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71)

내일이면 대공 부부가 초야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대공성 전체에 퍼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 그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남자의 마음을 되돌려야만 했다. 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어쩌면 좋지.’

아셀라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남자를 만나러 가자. 너무 이른 시간엔 불편할 수 있으니 점심때가 좋겠다. 그가 식사를 마치기 전, 아니, 식사 후가 나을 테지. 사람은 보통 배가 고플 땐 예민해지니까. 그를 찾아가서…….

“찾아가서…….”

그가 과연 만나줄까.

어쩌면 얼굴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만일 거절당한다면 남자가 나올 때까지 문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만나면 오늘 일을 사과하고 다시…….

불현듯 파고든 생각에 아셀라가 멈칫했다.

그가 다시 기회를 줄까?

차가운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내던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비난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건 결코 쉬이 풀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해야 해.”

무엇이든.

그녀에겐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볼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린 가느다란 물줄기에 베갯잇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셀라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부디 이 길고 긴 밤 동안 그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기를 바라면서.

숨죽인 흐느낌이 고요한 방을 휘감았다.

* * *

마고가 조심스레 대공비의 방을 찾았다.

아주 이른 시각은 아니었다. 라이젠으로부터 대공이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는 전갈을 받았으니 지금쯤 안주인의 시중을 드는 게 맞았다. 마침 전할 소식도 있었다.

“비전하, 마고입니다.”

“들어와요.”

차분하고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했으나 어쩐지 어제와 다르게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다들 여기서 기다리도록.”

왠지 불안한 느낌이 스쳐, 마고가 조금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목욕 시중조차 꺼리던 안주인이었으니, 초야의 흔적을 내보이는 것도 어려워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면서.

“비전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마고가 멈칫했다.

초야가 지난 아침. 침대맡 끄트머리에 조용히 앉은 여자. 흐트러짐 하나 없는 차림새. 너무도 정갈해 보이는 침대.

이 모습들이 뜻하는 건 너무도 명백했다.

마고가 재빨리 표정을 감추었다.

제일 먼저 밖에서 대기하던 다른 시녀들을 물렸다. 베네비토의 사용인들이라면 누구나 입조심부터 철저히 교육받지만, 이런 일이 늘 그렇듯 예외는 생기곤 했으니까.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홀로 안주인의 시중을 들었다.

아셀라가 저를 위한 배려에 담담히 고마움을 표했다.

아셀라가 아침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자, 마고는 문제의 소식을 전해도 될지 고민스러워졌다. 그러나 어차피 대공비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짧은 망설임 끝에 마고가 입을 열었다.

“오늘 메리엘 아가씨의 가정교사가 오기로 했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셀라가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물었다. 그러나 마고는 눈앞의 자그마한 여인이 떨고 있음을 눈치챘다. 대체 어젯밤 대공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급히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아셀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뒤로 이어진 말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정된 가정교사가 취소되었다는 말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심장이 불안으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한참 뒤 힘겹게 입을 연 아셀라가 가까스로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전하께선…… 지금 어디 계신가요?”

* * *

바닥에 깔린 고급스러운 융단 탓에 두 사람이 걷는데도 소리가 전혀 없었다.

“이쪽입니다.”

마고가 먼저 코너를 돌았다. 아찔할 정도로 화려한 복도를 따라 걸으며, 아셀라가 기도하듯 깍지낀 두 손을 꽉 부여잡았다.

천장이 높은 복도엔 벽마다 사치스러운 태피스트리와 명화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기둥이 튀어나온 자리마다 놓인 휘황찬란한 장식품들은 한눈에 보아도 고가였다. 시선을 두는 것마저 조심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웠다.

한참을 걸은 끝에 섬세하게 양각된 오크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발견한 시종들이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여기가 전하의 집무실입니다.”

마고의 설명에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문이 위압적이었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아셀라는 거절하려다가 마고의 표정을 보고는 하려던 말을 거두었다. 무뚝뚝한 얼굴에 숨기지 못한 걱정이 묻어난 탓이었다.

마고가 눈짓하자 시종이 안에 그녀의 방문을 고했다.

