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는 그녀를 숫제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었다. 빈틈 하나 없이 밀착된 몸이 사내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달했다.
몸을 감싸 안은 단단한 두 팔과 탄탄하고 강인한 상체가 얇은 천 사이로 선연히 느껴졌다.
“눈을 떠.”
찰나의 침묵 후, 남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탁해지다 못해 잔뜩 갈라진 목소리엔 뜻 모를 조급함마저 진득하게 묻어났다.
“아셀라, 나를 봐.”
칼릭스의 눈빛이 변했다.
아셀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핏빛 눈동자가 기이한 열기마저 띠고 위험하리만치 번들거렸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녀를 옭아맸다.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예감에 숨이 턱 막혔다.
알고 있었다. 각오도 했었다. 그녀는 철부지 어린애가 아니었고 남녀 간의 정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지 않았다. 혼인한 누구나 거쳐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무섭고 두려워지는 연유는 무엇인지.
단단한 나무 조각처럼 몸이 뻣뻣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작은 목소리조차 새어 나오질 않았다. 자그마한 입술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긴장 풀어.”
칼릭스의 손이 아셀라의 무릎 뒤로 향했다. 그녀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놀란 아셀라가 그의 품에서 버둥거렸으나 사내에겐 미약한 몸짓에 불과했다.
“쉬이. 가만히 있어.”
성큼성큼 방을 가로지르는 남자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중력을 벗어났던 몸이 이내 푹신한 시트에 감겼다. 몸에 감기듯 와 닿는 보드라운 촉감, 새 침구의 표면에서 자아내는 사그락거리는 소리.
한껏 예민해진 감각이 평소라면 지나쳤을 작은 것들까지도 민감하게 잡아냈다.
방 깊숙이 스민 달빛을 등지고 선 사내의 그림자가 그녀를 뒤덮었다. 달빛에 역광이 진 탓에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이 홍염처럼 일렁이며 자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흣…….”
덫에 걸린 짐승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간헐적으로 작게 몸을 떠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떨지 말고.”
칼릭스가 느슨히 풀어낸 소매를 천천히 접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고정된 시선은 여전히 집요하고 진득했다.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 잔근육으로 빈틈없이 짜인 탄탄한 팔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단정하게 잠겨 있던 셔츠의 목깃 단추까지 서넛 풀어낸 그가 침대 위로 몸을 기울였다. 단단하고 남성적인 사내의 팔 사이로 그녀의 몸이 갇힌 건 순식간이었다.
머리맡이 아래로 푹 꺼지는 아찔한 감각에, 아셀라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
이상한 일이었다.
타인과의 접촉은 그에게 늘 불쾌감만을 불러일으키곤 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으나, 몸이 맞닿을 정도로 껴안았는데도 불쾌감은커녕 되려 마음에 들었다.
지나치게 겁먹은 듯한 얼굴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칼릭스의 시선이 앞섶을 부여잡은 아내의 주먹 쥔 손에 닿았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살집이라곤 하나도 없는 섬약한 손가락이 마디마다 희게 불거져 있었다.
하기야 사내와는 대화도 드물었을 여자다. 초야를 앞두고 긴장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겁먹은 모습이 또 묘하게도 그의 가학심과 정복욕을 자극하며 아랫배를 뻐근하게 만들었다.
‘설마 정말로 모르고 있었을 줄은.’
저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고른 것이 분명한 나이트 드레스는 초야를 위한 신부용이라기엔 너무도 단조로웠다. 헐렁하여 몸매를 드러내기는커녕 완전히 감추는 디자인이었고,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왔다.
치마 기장은 겨우 복숭아뼈를 드러낼 정도로 길었다. 목 아래까지 오는 목깃은 파였다고 말하기가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보다도 더 선정적이었다. 그는 불길이 일듯 몸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의 이유에 조금 전 마신 애꿎은 와인 탓을 했다.
‘괜한 짓을.’
넓은 침대 한가운데 흐드러진 은발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꼼꼼하게도 몸을 가린 나이트 드레스 위로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눈보다 흰 얼굴에 붉은 입술이 색정적으로 느껴졌다.
