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알렌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성적으로는 확인해야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알고 싶지 않다는, 그냥 무시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알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계에 손을 댈 만한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선대공, 킬리언 베네비토.
세상을 떠난 아비의 이름을 읊조리는 칼릭스의 얼굴은 무미건조했으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무슨 짓을 벌이신 겁니까.’
결국, 칼릭스는 몸을 일으켰다.
다름 아닌 결계였다. 아내를 지킬 대공성의 첫 번째 방패였다. 균열이 생겼다는 걸 알고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가장 가까운 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고풍스러운 벽지에 손바닥을 댔다.
잠시 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밀실이었다.
손을 댈 벽만 있다면 대공성의 어디에서든 밀실로 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 밀실에서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내의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었다.
결계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건 그 탓이었다. 결계의 코어가 바로 이곳, 베네비토의 혈족만이 여닫을 수 있는 밀실에 있었으니까.
칼릭스는 결계가 내뿜는 힘을 하나씩 짚어가며 느릿하게 방을 돌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손톱으로 가볍게 반대쪽 손바닥을 그었다.
마치 칼날이 벤 것 같은 깊은 상처가 났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몇 분이면 아물 터.
상처가 벌어지며 후드득,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야 베네비토의 피에 반응한 결계의 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잡한 설계도를 연상시키는 어지러운 선이 가득했다.
찬찬히 결계를 살피던 칼릭스의 눈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결계에 손상을 입히거나 방해하지 않게끔, 아주 절묘한 위치에 박힌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납작한 조각.
생소한 모양에 크기도 작았으나 칼릭스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대공이 그를 불러 일러준 적이 있었다.
“……마법 영상구.”
그는 가볍게 손을 저어 결계의 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곤 복잡한 눈빛으로 손바닥 위의 조각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불현듯 조각을 반으로 부러뜨렸다.
콰직, 소리와 함께 갈라진 조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 영상구는 일회용이었다. 기록된 장면을 단 한 번밖에 볼 수 없었다.
칼릭스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릅떴다. 그의 앞에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킬리언이 황제를 찾았다.
한달음에 알현실로 달려온 페르난데가 곧바로 그를 황제궁의 내밀한 곳으로 안내했다.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보았나, 대공?”
황제의 잿빛 눈에선 찌든 탐욕이 엿보였다. 함정을 파놓은 이의 눈빛이 잔혹하게 번들거렸다.
킬리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가 초조하게 덧붙였다.
“대공자의 상황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지?”
“……심각할 정도는 아닙니다.”
부디 피해가기를 바랐건만, 몇 년 전부터 칼릭스에게 광기가 관찰되었다.
격세유전자인 아들은 광기의 진행도 보통의 베네비토와는 달랐다. 발현 시기도 일렀고 정신을 잠식하는 속도도 지나치게 빨랐다. 용병으로 보낸 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공, 이제 그만 결단을 내리시게. 언제까지 하나뿐인 아들을 제국 밖에서 떠돌게 할 참인가?”
“…….”
“잘 생각해 보게. 성배의 힘은 무궁무진해. 성배만 있으면 대공자의 광기를 잠재울 약을 만들 수 있어.”
겉으로는 웃는 낯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페르난데는 이를 악물었다. 테이블 아래, 그의 주먹 쥔 손에 핏줄이 돋아 있었다.
황제는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어떻게 해서든 대공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러던 그의 머릿속에, 문득 대공이 죽은 아내의 묘를 간간이 찾는다던 보고가 생각났다.
‘그 여자가 있었어……!’
도박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페르난데의 제위 계승에 힘을 보태기까지 했던 킬리언이었다.
“대공에게 이 이야기까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죽은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여자의 묘를 찾는다니, 어쩌면 지금도 미련을 못 버린 걸 수도 있었다.
“사실 성배로 광기를 제어하는 약을 만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야.”
페르난데가 킬리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누구도 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도 있지.”
“……!”
내내 차분하기만 하던 킬리언의 눈이 동요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대공의 반응에 페르난데가 소리 없이 입매를 비틀었다.
