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0화 (30/47)

30. 포기해야만 보이는 것

아저씨가 해외 출장을 간 날은 더없이 화창했다.

트렁크에 짐을 쌀 때부터 우연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햇빛이 너무 쨍쨍해서 불안했고, 아저씨와 함께 먹은 아침이 너무 맛있어서 불안했고, 이마에 입 맞추고, 손을 잡고, 몇 번씩 돌아보며 문을 나서는 아저씨가 너무 다정하고 사랑스러워서 또 불안했다. 저 짙고 부드러운 눈동자가 왜 이렇게 비장하게 느껴지는지 몰라서 불안했다.

우연이 방문 앞에 서서 팔을 긁다 말고 멈칫멈칫하는 것을 보자, 이원은 계단 앞에서 돌아서서 우연을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긁고 싶으면 내 팔을 긁어. 조금 거슬리고 짜증 나도 내가 올 때까지만 좀 참아 줘, 응?”

“……네.”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정말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일주일만 기다려 줘. 미안.”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연은 회사가 지금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동남아 쪽 해상 공항 입찰이 진행 중인데 더 낮은 금액을 쓴 회사가 둘이나 있다는 연락이 왔었고, 지금 재개발 진행되는 것도 사람들이 분양 신청을 안 해서 분위기가 몹시 안 좋은 듯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그런 불안감을 한 자락도 내색하지 않는다. 아저씨의 입술이 이마에 와 닿았다.

“일정을 아무리 당겨도 이렇구나. 불안하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하지만 우연은 전화기를 꺼 둔 채 손도 대지 않았다. 아저씨는 이제부터 전쟁을 치르러 가는 것이다. 나보다 힘들면 힘들지 덜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아저씨를 더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재수 없으면 전화기를 딱 여는 순간, 아빠에게 위치 추적을 당할지도 몰랐다. 아빠의 부재중 전화 표시가 쫙 깔린 꼴도 봐야 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1층 거실로 살금살금 내려가자 송 할머니나 일하는 사람들이 귀신같이 알아듣고 나와 고개를 숙인다.

“시장하세요 아가씨? 뭐 만들어 드릴까요?”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도와드릴까요?”

우연은 어물어물하며 복도 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저들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다들 아저씨의 약혼을 깨 버린 못된 년이라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

물론 우연은 약혼이 깨지는 것이 아저씨가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기 원하는 이유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 아니던가.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뻔뻔하고 이기적으로 비칠지도 알고 있다. 아저씨 등에 달라붙어 있는 거머리처럼 보이겠지.

……변명할 생각은 없다. 아마 나는 거머리가 맞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왔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팔에 얽힌 피딱지를 긁으며 벗겨 내다가 흠칫 멈췄다. 아저씨가 왔을 때 좀 더 깨끗한 팔을 보여 주고 싶었고, 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나, 정말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우연은 불안하고 위축될 때마다 아저씨의 웃음을 생각했다. 그래. 적어도 지금 아저씨는 몹시 행복해하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한 며칠 동안 아저씨가 보여 주었던 모습과 열렬한 반응은 그가 진심으로 행복해한다는 증거였다.

그동안 아저씨는 행복의 조건은 모조리 갖추고 있는데도 불행의 길로만 돌진하고 있었다. 세경그룹의 지배권은 그에게 행복을 더해 주는 요소가 아니라 갉아먹는 요소였다. 우연이 알기로 우 이사님네 남매의 지분하고 아저씨네 지분은 똑같이 45%이고 한 회장님이 키운 건 건설 쪽인데, 그럼 성일호텔 쪽하고 갈라서도 아저씨가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모르겠다. 내 생각이 너무 철없고 해맑은 거겠지.

우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저씨가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아저씨가 미현 언니와 결혼을 강행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복잡한 걸 감수하고 회사를 나누게 될까. 아니면 우 상무님네랑 피 터지게 싸워 가며 경영권 분쟁을 하던 한 회장님 때로 돌아가게 될까.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뻔뻔하고 염치없어서, 어떻게 되면 좋겠다, 하는 바람을 갖는 것마저 죄스럽게 느껴졌다.

생각을 접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확실한 것은 아저씨와 내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고, 아저씨는 행복하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우연이 유일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딱 한 조각의 땅이었다.

우연은 자신이 쓰던 1층 손님방의 문을 열어 보았다가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방은 자신이 떠날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저씨가 잔뜩 사다 놓은 인형, 분홍색 노란색 천지인 침구와 커튼, 한쪽 벽에 기대어져 있는 100호짜리 하얀 캔버스들과 여러 종류의 물감, 꽃병, 슬리퍼 따위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화분이었다. 그때는 조그만 싹들만 비죽비죽 늘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화분에서 늘어진 파란 잎들로 벽면이 무성하게 덮일 지경이었다.

“화초들이 많이 자랐지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송 할머니는 너무 기척 없이 다닌다.

“깜짝 놀랐어요, 할머니! 유령인 줄 알았어요.”

“아이고, 미안해라. 전무님이 시끄러운 걸 안 좋아하셔서, 다들 발끝으로 다니는 게 습관이 돼서 그래요. 다음엔 기척을 할게요.”

할머니가 다정하게 웃었다. 우연은 미움받아 마땅할 자신에게 이렇게 웃어 주고 있는 송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가식 같지는 않았다.

“할머니, 식물 잘 기르시나 봐요. 저는 손에 들어온 화분은 몽땅 죽이는데. 물을 많이 줘도 죽고 적게 줘도 죽어요.”

“아이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 꽃들은 전무님이 기르신 거예요.”

“네?”

“이 방 정리는 내내 전무님이 하셨어요. 다른 사람은 못 드나들게 하시고, 혼자 들어와서 청소도 하시고, 화분에 물도 주시고, 요 의자에 한참 동안 앉아 계시고 그러셨어요.”

아아. 그랬구나. 비죽이 웃음이 나오면서도 눈이 시큰해졌다. 바보 아저씨. 이럴 거면서 끊어 내기는 뭘 끊어 내.

“아저씨는 꽃들 잘 기르시나 봐요.”

“잘 기르는 정도가 아니에요. 전무님한테 가져오면 얼어 죽은 것도, 말라 죽은 것도 다 살아나요. 과일나무를 기르면 열매가 너무 많이 열려서 가지가 부러질 지경이고, 개들도 새끼를 열 마리씩 낳아요. 그래서 전무님이 아무것도 안 키우시는 거예요.”

한 걸음만 더 나갔다간 죽은 사람도 살리겠네. 우연은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왜요? 그럼 더 많이 키우셔야죠.”

“일단, 전무님이 손을 대면, 마당이 정글이 돼 버려서 수습이 안 되고, 동물들도 새끼를 너무 많이 낳아서 감당이 안 돼요. 그리고 전무님이 그런 결단을 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답니다.”

