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71)
  • 그러나 그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 돌더니 몸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듯 뿜어져 나왔다.

    “커헉……!”

    밝아진 침실 안. 검붉은 덩어리가 섞인 황제의 피가 바닥을 적셨다.

    입으로 연신 피를 토해내면서도, 그의 떨리는 눈이 가장자리부터 피로 적셔 드는 종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유려하고 고풍스러운 필체는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

    내용은 짤막했다.

    [물맛은 좀 어떻습니까.]

    도주하는 대공비 35화

    황궁에 이유 모를 긴장이 흘렀다.

    요 며칠간 황제가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침실에서 칩거하는 탓이었다.

    황제 직속의 호위 기사들이 침소 앞에서 삼엄한 경비를 섰다. 모든 이들의 출입이 극도로 통제되었다. 황후를 비롯해 황제의 자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직 황제의 최측근인 던컨과 시종장 단 두 사람만이 침실에 드나드는 것을 허락받았다.

    “왔느냐.”

    평소와 같이 황제를 알현한 던컨이 그의 안부를 살폈다.

    “폐하, 몸은 좀 어떠십니까.”

    황제가 독에 당했다는 사실은 극비에 부쳐졌다.

    쓰러진 황제를 제일 먼저 발견한 시종장과 황제의 측근인 던컨, 그리고 황제의 침실을 지키는 개들 정도가 진실을 아는 사람의 전부였다.

    “엉망이다.”

    페르난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아직도 나머지 마력이 반응하지 않고 있어.”

    몸에 자연스레 흐르던 마력이었다. 그러나 독에 당한 뒤로는 심장 부근에서 마력이 굳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몸이 점차 회복되면서 마력의 흐름도 조금씩 되돌아오기 시작했으나,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의 절반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곧 회복되실 겁니다.”

    “아니. 내 짐작이 맞는다면.”

    페르난데가 말을 짓씹듯 내뱉었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칼릭스 베네비토가 독을 제대로 썼다.

    페르난데의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독에 면역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해독이…….”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페르난데는 황자였던 시절부터 미량의 독을 섭취해 왔다. 황위에 욕심이 있는 황족들이라면 으레 그러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제국의 정점, 가장 지고한 자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덕분에 그는 거의 모든 종류의 독에 면역이 있었다.

    단 하나를 제외한다면.

    “대공이 베네비토 가문의 비기(?器)를 썼다.”

    “그런 것이 있습니까?”

    “하루 내로 해독제를 섭취하지 않으면 죽지.”

    독의 원리도, 제조 방법도, 해독제도, 오직 베네비토의 수장에게만 전해져 내려왔다.

    페르난데가 이 독에 면역이 없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애초에 구하는 게 불가능한 독이니 따로 손쓸 방도가 없었다.

    “내가 그 독에 면역이 없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택한 거겠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에 던컨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당황한 얼굴로 페르난데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고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베네비토 가문에…… 그런 독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존재조차도 제대로 알려진 바 없는 독이니까.”

    일단 치사량의 독이 사용된 사람은 스물네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대체 무슨 재료가 사용된 것인지는 몰라도 신관의 신성력 치료조차 듣질 않았다.

    “살아남는 방법은 해독제를 마시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죽고 말아.”

    왠지 그 끔찍한 모습이 상상되어, 던컨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페르난데가 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독에 당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

    “나중엔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더군.”

    지독한 독이었다. 중독이 진행되고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끔찍한 고통이 가해졌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희생자가 중간에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살아서 깨어났기에 그 독의 가능성을 제쳐두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페르난데가 분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목숨을 건질 정도로만 독을 희석한 거다. 죽일 순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마력이 없었다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겠지.”

    마력은 때때로 살아 있는 생물처럼 기능했다.

    주인이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그의 생존과 보호를 위해 마력이 스스로 움직였다.

    페르난데의 마력은 죽어가는 주인을 위해 독의 진행을 막았다.

    “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해독제를 받아내야지.”

    지금 와서? 이미 황제의 마력은 독을 해독하면서 절반이 사라진 게 아니던가?

    던컨이 의문을 갖던 그때, 황제의 무표정한 얼굴이 일순 초조한 빛을 띠었다.

