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71)
  • 특별한 장신구 없이 단순한 디자인의 밤색 드레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었으나, 자세히 보면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이었다. 치마는 주름 한 점 없이 정갈했고 세운 목깃의 각도 역시 완벽했다.

    많아야 서른 초반이나 되었을까. 일견 단출해 보이는 복장임에도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눈빛 탓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비전하,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마고 로메인입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예법의 인사가 이어졌다.

    “로메인이라면…….”

    아셀라도 들은 적이 있었다. 베네비토의 대표적 가신 가문 중 하나. 카단 가문과 더불어 대대로 뛰어난 무관을 배출하는 유서 깊은 백작가였다.

    아셀라의 표정을 읽은 마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제 남편인 리처드가 대공 전하를 보필하고 있습니다.”

    “백작 부인이셨군요.”

    “오늘부로는 비전하의 신하일 뿐입니다.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귀족의 표본. 잠깐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딱딱하리만치 공손한 어조에, 태도는 바늘이 들어갈 틈도 없을 정도로 각 잡혀 있었다. 조금의 어긋남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한 모습에서 철두철미한 성품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감시의 목적일 테지…….’

    샤르투스에서는 단 한 명의 사용인도 오지 않았다. 아셀라가 원하든 원치 않든 베네비토 가문에서 전담 시녀를 정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비전하를 모실 쓸 만한 아이들을 십여 명가량 더 추려두었습니다. 직접 보시고 뽑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잘 해주시리라 믿어요.”

    아셀라에겐 누가 시녀가 되든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모두 칼릭스 베네비토의 눈과 귀가 되어 그녀와 메리엘을 감시할 테니까.

    이곳은 거대하고 화려한 감옥이었다. 우리 안의 먹잇감이 마음을 내려놓고 안심하게 만들기 위한 장소.

    일견 안락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투명한 쇠창살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성벽을 지키던 완전무장한 병사들을 떠올리며, 아셀라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메리엘 아가씨의 시중을 들 이도 제가 뽑으면 되겠습니까?”

    “그건…….”

    좀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셀라가 잠시 고민했다. 누가 되든 감시라는 목적은 같겠지만, 적어도 메리엘이 눈치채지는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밝고 다정다감한 성품의 시녀를 붙여주고 싶었으나, 잠깐 보는 것으로 그런 점까지 눈치채기는 쉽지 않은 법이었다.

    “그렇다면 추려둔 아이들을 몇 개 조로 짜서 번갈아 가며 아가씨를 모시게 하겠습니다. 지켜보시다가 결정하시면 어떠실지요?”

    아셀라가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그녀의 고민을 읽은 마고가 눈치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제야 안심한 아셀라가 걱정 가득했던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어요. 고마워요.”

    “당연한 일입니다.”

    마고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 이후론 조금 더 매끄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셀라가 조금씩 긴장을 풀어갔다.

    마고가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면서 아셀라의 음식 취향, 선호하는 의상 디자인, 좋아하는 취미 등을 알아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비안이 혀를 내둘렀다. 라이젠과 파비안 모두가 하지 못했던 일을,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해낸 마고에 대한 감탄이었다.

    ‘하여간 대단한 여자야.’

    마고 로메인. 리처드 로메인과 결혼하기 전에는 블레어 가문의 둘째였다.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 뛰어난 학식까지 갖춘 그녀는 한때 사교계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현재, 마고의 이름 뒤에 붙는 별칭은 이것이었다.

    ‘블레어의 영원한 원석.’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칭찬이라 여길 말이었다. 그러나 사실 마고에겐 비할 데 없이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말이었다.

    보석으로 탈바꿈하지 못하는 영원한 원석.

    ‘이 아까운 인재를 진흙 속에 처박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지.’

    오죽하면 선대 블레어 백작이 노망이 났다는 소문까지 있었을까.

    마고는 팔 년 전 황립 아카데미의 정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해당 학부의 교수가 제 후임으로 공공연하게 탐냈을 만큼, 그녀의 성취는 월등했다.

    만일 마고가 원했던 자리가 블레어 가문의 후계위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황립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마고가 그토록 바랐던 후계위는 그녀의 오라비에게 돌아갔다. 마고가 이에 강하게 반발하자, 선대 블레어 백작은 제 딸을 리처드 로메인과 강제로 결혼시켜 가문에서 방출해 버렸다.

