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71)
  • “일시적인 보호로는 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어. 페르난데의 눈을 피해 여기로 데려와야 했지.”

    “일단 주술을 풀어야 하니까요.”

    유디트가 덧붙였다. 아셀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그를 향해 간신히 입술을 뗐다.

    “언제 이 일이 다 일어난 거예요?”

    “오늘.”

    “하지만 파티하는 줄곧 함께 계셨잖아요. 그럼…… 제가 메리엘의 방에 있는 동안에요?”

    “그래. 준비가 오래 걸렸을 뿐, 실행하는 건 잠깐이면 됐으니까.”

    아셀라의 입이 벌어졌다.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잠시 뒤 그녀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깊은 한숨이 흘렀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네요.”

    내색하지 않았으나 목소리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아셀라.”

    아내의 달라진 목소리를 알아차린 칼릭스가 얼른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동생의 생일 파티 내내 밝던 얼굴이 놀라우리만치 굳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저었으나 입술을 꾹 깨무는 게 보였다. 그건 아내가 눈물이 나올 때마다 참으려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젠장.’

    칼릭스는 단단히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잠시만 실례하지.”

    그가 다급히 그녀를 이끌어 테라스로 향했다. 순순히 남편의 손을 잡고 나온 아셀라가 테라스 문이 닫히자마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그새 그녀의 눈시울이 발개져 있었다. 칼릭스는 가슴 한구석에서 몰려드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당신이 걱정할까 봐 그랬어.”

    제가 생각해도 밋밋하기 짝이 없는 핑계였다. 그는 변명에는 영 소질이 없는 사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무소불위의 군주였고 드넓은 공국의 주인이었다. 해명이나 변명 따윈 그의 것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중요한 일인데 알려주셨어야죠.”

    아셀라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연신 눈을 깜박거리며 빠르게 물기를 지워내는 아내의 모습에 칼릭스는 난처해지고야 말았다.

    “아셀라.”

    달래듯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으나 그가 앞에 서기 무섭게 다시 그녀가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너무해요.”

    기어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달래줄 수 있나.

    그러나 고민하는 잠깐 사이에도 흐느낌은 커졌고, 칼릭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얼른 아내를 품에 껴안았다.

    그녀는 잠시 반항하듯 몸을 뒤틀었다. 그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붙이며 팔을 단단히 감았다. 이내 바르작거림이 멎었다.

    그러나 고개를 떨군 채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들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부드러이 한쪽 뺨을 감싸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내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아셀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애타게 아내의 움직임만을 기다리던 칼릭스가 재빨리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화났어?”

    “아니요.”

    “그럼?”

    “속상하고 서운해요.”

    아셀라가 솔직하게 마음을 밝혔다.

    “전하가 절 못 믿는 것 같아서요.”

    “아니야.”

    칼릭스가 재빨리 부인했다. 그녀가 다시 저를 전하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간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오죽 마음이 상했으면.

    아내가 예쁘게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제 이름을 부를 때의 설렘을 알고 있는 사내에게, 지금 상황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제가 방해된다고 여기신 거라면…….”

    “그럴 리가 없잖아.”

    답지 않게 구구절절한 변명이 튀어나왔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동생 생일이니 걱정 없이 마음껏 즐겁게 지내길 바랐던 것뿐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다행히 그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시무룩하다 못해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정말…… 이에요?”

    “당연하지. 내게 당신 말고 중요한 사람이 있을 거 같아?”

    얼떨결에 던진 말이었으나 진심이었다. 칼릭스에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어쩌면 그 자신보다도 더.

    아셀라가 당황한 듯 두 눈을 깜박거리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랑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무엇을?”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 믿어주시겠다고요.”

    “믿을게.”

    “그렇게 건성으로 말고요.”

    아셀라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 모습에 그는 하마터면 상황도 잊고 그녀에게 입을 맞출 뻔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귀여울 수가 있나. 살짝 찡그린 얼굴에 몸을 흔드는 모양새마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제대로 약속해 줘요, 네?”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묘하게 애교 섞인 목소리는 또 어떻고. 칼릭스가 표정을 숨기려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제가 전에 알려줬잖아요. 기억 안 나요?”

    “음…….”

    그의 좋은 기억력은 얼마 전의 일을 빠르게 떠올려냈다. 약지에 고리를 걸며 웃던 아내의 얼굴과 함께.