    페르난데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해독제 없이는 독이 사라지지 않아.”

    “폐하의 몸속에 아직도 독이 남아 있단 말씀입니까?”

    “추측일 뿐이지만 맞을 것이다.”

    심장에 모여 꿈쩍도 하지 않는 마력은 아마도 독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일 터.

    해독제를 마시면 독이 사라질 테니, 그의 마력도 자연스레 돌아올 것이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순순히 해독제를 내놓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이건 본보기였다. 두 번 다시 제 것에 손을 댄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명백한 경고.

    분노가 앙다문 잇새로 새어 나왔다.

    “메리엘 샤르투스에게 분명 뭔가가 있어. 그게 아니면 그놈이 구태여 이렇게까지 나올 이유가 없지.”

    페르난데에게 다른 가능성 따위는 아예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칼릭스의 분노가 아내의 상처 입은 손에서 기인했다는 것과 같은.

    “그놈은 내가 이런 상태가 될 것까지 예상했을 거다.”

    아까부터 저조하던 그의 기분은 이제 곤두박질치다 못해 땅을 뚫고 들어갈 기세였다.

    페르난데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거래를 제안할 것까지 내다보았겠지.”

    어이없이 당했다는 분노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수치심이 뒤섞이며 페르난데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황제의 불편한 심기가 던컨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페르난데는 한참 동안이나 숨을 훅훅 몰아쉬었다가 주먹을 꽉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가를 반복했다.

    아마 그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침실의 집기는 남아나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황제는 비로소 진정했다.

    “하지만 그놈이 할 수 있는 일도 여기까지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 덕분이었다.

    “내 능력이 필요할 테니까.”

    페르난데에게 ‘그것’이 있는 한.

    그리고 칼릭스 베네비토에게 ‘그것’이 필요한 한은.

    “적어도 그놈이 나를 죽이지는 못해.”

    그것이야말로, 이 순간 황제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0. 베네비토 대공성

    행렬은 밤새 쉬지 않고 이동했다.

    깜빡 잠이 든 아셀라가 눈을 떴을 땐 아침 햇살이 마차 안으로 은은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온통 잿빛 일색의 거대한 성이 저 멀리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베네비토 대공성이었다.

    먼 거리에서도 육중한 성문이 눈에 띄었다. 네모반듯한 돌로 차곡차곡 쌓인 성벽은 어떤 침입도 허용하지 않을 듯 견고해 보였다.

    성문을 지난 이후로도 직선으로 쭉 뻗은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렸다. 넓은 길 양옆으로 우람한 나무들이 마치 숲처럼 빼곡했다.

    그러다 시야가 탁 트이면서 엄청난 규모의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셀라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세상에…….”

    수백여 종의 나무 사이로 섬세하게 조각된 조각상들이 보였다.

    정원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긴 연못이 있었다. 연못의 끝에 자리한 저택이 마치 물 위에 뜬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풍스러운 저택은 멀리서 보기에도 웅장하고도 화려했다. 네모난 창 가장자리를 둘러싼 번쩍이는 노란빛은 분명 금이었다.

    예상을 한참은 뛰어넘는 저택의 위용에, 아셀라는 벌써부터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메리엘, 일어나렴.”

    “……우웅.”

    “다 왔어. 곧 마차에서 내릴 거야.”

    아셀라가 잠결에 눈을 비비적거리는 동생을 도닥였다. 메리엘이 잠투정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에겐 답답하고 고생스러웠을 여정이었다. 그런데도 칭얼거리거나 힘든 기색 한번 없이 와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조금만 더 참으면 방에서 쉴 수 있을 거야.”

    “응, 언니.”

    마차가 멈추었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아셀라가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메리엘이 라이젠의 도움을 받아 먼저 내리고, 아셀라가 뒤따라 내리려던 때였다.

    예상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놀랍게도 그녀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칼릭스였다.

    아셀라가 당혹한 낯빛을 숨기지 못하고 문가에서 주춤거렸다.

    “아셀라.”

    며칠 만에 마주한 사내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읊는 울림이 묘하여 아셀라가 숨을 삼켰다.