    ‘덕분에 쫄딱 망했지만.’

    마고의 오라비, 현 블레어 백작은 멍청한 난봉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을 만큼 가문을 이끌 만한 능력도, 자질도 없는 자였다.

    주색잡기라면 사족을 못 썼고, 결국 그 많던 재산을 몇 년 만에 탕진했다. 오입질에 빠져 사생아만 둘이었다.

    참다못한 아내가 이혼소송을 걸었고, 최근 패소해 그나마 얼마 남아 있지도 않던 재산조차 위자료로 지급한 뒤 빈털터리가 되었다.

    한때 칭송받던 블레어 백작가의 이름은 돌이킬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세간에서 예상했던 대로의 결말이었다.

    ‘결국은 그리될 줄 알았지.’

    파비안이 한쪽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과거의 일을 회상하던 때였다.

    “비전하, 신관이 막 성문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하인이 신관의 도착을 알렸다.

    * * *

    나이 지긋한 신관의 머리칼이 희끗희끗했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아셀라의 팔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었다. 마수에게 입은 상처를 확인한 신관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누가 처치를 하셨는지는 몰라도 상처가 덧난 곳도 없고 잘 아물어가고 있군요. 한 번만 신성 치료를 받으시면 흉터 없이 깨끗해질 듯합니다.”

    “다행이네요.”

    아셀라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마수에게 공격받기 직전의 위급한 상황에서 나타났던 칼릭스 베네비토.

    늦지 않게 그가 도착한 덕분에 그녀도, 메리엘도 무사할 수 있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그녀의 상처를 직접 치료하기까지 했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선 다친 부위를 세심하게 살피고 처치했다.

    노신관의 반응을 보니, 그의 손놀림이 능숙하다고 여겼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주치의의 실력이 대단하군요. 마수의 상처를 이렇게 깔끔하게 처치하기란 쉽지 않은데.”

    “전하께서 치료해 주신 거예요.”

    “대공 전하께서 직접 말씀인가요?”

    “네.”

    일순 신관의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원숙했다. 재빨리 표정을 감추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셨군요. 그럼 이제 신성력을 불어넣겠습니다. 혹 너무 뜨겁다고 생각되면 말씀하세요.”

    따뜻하고 보드라운 온기가 먼저 아셀라의 양팔을 감쌌다. 패였던 살이 차오르고 찢긴 부위가 완전히 아물었다. 흉터가 사라지며 피부가 매끈해진 뒤에는, 온기가 온몸으로 옅게 퍼져나갔다. 남아 있던 피로감이 순식간에 풀리며 몸이 개운해졌다.

    “치료는 잘 되었지만, 이제 막 새 살이 돋은 터라 조심해 주세요.”

    “주의할게요.”

    “그럼 어디 보자…….”

    신관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아셀라를 응시했다. 자애로운 할머니가 손녀딸을 보는 듯한 따뜻한 시선이었다.

    “제가 비전하께 작은 선물을 드려도 될까요?”

    “선물이요?”

    “귀하신 분의 앞날에 행복과 길운을 빌어드리고 싶어서 그렇답니다. 부디 이 노신관의 청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아셀라가 신관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옆에 있던 파비안이 탄성을 터뜨렸고, 마고조차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셀라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찌 그리 귀한 것을…….”

    “그동안 마땅히 쓰일 곳이 없었는데, 이리 비전하를 만나려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축복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신의 축복은 값어치를 환산하기 힘들 정도로 귀했다.

    일단 축복을 내릴 수 있는 신관 자체가 희귀했다. 오랜 수도 생활 끝에 얻어지는 능력이었고, 그마저도 한번 축복을 내리고 나면 다시 채워질 때까지 일반적으로 일 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받아주신다면 제게 큰 기쁨이 될 거예요.”

    잠시 고민하던 아셀라가 승낙했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셀라가 몸을 일으켜 무릎을 살짝 굽힌 뒤 고개를 숙였다. 노신관이 그녀 앞에 서서 정수리 위에 손바닥을 펼쳤다.

    “이 세상과 생명의 근원, 태초의 모든 것이었던 헤르니야의 축복을 당신에게 내리니…….”