    그는 분명히 이렇게 요구했었다.

    ‘손가락 걸고 약속해줘.’

    아니나 다를까, 아셀라의 눈이 반짝이더니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말이 들려왔다.

    “손가락 걸고 맹세해요.”

    조금 전까지의 우울함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어느새 밝아진 얼굴이었다.

    “하나부터 다섯까지 제대로 세서요.”

    준 대로 그대로 되돌려받은 셈이었다. 이렇게 함정을 파놓았을 줄이야.

    아내에게 제대로 당한 칼릭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132화

    “네? 어서요.”

    달콤한 함정이었다. 알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아내의 다디단 덫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보았다면 비웃었을 행동.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그래.”

    칼릭스가 그녀의 두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아셀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건 알려드린 것과 다른데요?”

    “하나만 거는 것보다 열 개가 더 단단할 것 같지 않아?”

    “그런가…….”

    중얼거리던 그녀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읊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믿겠다고 맹세해.”

    약속을 마친 칼릭스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데도 싫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없고 우스우면서도, 그녀에게라면 몇 번이고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음을 삼킨 그가 그렇게 깍지낀 손을 풀려 할 때였다.

    “잠시만요.”

    아셀라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고는 대상만 달라진 똑같은 맹세를 읊었다.

    “저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인 당신을 믿을게요.”

    칼릭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셀라가 그제야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며 싱긋 웃었다.

    “놀랐어요?”

    “……조금.”

    “천하의 대공 전하께서 고작 이런 일로 놀라시는 거예요?”

    그녀의 놀리는듯한 말에도 그는 대꾸하지 못했다.

    이렇게 가슴 뭉클할 수가 있나.

    그만큼 아내의 맹세가 그에게 준 의미가 컸다. 어떤 상황에서도 저를 믿는다는 말이 가슴속에 거센 파문을 일으켰다. 동시에 묵직한 책임감이 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세상 어떤 위협으로부터, 심지어 자신에게서조차 그녀를 지키겠다고.

    간밤에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했던 맹세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 내게 할 말이 있다 하지 않았었나?”

    “아, 그렇긴 한데…….”

    아셀라가 안쪽을 턱짓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따가 이야기해 드릴게요.”

    “언제?”

    “밤에 우리 둘만 있을 때요.”

    둘이서, 그것도 밤이라.

    이 여자가 또 순진하게 위험한 소리를 한다.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끌어 올려지는 입꼬리를 꾹꾹 내리눌렀다. 사실 그는 아셀라의 눈을 피해 메리엘로부터 문제의 ‘그’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귀띔받았다.

    ‘조카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덕분에 그는 밤이 오기만을 벼르고 있었다. 모른 척하며 시치미를 뚝 뗀 아내에게 뜨겁고 아찔한 대가를 치르게 할 속셈이었다.

    “칼릭스, 그만 들어가 볼까요?”

    그제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곱게 접어 웃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기 토끼 같은 표정이었다.

    답지 않게 양심에 찔린 칼릭스가 민망함에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칼릭스, 감기라도 걸린 건 아니죠?”

    푸욱, 다시 한번 커다란 양심 화살이 그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순수한 걱정이 담긴 맑은 눈이 저를 향했다. 칼릭스는 황급히 표정을 감추며 태연한 척 애써야만 했다.

    “당신 남편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고.”

    “그럼 다행이고요.”

    밝게 답한 그녀가 그와 깍지낀 반대쪽 손으로 테라스 문고리를 잡았다.

    운 좋게 수습은 했는데.

    칼릭스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오늘 밤엔 나쁜 짓은 안 될 모양이었다.

    * * *

    아셀라가 조심스레 신관들을 살피며 물었다.

    “이분들의 몸에서 흑주술을 찾아 파훼하면 되는 거죠?”

    “맞아요. 주술이 깨진다면 황제가 예언 신관들만 골라서 흑주술을 건 까닭을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사실 대강 짐작은 하고 있지만…….”

    “신탁.”

    여신의 전언을 듣는 그들의 능력을 생각하면 무언가 예언이 내려진 게 틀림없었다.

    “이들이 깨어나면 신탁의 내용을 들을 수 있겠군요.”

