “이번에는 무슨 그림이요?”

    “초상화.”

    “또요? 음……. 몇 개요?”

    “1년에 몇 점 정도 계약이 가능할까?”

    우연은 계산을 해 보다가 스무 살부터 스물두 살 된 지금까지 아저씨에게 고작 다섯 점의 초상화밖에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그나마 자신의 초상화를 빼면 네 점, 그래도 계약한 햇수로 따지면 벌써 3년 차인데 고작 네 점이라니. 손이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계산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기복이 심하고 공백이 길어지면 장담할 수 없었다.

    “1년에…… 한 점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아요.”

    고개가 갸웃한다. 뒷모습만 봐도 ‘그 엄청난 속도로 1년에 한 점?’ 하는 것 같다. 우연은 황급히 변명했다.

    “저, 저도 아저씨 초상화만 그려 줄 순 없잖아요? 먹고살려면 다른 그림도 그려야 할 거고.”

    아저씨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들릴락 말락 코웃음을 친다. 눈은 벌그레한 주제에 코웃음을 치니 너무 같잖고 어울리지 않았다. 우연은 눈가를 실룩대며 웃음을 참았다.

    “몇 개 정도 계약할까요, 그럼?”

    “100개. 네가 처음에 제안했던 대로.”

    우연의 턱이 아래로 덜렁 떨어졌다. 단돈 500만 원에 그림 100점을 팔아 치우려던 패기를 아저씨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여전히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이것은 비즈니스다.’ 하는 태도로 엄숙하게 되풀이한다.

    “내 초상화, 1년에 한 점씩, 100개.”

    “……아, 아저씨, 그럼 우리는 결사적으로 무병장수해야 할 거예요.”

    “결사적으로 무병장수하면 되지. 넌 120살까지 산다면서.”

    “아저씨는 남자고, 저보다 열두 살이나 많아서 엄청 불리하신데요.”

    “인스턴트 음식 안 먹어서 내가 더 유리해. 너보다 20살 이상 더 살 거야.”

    우연은 멍하니 눈앞의 아저씨를 보았다. 반박할 수 없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라면과 불닭과 콜라도 못 먹고, 아저씨처럼 무미건조한 시래기나 먹으면서 20년이나 더 살 생각은 없었다.

    “……물론 마음이 떠나면 얼마든지 계약을 파기하고 튀어도 돼.”

    “제 신용도가 그렇게 바닥은 아니었을 텐데요.”

    대답하던 우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 저 말은 마음이 떠난 채 몸만 옆에 묶여 있는 관계의 부질없음, 그 공허함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아저씨는 우연에게 완전히 자유를 주었고, 우연의 사랑에도 자유로운 선택권을 준 것이다. 심지어 그동안 우연이 갖고 있던 경제적, 심리적인 부채 의식에서도 완벽하게 자유로운 선택권이었다. 우연은 쓰라린 통증이 번지는 목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럼 대가는요? 이번에는 하나에 100만 원씩은 싫은데요. 그땐 확실히 제가 뭘 몰라서.”

    아저씨의 얼굴에 살짝 당혹스러운 빛이 감돈다. 처음에는 그 계약이 엄청난 호의라고 생각했지만, 까고 보니 우연이 호구 잡혔다고 해도 될 만큼 손해나는 계약이 되어 버렸다.

    “원하는 금액이 얼마야? 호당…….”

    “호당 얼마 그런 건 됐고요.”

    우연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닿을 때 철버덕,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며, 우연은 아이스크림이 다 녹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아, 망했다. 우연은 아이스크림은 포기하고 딜을 시작했다.

    “일단 이 집을 장기 임대 해 주셔야 하고요.”

    “여기선 5년 후에 나가야 하는 게 규칙인데?”

    “여기 운영자라면서요. 권력 남용 좀 해 보세요.”

    “그게 다야?”

    “그럴 리가요. 저도 시세라는 걸 알고 호구도 아니거든요. 자주 오셔서 맛있는 것도 사 주셔야 해요.”

    “또?”