    “내 손을 잡아.”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심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해 뻗어 있는 손.

    짧은 머뭇거림 끝에, 아셀라가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남자가 그녀의 손을 느리게 감싸 쥐더니 계단 아래로 천천히 이끌었다.

    마침내 땅에 두 발을 디딘 아셀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그녀가 선 곳까지, 대공성의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시립해 있었다. 마치 병사들이 도열한 듯한 일사불란함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인상 좋은 노집사가, 그들 앞에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전하, 이분이…….”

    “아셀라 베네비토, 내 아내다.”

    칼릭스의 말에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조아렸다.

    “대공비가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공손히 답한 집사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알았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갯짓한 칼릭스가 시선을 돌렸다.

    아셀라는 말문조차 잃은 채 눈앞의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 뒤늦게서야 그의 시선을 눈치챘다.

    잘게 흔들리는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칼릭스는 작은 충동을 느꼈다.

    아주 잠깐, 그녀를 놀려주고 싶다는.

    일직선으로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그린 듯이 휘어지며 수려한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어디로 가겠나?”

    “네?”

    영문을 모르는 눈동자가 동그래지는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시선을 맞추며 가까이 다가가자 맑은 물빛의 눈동자에 제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당황하여 눈을 파르르 떨면서도, 뒷걸음을 치지도 그렇다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묘한 만족감이 일었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선택해.”

    아셀라가 몸을 움찔 떨었다.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남자의 입술이 몸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귓가를 쓸어내리듯 다가오는 더운 숨결과 진동, 지독하리만치 낮은 목소리와 짙은 향.

    현기증마저 일었다.

    “그대의 침실? 아니면.”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우리의 신방?”

    도주하는 대공비 36화

    아셀라가 제때 답하지 못한 건 비단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경험한 바 없는 아찔한 자극에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눈을 끔벅거리며 들은 말을 되짚어야 했다. 그리고.

    ‘……!’

    이내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던 얌전한 얼굴에 당황이 차오르자, 칼릭스는 묘하게 즐거워졌다.

    불현듯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녀의 다른 표정들이 궁금해졌다. 이를테면 즐거울 때나 행복할 때, 기쁠 때의 얼굴 같은 것.

    “언니, 신방이 뭐야?”

    맑고 청량감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셀라가 황급히 고개를 내리자 메리엘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갸웃거리고 있었다.

    “메리엘, 그건…….”

    밀려드는 당혹감에 아셀라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어린아이에게 무어라 설명을 해야 할까.

    아셀라가 이도 저도 못 하고 머뭇거리던 때였다.

    “아! 알겠다!”

    일순, 메리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공 전하께서 새로운 방을 만드신 거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뿌듯한 표정을 짓는 메리엘을 향해, 아셀라가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그 와중에 스스로 알아냈다는 사실에 감격한 메리엘이 신이 나서 외쳤다.

    “언니랑 전하는 이제 부부니까 같이 지내려고! 친해지려면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놀아야 하잖아.”

    “아니, 그게…….”

    “그런데 어른들은 뭐 하고 놀아?”

    “풉……!”

    별안간 한쪽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해맑게 웃음 짓던 메리엘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지크.”

    옆에 서 있던 라이젠이 경고하듯 이름을 불렀으나, 지크의 입이 열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지크가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시겠지만, 신혼부부란 무릇 눈만 마주쳐도 불꽃이 튀는 법이죠. 낮이고 밤이고 매일같이……. 악! 왜 때려!”

    지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으나, 라이젠은 친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저 나불대는 입을 그대로 뒀다간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터.

    “헛소리 마라.”

    “내가 뭘!”

    지크가 맞은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눈을 흘겼으나, 그 따가운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한 라이젠이 무심히 덧붙였다.

    “전하께 귀염받고 싶으면 계속해 보든지.”

    “……헉!”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달은 지크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파드득 몸을 떨었다.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뻣뻣해진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히, 히익……!”

    아니나 다를까, 칼릭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신종 자살 수법인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 나간 자식. 친구를 평하기엔 퍽 박한 말이었으나, 오늘도 지크의 머리와 몸통 분리를 막은 라이젠에겐 그리 말할 자격이 있었다.