    “어쩌면 황제가 벌이는 일과 관련한 다른 정보도 캐낼 수 있을지 모르고요.”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관들의 머리맡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가늠하던 그녀가 첫 번째 신관의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그러자 신관의 심장에서 검은 연기가 몽글몽글 샘솟았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나란히 누운 신관들의 이마에 차례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윽고 방 천장은 다섯 명의 신관에게서 뽑혀 나온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아셀라는 일부러 주술의 파편을 소멸시키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러다 신관의 몸에서 완전히 주술이 뽑히자, 연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장을 새까맣게 뒤덮었던 연기가 꾹꾹 눌러 뭉쳐지듯 모이더니, 잠시 뒤 그녀의 손엔 새카맣게 빛나는 구슬이 놓였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매끈한 표면이 내뿜는 빛이 섬뜩했다.

    아셀라가 이를 알렌에게 건넸다.

    “황제가 단지 예언의 입막음만을 위해 흑주술을 사용하진 않았을 거예요. 혹시 다른 흔적은 없는지 알아봐 주세요.”

    “조사해 보겠습니다.”

    알렌이 공손히 구슬을 받아 들며 답했다. 그는 저번의 말실수 이후 그녀에게 더욱 깍듯해져 있었다.

    “그럼…….”

    아셀라의 눈짓에 이번에는 로샨이 움직였다. 수면 마법을 해제하는 영창이 방에 울려 퍼졌다.

    정신이 돌아온 신관들은 금세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간 당신들은 흑주술에 속박당해 있었어요.”

    유디트의 말에 한 신관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술 때문에 말하지 못했지만 저희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니, 어떻게요?”

    유디트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황제가 주술을 인지하지 못하게 해놓았을 텐데요.”

    “원래는 몰랐습니다만…….”

    신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언제부턴가 어떤 약을 먹기 시작했거든요.”

    “그 이후부터 몸에 새겨진 흑주술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한번 물꼬가 트이자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이 아는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신관들의 이야기가 끝난 뒤, 칼릭스는 라이젠을 불렀다.

    “손님 방으로 안내해라. 방 앞과 복도를 비롯해 모든 동선에 호위를 배치하도록.”

    “예, 전하.”

    신관들은 감사를 표하며 몸을 일으켰다.

    한 명씩 집무실을 빠져나가던 중, 마지막 신관이 문을 나서는 대신 아셀라에게로 다가왔다.

    “신관님, 무슨 일이시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머리가 희게 센 노년의 신관이 맑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여신의 축복이 항상 비전하와 함께하시기를.”

    “고마워요.”

    아셀라가 미소와 함께 화답했다. 그러자 신관이 말을 덧붙였다.

    “사실, 이 늙은이는 비전하께서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네?”

    “전부 잘 되실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아셀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신관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는 방을 나섰다.

    아셀라가 얼떨떨해하다가 도로 자리에 앉자 유디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양반이 원래 실없는 소리를 자주 해요. 제가 어릴 때도 어찌나 쓸데없는 헛소리를 하던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셀라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의 대화로 가라앉아 있던 방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칼릭스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황제가 처음엔 신탁 때문에 저와 메리엘을 죽이지 못한 거였군요.”

    “하나 샤르투스의 이능이 두려워 어떻게든 각성을 막으려 흑주술을 걸었지.”

    황제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신탁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모두 짧지만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신의 힘을 지닐 존재의 알림. 그리고 샤르투스의 핏줄을 끊지 말라는 경고.

    유디트가 이어서 말했다.

    “샤르투스의 대가 끊기면 하르메니아의 핏줄도 멸해질 거란 신탁이었으니 황제도 고민했을 거예요. 그러다 두 사람 다 이능을 각성하자 생각이 바뀌었겠죠.”

    잠시 생각하던 아셀라가 떠오르는 의문을 꺼냈다.

    “그런데 왜 황제는 신탁에서 말한 존재가 샤르투스라고 확신한 걸까요?”

    “신의 힘에 대한 기록을 본 거겠지요.”

    잠자코 있던 로샨이 입을 열었다.

    “그런 기록이 있어요?”

    “네. 신전 기밀 서고의 장서에요. 어떻게 그 기록을 찾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록에 의하면 초대 샤르투스 후작이 잠깐이지만 신의 힘을 가졌었다고 해요.”