우연이 귀를 쫑긋하며 눈을 반짝이자, 송 할머니는 아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저씨의 어린 시절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부터 교감 능력이 좋았다고 했다. 지나치게 좋았단다. 말도 못 하는 아기가 어디가 아픈지, 동물들이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저 나무가 왜 시들시들 죽어 가는지 조금만 관찰하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했다.

심지어 그가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더라 증언하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너무 외로워서 관심을 끌려고 하는 행동인가 했는데, 실제로 멀쩡해 보이던 강아지나 고양이가 병이 났다며 병원에 데려가 병을 발견하게 한 적도 몇 번 있었고, 새나 나비들도 그를 무서워하지 않고 주변에 잘 날아와 앉는다고 했다.

“지금도 전무님은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직업을 정원사나 고양이 미용사로 생각하신답니다. 아무리 성질이 나쁜 길고양이라도 몇 마디만 설득하면 얌전히 배를 보이고, 시키는 대로 목욕을 하고 털을 깎고 주사를 놓도록 허락한다네요? 그래서 ‘집사모’라는 길고양이 봉사 단체에선, 전무님을 차기 회장으로 추대하려고 20년 넘게 공을 들이고 있답니다.”

“20년이요?”

“네, 전무님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요.”

푸웁. 우연은 폭소를 터뜨렸다. 물론 유기묘 봉사 단체 집사모에서 아저씨가 얼마나 전설 같은 존재였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우연에게 ‘한이원’은 ‘슈트 차림의 사업가’ 외에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품위와 중후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아저씨가 커다란 모자에 헐렁한 멜빵바지 차림으로 가지를 치고 잔디를 깎는다? 앞치마를 두르고 고양이를 살살 달래 가며 목욕을 시키고 털을 민다? 상상할수록 너무 우습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만큼 아저씨에게 잘 어울리는 게 있을까, 싶기도 했다.

“동물하고 말을 주고받을 정도면 수의사가 낫지 않았을까요?”

“수의사는 꿈도 못 꾸셨어요. 누가 아프거나 피 보는 걸 그렇게 못 견디시는데 수술 같은 걸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렸을 때 충격받은 일도 있고요.”

“어떤 충격이요?”

송 여사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한세경 회장님이 어린 아들을 다시 보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당사자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전무님이 유치원에 다닐 때였어요. 어렸을 때도 사람을 많이 가리고 외로움을 많이 탔는데 동물을 너무 좋아하셔서 거북이인지 자라인지 두 마리를 키운 적이 있었어요. 거돌이하고 거순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고, 온종일 녀석들 옆에 붙어 앉아서 이름을 불러 주고 이야기를 걸고 먹이를 주면서 어찌나 좋아하셨는지 몰라요.”

우연은 속으로 웃었다. 거돌이 거순이라니, 작명 센스도 어지간히 없다 진짜.

“그러다가 유치원에서 현장 학습을 갔다가 다슬기인지 달팽이인지 두 마리 주워 와서 그걸 거북이 어항에 넣어 같이 기르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다슬기가 어느 돌 틈에 숨어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원은 그놈들을 바위틈에서 발견할 때마다 환성을 질렀다.

얼마 안 가 좁쌀만 한 새끼들이 꼬물꼬물 한두 마리씩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꼬물이들을 볼 때마다 이원은 흥분했다. ‘많이 먹고 얼른 자라서 아기들도 열심히 낳으렴.’ 하며 응원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원은 자신의 수족관에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다슬기가 엄청난 속도로 번식하고 있었다. 그것을 인식한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 순간부터 작은 수족관 벽에 검은 다슬기들이 다닥다닥 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고, 거북이들은 날이 갈수록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이원은 그제야 당황해서 물을 새로 갈고 다슬기들을 보이는 대로 모조리 잡아 양재천에 놓아주기 시작했다. 거기서 잘 살까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수족관의 주인인 거북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깨알만큼 작은 다슬기는 아무리 잡아도 어디선가 끊임없이 계속 나타났고 아무리 물을 새로 갈고 돌을 씻어도 다음 날이면 어디선가 또 나타나 수족관 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바위나 돌 틈에 이미 알이 깔려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까지 다 잡아내기는 속수무책이었다. 새로운 수족관을 들여서 거북이만 따로 넣어 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송 여사의 건의에 한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새 수족관은 됐고, 이원이도 도와주지 말고 한번 둬 봐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봅시다.’

결국, 어느 날 아침, 물 위로 거돌이가 배를 뒤집고 둥둥 떠올랐다. 이원은 녀석을 끌어안고 하루 종일 울었다. 남은 거순이라도 살리려면 어떡해야 하느냐 묻는 이원에게 아무도 대답해 주지 못했다.

‘아주머니, 이제 달팽이랑 거순이는 둘 다 살릴 수는 없는 거죠?’

그날 밤 이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송 여사에게 물었고, 송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후, 송 여사는 이원의 부탁대로 수족관의 돌과 장식품을 모조리 꺼내 들통에 쓸어 넣고 푹푹 삶았다. 그곳에 깨알처럼 붙어 있는 다슬기들과 보이지 않는 알들도 폭 삶아졌다. 우렁된장국과 비슷한 냄새가 온 집 안에 구수하게 퍼졌다. 이원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만, 끝까지 그 옆에 서서 결과를 지켜보았다.

이원은 간신히 살아남은 거순이를 정성으로 보살폈고, 거순이는 5년을 더 살았다.

거순이가 죽은 후, 이원은 집에 어떤 동물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동물 관련 봉사 활동을 오래 하기도 했지만, 동물을 기르자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한 회장은 어린 아들의 결단을 몹시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린 아들의 지나치게 민감한 기질이나 사람을 가리는 습관도 사내답지 못하다고 나무라는 대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아들이 기피하고 싫어했던 사람들이 결국 뒤통수를 치거나 공금 횡령 따위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확인한 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 한 회장은 중요 바이어들을 만날 때마다 이원을 데리고 다녔고, 일찍부터 경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원의 사람 보는 눈은 백발백중이라 할 만했고, 인사가 만사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한 회장은 아들의 혜안을 크게 기꺼워했다.

하지만 이원은 고등학생이 된 후,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신학교에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우와…….”

우연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아저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저렇게 여리고 상처도 잘 받는 아저씨가 어떻게 저 큰 회사를 끌고 나가나 싶었는데, 어릴 때부터 그런 싹수는 있었나 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인 한 회장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회장님은 상대방의 마음을 유달리 잘 느끼는 아들에게 경영자로서의 싹수를 보았을지 몰라도, 우연은 상처받은 어린 마음이 너무나 아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자꾸 눈시울이 시큰했다. 우연이 눈이 발개진 채 코를 훌쩍대자, 송 할머니는 우연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어깨를 가만히 토닥거려 주었다.