“흣…….”
눈이 마주치자 급히 숨을 삼키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겁먹은 사슴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타고난 맹수는 먹잇감을 놓치는 법이 없다.
“아셀라.”
이름을 불린 이의 긴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잘게 진동했다. 평소에는 무감정하던 붉은 눈이 강렬한 욕망을 품고 여자의 모습을 낱낱이 탐했다.
조금 상기된 듯한 뺨도,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도, 긴장하여 미세하게 진동하는 손끝도, 얇은 나이트 드레스 위로 설핏 느껴지는 보드랍고 굴곡진 몸도.
마침내 깜박임을 멈추고 온전히 저를 담은 벽안을 마주하자 주체할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
“원치 않는다면 지금 말해.”
그러나 말과는 달리, 낮게 울리는 목소리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이 짙게 배어 있었다. 파도처럼 흔들리는 아셀라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좇으며, 칼릭스가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
대답이 없었다.
의미를 눈치챈 그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아까부터 그를 괴롭히던 기갈이 이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열릴 듯 말듯 달싹이는 자그마한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키고 싶다는 열망이 일었다.
굳이 참아야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아내였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녀를 취해도 되었다. 문제 될 건 조금도 없었다.
칼릭스는 제 욕망이 무척 저열하다 여기면서도, 어째서인지 그 사실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셀라.”
칼릭스가 아셀라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흐려져 있던 파란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이 조그마한 입술에 입을 맞추면,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약속하지.”
기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여자든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내이기도 했다. 단지 베네비토의 수장으로 쥐고 있는 권력이나 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빼어난 외양은 많은 이의 흠모를 한몸에 샀다. 수려한 얼굴과 장대한 기골은 타고난 것이었다. 수많은 여자가 그와의 하룻밤을 꿈꾸며 몸이 달아 있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았다.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주겠다고.”
망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42화
한편 아셀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칼릭스를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던져진 뇌가 제대로 상황을 인지해 내지 못했다. 가까스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남자에게서 풍기는 달콤한 향에 몸이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셀라, 나를 봐.’
손끝이 저릿해질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겨우 눈을 뜨자, 어둠 속에서도 선연하게 빛나는 붉은 색채가 한달음에 꽂혀 들어왔다.
한 번 시선이 붙들리고 나자 도저히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맞닿은 사내의 뜨겁고 단단한 육체는 그녀가 경험해 본 적 없는 감각을 전했다. 접촉한 몸의 부위마다 찌릿해지면서 솜털 하나까지도 쭈뼛하게 곤두섰다.
농도 짙은 초콜릿과 잘 숙성된 포도주가 뒤섞인 것만 같은 사내의 향기가 머릿속을 거침없이 휘저었다.
남자가 전하는 모든 감각이 이성을 차리기 힘들 만큼 머릿속을 멋대로 주물렀다. 이내 통제를 벗어난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감각은 사내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예민하게 깨어났는데, 막상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경한 감각이 뇌를 눅진하게 절여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실감이 나질 않았다. 표백된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이 들려 푹신한 침대에 눕혀진 건 그다음이었다. 그녀는 남자가 셔츠 단추를 거의 뜯어내다시피 거칠게 풀어 내리는 모습을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사내의 등 뒤로 비치는 달빛이 유난히도 희고 밝았다.
역광을 받은 남자의 실루엣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의 몸에 딱 맞추어 밀착된 셔츠 탓에 탄탄한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남자의 몸은 단점을 찾기 힘들 만큼 완벽했다. 장신의 몸이 빈틈없이 근육으로 짜여 있었음에도 투박하기는커녕 날렵한 느낌을 주었다. 신전의 조각상조차 그처럼 훌륭하지는 못했다.
일순. 각도가 바뀌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름답다…….’
순간이었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을 매혹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악마의 이야기가 스치듯 떠올랐다.