    로샨의 설명에 아셀라의 머릿속으로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그래서 황제가 처음에 어머니를 노린 거였군요. 어머니의 이능 중 하나가 예지였으니까.”

    초대 샤르투스 후작의 이능이 예지였다. 그리고 이후로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예지의 이능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아델의 대에 이르러, 그녀가 두 번째 예지의 이능자로 각성했다.

    유디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비며 말했다.

    “맞아요. 초대 샤르투스 후작과 같은 이능을 지녔으니 아델 님이 예언의 존재일 거라고 판단하고 표적으로 삼은 거예요.”

    “하지만 아까 신관님의 말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도 신탁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고 했어요. 그럼…….”

    로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착각한 거지요. 신탁에서 말한 존재가 아델 님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셀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와 메리엘 중 신탁의 이능자가 누구인지 모르니 황제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겠군요.”

    “네. 최소한 한 명은 샤르투스의 핏줄이 끊기지 않도록 살려두어야 했을 테니까요.”

    아셀라는 착잡해졌다. 그토록 알고자 했던 진실 하나가 드러났는데도 마음이 갑갑하기만 했다. 어머니의 유언이 머릿속을 뎅뎅 울렸다.

    ‘꼭 기억하거라. 메리엘이 살아야 너도 살아.’

    ‘둘이서 꼭 살아남겠다고 약속해 주렴…….’

    어쩌면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 미래를 전부 알았을는지도 몰랐다. 비록 힘이 약해졌다지만 예지의 이능은 여전히 유효했을 테니까.

    “아셀라.”

    칼릭스가 그녀의 주먹 쥔 손에 제 커다란 손을 가만히 겹쳐 올려 감쌌다.

    예기치 못한 접촉에 퍼뜩 놀란 아셀라가 그를 쳐다보자, 칼릭스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으로 가득하던 몸이 풀렸다.

    그녀가 안정을 되찾자 칼릭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데, 신의 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뭐지?”

    “미지의 이능이라는 것밖에는 알지 못해. 아까 말한 내용이 기록된 전부거든.”

    유디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아셀라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비전하의 이능이 뭔지 알 수 없는 걸 보면…… 신의 힘은 비전하께 발현될 가능성이 커요.”

    “그런가요?”

    “물론 반대일 수도 있어요. 록트린 영애가 마법의 이능을 갖고 있지만 아델 님처럼 두 개 이상의 이능을 각성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말해, 말아…….”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고민이 묻어났다.

    도주하는 대공비 133화

    “성녀님, 뭔지 알려주시겠어요?”

    “이건 그냥 추측이라서요.”

    “괜찮으니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유디트가 슬쩍 로샨을 향해 눈을 굴렸다. 스승의 끄덕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답했다.

    “록트린 영애의 이능 각성이 비전하께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어요.”

    “제 각성이 메리엘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씀이세요?”

    “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어디까지나 추측이라는 걸 염두 하시고 들어주세요.”

    유디트가 콧잔등을 슬쩍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첫째로, 한 세대에 한 명의 여아만 태어나던 샤르투스에 두 명의 딸이 태어났다는 이변이 생겼어요. 이능의 그릇이 둘이란 의미죠. 둘째, 영애의 각성이 끝나자마자 비전하의 각성이 시작되며 흑주술이 파괴되었어요. 우연이라기엔 시기가 너무 딱 맞아요. 그리고 세 번째는-”

    “어머니의 유언이로군요.”

    “네, 맞아요. 아델 님이 허투루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메리엘의 생존이 곧 그녀의 생존과 직결된다던 어머니의 유언.

    “어쩌면 두 이능의 그릇은 처음부터 연결되어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어머니께서…… 이 미래까지 내다 보셨던 걸까요?”

    “신중하게 판단해야겠지만, 전 아델 님이 예지로 알고 계셨을 거라 생각해요.”

    유디트의 말을 끝으로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아셀라가 입술을 뗐다.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일단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생각하기로 해요.”

    칼릭스가 그녀를 도와 자연스레 화제를 넘겼다.

    “황제가 신관에게 먹였다는 약의 정체, 짐작될 만한 건 없나?”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면, 신관들의 증언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 모두 정체불명의 약을 먹었다. 약을 먹는 동안은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저절로 몸이 움직이며 약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먹은 직후엔 엄청난 고통이 밀려듭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고통이 잠잠해지고 나면 몸에 활력이 돌아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몸에 쌓여가는 게 느껴지지요. 하지만 막상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품에서 하나씩 약통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다섯 개의 생김새가 똑같았다.