혹시나 했던 도박이 제대로 먹혀든 거였다.
도주하는 대공비 134화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십 팔 년이 된 날이었다. 킬리언은 언제나처럼 아내의 무덤을 찾았다.
활짝 핀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석관 위에 놓였다. 그는 맨손으로 관과 비석에 떨어진 잔 나뭇가지와 이파리 따위를 쓸어냈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아내의 묘를 매만진 그의 손끝이 향한 곳은 그녀의 이름이 음각된 비석이었다.
“……힐데.”
오래전 세상을 떠난 이의 이름을 읊조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떠난 뒤 지금까지 한시도 뇌리에서 잊어본 적 없는, 가슴에 새겨지듯 박힌 이름.
힐데.
생을 다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여자였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저 제 곁에 있어만 주기를 바랐다.
베네비토의 혈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를 알면서도, 자신만은 예외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 오만이 결국 그녀를 잃게 만들었다.
그 이후의 삶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뒤를 따르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칼릭스가 올해 성년이 되었어.”
비겁한 변명이었다. 그는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남긴 하나뿐인 아들이기에 정을 붙여야 한다 여기면서도, 막상 마주하면 속이 뒤집혔다. 목을 조르며 당장 힐데를 돌려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차라리 제가 아닌 아내를 닮았다면 좋았으련만.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이 아니라, 아내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숲의 녹음 같은 초록빛 눈이었다면. 어쩌면 애정이라는 것도 줄 수 있었을는지 모르는데.
그러나 베네비토의 피는 지독하게 강했다. 아내의 흔적을 죄 지워버릴 만큼.
애석하게도 아들은 날이 갈수록 그를 빼닮듯 자라났다.
악화일로에 치달은 부자 사이는 이제 남보다도 못했다. 후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마땅히 돌이킬 방도도 없었다.
“실은, 힐데.”
한동안 비석의 이름을 어루만지던 그가 마침내 그녀를 찾아온 본론을 꺼냈다.
“당신을 되살릴 방법을 찾았어.”
짧은 문장을 내뱉은 남자가 긴 숨을 내뱉었다. 그간의 지리한 그리움과 고독이 묻어나는 숨이었다.
“알아. 금지된 술법이라더군.”
생과 사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 이는 신을 향한 반역이었다.
그러나 킬리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십팔 년의 끔찍한 그리움이 그를 산 채로 좀먹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안쪽은 죄 갉아 먹혀 텅 빈, 썩은 나무 둥치와도 같았다.
“……당신의 원망은 나중에 받을게. 일단 당신이 내게 돌아오면, 그때…….’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떠한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꺼멓게 죽어 있던 킬리언의 눈에 비로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 *
칼릭스는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제 선대공은 무언가가 담긴 상자를 들고 황제 앞에 섰다. 안에는 낡은 흙 그릇이 담겨 있었다. 성배였다.
마침내 바라던 물건을 손에 쥔 페르난데의 눈이 희열로 가득 찼다.
칼릭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나. 눈에 빤히 보이지 않나. 모든 게 덫이라는 걸.
그러나 장면 속의 선대공은 조금의 의심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거면 되는 겁니까. 정말 힐데를 살릴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네, 대공. 내 약속대로 대공비를 되살려줌세.”
황제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자 특유의 비릿한 미소였다. 그러나 킬리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고 바지런히 날개를 놀리는 나비처럼.
“따라오시게. 내 미리 다 준비해 두었으니.”
킬리언이 잠깐 멈칫하자 페르난데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대공도 대공비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을 게 아닌가.”
“오늘 바로 가능한 겁니까?”
“물론일세. 내가 준비해 두었다지 않아.”
킬리언이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더라면 페르난데의 속임수를 간파하는 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켜켜이 쌓인 그리움이 벽돌처럼 굳어지는 동안, 몸도 마음도 조금씩 병들어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함정에 걸려들 만큼.
“이쪽일세.”