일단 악마에게 홀리고 나면, 그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라 했던가. 그 말처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달빛을 받은 한쪽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반쯤 내리깐 눈 아래로 길쭉한 눈매를 따라 촘촘하고 긴 속눈썹이 짙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약속하지.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주겠다고.’
그 사이로 핏빛 눈이 번득이던 그 순간.
“……!”
들려서는 안 될 끔찍한 목소리가 이명처럼 아셀라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가서 전하의 비위를 잘 맞춰. 지금처럼 뻣뻣하게 굴지 말고.’
귓가에 아교처럼 눌어붙는 목소리는 아셀라가 늘 두려워하던 자의 음성이었다. 그녀가 뭍에 내동댕이쳐진 물고기처럼 파드득 몸을 떨었다.
‘메리엘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모양이구나.’
“아, 안 돼……!”
아셀라가 단말마의 비명처럼 말을 토하며 팔을 뻗었다. 남자를 밀어내는 두 손에 다급함마저 어려 있었다.
‘채찍 가져와.’
‘버르장머리 없는 것에게는 교육이 필요하니까.’
아셀라가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제 앞을 가로막는 사내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어서 잘못했다고 빌어!’
휘익.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가 숨통을 죄었다. 두려움에 질린 머릿속에선 제대로 된 이성적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귓가에 메아리치는 끔찍한 소음과 환상통에 아셀라가 몸부림쳤다.
도망쳐야 해. 여기 있으면 안 돼. 저 사람은 나를 죽일 거야. 메리엘을 해칠 거야.
“시, 싫어!”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은 아셀라에게 늘 지독한 공포를 되새김질시켰다.
그녀에겐 다정한 손길보다 매서운 손찌검이, 포근한 품의 감촉보다 채찍이 피부를 찢는 감각이 더 익숙했다.
애써 의식하려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학습된 공포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무의식을 뚫고 나와 사고를 마비시키곤 했다.
두렵던 사내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이 그나마 유지하던 이성마저도 완전히 휘발시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날것의 공포가 그녀를 잠식했다.
“이 무슨……!”
아내의 돌변한 모습에 칼릭스의 반듯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품에 안겨 금방이라도 그를 받아들일 것처럼 굴던 여자가 돌연 시선조차 맞추려 들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지?”
“가까이 오지 마!”
“아셀라!”
칼릭스가 몸을 비틀어 침대를 벗어나려는 여자의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그 행동이 아셀라를 더 겁에 질리게 만들고 말았다. 그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놔, 놔줘요! 싫어!”
“대체 왜 이러는―”
“내 몸에 손대지 마!”
명백한 거부였다.
“뭐?”
툭, 그때까지도 칼릭스의 머릿속에서 애써 팽팽하게 유지되던 무언가가 끊어졌다.
뜨거운 열기로 세차게 팔딱이던 사내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이내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서늘한 분노였다.
“감히.”
칼릭스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지금껏 갖지 못한 것이 없었던 남자는 아내의 거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서 먹잇감을 빼앗긴 맹수처럼, 붉은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일순 형형해진 눈동자에 아셀라가 더 겁을 집어먹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바둥거리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어딜!”
칼릭스가 제게서 도망치려는 여자를 곧바로 붙잡아 그대로 위에서 찍어눌렀다. 아셀라의 양 손목이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 붙잡혀 머리 위로 끌어 올려졌다. 발버둥 치던 하체는 남자의 다리에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몸에서 자유로운 곳이라곤 이리저리 쉼 없이 고개를 젓는 머리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칼릭스의 다른 손에 턱이 붙들렸다. 그렇게 시선을 강제로 제게 고정한 뒤에야 사내의 가차 없던 행동이 멈추었다.
손목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 아셀라가 신음했으나, 그는 힘을 풀지 않았다.
“아셀라 베네비토.”
짓씹듯 아내의 이름을 내뱉는 음성이 무섭도록 낮았다. 새하얗게 질린 여자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온기 한 점 없이 싸늘했다.