    “일종의 자양 강장 효과가 있는 약인 듯한데, 황제가 그런 좋은 일을 할 리는 없고. 알렌, 뭐 찾아낸 거 있어?”

    유디트의 물음에 알렌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아셀라가 건네준 검은 구슬과 신관들이 먹었다던 약을 유심히 관찰 중이었다.

    “아직은요. 하지만 조사해 보면 뭔가가 나올 듯합니다.”

    “정말이야?”

    성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렌이 이리 말할 때는 꽤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예. 두 분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켈튼산 마수가 보인 이상행동의 까닭도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지금껏 밝혀진 페르난데의 행보엔 모두 이유가 있었어.”

    칼릭스의 대답에 유디트가 두 손을 소리 나게 맞부딪혔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한 가지네.”

    네 쌍의 눈이 동시에 저를 향하자 유디트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렇잖아. 황제가 이 모든 일을 계획한 데엔 목적이 있었을 거 아냐.”

    “그렇네요.”

    아셀라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평소보다도 한층 진지해진 얼굴에 푸른 눈이 심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한껏 고요해진 집무실, 그녀가 차례로 네 사람과 시선을 맞추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황제의 최종 목표, 그걸 알아내야 해요.”

    * * *

    꽤 길었던 대화가 끝난 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 길을 달려온 유디트가 피로를 호소하며 로샨과 함께 제일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마탑주님도 편안한 밤 보내요.”

    아셀라가 문가에 선 알렌을 향해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그녀 곁의 칼릭스가 알렌의 손에 들린 구슬과 약통에 힐끗 시선을 던지곤 말했다.

    “조사하다 발견된 사항은 사소한 것이라도 즉시 알리도록.”

    “예, 전하. 그런데…….”

    문을 가로막고 움직이지 않는 알렌의 모습에 칼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년이 냉큼 말을 이었다.

    “전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해.”

    알렌이 아셀라의 눈치를 힐끔 살피다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게…… 비전하께서 들어도 괜찮으실지 알 수 없어서요.”

    “상관없어.”

    “아니에요, 칼릭스.”

    아셀라가 얼른 팔짱을 풀고는 그에게서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진중한 소년의 평소 성품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알렌이 이렇게 망설일 정도라면 선뜻 밝히기 곤란한 개인적인 일일 터였다.

    약속도 하지 않았나. 그녀가 알아야 할 이야기라면 분명 남편은 말해 줄 거였다.

    “제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라면 나중에 알려주시면 되잖아요.”

    “아셀라.”

    “전하의 침실에서 기다릴게요. 말씀 나누신 뒤에 봬요.”

    그러고는 칼릭스가 붙잡기도 전에 그의 뺨에 쪽, 입맞춤을 남기고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하, 칼릭스는 가볍게 혀를 차며 아내가 나간 문틈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돌려 알렌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래, 대체 할 말이 뭐지?”

    중요한 일이 아니면 당장에라도 목을 벨 듯한 기세였다.

    침을 꼴깍 삼킨 소년이 입을 열었다.

    “실은 대공성의 결계에서 이질감이 느껴졌습니다.”

    대공성을 지키는 결계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칼릭스는 코웃음을 쳤다.

    “얼토당토않은 말이군. 착각 아닌가?”

    초대 대공이 만들어 낸 결계는 마법 공격으로부터 완벽하게 대공성을 지켰다.

    포털 따위로 성 내에 불법 침입하려던 자들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마탑주인 알렌은 물론이거니와 황제도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결계였다.

    “지금껏 한 번도 틈을 내보인 적 없던 결계다. 침입을 시도한들 결계의 함정에 걸려 즉사할 터.”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 역시 침입자가 결계에 손댔다고 보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칼릭스가 말을 멈추었다.

    베네비토의 결계를 건드릴 수 있는 자. 이는 그와 같은 베네비토의 혈족뿐이었다.

    “제가 느낀 건 이게 전부입니다. 한번 결계를 점검해 보심이 좋을 듯싶어 말씀드렸습니다.”

    꾸벅 인사를 마친 알렌이 나가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칼릭스는 앉은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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