    노신관의 몸에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색빛깔의 찬연한 빛무리가 아셀라의 몸 전체를 순식간에 휘감으며 설명할 수 없는 힘이 그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힘이 핏줄을 타고 돌며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듯한 감각에, 아셀라가 몸을 작게 떨었다.

    강력한 힘이었으나 거칠다거나 사납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보호받고 지켜지는 듯한 안정감이 들었다. 그립고 소중했던 무언가를 되찾은듯한 오묘하면서도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비전하께 헤르니야의 축복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아셀라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노신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완연한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 * *

    베네비토 대공성은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성을 빠져나오면 직선으로 널따란 길이 곧바로 이어졌고, 양옆으로 울창한 숲이 맞닿아 있었다.

    “신관님, 정말 마차 없이 괜찮으시겠습니까?”

    “염려는 감사하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나이가 드니 풍경을 즐기며 산책하는 시간이 어찌나 좋은지요.”

    한사코 호의를 거절한 노신관, 로샨이 놀라우리만치 빠른 걸음으로 성에서 멀어졌다. 병사들의 시선이 더는 닿지 않는 곳까지 가자, 곧바로 인적이 없는 숲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정 반경 내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로샨이 멈추어 섰다.

    도주하는 대공비 38화

    “이동 마법 개방. 신성(神聖) 자치주 헤뷔움. 대신전 중앙홀.”

    로샨이 발을 디딘 땅에서 흰 빛줄기가 솟구쳤다. 원통형의 빛기둥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가 사라졌을 때, 주변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로샨 님, 귀환을 환영합니다. 성하께서는 예언의 홀에 계십니다.”

    신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로샨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였으나, 그녀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총기 어린 눈빛도 여전했다.

    어쩌면 그녀의 경쾌한 모습은 오늘 만난 존재 때문일는지도 몰랐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왔음에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예언의 홀로 가는 발걸음이 빠르다 못해 나중에는 거의 뜀박질을 하다시피 했다. 로샨을 아는 그 누가 보더라도 깜짝 놀랄 장면이었다.

    예언의 홀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이 저만치에 보이자, 로샨이 숫제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문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마법으로 문부터 열어젖혔다.

    물결치는 연분홍색 머리칼을 발치까지 늘어뜨린 존재의 뒷모습이 로샨의 눈에 비쳤다.

    “성하!”

    그녀를 향해 로샨이 크게 외쳤다.

    예언홀의 중앙에 서 있던 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넘쳐흐르는 신성력이 함께 이동했다.

    평범한 이조차 가까이 다가서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었다. 대신관인 로샨의 예민한 감각으로는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로샨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수도 없이 마주한 힘이었음에도 매번 경이를 느끼곤 했다.

    “성하께 헤르니야의 축복을. 대신관 로샨, 소임을 마치고 귀환하였습니다.”

    “대신관 로샨. 돌아오셨군요.”

    성숙한 얼굴 속,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황금빛 눈이 예기로 반짝였다. 신 헤르니야의 첫 번째 사도이자, 신성 자치주 헤뷔움의 군주는 각성을 마치고 나면 눈 색이 바뀌었다.

    성하, 또는 성녀라 불리는 존재. 위대한 신성력의 계승자.

    호박 보석을 그대로 박아놓은 듯한 눈이 로샨과 마주했다.

    “이번엔 소득이 있었나요, 스승님?”

    “유디트.”

    친근하게 저를 부르는 성녀의 말에, 로샨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유디트는 원래 로샨의 제자였다. 신성력이 발견된 어린 유디트가 헤뷔움에 도착했던 때부터 딸처럼 길렀다. 그러다 일 년 전, 전임 성녀가 영원한 안식에 들면서 유디트가 성녀로 각성했다.

    “어찌 되었나요? 그 아이가 맞던가요?”

    유디트의 정갈한 얼굴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확인을 위해 로샨이 직접 베네비토 공국으로 움직인 직후부터 지금까지, 유디트는 예언의 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님, 어서요.”

    유디트가 아랫입술을 깊숙이 깨물며 깍지낀 두 손을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마디가 유디트의 긴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샨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뭔가 좀 그럴듯한 말로 전하고 싶었으나, 결국 로샨이 내뱉은 건 멋이라곤 하나도 없는 짤막한 대답이었다.

    “그래.”

    “…….”

    “맞더구나.”