칼릭스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차디찬 목소리에 아셀라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안개가 낀 듯 흐렸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동시에 환상을 헤매듯 부유하던 정신이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아, 아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셀라의 눈에 들어온 건, 금방이라도 먹잇감을 짓눌러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만 같은 사내의 핏빛 눈이었다.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산채로 빙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히는 감각이 이러할까.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한동안 이어졌다.
“저, 저는…….”
아셀라의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겁에 질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를 응시하는 칼릭스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냉정했다.
‘설마 초야를 거부할 줄이야.’
황당해서 기가 찰 지경이었다. 초야는 권리였고, 아셀라 베네비토는 그의 요구를 거절할 그 어떤 명분도 없었다.
“누가 보면 겁탈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그렇게나 싫었나?”
조롱 섞인 물음에 아셀라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도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에요…….”
“몸이 닿는 것도 소름 끼쳐 하면서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
힘겹게 입술을 뗐으나, 막상 말을 꺼내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갑자기 필립의 목소리가 떠올라 무서워졌다고? 과거의 학대를 기억한 탓에 겁이 났다고? 그래서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말을 내뱉었다고?
무슨 말을 한들 변명에 불과했다. 비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
결국, 아셀라가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남자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태도였다.
칼릭스의 얇은 입술이 차게 비틀렸다.
“알 만하군.”
비록 정략혼이었으나 남편의 의무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랬다.
초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아내였고, 베네비토 가문에 이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녀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음 대 가주가 될 것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나.”
“…….”
“불쾌하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제 입으로 하나하나 읊고 있자니 더 기분이 저조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를 열띤 흥분으로 몰아넣었던 감각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가까이 오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라고 하지 그랬어.”
단지 놀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품에 안았을 때도 특별한 거부의 몸짓은 없었다. 침대에서 마지막으로 물어볼 때까지도.
가냘픈 몸이 작게 떨리는 게 보였으나 처음 겪는 일이기에 긴장해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실은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진저리치게 싫어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머저리 같은 착각을 했더랬다.
말갛게 올려다보는 눈빛에, 어쩌면 그녀도 저를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을.
처음이었으나 솔직히 자신 있었다. 베네비토 가문의 피를 이은 자들은 그쪽 방면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자랑했다.
이 밤이 지나고 난 뒤, 어쩌면 제게 겁먹어 움츠러들었던 여자와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기대마저 품었었다.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은, 그래서 진심이었다.
‘한심한 새끼.’
진창에 머리부터 처박히는 더러운 기분에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생경하기만치 격렬한 감정에 쉬이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한 탓에 극렬한 분노가 인 탓이라 여겼으나, 실상 그가 느낀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끔찍하고도 잔인한 감정에, 칼릭스가 치를 떨며 이를 사리물었다.
“피차 서로 귀찮은 일 따위 할 필요 없었을 텐데.”
“…….”
“초야조차 거부하는 아내라.”
낮게 내리깔리는 목소리에 분노가 고스란히 담겼다.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 이제 와 모른다고 할 셈인가?”
“…….”
“뭐라도 말을 좀 해.”
마침내 칼릭스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초야를 거부당했다는 모욕감, 혼자만의 기대였다는 수치심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음에도 여기까지 참아낸 건,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말 같지 않은 변명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든 말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은 열리지 않았다. 끝내 아셀라가 시선마저 피해버리자 칼릭스는 잡고 있던 인내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43화
속에서 무언가가 비틀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가 비아냥거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자였군.”
그녀에겐 분명히 상처가 될 말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저열하고 졸렬하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었다. 차라리 억울하다며 화를 내고 소리쳐주었으면.
그렇다면 이 설명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을 어떻게든 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제 책임도 다 못하는 것이었을 줄은.”
“…….”
칼릭스의 말에 아셀라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귀족은 사랑으로 결혼하지 않는다.
정략혼에는 의무가 따랐고 대부분은 일종의 계약으로 매여 있었다. 매일같이 자랑해대는 필립 때문에, 아셀라 역시 칼릭스가 이 결혼을 위해 어떤 것들을 대가로 내놓았는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요구사항은 알지 못했다.