“전하, 비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짧은 침묵이 복도에 감돌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44화

열리지 않으면 어쩌지. 돌아가라고 내치면 어떻게 하지. 아니, 어쩌면 아예 무시할 가능성도 있었다.

아셀라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기다릴 때였다.

묵직한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라이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전하, 들어오십시오.”

아셀라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대공의 최측근인 그라면 지난밤 일을 직접 듣지는 못했을지라도 짐작은 했을 터인데, 어제와 조금도 다름 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밖에 있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가벼운 묵례 후 문이 닫혔다.

대공의 집무실은 전체적으로 중후한 인상을 주었다. 벽지를 비롯한 실내 장식이 어두운 탓에 그다지 환한 느낌은 아니었다. 길쭉한 창이 세 개 연달아 난 집무실 가장 안쪽, 그의 책상이 있었다.

그녀가 들어왔음에도 남자는 무심히 서류를 넘길 뿐이었다. 아셀라가 쉬이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칼릭스가 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볼일이 있어 온 거 아니었나?”

평소에도 중저음이었던 목소리가 부쩍 낮아져 심기 불편한 그의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셀라가 자꾸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긴 소맷자락 안에 감추었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심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고 말, 위험천만한 곡예.

옅은 화장이 자신의 긴장한 얼굴을 가려주기를 바라며 손등뼈가 희게 도드라질 정도로 두 손을 꽉 맞잡았다. 깊은 심호흡 끝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맞아요.”

“말해.”

고저 없는 목소리가 서늘했다. 여전히 그녀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아셀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더듬더듬 준비해 왔던 말을 꺼냈다.

“어제 일…… 사과드리려고 왔어요.”

뭔가 더 유려한 말을 뒤이어서 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말을 포장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사과라.”

칼릭스가 마침내 눈을 들어 올렸다. 그의 차갑고 무감정한 시선에, 아셀라가 예리한 창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지독한 무표정이 섬�했다.

“빠르기도 하지. 이미 밤은 다 지나간 것 같은데 말이야.”

여기서 대화가 끊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셀라의 입술이 다급히 움직였다.

“너, 너무 깊은 밤이었고, 또 어디에 계신지도 몰라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지난밤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칼릭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눈으로 아셀라를 가볍게 훑어낸 그가, 뒤이어 빈정댔다.

“그 와중에 단장할 정신은 있었나 보군.”

“이건……!”

당신을 만나려 일부러 꾸민 것이라고, 대답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말한들 그가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이 상황에도 발끈하는 걸 보니,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겠어.”

“그게 아니라.”

“그만 나가 봐.”

사내의 냉정한 선고가 떨어졌다.

그러나 아셀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갈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가면 그녀도, 메리엘도 끝장이었으니까.

그가 만나주지 않을 경우까지 예상하고 오지 않았던가. 여차하면 무릎을 꿇을 각오도 했었다.

적어도 자신을 상대해 주고 있는 지금은 가정했던 여러 상황 중에 나은 축에 속했다.

“죄송해요. 전 단지…….”

“나가라는 말 안 들리나?”

“아, 아직 드릴 말씀이 더 있어요.”

“난 그대와 할 말이 없어.”

“잠깐만, 정말로 잠깐이면 돼요. 시간 끌지 않을게요. 전하, 제발…….”

칼릭스가 눈앞의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음성이 애처로웠다. 무슨 말을 하든 넘어가지 않으리라 그리도 다짐했건만. 막상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가냘픈 몸으로 힘겹게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신경이 쓰였다.

어쩔 수 없지. 단단히 비틀려 있던 심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가 손등에 제 턱을 괴며 고개를 까닥였다.

“할 말이 뭐지?”

지금이 남자가 주는 마지막 기회임을 아셀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주섬주섬 신중히 단어를 골라낸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제 일은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

“제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전하를 불쾌하시게 만들고 말았어요. 죄송해요.”

저를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셀라가 긴장과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르고서야, 대공의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졌다.

“끝인가?”