황제의 걸음을 따라 킬리언이 움직였다. 두 사람은 잘 꾸며진 정원을 지나 황궁의 외진 구역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예배당이 보였다.
그렇게 마침내 다다른 곳은 예배당의 지하였다. 지하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벽의 횃불만이 싸늘한 공간을 비출 뿐이었다.
“저 안쪽 벽을 밀면 방이 하나 더 있다네.”
미심쩍기 그지없는 황제의 말에도, 킬리언은 순순히 따랐다. 그의 발걸음이 지하실 가장 안쪽 벽 앞에서 멈추었다.
지그시 손바닥으로 벽을 밀어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문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킬리언은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등과 배에 따끔한 감각이 퍼졌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자, 몸을 꿰뚫고 나온 길고 두꺼운 날붙이가 보였다.
손바닥만 한 두께의 것이 몸을 관통했는데도, 기이하게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성배는 잘 쓰겠네, 대공.”
킬리언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땅에 닿았다. 바닥에 손을 짚으며 힘겹게 버텨내려 했으나 이내 무너지고 말았다.
숨이 느리게 잦아들며 서서히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힐데.’
평생을 갈구했던 이름을 마지막으로 입에 담은 사내의 눈에서 마침내, 생명의 빛이 꺼졌다. 그리움으로 점철됐던 삶의 끝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난데가 짤막이 덧붙였다.
“물론, 자네의 심장도.”
잠시 후, 아직도 팔딱이는 심장이 성배에 담겼다.
흡족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르난데가 다른 쪽 손에 똑같은 모양의 심장을 하나 더 만들어냈다.
가짜 심장이 킬리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분명 숨이 끊어졌던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눈이 뜨이고 목을 가누더니 몸을 일으켰다.
킬리언의 죽음을 며칠간 감추어줄 꼭두각시 인형이 만들어진 거였다.
“일주일 정도 버텨라. 더 빠르면 의심받을 테고 더 늦어졌다간 실수할 수 있으니.”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인형을 보며 페르난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텅 빈 지하 공간이 그의 웃음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정정하기만 했던 선대공의 급사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칼릭스의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섰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돋아났다. 단단한 팔뚝에 솟아오른 근육이 푸들거렸다.
그가 용병으로 전쟁터를 전전하는 동안 선대공에게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였다.
칼릭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버지의 심장이 담긴 성배를 노려볼 때였다.
킬리언의 소매에서 무언가가 반짝 빛을 내더니 칼릭스가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손톱만 한 조각. 마법 영상구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조각을 따라 몸을 돌렸다. 자연히 지하실 문을 향하게 된 그가, 문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황녀?’
황후의 무남독녀 외동딸, 베로니카 황녀.
그녀가 문 뒤에 숨어 벌벌 떨며 그 장면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다.
22. 기적
“왜 이렇게 늦지…….”
시무룩해진 아셀라가 소파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너무 심각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셀라가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침실 문이 열리며 내내 보고 싶었던 이가 들어왔다.
“칼릭스!”
아셀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칼릭스에게 총총 걸어갔다. 그가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을 너무 기다리게 했군.”
“아니에요. 이야기는 잘 나눴어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그녀를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낌새에 아셀라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칼릭스, 무슨 일이에요?”
나란히 앉은 그녀가 몸을 틀어 칼릭스의 뺨을 쓸며 말을 걸었다. 표정을 읽기 어려운 남편이었지만, 아까보다 훨씬 어두운 얼굴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칼릭스가 침묵을 고수하는 동안, 아셀라는 잠자코 그를 기다려주었다.
그가 뺨을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버지의 죽음을 봤어.”
* * *
칼릭스가 영상구의 기록을 들려주는 동안, 아셀라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특히 선대공이 살해된 대목에 이르자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황제가 성배를 갈취한 거였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선대공을 속여 성배를 빼앗고 그를 살해한 거였다. 게다가…….
“페르난데가 이용한다는 힘이, 아버지의 것이었어.”
칼릭스는 켈튼 산의 시신에서 느꼈던 익숙한 기운의 주인을 마침내 찾았다.