    몇 분 더 내버려 뒀다면 지크의 뒤통수를 후리는 건 제 손바닥이 아니라 주군의 잘 벼려진 검이었을 거라는 데, 라이젠은 집무실 책상 밑에 숨겨둔 크랜베리 사탕을 걸 수도 있었다.

    때마침, 집사가 그 짧은 틈에 용케 상황을 파악하고는 노련하게도 적절한 말을 건넸다.

    “전하, 메리엘 아가씨의 방도 준비되었습니다.”

    “그런가.”

    “예, 그쪽을 먼저 확인하심이 어떠하실지요?”

    칼릭스가 슬쩍 시선을 돌려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당황이 가시지 않은 뺨은 달아오른 채였고, 사슴 같은 목덜미까지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이쯤 해둘까. 그녀의 당황한 모습은 퍽 즐거웠으나 그렇다고 과할 정도로 짓궂게 굴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편이 더 낫겠군.”

    심하게 몰아붙였다가 혹여나 눈물이라도 글썽이면 어쩌나. 그리되면 곤란한 건 자신이었다.

    울면 우는 것이지 사실 그가 곤란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도.

    “그대 동생의 방을 사용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꾸몄다는데, 가보지 않겠나?”

    물음을 받은 아셀라가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박였다.

    잠시 후,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의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의 입가에 스치듯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파비안, 네가 책임지고 안내하라.”

    “예, 전하.”

    집사가 대공을 향해 다시금 허리를 숙였다. 충직한 신하는 주인의 명을 완벽하게 이행할 터. 칼릭스는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앗……!”

    탄성 같은 소리에 칼릭스가 돌연 멈추어 섰다. 어찌할 바 몰라 쩔쩔매는 아셀라의 모습이 시야에 담기자, 무심하던 붉은 눈이 언뜻 의문을 품었다.

    자신이 그때까지도 아내의 손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잠시 뒤였다.

    “아.”

    칼릭스가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손을 놓았다.

    잠깐 에스코트를 한다는 것이 지금껏 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는 칼릭스조차 놀라움을 느꼈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누군가와의 접촉을 극도로 싫어했고, 그래서 황실 연회에도 파트너 없이 참석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장갑 너머로 느껴졌던 손의 감촉이 미묘하게 남아 심장 한구석을 간질거렸다.

    작고 보드랍고 따뜻한. 가능하다면 조금 더 쥐고 있어도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언니 손 따뜻해!”

    그러나 매정한 아내는 그에게서 거둔 손을 이미 동생에게 내준 뒤였다. 아셀라의 손을 차지한 메리엘이 잔뜩 신이 나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칼릭스는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묘한 열패감을 느껴야 했다.

    다행히 그 기분이 오래가진 않았다. 성문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와 칼릭스의 앞에 부복하며 중요한 소식을 전한 탓이었다.

    “전하, 황궁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제때 왔군.”

    칼릭스가 무미건조한 어투로 빈정거렸다. 성에 도착하자마자 들이닥친 전령이라니,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혔다. 그가 아셀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첫날이니 함께 식사라도 할까 했는데, 어렵겠어.”

    “괜찮아요.”

    아셀라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도저히 대공과 마주 앉아 식사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던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방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어쩐지 그녀를 생각했다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아셀라는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졌다. 쉬이 입술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녀의 귀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중에 보지.”

    칼릭스가 가볍게 고갯짓했다. 주인의 신호에 파비안이 재빨리 다가왔다.

    “비전하, 아가씨, 모시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셀라가 이내 파비안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쩐지 누군가의 시선이 길게 따라붙는 듯했지만, 아셀라는 자신의 착각이려니 애써 고개 저었다.

    * * *

    “와아!”

    방문이 열리자마자, 메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셀라가 메리엘과 깍지낀 손에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이가 우다다다 방 안으로 뛰쳐들어가는 걸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동화 속에서 봤던 황녀님 방 같아!”

    메리엘이 연신 탄성을 터뜨리며 외쳤다.

    산뜻한 노란색 실크 벽지에 연두색 커튼이 싱그러운 느낌을 주었다. 가구는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으로 배치되어 화사했고, 바닥에는 복슬복슬한 러그가 깔려 포근함을 자아냈다.