아셀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목이 탔다. 맞잡은 두 손에 꾹 힘을 주며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자꾸만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태연함을 가장하기가 힘들었다.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시면…… 이번에는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아내로서 의무를 다할게요.”

“그만.”

칼릭스가 사정없이 미간을 구겼다.

“싫다는 여잘 강제로 안는 취미는 없어.”

처음이었다. 어젯밤의 그녀처럼 그를 동하게 했던 사람은.

그러나 애초에 그녀가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았더라면 손끝 하나 대지 않았을 것이다.

“시, 싫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어제 같은 일은 앞으론 절대―”

“적당히 해.”

칼릭스가 단칼에 말허리를 잘랐다.

도저히 들어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지금도 두려움에 바들거리고 있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워섬기는 모습이 내키지 않았다.

“입에 발린 말은 필요 없어. 원치도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킬 생각 없으니까.”

그러나 칼릭스는 곧 내뱉은 말을 후회하고 말았다.

아셀라의 말간 눈에 눈물이 왈칵 치솟더니 해쓱한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잠깐, 그대―”

“그,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제 동생은…….”

“뭐?”

난데없는 반응에 이어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칼릭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놀란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셀라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아셀라!”

칼릭스가 곧바로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꽤 거리가 있던 두 사람 사이가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파묻힌 아셀라가 떨리는 눈을 힘겹게 들어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칼릭스의 심장 한구석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대체 왜.

어째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아카데미에 갈 수 있게…….”

띄엄띄엄 이어지는 토막말에서, 칼릭스가 마침내 정답을 찾았다.

가정교사가 사정이 생겨 오지 못했다는 소식에 지레짐작해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아마도 어젯밤 일 때문에 화가 난 분풀이를 한 것이라 여겼을 테지.

저가 그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던가. 고작 잠자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해코지하는 인간으로 여겼나. 대체 그녀의 머릿속 자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일순 주변 기류가 급격히 얼어붙자 아셀라가 숨을 들이켜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젠장.’

칼릭스가 사납게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관리했다. 그녀를 더 무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선생은 아카데미에 초빙교수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취소된 거야. 라이젠이 알아보고 있으니 며칠 내로 새 가정교사가 올 거야.”

“…….”

“그러니 그만 좀 울어.”

훌쩍, 아셀라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커다란 눈을 끔벅거렸다. 뭔가 주체할 수 없어지는 기분에, 칼릭스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더는 그녀와 함께 있어선 안 되겠다는, 어서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칼릭스가 아셀라를 훌쩍 안아 들었다.

새처럼 가벼운 몸이었다. 폭이 넓은 소파에 아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가,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마고를 불러줄 테니 여기 있어.”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집무실을 나와버렸다.

* * *

라이젠이 대공의 불편한 심기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감히 말을 붙이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핏빛 눈 아래로 갈무리되지 못한 복잡한 감정들이 한껏 뒤섞여 이리저리 일렁이고 있었다.

주군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라이젠은 고개를 저었다.

대공은 여간해서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게 감정이란 오랜 세월 풍화되어 무뎌진 흔적 같은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베어낼 때도 눈썹 한번 찌푸리는 걸 보기 힘든 사내였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일이 벌어지겠다는 직감에 라이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라이젠.”

“예, 전하.”

“기사단 훈련장으로 가겠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 * *

베네비토 가문의 기사들은 지옥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강도 높은 훈련이 아침부터 수 시간째였다. 지금껏 온갖 수련을 하고 수많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단련된 기사들조차 도저히 버티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살벌한 훈련장 분위기에, 그들 모두 찍소리도 못했다.

“일어나.”

“전하, 더는, 헉, 무리…… 허억!”

“다음.”

칼릭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희생자를 불렀다. 순서를 기다리는 기사들의 얼굴이 점차 희게 질렸다.

기사단 반절은 이미 초주검이 되어 물에 흠뻑 젖은 빨랫감처럼 훈련장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나머지 반절도 상태가 가히 좋지 않았다. 그나마 멀쩡한 축에 속하는 사람은 딱 둘이었다.

지크와 라이젠.

“솔직히 말해봐. 무슨 일 있었지?”

“전혀.”