    유디트는 잠시간 아무 말이 없었다. 그토록 고대했던 대답이었음에도 어떠한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일순, 유디트의 눈꼬리 끝에 투명한 방울이 맺히더니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윽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유디트의 얼굴은 감격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아냈다.

    “설마 이능자가 둘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한 명은 헤르니야께서 선택하신 존재이고.”

    마침내 유디트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입술을 떼었다. 젖어 반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쓸어냈다.

    “우리에게까지 비밀로 하시다니, 아델 님께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예요.”

    “적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선 아군조차 속여야 하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그들의 적은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디트와 로샨이 몸을 사리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아델의 두 딸은 끔찍한 학대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 사실조차 한 달 전 샤르투스 가문을 방문한 신관을 통해서 겨우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았더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 왔을 거예요.”

    “이 위험한 곳으로 말이니?”

    “…….”

    유디트가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로샨의 말처럼 대신전은 안전하지 않았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신관 중에도 첩자가 섞여 있었다. 분명 기밀로 다뤄졌던 극비 정보들이 어느새 새어나가 그들을 겨누는 칼이 되어 돌아왔다.

    신의 절대적인 힘으로 보호받는 예언의 홀을 제외하면, 신전의 모든 장소에 적의 눈과 귀가 돌아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그 아이들을 신전에 데려왔다면 곧바로 표적이 되었겠지. 예언의 홀이 안전하다 한들 문밖만 나가면 사방이 적인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었겠니.”

    “알아요. 미안해서 그래요. 지금껏 아무것도 못 해준 게 미안해서.”

    유디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단순히 정보만 넘기는 첩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 훈련된 암살자들이 평범한 사람인 양 원래의 본모습을 감추고 신전을 무대 삼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다.

    당장 얼마 전만 해도 신관 하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터라 신전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지킬 수 있었던 거야.”

    어떠한 언질도 없이 세상을 떠난 아델 때문에 두 사람은 지난 칠 년간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샤르투스의 두 후계가, 이능자들이, 신께 선택받은 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만 유디트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그렇죠. 하필이면 결혼 상대가 칼릭스 베네비토라니. 필립 그 개자식을 진작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유디트의 입에서 기어이 험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세상을 굽어살피셔야 할 성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신데.”

    “죽어 마땅한 사람을 살려두는 것도 신께 죄악이에요.”

    “이거 봐. 한마디도 안 지지.”

    “누굴 닮았겠어요.”

    “설마 나라는 거니?”

    “헤르니야 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디트가 과장된 몸짓으로 두 손을 깍지껴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로샨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한쪽 눈을 찡긋했다.

    로샨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것도 아델의 큰 그림이었을지 몰라.”

    “대체 왜요?”

    “그거야 모르지.”

    복잡해지는 머릿속, 로샨이 관자놀이를 세게 문질렀다.

    망할 아델.

    그녀의 이능은 예지였다. 미래를 엿보는 신의 권능.

    그런 아델의 안배를 자신이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건 살아생전에도, 지금도 매한가지다.

    “도저히 이해되질 않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델 님이 칼릭스 베네비토를 택했다고요?”

    하르메니아 제국의 건국 초기부터, 샤르투스와 베네비토 가문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다.

    “스승님도 아시잖아요. 그의 힘은 너무 위험해요.”

    샤르투스의 직계에게 내려오는 힘이 여신 헤르니야의 선물인 반면, 베네비토 가문에 내려오는 끔찍하리만치 강력한 힘은 출처가 불분명했다. 세간에서는 악마의 힘이라는 말까지도 심심찮게 나돌곤 했다.

    “절대 아델 님의 뜻일 리가 없어요. 혹시 모를 메리엘의 각성을 염두에 두고 칼릭스 베네비토가 움직인 것뿐일 거예요. 그 아이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요.”

    “그건 아니,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로샨은 하마터면 ‘그건 아닐 거다’는 말을 할 뻔했다. 주어진 상황과 조건들이 모두 유디트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조금 전 만났던 아셀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칠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뒤 처음이었다. 훌쩍 커버렸지만 어릴 적의 모습이 남아 있어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마수에게 당한 상처라는 말에 꽤 걱정했었는데 붕대를 풀고 보니 완벽하리만치 처치가 된 상태였다.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공이 직접 치료를 했다니.’