우연은 어린 시절의 아저씨를 상상해 보았다. 달고 향긋한 핫초콜릿이 혓바닥으로 사르르 스며드는 것 같다.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얼마나 천사 같았을까. 저런 사람을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돌보았을 부모님이, 곁에서 자상하게 챙겨 주었을 송 할머니가 몹시 부러웠다. 자신이 너무 늦게 태어나 아저씨의 어린 시절을 못 보고 어른 시절만 보게 된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아 맞다. 출장 다녀오시면 앨범 보여 달라고 하면 되겠구나.

우연은 그제야 희미하게 웃었다.

띠리릿, 띠리릿, 띠리릿.

밖에서 희미하게 전화벨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우연이 있는 방으로 인터폰이 울렸다. 인터폰을 받은 송 할머니가 뒤를 돌아 묻는다.

“아가씨, 학교 기숙사에서 전화가 왔다는데요. 기숙사 퇴실 문제하고 휴학 처리 때문인 것 같은데, 받으시겠어요?”

“어? 학교에서 여기 번호는 어떻게 아셨대요?”

우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 할머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아가씨 모셔 오면서 집 번호로 여기 번호를 등록해 두셨을 거예요. 무슨 일 있으면 이리로 바로 연락 오게 했다고 하셨거든요.”

아, 그렇구나. 괜히 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바보 아저씨, 이래 놓고 야멸차게 끊기는 뭘 끊어. 우연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 전화받으시는 분 서림예대 회화과 3학년 진우연 학생 맞으십니까?

수화기 너머 담당자는 본인 확인을 마친 후 골치 아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숙사 퇴실 신청과 휴학 신청을 했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처리가 안 된다. 휴학이든, 자퇴든, 기숙사 퇴실이든, 직접 와서 다시 신청을 해야 한다, 어떡할 거냐, 놔둔 짐들은 다 어쩔 거냐, 몇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던 직원이 문득 말을 멈추고 묻는다.

― 혹시 지금 옆에 누가 있습니까?

“……없는데요.”

― 아무도 안 계신 게 확실합니까?

우연은 어리둥절해서 둘러보았다. 통화가 시작되자 송 여사는 방 밖으로 나갔고, 방에는 우연 혼자였다. 없어요. 저 혼자인데요. 대답하기가 무섭게 목소리가 확 바뀐다.

― 목소리 들으니 잘 살아 있는 것 같네. 이렇게 통화가 힘들어서야 원.

귀에 익은 목소리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연의 눈이 커지면서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날카로운 소름이 척추를 쭉 훑고 지나간다.

천의 얼굴, 천의 목소리를 가진 배우.

……빌어먹을.

― 뉴욕에서 얼마 전에 한국에 도착했어. 네년이 정말 그 집에 처박혀 있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유미현이다.

깨닫기가 무섭게 엉뚱한 소리가 이어졌다.

― 꼬마야,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네 엄마가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왜 일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어?

이게 무슨 소리지? 엄마는 지금 외국에 나가 있을 텐데?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우연은 고개를 흔들며 버텼다. 목소리가 달달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어, 엄마가 왜요?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 일단 좀 만나서 이야기할까? 우리 할 얘기가 좀 많을 것 같지 않아?

* * *

눈치채이지 않게 나오는 건 쉽지 않았다. 바람 좀 쐬고 오겠다는데도 다들 따라 나오려고 어찌나 성화인지, 꼬리를 떼고 오느라 몹시 애를 먹었다. 결국 송 여사가 물건 찾을 때 애용하는 소형 발신기를 가방에 매달고, 요 동네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서야 대문을 나설 수 있었다.

집 앞 편의점 옆의 지하 카페에 들어서자 안쪽에 앉아 있던 낯익은 여자가 빙긋 웃으며 손을 까딱, 한다. 그 자연스럽고 오만한 손짓에, 우연은 줄에 매이기라도 한 것처럼 주춤주춤 다가갔다. 그녀가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피골이 상접하다더니, 기름이 반질반질하네. 하긴, 오빠하고 송 여사가 어지간히 잘 거둬 먹였을까.”

미현이 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다리를 높이 꼬고 앉아 있었다. 반역광으로 빛을 받은 여자는 오만하고 아름다운 여신 같았다. 칼로 탁탁 자르는 듯한 말투며 동작 하나하나가 더없이 명료하며 당당했다. 아저씨에게 너무 잘 어울릴 만큼.

“일단 좀 앉지 그래?”

미현이 턱으로 맞은편의 카우치를 가리킨다. 그 작은 움직임에서조차 오랫동안 남을 부리고 휘어잡으며 살아온 사람의 힘이 느껴졌다. 우연은 시킨 대로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미현 앞에서 기가 죽는 게 분하면서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고 시선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오빠한테 전화가 왔더라. 웬일로 뉴욕에 오겠다는데, 그때 내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는 바람에 인천 도착해서야 그 메시지를 들었어. 하여간 이런 것까지 손발 맞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응? 이게 무슨 말이지? 아저씨는 분명 출장을 가신다고 했는데? 외국 출장.

……뉴욕으로, 가신 거였나? 저 언니하고 바로 결판을 내고 오려고?

내가 신경 쓸까 봐 출장이라고 하신 거구나…….

심장이 걸레처럼 쥐어짜이는 것 같다. 역시 결혼을 파기하고 회사를 나누자는 거였을까? 아저씨가 어떤 제안을 준비해 갔을지 우연은 여전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전수현 실장……. 내 웨딩 플래너가 회사 로비에서 너를 만났다고 하더구나. 오빠가 널 안고 바로 서초동으로 들어온 거라며? 전화 끊자마자 JFK 가서 대기 좌석 잡아타고 들어왔지.”

우연은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로비에서 몽롱한 얼굴로 배회하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떤 아줌마가 보여 준 아저씨의 결혼 예복 카탈로그를 구경했던 기억도 난다. 우습게도 그 여자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저 그런데, 엄마가 위험하다는 말은…….”

“너 오빠랑 잤니?”

미현은 우연의 말을 탁 끊으며 치고 들어왔다. 힉, 소리가 나오며 고개가 폭 수그러들었다.

“어라. 정말 잤나 봐. 기가 막혀서. 조금만 일찍 도착했으면 굉장한 구경을 할 뻔했잖아.”

미현은 우연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신기하고 궁금한 표정이었다. 우연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뭔가 이상했다. 약혼자가 다른 사람하고 잤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대체 오빠를 어떻게 따먹은 거야? 보통 철벽이 아니었거든. 담백하다고 봐 주기엔 너무 심하게 철벽을 쳐서, 나 정말 오빠가 발기 불능인 줄 알고 심각하게 고민했었어.”

미현이 턱을 탁, 튕기듯 놓아 주며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머리가 부스러져 나가는 것 같다.

“오빠는 성격이 까다롭고 눈이 굉장히 높아. 그런 사람이 어떻게 너처럼 볼품없고 정신도 이상한 애한테 빠진 거지? 너 지금 조현병 치료받는 중이라며?”

“조현병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변동 폭이 좀 있는데 심하진 않아요……. 관리만 잘하면 괜찮다고…….”