    널따란 침대에는 섬세한 레이스 자수가 놓인 캐노피가 풍성하게 달려 있었다.

    아이를 위한 온갖 물품도 함께였다. 한쪽 벽에 자리한 책장에 책이 빼곡하리만치 가득했다. 다양한 놀잇감은 물론이고, 악기까지 종류별로 갖춰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메리엘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건, 방 중앙에 놓인 커다란 곰 인형이었다. 아이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만져봐도 돼?”

    “그럼.”

    메리엘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 제 몸보다 커다란 곰 인형에 폴짝 뛰어들었다. 잔뜩 신이 난 동생의 모습에, 아셀라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여기가…….”

    아셀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희게 질린 안주인의 안색에 파비안이 다급히 물었다.

    “혹 마음에 드시지 않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

    조금 전 메리엘의 방을 봤을 때부터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었다. 그러나 지금, 아셀라가 깨달은 건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이었다.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화려함에 그녀는 그만 말문을 잃고 말았다.

    한편, 대공성의 유능한 집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극도의 초조감에 입술을 질근질근 씹어대던 파비안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비전하의 취향을 몰라, 저희가 임의로 마련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

    “부족한 점을 말씀만 해주시면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무려 이십여 년 만의 대공비였다.

    그들의 주인이 결혼을 결정한 지난 한 달여간, 파비안을 위시한 대공성의 사용인들이 뼈를 갈아가며 이 공간을 준비했다.

    기존 방에 더해 옆 방을 터서 공간을 넓혔고, 가벽을 세워 응접실과 침실을 분리했다. 벽지며 창틀, 문까지 아예 골조만 남기고 모조리 새로 교체했다.

    사용된 가구와 침구, 커튼, 작은 소품까지 모두 최고급으로만 엄선했다. 황실에 들어가는 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 크리스털 꽃병 속 흐드러진 작약에 이르기까지 심혈을 기울였을 정도였다.

    “……비전하.”

    여전히 굳은 얼굴의 안주인을 지켜보는 파비안의 입이 긴장으로 바싹바싹 말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머릿속이 표백된 것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큰일이다!’

    나이 지긋한 파비안이 베네비토 가문에서 일한 지 어림잡아 삼십 년이 넘었다.

    지금의 대공은 물론이거니와 선대공이 메리엘의 나이만 할 때부터 모셨다. 그만큼 주인의 기분을 살피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건, 그에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파비안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베네비토의 혈족은 대대로 냉정하고 잔혹했다. 특히나 현 대공은 핏줄의 특성을 유독 진하게 타고난 이였고, 탁월한 능력만큼이나 성정이 모질고 몰인정했다.

    ‘분명 전하께서 용서치 않으실 텐데…….’

    아까 대공 부부를 맞이할 때 분명히 보았다.

    차갑다 못해 냉기가 풀풀 흐르던 주인의 시선이, 아내를 향할 때만큼은 놀라우리만치 풀어지곤 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어 제 눈을 의심했으나, 아니었다.

    덕분에 파비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 사용인의 운명이 대공비의 입에서 나올 말 한마디에 달렸다는 것을.

    파비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지옥 불에 발을 내딛는 심정으로 그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37화

    “비전하, 제발, 무슨 말씀이라도 좋으니…….”

    “아, 미안해요.”

    퍼뜩, 정신을 차린 아셀라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아름답네요. 제게 과분할 정도로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파비안이 답지 않게 크게 외쳤다. 아셀라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지자, 그가 얼른 덧붙였다.

    “부족함 없이 준비하라는 전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필요하신 건 무엇이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명만 해주십시오.”

    “그리할게요.”

    파비안이 그제야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펴며 한숨을 돌렸다. 때마침 열려 있던 문밖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그가 반색하며 말했다.

    “아! 드디어 도착한 모양입니다, 비전하.”

    설명을 위해 파비안이 막 입을 떼려던 그때,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셀라에겐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채도가 낮은 금발을 하나로 정갈하게 틀어 올리고, 제비꽃을 연상시키는 보라색 눈에 은테 안경을 쓴 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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