‘사악한 주술입니다만, 강제로 능력을 추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알렌의 설명이 떠올랐다.
아무리 변형되었다 하나 아버지의 기운을 몰라볼 수가 있나.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침실로 돌아오기 전에 마음을 갈무리했건만, 다시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어리석게도 전혀 눈치채질 못했어.”
“아버지를 본 게 거의 십 년 전의 일이잖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다 해도.”
아셀라가 팔을 한껏 뻗어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토닥토닥, 제 등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손놀림에 놀랍게도 복잡하고 어지럽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진실을 알았는데도 속이 편하질 않군.”
칼릭스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번쩍 들어 제 다리 위에 앉혔다.
그에게 옆으로 안긴 아셀라는 손끝을 꼼지락댔다.
“이런 말 하긴 조심스럽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대공께서 당신을 걱정하셨다고 생각해요.”
“어째서?”
“하나뿐인 아들이잖아요. 소중했던 아내가 남긴…….”
칼릭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선대공이 그에게 지녔던 감정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것이었다.
비슷한 단어를 굳이 고른다면 애증 정도일까.
“하나 그 소중했던 아내를 잃게 만든 자식이기도 하지.”
“그건 아니에요, 칼릭스.”
그녀가 곧바로 반박했다. 아내의 단호한 반응에 칼릭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었죠?”
아셀라가 그의 한쪽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었다. 이 손을 영원히 놓고 싶지 않다면, 그건 욕심인 걸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버렸거든…….’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선대공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동시에 잔혹한 계약의 대가가 다시금 떠올랐다.
대공을 사랑하게 되면 목숨을 잃고 마는 대공비의 운명이.
“선대공비께서는 당신 덕분에 돌아가시지 않았던 거예요.”
“아셀라, 지금 무슨 소리를…….”
“선대공 전하를 마음에 품으셨는데도 버티신 건, 당신을 가졌기 때문이라고요.”
당혹한 칼릭스가 자유로운 손으로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내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오해한 것 같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치기만을 원했어. 평생 남편을 증오하며 벗어나려 했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거야 당연히-”
엉겁결에 말을 내뱉으려던 칼릭스가 입을 다물었다.
계약의 진짜 대가. 베네비토의 피를 타고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저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바깥으로 꺼내는 순간 그대로 말이 씨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혹시나 하고 품은 일말의 기대가 산산이 조각나 버릴까 봐.
이 막연한 불안이 기어코 현실이 될 것 같은 잔인한 예감에.
아셀라는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냉혹한 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칼릭스.”
그의 반응을 차분히 살피던 아셀라가 물음을 던졌다.
“마족과의 계약에, 제게 말해주지 않은 다른 대가가 있는 거죠?”
도주하는 대공비 135화
칼릭스는 대답을 기다리는 아내의 시선에 곤혹스러워하며 답했다.
“당신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제가 알아선 안 되는 거예요?”
“당신 탓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거지.”
아셀라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칼릭스의 굳게 다물린 입술은 쉬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럼 제 이야기 먼저 할게요.”
아셀라는 칼릭스의 가슴에 옆머리를 기댄 채, 그러쥔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녀 역시 쉽게 꺼낼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실은…… 저도 알고 있어요.”
칼릭스의 몸이 굳었다. 크게 뜨인 적안이 충격으로 일렁였다.
안다고? 어떻게? 그를 제외한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당혹감이 쏟아지듯 밀려들었다.
이내 그는 힐데의 묘 앞에서 눈물을 쏟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그녀를 위로했었다.
설마, 거기서 또 무언가를 본 건가.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그러나 입을 여는 순간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신은 내게 절대 마음을 주지 않을 거라는 말을. 나는 평생 그런 당신을 옭아매며 붙잡아 두려 할 거란 말을.
생각만으로도 비참해졌다. 그러나 더 끔찍한 감정은, 그녀가 저를 떠날 거란 두려움이었다.
그의 시선이 아내의 옆얼굴로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셀라.”