“변이나 똥이나. 괜찮다고 누가 그래? 이원 오빠가? 그 말을 믿었어? 순진하게.”

저렇게 더러운 말을 저리도 우아하게 하다니. 우연은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거 잘 몰라요. 엄마 이야기나 얼른 해 주세요.”

“모르긴 뭘 몰라. 모가지에 난 자국이나 가리고 말해. 거머리 떼한테 뜯긴 것 같네. 하? 얼굴 빨개지는 거 봐라? 오빠가 그동안 꽤 잘 빨아 줬나 봐?”

“저기 언니, 우리 엄마 얘기나…….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누가 네 언니야?”

“그럼 아줌마라고 해요?”

순간 미현은 폭소를 터뜨렸다. 여자의 반응을 종잡을 수 없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웃는다고 기분 좋다는 뜻도 아닌 것 같았다. 가면이 느껴졌다. 너무 자연스럽고 철통같아서 속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가면이었다.

“좋아. 미현 언니라고 해. 너 같은 애한테 아줌마, 미현 씨 소릴 들으면 네 혀를 썰어 버리고 싶을 테니까. 언니는 그래도 애교로 좀 봐 줄 수도 있겠고.”

미현은 소름 끼치는 말을 시원시원 내뱉더니 등을 뒤로 푹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엄마 얘기보다 먼저 너한테 확인할 게 있는데.”

발끝, 손끝이 서서히 차가워지는 게 느껴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점점 덩치를 키운다. 숨이 가빠진다. 미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오빠가 왜 나랑 결혼하기로 한지는 알아?”

“알아요.”

“안다? 그런데도 이런 짓을 해? 뻔뻔한 거야, 아니면 정말 미친 거야?”

“하, 하지만, 아저씨는 언니를 사랑하지 않는걸요.”

아차, 우연은 두 손으로 입을 감쌌다. 이 말은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이건 아저씨가 언니에게 했어야 하는 말이다. 아니, 어쨌든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와, 하, 하하하, 깔깔깔, 미현은 우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친 듯이 폭소했다.

“사랑? 사아라앙? 미친년 째진 것도 입이라고 한다는 소리 좀 봐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같잖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그녀는 한참을 웃어 댔다. 우연은 미현이 화를 내며 따귀를 후려치는 것보다 이 비웃음이 백배는 더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넌 1년 총 매출이 몇조, 몇십조 단위라는 게 무슨 의미인 줄은 알아? 그런 돈을 휘두르는 대기업 총수라는 건, 사랑하네 어쩌네 하면서 포기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

“하긴. 겨우 500만 원에 목숨을 버리려고 벌벌 떠는 년이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고개를 숙이고 이를 물었다. 분해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반박할 수 없었다. 저 여자는 허세나 교만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정말, 그냥 사는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그 세계에서 ‘사랑’이 얼마나 같잖고 우스운지 있는 그대로 알려 주는 것뿐이었다.

“그래, 오빠가 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하고 결혼하기로 했는지, 왜 맘에 드는 여자가 생겼는데도 파혼을 못 하고 있는지 궁금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너…….”

우연은 멍하니 미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인가?

“너, 한 회장님의 유언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유언? 그딴 건 한 번도 못 들었다. 속에서 이상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다시 신랄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거봐. 넌 오빠가 나랑 결혼하는 진짜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잖아. 그래도 생각만큼 뻔뻔한 건 아니었네?”

귓속에서 잉잉대며 이명이 인다. 불길하다, 뭔가 듣지 말아야 할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된 재앙이 툭, 하고. 누군가 귓가에 대고 킬킬대며 속살거리는 것 같다. 그동안 이 정도로 운이 좋았으면 됐잖아, 이제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지, 하면서.

“잘 들어. 오빠는 나와 결혼을 포기하면 세경그룹 총수 자리를 영원히 포기해야 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설 쪽 계열사하고 메세나재단 경영권까지 싹! 몽땅! 외삼촌에게 뺏기는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세경건설 쪽 회사들이랑 이원메세나재단은 원래 아저씨 거 아닌가요? 분명 한 회장님이 키운…….”

“어머나 저런. 그래서 결혼 깨지면 세경그룹 반반 갈라서 빠이빠이 하면 될 줄 아셨어요? 순진하긴.”

“아……?”

“지주사가 뭔지 몰라? 세경홀딩스를 뺏기면 세경그룹 전체를 다 뺏기는 거예요. 홀딩스가 11개 자회사들 지분을 반 이상 갖고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이 무식한 아가씨야.”

“…….”

“그리고 홀딩스 지분은 엄마하고 외삼촌에게 45%, 오빠와 한 회장님에게 45%,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10%로 나뉘어 있어. 입지전적인 사업가였던 한 회장님도 그 10% 주주들을 똥줄 타게 설득해 가면서 간신히 경영권 유지했는데, 새파랗게 젊은 오빠가 무슨 재주로 과반을 확보해? 우리 도움 없이 단 하루라도 가능한 일인지 알아?”

숨이 점점 막혀 왔다. 미현이 가방에서 작은 복사지를 꺼내 눈앞에 펼쳐 든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이 유언장이지. 눈깔이 있으면 한번 읽어 보시죠?”

「한세경의 상속분 (주)세경홀딩스의 보통주 785,500주, 25%의 지분에 대하여 상속인 한이원은 우성희 이사의 딸 유미현과의 혼인 신고를 필하기 전까지 상속 지분을 행사할 수 없음.」

얼빠진 얼굴로 눈앞에 있는 글자를 하나씩 읽었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몇 번을 읽어도 너무 황당해서 내용이 믿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린다.

“왜? 이해가 안 돼? 하긴, 그 정신머리로 뭔들 이해가 가겠니.”

“…….”

“현재 오빠 지분은 45%가 아니라 20%밖에 안 돼. 나와 결혼한다는 전제로 우리 지분을 당겨쓰고 있는 것뿐이야.”

“그, 그런…….”

“그런데 지금 오빠 하는 짓 보면, 정말 정신이 나간 것 같고 말이지?”

……어떡해…….

우연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천천히 허리를 구부렸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을까.

어떡해, 어떡해, 아저씨……. 대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나는 이제 어떡해. 대체 나는 뭘 어떡해야 해요?

한 회장님은 왜 아들한테 이따위 유언을 남겼을까. 왜 아무도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지 않았을까. 송 할머니도, 정 관장님도, 손 원장님도, 그렇게 말이 많고 시끄럽던 최 실장 아저씨도.

심지어, 아저씨마저도. 나에게 아무것도 속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던 그 아저씨마저도.

아저씨에게 이 정도로 선택의 여지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목줄에 묶여 맨발로 질질 끌려가는 포로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끝까지 숨긴 것이다. 이것마저 들켰을 때의 굴욕감까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아저씨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 결혼은 하면 안 돼.’, ‘회사를 반반 나눠서 갈라서면 안 돼?’ 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같잖게 느껴졌다.