아마 한둘이 아닐 거라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만큼 받은 것이 많았으니까.
“…….”
다시 말해, 그녀의 행동은 어떤 이유로도 해명될 수 없었다. 아셀라가 칼릭스의 날 선 매도에도 입도 벙긋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감히 그의 눈을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자존심을 짓뭉개고 헤집는 말에는 이미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했다. 단지.
……두려웠다.
‘쓸모없는.’
이 남자에게 이용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됐다.
어떻게든 필요성을 증명해야만 그녀 자신도, 메리엘도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목숨을 부지하려면 그만한 가치를 입증해야 했다.
귀족 가문의 결합에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가 내어줄 수 있는 것이란 뻔했다. 후계자를 갖는 건 어찌 보면 간단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자신에게서 아이를 보길 바랄 것 같지 않았다. 곧 죽여 없앨 여자와의 사이에서 과연 후사를 원할까.
아마도 칼릭스 베네비토가 원하는 거라곤 잠깐의 쾌락을 위한 몸뚱이에 불과할 터.
그러나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아셀라에게 거부란 허락된 선택지가 아니었고, 그가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응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매달려 사정한다면…….
“말 한마디 섞는 것도 싫다, 이건가?”
그러나 아셀라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칼릭스가 먼저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녀의 몸을 단단히 얽매던 압박감이 일순간에 풀어졌다.
“그래, 좋아.”
칼릭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진 말을 들으면 무어라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처참히 부서졌다. 그의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 따위는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한다는 듯이.
그리고 그는 이토록 노골적인 거부조차 참아줄 만큼 아량이 넓지 못했다.
“어디 한번 당신 마음대로 해봐.”
협박 섞인 말에 아셀라가 몸을 움찔거렸다. 겁을 집어먹었는지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게 보였으나, 그는 아내의 두려움을 모른 체했다. 지체없이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갔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의 인사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기가 온통 어지러웠다.
“빌어먹을.”
성큼성큼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가는 칼릭스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두 손은 꽉 주먹 쥔 채였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머릿속은 도통 이해할 수 없던 여자의 행동을 되짚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래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이성적인 가정마저 들었다.
‘설마.’
다른 남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던가. 애초에 원했던 결혼도 아니었지 않나. 그래서 나중에라도 돌아갈 걸 염두에 두고…….
우뚝, 칼릭스가 멈추어 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당찮은 상상이다. 철두철미할 정도로 완벽을 자랑하는 그의 정보원들이 샤르투스의 곳곳에 잠입해 있었다.
그녀의 평소 인간관계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좁았고, 그 사실은 칼릭스 본인이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알았다.
그럼에도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하게 된 건, 그만큼이나 그녀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기 때문이다.
한동안이나 이유를 찾던 칼릭스가 결국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깊이 생각할 것 없어.”
듣는 사람도 없는데, 칼릭스는 굳이 목소리까지 내어 말했다.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명목상의 대공비일 뿐이다. 후계자는 필요하나 그녀가 굳이 거부한다면 다른 방법은 차고 넘쳤다. 공들여 고민해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이따위 가문, 그냥 자신의 대에서 끝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올린 수많은 방법 중에, 아내 외의 사람에게서 아이를 보는 선택지는 없었다. 칼릭스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신경 쓸 필요 없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기며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저벅저벅, 한동안 멈추었던 발소리가 다시금 묵직하게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 * *
홀로 침실에 남겨진 아셀라가 멀거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나가기 전에 붙잡아 뭐라도 말을 좀 해 볼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설마 제 책임도 다 못하는 것이었을 줄은.’
칼릭스 베네비토의 말이 맞았다.
이 결혼을 추진한 건 필립이었으나 혼인 서약서에 서명한 건 자신이었다. 처한 상황이 어땠고 무슨 협박이 있었는지 따위는, 냉정히 말해 남자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책임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주제넘게도 서러움을 느끼는 것인지.
아셀라가 다물린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눈 밑에 고이는 물방울을 빠르게 눈을 깜박여 연신 지워냈다.
‘전부 네 탓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