    “저하고 수다도 떨어야 하고 고민도 들어 주셔야 해요.”

    아저씨는 점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가를 실룩실룩하며 계속 물었다.

    “또?”

    “저랑 섹스도 자주 해 주셔야 해요. 제가 욕정이 좀 만발하와…….”

    그 말에 아저씨의 얼굴이 갑자기 얼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얼마나 자주?”

    “경우에 따라 다른데, 제가 뭐가 삐끗해서 가벼운 조증이 되어 버리거나 호르몬이 날뛰는 날에는 매일 와서 밤새 달려 주셔야 할지도 몰라요.”

    아저씨의 표정이 다시 변한다. 점점 진지해지다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우연아. 섹스를 원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선 당연히 따라오는 반응이야. 경조증이나 호르몬 때문이라고 매도할 거 없어.”

    우연은 동의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 상담 선생님이 아저씨에게 했던 말, 모두 가벼운 조증 상태의 지나친 성욕과 변덕스러운 애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우연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가 몸을 우연 쪽으로 완전히 돌리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말을 고른다.

    “우연아. 고흐나 로스코, 잭슨 폴록, 살바도르 달리,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헨델 같은 예술가들은 정신이 불안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경조증 증세가 있었다고 짐작되는 예술가들은 그 사람들 말고도 많아.”

    “그런데요?”

    “그러면, 그 그림과 음악들은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예술품이 아니라 정신병자의 경조 증세를 나타내는 임상 기록일까? 압생트 중독자들은 노란색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럼 고흐의 강렬한 해바라기 그림들이 예술품이 아니라 압생트 중독자의 임상 증거가 되는 걸까?”

    “아…….”

    “네가 만에 하나 경조증 상태가 돼서 나와 맹렬히 섹스를 하고 싶으면, 그건 가짜 사랑일까? 그 기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감정이 가짜는 아니잖아.”

    “…….”

    “내 초상화를 그려 줘. 너를 사랑하는 내 모습을 그려 줘.”

    “……네.”

    “네 마음이 내 옆에 남아 있는 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한, 해마다 한 점씩. 그게 조건이야.”

    “네.”

    우연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고 젖어 든다. 아저씨의 목소리는 점차 담백하고 명료해진다.

    “우리 사랑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현재밖에 없어. 아이도 없고, 가정도 없고, 법적인 인정도 없고, 사랑만 있어. 하지만 그거면 충분해.”

    “흐, 흐으, 네.”

    대답하는 사이로 가슴에서 치미는 거센 날숨이 스며들었다. 아저씨는 여전히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네 그림들은, 우리의 유전자로 이어지는 후손 대신, 우리가 언제까지, 어디까지 사랑했느냐를 입증하는 증거로 영원히 남게 될 거야.”

    “……네.”

    “먼 훗날 사람들은, 열 장, 스무 장, 혹은 백 장의 내 초상화를 보면서, 우리가 10년, 20년, 혹은 100년 동안 쉼 없이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아니, 오직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곁을 지켰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우리가 상륙한 곳은, 깨어진 감정의 파편이 녹아서 만들어진, 작고 불안정한 땅이었다. 우리는, 결혼이나 자식과 같은 법적인 보호 장치나 구속이 없는 불확실한 관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작고 불안정한 땅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명제를 놓고 보면 놀랍도록 단단하고 아름다운 결정(結晶)으로 화한다. 그리고 그 불확실한 관계 역시 오로지 사랑 하나만으로 존재하고 정의될 것이다.

    네 그림들은, 그 작고 아름다운 땅에 대한 기록이며, 사랑 하나만으로 정의되는 우리의 관계에 대한 기나긴 연대기가 될 것이다.

    “우리 사랑은 그렇게 불멸의 생명을 얻게 될 거야.”

    “……나쁘지 않네요.”

    우연은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이원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우연의 앞에 와서 섰다. 우연은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폭포처럼 눈물을 쏟아 내는 눈을 가만히 눌러 주었던 것이다.

    새로운 계약의 성립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