아저씨는 잃어야 할 게 어마어마했고, 나는 그저 주둥이만 살아 있는 기생충에 불과했다. 아저씨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나 때문에 잃어버린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될 거고, 그때 아저씨의 몸에 매달려 여전히 미친 듯이 피를 빨아먹고 있는 내 정체가 보일 것이다.

우연은 그 ‘잃어버린 것들’이 나중에 얼마나 큰 원망을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엄마도 한때 아빠에 대한 사랑이 넘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조기 유학을 다녀와 좋은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했던 엄마는 가진 것이 많았고, 따라서 ‘사랑 때문에 포기했던 것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열등감 덩어리였던 아빠는 그 원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운명적인 사랑이 파탄 나는 첫 번째 단추가 그 ‘포기했던 것들’이었다.

눈앞으로, 가야 할 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래. 아저씨는 애초부터 내 것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저씨가 행복하기를 바랐지, 모든 것을 잃고 내 옆에 주저앉길 바란 건 아니었다. 왕위를 내려놓고 사랑을 택하는 따위의 스토리는 엿이나 먹어야 마땅했다. 더욱이 왕은 재산이라도 남지만, 아저씨는 재산을 물려받지도 못한다. 이건 백번 뒤집어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그래. 그냥 덕질, 팬질, 사생질 정도에서 끝났어야 했다. 그 정도가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툭, 툭툭, 툭툭툭.

결국, 눈물이 터졌다.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으로 눈을 막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정신없이 아래로 쏟아졌다. 우연은 이를 악물고 발을 콱콱 구르며 눈물을 닦아 냈다. 저 여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이 머저리 같은 눈깔을 뽑아 버리고 싶다.

우연의 처참한 얼굴을 본 미현은 조금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약간 너그러워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지금 네가 찢어 죽일 만큼 밉고 그런 건 아니야. 나도 한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아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

“모……리스 첸……? 아직도 사귀고 있는 거 아니에요?”

“씨발, 이건 또 어떻게……. 누가 그래! 오빠한테 들은 얘기야?”

느긋하던 목소리에 다시 파랗게 날이 선다. 과거사처럼 이야기를 돌리려다 정통으로 들켜서 당황한 듯했다.

“아뇨. 인터넷에서, 기사랑 사진 봤어요. 엄청 많이 봤어요.”

많은 건 아니고 네댓 번에 불과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미현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중얼거린다. 씨발 다 지우라고 했는데 어디서 득달같이 주워 본 거야. 미현이 우연을 노려보며 추궁했다.

“오빠한테 들은 거 정말 아니야?”

“아저씨는 그런 얘기 한 번도 안 했어요. 제가 찾아봤어요.”

“하긴, 그 콧대 높은 자존심에 그런 얘길 할 리도 없지.”

미현은 얼굴을 구긴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표정을 풀고 쿨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좋아. 뭐, 말하려면 확실히 말하는 게 좋겠지. 그래야 제대로 현실을 보고 처신을 똑바로 하게 될 테니까. 오빠도 어차피 다 알고 있을 테고.”

미현이 비웃듯이 키들거린다.

“나는 말이다, 꼬마야. 남녀 관계에서 섹스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애석하게도 오빠하고 나는 둘 다 성적으로 전혀 끌리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오빠는 남자로서, 결혼 상대로서 성적인 매력이 전혀 없어. 그건 정말 큰 문제야. 그건 엄연한 이혼 사유이기도 하거든.”

“…….”

“그리고 애초에 난 천상의 테크닉을 가진 정력가를 놔두고, 수도승 같은 사람 옆에서 허벅지에 송곳 박으면서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그나마 너랑 같이 잤다는 걸 보니 아주 고자는 아니었나 보네.”

이원은 미현에게 다정하고 정중한 약혼자였다. 하지만 입맞춤 외에는 어떤 성적인 접촉도 없었고, 성적인 뉘앙스가 있는 대화조차 점잖게 회피했다. 결혼 전까지 성관계를 절제하는 것이라기엔 도가 지나쳤다. 어딘가 큰 결함이 있어서 신부가 되려고 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반명 모리스 첸은 워킹 페로몬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로, 이원과 여러모로 대척점에 놓여 있었다. 상업적 감각이 뛰어난 공연 기획자였지만 추문에 연루되는 일도 잦았다. 여러 종류의 중독에 쉽게 빠져들었고, 낭비벽이 심했으며, 절제라곤 전혀 없었다. 자극이 없는 지루한 삶을 견디지 못해, 그가 머무르는 곳에선 밤마다 흥청대는 파티가 이어졌다. 도박, 파산, 여자들과의 추문, 폭행 사건에 연루된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언변, 특히 성적인 매력만큼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배우자로서는 적절하지 않을지 몰라도, 자극적인 쾌락을 아낌없이 선사하는 연인으로서는 최고점을 받을 만했다. 미현은 그와의 낮과 밤을 기꺼이, 적극적으로 즐겼다.

모리스와 함께 자극이 넘치는 변화무쌍한 일상에 묻혀 있다가, 서울에 와서 이원과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끔찍하게 지루하고 숨이 막혔다. 깊은 산골 수녀원에 틀어박혀 고행하는 기분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을,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미현이 모리스와의 관계를 무리하게 유지하기로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차피 이 바닥에서 법적 부부란 대부분 허울 좋은 동업자나 동지에 가까웠고, 성욕이나 정서적 만족감은 정부를 이용해 충족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결혼이 재산의 이합집산 도구가 되다 보면 이혼도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연은 이야기를 들으며 멀거니 눈을 깜박거렸다.

……저 언니는 아저씨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금욕적이고 품위 있는 분위기와 달리, 빗장이 풀린 아저씨는 절대 수도승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욕으로만 가득 찬 짐승이라면 모를까. 그는 육체의 자극에 무서울 만큼 탐닉하는 사람이었다. 경험이 부족함을 수치스러워할망정 그 추잡하고 더러운 짓들을 전혀 회피하지 않았다. 섹스할 때만큼은 주변 상황과 뒷일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쾌락을 한계 이상으로 추구하기 위해, 법에만 어긋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남자가 틀림없었다.

다만 얼마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었다. 아저씨 자신까지도.

하지만 그런 말까지 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아저씨가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모습은 남에겐 절대 이야기해선 안 될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오빠와 결혼하면 호텔 경영권을 영구적으로 확보할 수 있잖아? 포기하는 건 병신 짓이지. 둘 다 갖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까. 그래서 모리스에 대해선 오빠한테 암묵적으로 미리 합의를 받은 거고.”

저쪽 세상은 정말 이상하다. 상식이 안 통해, 라고 생각하던 우연은 이내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실은 내가 살던 세상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리 아빠만 해도 다른 여자들과 그렇게 바람을 피우면서도 엄마에게 당당하다 못해 폭력적이지 않았던가. 애초에 세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순진하게 상식을 믿던 사람들만 바보가 되어 자빠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빠는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이제 와서 일을 뒤집으려고 이래? 오빠가 네년을 근처 오피스텔에 박아 두고 눈에 안 띄게 적당히 즐기면 나도 이렇게 귀찮은 짓 안 해! 그래, 공평하니 좋다 이거야. 괜히 가책을 받을 것도 없고.”