“거짓말하지 마! 갑자기 주군이 아침부터 푸닥거릴 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지크가 계속 대답을 종용했으나 라이젠이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렸다.

“말이 좋아서 대련이지, 이쯤 되면 고문이라고.”

지크가 칼릭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기사단 전부와 대련하면서도 그의 주군은 지치기는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죽어나는 건 기사들뿐이었다.

라이젠이 시계를 흘끗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2분 30초. 이번엔 꽤 오래 버텼군.”

어느새 한 사람분의 대련이 끝나 있었다. 다음 차례의 기사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칼릭스의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지크가 혀를 내둘렀다.

“새벽 정찰 나간 애들이 부럽기는 또 처음이네. 어쩐지 따라가고 싶더라.”

“전하께서 직접 대련해 주시는 영광스러운 기회다.”

“너 같은 놈한테나 그렇지. 쟤네 아마 며칠간 자리보전하고 누워야 할걸.”

그 와중에도 가련한 희생자 하나가 기절하여 실려 나갔다.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지 않나.”

“그럼 주군 상태가 왜 저래? 지금쯤 새신부랑 알콩달콩 시간 보내고 있어야 할 새신랑이 왜 이 칙칙한 훈련장에서 저 시커먼 것들이나 패고 있냐고.”

도주하는 대공비 45화

지크의 눈치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린 시절,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 없던 빈민가에서 그를 생존케 해준 눈치가 여기서도 유용하게 작용했다.

“어젯밤에 주군 바람맞으셨나?”

“……아니다.”

“대답이 좀 늦는데? 뭐야, 설마…….”

대충 던졌다가 엉겁결에 정답을 찍어낸 지크가 놀라움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주군이 바람맞았단 말이야?”

“말조심해라, 지크.”

라이젠이 제지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흥분한 지크가 장소도 잊고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흥미 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비전하께서 생각보다 강적이시잖아?”

“목소리가 너무 커. 적당히 해라.”

“얌전하고 조용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완전히 착각했었네.”

“그만 하라니까.”

라이젠이 불안감을 느끼며 지크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힐끗 눈을 굴려 확인하니 아직 대공은 대련 중이었다. 그러나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는 지크의 습관을 생각하면, 더는 위험했다.

“와, 주군이 열 받으실 만도 하네. 그러니까 이 잡도리의 이유가 첫날밤에 신부한테 쫓겨난 거―”

“누가 쫓겨났다고?”

“히익……!”

지크가 지옥의 사신을 본 양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주, 주군!”

망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존재를 보자마자 라이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수습되질 않는 상황에 현기증마저 일었다. 조금 전까지도 저쪽에서 기사들을 상대로 목검을 휘두르고 있던 칼릭스가 어느 틈에 여기까지 와 있었다.

지크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드, 들으셨습니까?”

미친. 라이젠이 속으로 지크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정말이지 뭘 생각하는지가 구슬처럼 투명한 녀석이었다. 머리가 비었으면 입이라도 무겁던가.

‘저 망할 주둥아리를 진작 꿰매버렸어야 했는데.’

라이젠이 뒤늦은 통탄의 눈물을 흘렸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주군이 한껏 눈매를 휘어 웃으며 그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것도 매우.

“요즘 좀 몸이 편했었지. 그렇지 않나?”

나긋나긋한 음성이 되레 소름 끼쳤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 살이 떨렸다. 수려한 얼굴에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미소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라이젠이 질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부디, 훈련장 뺑뺑이만 아니면 좋겠다고.

“세 시간 주지. 백 바퀴, 돌아.”

* * *

지크가 깐족거림의 대가로, 그리고 라이젠이 친우를 잘못 둔 죄로 훈련장을 미친 듯이 돌고 있던 그 시각, 아셀라는 메리엘과 함께 있었다.

마고의 성심을 다한 보살핌과 얼음주머니 덕에, 아셀라의 빨개졌던 눈가는 화장으로 충분히 가려질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메리엘, 어젯밤에 무섭진 않았어?”