    그 칼릭스 베네비토 대공이 말이다. 머리를 해머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렇게 안일한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에요! 대공이 황가에 그 아이들을 넘길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구해야죠!”

    로샨의 복잡한 속내를 알 리 없는 유디트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외쳤다. 지금이야 대공과 황제의 사이가 썩 좋지 않으나, 또 뒷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셀라에게 여기로 오는 포털을 주었어.”

    유디트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정말요?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요?”

    “떨어뜨린 물건 주워주는 척하면서 쥐여 주었지. 개방 방법은 설명하지 못했지만.”

    로샨이 진지한 얼굴로 유디트를 응시했다. 단단한 결심과도 같은 확신이 그녀의 얼굴에 어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유디트. 그 아이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 * *

    “그래서 공주님은 동료들과 함께 성에 갇힌 왕자님을 구하러 가기로 했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왕자님! 제가 당신을 반드시 꺼내드릴 테니까요!’ 공주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어요. 다음 날 날이 밝자…….”

    동화책을 읽던 아셀라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메리엘이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잘 자, 메리엘.”

    아셀라가 동생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자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예를 갖추었다. 메리엘과 아셀라를 호위하는 기사들이었다.

    “비전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옆방이니 몇 걸음 걷는 게 고작인데도 감시가 철두철미했다. 아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비의 개인 응접실을 지나, 침실 쪽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마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쪽 것도 나쁘진 않지만 장식이 많아 불편하실 것 같으니 오른쪽 것이 낫겠어. 적당히 화려하고 소재도 부드럽고, 섬세한 자수가 비전하와 잘 어울려.”

    드레스룸과 연결된 공간에서 마고와 다른 시녀들이 수 벌의 실크 잠옷을 두고 대화 중이었다.

    열린 욕실 문틈 사이로 따끈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욕실 한가운데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욕조가 보였다.

    인기척에 아셀라를 발견한 마고가 그녀에게 재빨리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비전하.”

    “네. 그런데 이건…….”

    “목욕 시중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아셀라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39화

    “여기 있는 두 아이가 비전하의 시중을 들어드릴 겁니다.”

    앳된 얼굴의 시녀 둘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손끝이 여문 아이들이니 만족스러우실 거예요. 마사지 오일은 여러 가지로 준비해 보았는데, 특별히 좋아하시는 향이 있으신지요?”

    “잠깐…….”

    아셀라는 몸 시중에 익숙지 않았다. 샤르투스에서 지낼 때, 하녀 없이 생활했던 탓이 컸다. 몸에 남았던 흉터는 깨끗하게 제거되었으나 여전히 남에게 몸을 보이는 것도 두려웠다.

    아셀라의 망설임을 눈치챈 마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셀라가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로메인 부인. 미안하지만 목욕 시중은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예?”

    마고가 안경을 고쳐잡으며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혹 이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다른 시녀들이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째서…….”

    아셀라는 몹시 난처해졌다. 시중을 거부할 적당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에게 벗은 몸을 보이는 건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마고가 기민하게 아셀라의 표정을 읽어냈다.

    “모두 나가 있겠니?”

    “네, 부인.”

    시녀들이 모두 자리를 피한 뒤 두 사람만이 남자, 마고가 조심스럽게 아셀라에게 물었다.

    “비전하, 무례가 아니라면 시중을 물리시려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셀라는 답하지 못했다. 답할 수가 없었다.

    결혼 전까지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생활했다는 말도, 불과 얼마 전까지 멀쩡한 피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몸에 흉터가 가득했다는 말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셀라가 입술 안쪽의 여린 속살을 꾹 깨물 때였다. 마고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원치 않으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저희의 시중이 미흡했나 하여 여쭌 것입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셀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하자 마고가 온화한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나중에라도 저희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럴게요.”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고가 아셀라를 위해 욕실 사용법과 마련된 각종 비품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치곤 두말없이 자리를 비웠다.

    이제 욕실에는 아셀라 홀로 남았다.

    그녀가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침실과 마찬가지로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화려한 욕실이었다. 가장자리가 금장 된 커다란 욕조 맞은편 벽 너머로 깊은 밤의 풍경이 비쳤다.

    그녀의 공간은 저택의 삼 층이었고, 층고도 높아 웬만한 건물의 사 층과 맞먹었다. 환한 달빛이 내린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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