……공평하다? 마음이 편하다?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집에 너를 끌고 와서 사람들 다 알도록 이 짓거릴 하는 건, 나한테 대놓고 엿 먹으라는 수작이잖아. 저번에는 치료 때문이라고 핑계도 대고, 내가 너한테 손댄 것도 있어서 한 번은 넘어가 준 거지만, 지금 이러는 건 나하고 결혼을 때려치우고 회사도 다 팽개치겠다는 말밖에 안 돼.”

우연은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그러면……?

그, 그래.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어.

미현이 격분한 것과 별개로, 심장이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한다.

그래. ……아저씨도, 저 언니랑 똑같이 하면 되는 거잖아. 잘하면, 둘 다 가질 수 있잖아. 손해 안 봐도 되잖아.

나, 나를 근처 오피스텔에, 놔두고, 그래, 나, 나도 그렇게 살면……?

물론 아저씨는 이런 방법을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정말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 보지 않았을까? 이 방법을 몰랐을 리는 없으니까. 다만 아저씨 성격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법이라 포기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하면?

갑자기 입술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 나는 소위 말하는 세컨드? 첩? 그런 여자가 되는 건가?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상하다. 처음엔 굉장히 좋은 방법인 것 같았는데, 아주 몹쓸 방법인 것도 같고, 공평하니 좋을 것 같으면서도, 공평하건 말건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치밀기도 했다.

하지만 이거 말고는 선택할 방법이 없으면?

아저씨와 헤어지는 것보다, 아저씨가 회사를 뺏기는 것보다…… 그래도 이 방법이 나은 건 사실 아닌가?

우연이 뒤죽박죽 엉켜 버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를 쓰자, 위에서 피시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마. 어차피 너는 결정할 권한 따위 없으니까.”

“……네?”

“넌 어차피 오빠 옆에 못 있어. 나가서, 오빠 눈에 안 띄게 죽은 듯 숨어 살아야 할 거야.”

미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죽을 때까지.”

* * *

“저, 전무님?”

최 실장은 옆 좌석에 앉은 이원을 부르다가 멈칫했다. 이원은 좌석 시트도 펴지 않은 채, 앉은 자세 그대로 자고 있었다.

회사 로비에서 실신한 우연을 안고 그대로 퇴근한 이원은 사흘 동안 회사에 나오지도 않고 집에 박혀 있다가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더니 식사도 거른 채 바로 숙면 모드다.

세상에, 불면증으로 죽을 고생을 하던 전무님이 이렇게 불편한 자리에서, 이렇게 달게 주무실 수도 있구나. 와이셔츠 깃 주변으로 얼핏얼핏 보이는 벌건 자국들을 보면, 사흘 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안 가는 바는 아니었지만, 홍연은 이원의 이런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음, 예, 말……씀하세요.”

이원은 잠결에서도 남에게 짜증을 내는 법이 없었다. 홍연은 모처럼 꿀잠에 빠진 상사를 깨운 자신이 미웠다.

“미현 양에게 끝까지 답장이 오지 않는데, 만약 공항에 내려서도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파트에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공항에서 바로 한국행 표를 다시 끊을까요?”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간다. 졸음에 겨운 것이 보였지만 그는 애써 눈꺼풀을 비비고 고개를 흔들었다.

“표는 안 끊으셔도 됩니다. 미현이 아파트에도 갈 필요 없어요.”

“그럼……?”

“미현이 말고 만날 사람이 있어요. 거래를 할 사람이.”

홍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만날 사람? 누구? 무슨 거래? 지금 파혼 문제 때문에 미현에게 가려는 게 아니었나?

홍연의 어리둥절한 반응을 느낀 이원이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웃는다.

“홍연 씨, 난…… 정우건설 사태 이후로 내내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뭘 말씀입니까.”

“누군가를 벼랑까지 몰아서 파멸시키는 것, 비열하게 뒤를 캐고, 악착같이 공격하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위협해서 굴복시키는 것. ……혹은, 나와 내 회사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파멸하는 것. ……전부 다.”

홍연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건설 사태는 이 사내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원은 기업 간, 혹인 개인 간의 힘겨루기에 결코 서툴지 않았고, 그것을 회피한 적도 없었지만, 사실 그런 상황에 대해 늘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언제 사라지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언제입니까?”

“더 큰 두려움이 생길 때 사라져요.”

홍연은 눈을 가만히 깜박거렸다. 이게 무슨 선문답 같은 말인가. 하지만 곰곰 생각하던 홍연은 잠시 후 눈을 크게 떴다. 알 것 같다. 더 큰 두려움. 그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어떤 것. 생각이 닿는 순간, 이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중요한 걸 잃고 나면, 다른 부차적인 것들을 소유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돼요.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았으면, 다른 것들을 내려놓고 그것부터 지키는 게 맞겠죠.”

홍연은 긴장하며 눈을 빙그르르 돌렸다. 이원은 눈을 감은 채 싱긋 웃고 있었다.

“좋은 경영자는 뭘 버려야 하는지 빠르게 결단을 잘하는 사람이라면서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파멸해도 좋다, 얼마든지 비열해져도 좋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야 제가 가진 걸 모조리 판돈으로 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

“……이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연의 등 뒤로 차가운 긴장감이 흘러내렸다. 이원에게 배수의 진이나 모 아니면 도, 방식의 올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평상시의 그는 리스크를 극도로 회피하는 경영자로 정평이 나 있었고, 안전망을 몇 겹씩 두르고 일을 추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그의 내면에서 승부사의 기질이 발동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그의 내면에서는 이미 새로운 스위치가 눌렸고,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했다. 폭풍 전야였다.

“뉴욕에서 어떤 분과 만나실 예정입니까.”

홍연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원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산타바바라 극장의 프로듀서, 모리스 첸입니다.”

* * *

“자 이쯤에서 본론을 말해야겠구나. 네 엄마 말이야.”

우연은 손바닥으로 두 눈을 마구 문지른 후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덜룩한 꼬락서니가 얼마나 흉할지 알지만,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엄마 외국 나가신다고 했는데, 무슨 일인데요?”

“전화기 좀 켜서 부재중 전화나 확인해 보지 그러니?”

오랫동안 켜지 않았던 전화기에는 수백 개의 부재중 전화 표시가 붙어 있었다. 옆에서 화면을 들여다본 미현이 피식 코웃음을 친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김현주. 부재중 전화 687통. 진형식 부재중 전화 584통.