“곰 인형 꼭 끌어안고 자서 하나도 안 무서웠어! 꿈에 헤르니야 여신님도 나왔는걸!”

혹시 간밤의 소리를 듣기라도 했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푹 잠든 모양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아셀라가 메리엘에게도 가정교사의 소식을 전했다.

“전하께서 새로운 선생님을 구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어. 곧 훌륭한 선생님이 오실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응! 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언니.”

메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씩씩한 태도였다.

‘그렇게나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 하면서…….’

입학시험까지 얼마 남지 않은 탓에 불안할 텐데도 내색하지 않는 동생이 안쓰러워, 아셀라가 메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에 기분 좋게 감겨들었다.

“아!”

아셀라의 손길을 말없이 즐기던 메리엘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이 손뼉을 딱 쳤다.

“언니, 혹시 정원에 가 봤어?”

“아니. 아직. 왜?”

“정원 곳곳에 꽃이 펴서 무척 예쁘대. 후원에 가면 볕이 잘 드는 곳에 유리 온실도 있다고 했어!”

메리엘이 반짝이는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도 가보자!”

아셀라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대로 성내를 돌아다녀도 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 화가 나 있는 대공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다. 더는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 시녀한테도 물어봤는데, 가고 싶으면 말만 하랬어!”

아셀라가 시선을 옮겨 마고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날씨가 따뜻해 온실의 꽃들이 만발했다 들었습니다. 보시며 차를 즐기시기에 좋지요.”

“하지만 아직 전하께…….”

“원하실 때, 언제든 가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라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아셀라는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설사 어제 낮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의 대공이 같은 마음일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마고가 덧붙였다.

“대공 전하의 일부 개인 공간을 제외한다면, 비전하께서 이곳 성내에 가시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전하께서 별도로 다른 명을 내리신 바 없으니, 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에, 아셀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샤르투스 저택에서는 필립의 심기가 좋지 않을 때면 그녀에게 체벌과 함께 근신 처분이 내려지곤 했다.

저택 바깥이나 정원을 출입하는 건 물론, 아예 방 밖조차 나갈 수 없었다. 식사도 방 안에서 해야 했다. 사실상의 감금이나 다름없는 생활이 짧게는 수일에서 길게는 보름 가까이도 이어졌다.

잔혹하고 무자비하다는 남자. 샤르투스를 누구보다도 혐오할 베네비토의 후계.

그래서 아델을 암살했고 언젠가는 그녀와 메리엘마저 죽이고 말 사내.

“…….”

그래서 아셀라는 그가 자신에게 필립보다 더 잔인하게 굴리라 여겼다. 수가 틀리면 매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실제로 가주 중에선 제 위치를 이용해 배우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으니까.

“언니,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메리엘의 발랄한 목소리가 아셀라의 상념을 깨뜨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면 안 돼? 나 아까부터 가고 싶었는데 언니랑 같이 가려고 지금까지 꾹 참은 거란 말이야. 가자, 응?”

메리엘이 지치지도 않는지 연신 졸라댔다. 어떻게든 달래보려 했으나 어린아이의 고집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종래에 설득당한 사람은 아셀라가 되고 말았다.

“대신, 해지기 전까지만이야.”

“응, 알겠어!”

기대감을 품은 메리엘의 푸른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동생의 해사한 웃음에 복잡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풀어지며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 * *

“메리엘, 그러다 넘어질라.”

“우와! 언니 이 꽃 좀 봐! 만지면 봉오리가 오므라들어!”

메리엘이 온실 내부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연신 감탄사를 토해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동생이 넘어질까 염려하면서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셀라의 눈이 다정다감했다.

무척이나 따뜻한 실내였다. 온실 자체의 훈기도 있었고 테이블 근처의 간이 난로 덕분이기도 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사용인들이 그들이 오기 전 테이블이며 의자, 담요 등 작은 소품까지 준비해 둔 탓에, 내부가 방처럼 아늑했다.

“와아! 맛있겠다!”

메리엘의 온실 탐방은 마고가 테이블 위에 따뜻한 차와 코코아, 막 구워낸 따끈따끈한 쿠키를 올려놓고 나서야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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