부르는 음성에 그녀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모로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자세가 되자,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칼릭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두 팔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곤 희고 여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마른 등을 더듬는 손길이 다급했다. 물속에서 한 번의 숨을 찾듯 절박한 움직임이었다.
안 돼.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 당신이 내게서 도망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붙잡아 올 거야. 그러니 당신이 포기해.
아니, 아니다.
어쩌면 아내가 저를 떠보려는 건지도 몰랐다. 그가 말해주지 않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알려 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칼릭스가 그 말도 안 되는 가정에 생각을 내맡길 때였다.
“만일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저는 죽게 되나요?”
순간, 칼릭스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뭐?”
“계약의 대가는…… 대공비가 대공을 사랑하게 되면 죽는 거지요?”
거대한 충격이 그를 덮쳤다. 낙하하는 바윗돌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당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선대공비 전하의 무덤에서, 그분을 뵀어요.”
아셀라는 힐데의 무덤 앞에서 자신이 본 장면을 털어놓았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선대공비께서 분명 배 속의 아기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선대공 전하를 사랑하게 되어서 곁에 있을 수 없다고요. 네 덕분에 그나마 버티는 거라고요.”
이야기가 끝난 이후로도 그는 한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래서…… 여쭤본 거였어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무겁고 어두운 절망이 칼릭스의 온몸을 내리눌렀다. 누군가가 다리를 붙잡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늪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실낱같은 희망이 삽시간에 불에 타 사라지고, 새카만 잿가루만이 남았다.
혹시나 하고 바랐던 기적은 또 다른 덫이었다.
계약은 어떤 먹잇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촘촘한 그물을 쳐두고, 언젠가 걸려들 베네비토의 혈족을 기다리며 웃고 있었다.
칼릭스의 눈가가 떨렸다.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분노가 끓어오르면서도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도망칠 수 없는 덫이었다.
그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그동안…… 계약의 대가를 반절만 알고 있었군.”
피하고 싶은 진실을 기어이 제 입으로 밝혀야만 하는 사내의 목소리엔 짙은 절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성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내가 알고 있던 대가는.”
마지막 문장을 토해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대공비는 남편을 결코 사랑할 수 없다는 거였어.”
일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방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적막해졌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는 격렬한 감정만큼, 방을 둘러싼 공기도 불안하게 뒤흔들렸다.
그 숨 막히는 정적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아셀라였다.
“자세히…… 설명해 주실래요?”
목소리가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상처받은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누군가가 그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칼릭스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떼었다.
“역대 대공들은 모두 밀실을 열었어. 거기에 대공비를 가뒀고.”
검은 속눈썹이 지그시 내리깔렸다. 그는 지금껏 역대 대공들이 피하지 못했던 계약의 대가를 차분히 설명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떤 거였는지는 모르겠어. 단순한 소유욕이나 독점욕, 혹은 도망치려는 아내에 대한 분노였을 수도 있지. 다만 확실한 건…….”
아내의 마음을 원했다. 평생 받을 수 없을 애정을 바라며 신기루 속에서 헤맸다.
“그 증오를 고스란히 받아내면서도 놓아주려 하지 않았어.”
“…….”
“파국의 이유였지.”
기어이 말하고야 말았다. 칼릭스는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뭉근하게 뜨끈해지는 눈가를 감출 길이 없어서였다.
운명을 알면서도 그녀가 자꾸만 욕심이 나서. 뻔히 보이는 결말을 알면서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서.
어쩌면 자신만은 파국을 비껴갈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셀라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눈이 시큰거리고 코가 알싸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짓이길 정도로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너무도 얄궂은 운명. 끝이 정해져 있는 미래라는 건 이토록이나 고통스러운 거였다.
“그래서…… 제게 자꾸 물어보셨던 거로군요.”
아셀라가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끝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지나 칼날처럼 뻗은 눈썹에 가 닿았다. 일직선의 곧은 눈썹을 천천히 쓸고는 감긴 눈꺼풀을 슬쩍 건드리자, 그가 눈을 스르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