우연은 엄마와 아빠를 특별한 호칭으로 저장했던 적이 없다. 애칭도 멸칭도 아닌 딱 이름 석 자. 이렇게 적어 두면 가족이 아니라 완전한 타인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웃긴다. 엄마 아빠는 아무리 밀어내도 남이 될 수 없다. 687, 584라는 숫자가 그것을 생생히 보여 주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어렴풋이 윤곽이 잡힌다.

“우리 엄마가 재판에서 이기도록 도와주고, 외국으로 나가게 도와주신 분이 당신인가요?”

“그래도 머리는 좀 돌아가는구나.”

“왜……?”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니?”

“이유도 모르고 고마워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는 엄마한테 받으셔야죠.”

“아, 그래. 그건 그렇구나.”

미현은 목을 뒤로 젖히고 시원하게 웃었다.

“그 부재중 전화가 언제 들어왔는지 확인이나 해 보지 그래?”

우연은 최종 날짜를 확인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인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은, 바로 30분 전까지 이어져 있었다.

“엄마…… 못 나갔어요?”

“응. 어딘가에 처박혀서 숨도 못 쉬고 숨어 있지.”

무언가를 예감한 듯, 다리가 와들와들 떨린다. 점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에게 변호사를 붙여서 이혼을 도와주고, 한국인이 전혀 없는 미국 시골 마을에 숙소까지 마련해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아…….”

“난 도와준 데 대한 합당한 대가를 미리 말했어. 난 네 아저씨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희생정신이 넘치는 인간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보통 사람이거든.”

“무슨 대가요?”

“뭘까. 그 대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생각이 멈춘다. 시간도 멈춘다. 이 순간이 극도로 맑고 단단한 유리에 갇힌 것 같다. 미현은 극적인 효과를 만들려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생긋 웃었다. 붉고 매끄러운 입술이 달싹거린다.

“오빠 눈앞에서 너를 치우는 것.”

천천히 눈만 깜박였다. 전혀 놀랍지 않은 걸 보니 아마 무의식은 그 조건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빠는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알면서도, 나처럼 그 길을 택하진 못해. 너를 세컨드로 두고 회사도 차지하는 대신, 너를 택하고 회사를 포기하겠지. 등신같이.”

맞다. 아저씨는 아마 그럴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던 한이원 아저씨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럼 내가 원하는 호텔 경영권도 영영 물 건너가는 거고. 난 그 꼴은 못 봐.”

“…….”

“그래서 네 엄마와 거래를 한 거야. 남편인지 개새끼인지, 거기서 벗어나게 해 줄 테니, 딸을 데리고 외국에 나가라, 연락 끊고 죽은 듯이 살아라. 오빠한테 몰래 첩질하라는 말은 죽어도 안 먹힐 테니, 이렇게 귀찮은 방법이라도 써야 할 거 아니겠니.”

너만 없으면 오빠는 얼마 안 가 정신 차리게 돼 있어. 생각보다 굉장히 계산 빠르고 손절 각도 잘 재는 사람이거든. 미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늬 엄마는 아주 고맙다고 난리가 났고. 만나면 길바닥에서 큰절도 하겠더라?”

당연하다. 엄마는 아빠에게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미끼를 거절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와 엄마가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감정, 공포심. 온 세상을 꽉 채우고 있는 저 거대하고 무거운 감정 앞에서,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공항에 데려가려고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네 엄마 혼자 나왔더라고. 네가 같이 가기 싫다고 했다면서.”

“저,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래. 그럴 것 같더라. 너를 치우는 조건으로 엄마를 덤으로 보내 주기로 한 건데, 엄마만 나오니 짜증이 나, 안 나? 대가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면 그게 아메바지 인간이야?”

미현은 그들의 황당한 정신세계를 마음껏 비웃었다. 어쩌면 일가족이 죄다 이 모양일까. 아비란 새끼는 열등감과 피해망상으로 머리가 돌았고, 어미란 년은 알코올에 뇌가 녹았고, 딸은 말 그대로 뇌가 맛이 갔다.

“어, 엄마는 그래서 지금 어디 있어요?”

“지금 김포 근처의 민박집에 죽은 듯이 숨어 있지. 하루 종일 너한테 전화만 해 대면서.”

제기랄. 그래서 이렇게 미친 듯이 전화를 해 댄 거구나.

“엄마는 지금 네 전화 기다리다 숨넘어가게 생겼어. 악귀에게 쫓기는 것보다 남편한테 들키는 걸 더 무서워해. 화장실 가는 거 말고는 방구석에서 나오지도 못해.”

“딸 팽개치고 혼자 튀려고 한 여자가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안 가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엄마를 위해서, 라는 협박은 우연에겐 먹히지 않았다. 미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어떻게 해. 네 엄마한테 들어간 돈하고 그동안 신경 썼던 것만큼 모조리 받아 내고 신경 꺼야지. 그담에는 네 아빠가 알아서 하겠지. 그러잖아도 네 아빠, 너랑 연락이 끊어지니까 반 돌아 버린 것 같더라.”

“그, 그걸 어떻게…….”

“사람 붙여 놨지. 오빠가 너한테 빠져서 미친 짓을 하는 동안, 내가 움직였어.”

“……으.”

“너도 조만간 아빠를 만나겠구나. 네 아빠가 쓰레기인 건 알지만, 사람 집요하게 스토킹하고 찾아다니는 능력은 기가 막히더라. 빨리 뜨지 않으면 꼬리를 밟히지 않겠니.”

엄마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아빠의 부재중전화 584라는 숫자는 몸서리가 쳐졌다. 대체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며칠 사이에 584번이나 전화를 해 댔을까. 엄마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분명 말했었는데.

“여기서 질문 하나. 아빠는 왜 너한테 하루에 100통 가까이 전화를 했을까? 엄마를 추적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왜……죠?”

“네 아빠가, 네가 쓴 탄원서 내용을 알게 됐어.”

눈앞이 하얗게 변한다. 맙소사. 이젠 진짜 끝장이다.

“엄벌에 처해 달라고 했다며? 대체 왜 그랬어? 그게 끝까지 숨겨질 줄 알았어? 그거 다 나중에 당사자 귀에 들어가는 거 몰랐니? 너는 매 맞는 마누라나 애새끼들이 왜 죽으나 사나 가해자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는지 알 거 아냐.”

확 눈물이 치밀었다.

안다. 아는데 그때는 잠시 정신이 나갔다. 아저씨의 말을 믿고 싶었다. 나와서 또 때리면 다시 감옥에 넣고, 또 처넣고, 또 처넣고. 그 달콤한 유혹을 믿고 싶었다.

난 아빠한테 그렇게 당해 놓고, 어떻게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을까.

참았던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저 여자 앞에서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는데, 의기양양하게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는데. 우연은 끅끅 소리를 필사적으로 삼켰다.

결론은 점점 한 가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새로 알게 되는 정보들은 내가 절대로 아저씨 곁에 남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나한테 닥치는 일들은 왜 늘 이 모양일까?

맞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은 아무리 좋은 것을 품어도 죄다 똥으로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그림 그리는 재능, 사람의 위선과 위악을 까발리는 재능, 천신만고 끝에 온 서림예대, 아저씨, 한이원, 부드럽게 혀에 휘감기는 달콤한 이름을 가진 나의 아저씨까지. 황금 덩어리, 로또 복권보다 더 귀한 그마저도 내 인생에 떨어지자 똥처럼 변해 내 속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미현의 혀 차는 소리가 길었다.

“지금 바로 엄마 있는 곳으로 가. 내일이라도 비행기 표 수배해 줄 테니까.”

“저, 여권이 없는데요…….”

“씨발, 지금까지 여권 하나 안 만들어 놓고 뭐 한 거야?”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알게 되자마자 인상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고운 입술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오니 안 어울려야 마땅한데, 우습게도 그것마저 잘 어울렸다. 저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말투와 모든 표정이 다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녀를 보니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겉돌고 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가야 한다. 이대로 갈 순 없다. 아저씨가 얼마나 놀랄까. 얼마나 기가 막히고 좌절할까. 지난번보다 더 지독한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저씨는 이걸 어떻게 감당할까. 나는 또 어떡해, 난 이제 아저씨 없이는 숨도 못 쉴 것 같은데.

우연은 머리를 쥐어 싸고 고개를 수그렸다. 왕왕대는 목소리들이 뒤엉켜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다.

그럼 아, 아저씨한테 한번이라도 말을 해 볼까? 아저씨도 저 언니랑 똑같이 살면 어때요. 나는 그럼 평생 결혼한 아저씨의 세컨드로 살아야 하는 거야? 그건 싫어! 왜? 영영 헤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싫어, 아냐, 모르겠어. 그럼 엄마는? 엄마는 이번에 아빠한테 잡히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내가 날 버린 엄마를 왜 신경 써야 해? 그렇다고 엄마를 아빠한테 평생 쫓기게 할 거야? 넌 아저씨를 파멸로 몰아넣게 될 거야. 기생충도 모자라 암 덩어리. 그래도, 어쨌든 같이 있는 게 좋지 않아? 싫어, 아니야, 아저씨가 그런 일을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그래도 혹시 알아? 아저씨는 너를 사랑하잖아.

……아저씨는 너를 사랑하잖아.

“오늘 당장 구청 가서 여권 만들어 놔. 허튼 생각 말고.”

서슬 퍼런 목소리가 생각을 탁 끊어 낸다. 우연은 후드득 몸을 털었다. 허리가 잘려 나간 목소리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사방은 무섭게 고요해졌다.

“여권 나오는 데 일주일도 안 걸려. 오빠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던가? 그 안으로 비행기 표 잡아 놓을 테니까, 사람 보내면 아무 소리 말고 차 타고 나와. 알았지?”

“……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아빠에 대한 공포를 이길 힘도 없고, 아저씨를 망하게 하면서까지 옆에서 버틸 염치도 없다. 아무리 상식이 없고 눈에 뵈는 게 없어도, 아저씨 옆에서 버티면 안 되는 상황인 건 잘 알겠다.

“저, 그, 그런데 언니, 아저씨 한 번만 더 보고 가면 안 돼요?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따악.

갑자기 한쪽 뺨에서 엄청난 소리가 나더니 몸이 붕, 떠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익숙한 타격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프다기보다 충격이 컸다. 우연은 뺨을 감싸 안고 바닥에서 비슬비슬 뒤로 물러앉았다. 미현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인사? 대갈통에 총이라도 맞았어? 나 좀 붙잡아 달라고 오빠 앞에서 시위하려고?”

“…….”

“비련의 연인 시늉 하면서 날 원망할 거면 여기서 집어치워도 돼. 나야말로 진짜 피해자고, 계약을 어긴 건 내가 아니니까.”

계약……이라.

혀끝으로 낯선 말을 슬쩍 감아올리는 순간 우연의 머릿속에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아, 이런. 우연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계약. 맞다. 아저씨하고 나 사이에도 남은 계약이 있다.

……그려 주어야 할 그림이 두 개나 더 있는데.

얼굴을 잔뜩 우그린 우연을 향해 미현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가져갈 짐 잘 챙겨 두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몰래 나오도록 해. 오빠 귀국하기 전에 올 거니까 딴생각 말고.”

“……네.”

우연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한껏 비굴해졌고, 미현은 전혀 흡족하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뱉었다.

“오빠 귀에 한마디라도 들어가면, 너도 약속을 깼다는 거로 알겠어.”

* * *

홍연은 눈을 멀거니 껌벅이며 맞은편에 앉은 상사의 맹렬한 식욕을 구경했다. 불면증 환자답지 않게 비행시간 내내 꿀잠을 자면서 식사를 내리 거르더니, 공항에 내리자마자 식당으로 직행해서 대형 스테이크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흡입하는 중이었다.

“아, 최 실장, 이걸 확인한다는 걸 잊었네요. 우연이 어머니 김현주 씨, 이혼 소송을 어디서 도왔는지 혹시 들은 게 있습니까? 우연이는 저나 우리 회사 쪽에서 도왔다고 알고 있는데요.”

“금시초문입니다, 전무님.”

“음, 혹시 정 관장? 정 관장이 법무팀에 요청을 한 걸까요? 보고받은 건 없는데…….”

이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했다.

“확인은 해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정 관장이 그럴 리가.”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피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원과 홍연이 생각하는 정 관장은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이자, 안전제일주의자였다. 집안이 어려운 예술계 학생들을 돌보는 장학관 관장답게 조심조심 몸을 사리는 태도가 아주 몸에 배었다. 지시받은 일은 철저하게, 바늘도 안 들어갈 만큼 빈틈없이, 가이드라인과 정관, 법규는 백만 볼트 고압선처럼 절대로 밟지 않는 오지랖 제로의 성격. 그런 그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우연 어머니의 이혼 소송을 도와준다는 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홍연이 노트북 화면에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정 관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합니다. 법원 판결문 조회를 해 보고 알려 드리겠다고 하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사이 이원은 종업원을 불러 다른 스테이크를 하나 더 주문했다. 홍연이 놀란 눈으로 멀뚱거리며 바라보는 동안, 이원은 새로 나온 요리와 사이드 메뉴까지 다 먹었다. 피클 한 조각까지 천하 진미를 먹는 것처럼, 눈을 감고 음미하면서. 그의 입가에 머무는 웃음이 낯설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홍연이 눈썹을 찌푸린 채 중얼거린다.

“혹시 전무님, 법무법인 영보라고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원은 잠시 갸웃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기억납니다. 서울고법에서 은퇴하신 차영보 판사님이 몇 해 전에 마포에 개업하신 사무실입니다. 박원주 이사님하고 막역한 사이인 듯하던데…….”

홍연의 눈이 둥그레지는 것이 보인다.

“김현주 씨 이혼 소송 대리한 곳이 법무법인 영보입니다.”

이원의 손에서 포크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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