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마님, 같이 가요!”
케이트가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뒤에서 외쳤다.
나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게 너도 바지를 입고 나오지 그랬어? 치마 입고 빨리 걷는 건 불편하잖아? 속도도 잘 안 나고.”
“전 치마가 더 편해요. 바지는 껴서 싫더라고요.”
케이트가 후후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 이마도 마찬가지였는지 케이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마워.”
우리는 잠시 그늘에 선 채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물도 한 모금 마시며 목도 적셨다.
케이트가 하아, 하아…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전 치마 문제보다는 운동 부족이 문제인 것 같아요. 마님 산책에 동행하는 일정을 주디한테만 맡겼더니….”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 요즘 계속 주디랑만 산책했었구나.”
“네, 맞아요. 그나저나 마님께선 거의 달리는 수준이세요! 어느새 걸음이 이렇게나 빨라지셨대요? 대단하세요!”
케이트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처음 엘프윈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땐 방안에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이젠 야외에서 거의 뛸 듯이 걷는 게 가능해지다니!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더 열심히, 더 꾸준히 노력해야지,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주디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님! 마님!”
대체 어떤 용건이기에 여기까지 달려와서 전하는 걸까?
안 좋은 일인 건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심장이 덜커덩거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
“마님! 하아, 하아…!”
“일단 물부터 좀 마셔 봐…!”
주디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케이트가 건네는 물병을 받아 벌컥벌컥 물을 흡입하듯 마셨다.
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안정을 되찾은 주디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한 시간 후면 공작성에 바로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그이가? 그이라면 내일모레 돌아온다고 했잖아?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아니요. 잘못 알고 계신 게 아니라 공작님께서 원래 일정보다 조금 앞당기신 것 같아요.”
“갑자기?”
“네, 갑자기요. 지금 막 수도에 도착하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황궁에 들러서 업무 보고를 하고 바로 공작성으로 돌아오신다고 해요.”
“어머! 그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네!”
내 두 다리는 어느새 건물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크론이 돌아온다!
일주일 동안 이어진 출장을 끝내고!
일주일 만에 보는 남편에게 땀에 절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케이트! 주디! 서두르지 않고 뭐해! 빨리, 빨리! 목욕물 준비하고! 드레스 준비하고! 서둘러야지!”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하녀들을 향해 외쳤다.
마음은 바빴지만 두 다리만은 가벼웠다.
거의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님! 같이 가요! 좀만 천천히 같이 뛰면 안 될까요?”
“마님!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시면 어떡하나요!”
뒤에서 하녀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속도를 늦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 * *
잠시 뒤.
“엘프윈!”
“제크론!”
제크론은 마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내게로 달려왔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1년 만에 재회하는 이산가족이라고 의심했으리라.
그가 나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역시 당신이 있는 집이 최고야!”
“어서 와요. 내일모레 돌아오는 줄 알았는데 이틀이나 빨리 왔네요? 당신 또 멀론 경을 닦달한 거 아니죠?”
“아휴, 말도 마십시오, 마님! 아침부터 밤까지 어찌나 들들 볶던지요! 빨리 끝내라! 더 빨리 끝내라!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1분 1초도 아깝다! 아휴, 제 귀에 딱지가 앉았을 정도입니다.”
곁에 섰던 보좌관 멀론 경이 투덜거렸다.
제크론이 몸을 풀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매 순간 놀랐다니까! 조쉬는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최고의 보좌관이야! 결국 그 어려운 걸 다 해내더라고!”
멀론 경의 어깨를 툭툭 토닥거리는 제크론의 손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는지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윽, 멀론 경은 입을 앙다물며 제크론의 칭찬 혹은 문책의 손길을 견뎌 냈다.
“일정을 이틀이나 단축시켰으니 앞으로 이틀간 휴가를 쓰도록 해. 휴가비도 챙겨 줄 테니.”
“저, 정말이십니까, 각하? 물론 저희 조원 모두에게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멀론 경이 곁에 섰던 조수 두 명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제크론은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답했다.
“물론이지! 그걸 말이라고!”
순간 멀론 경과 조수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던 걸까. 멀론 경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혹시 저희 휴가 보내시고 그대로 영영 다시 부르지 않을 작정이신 건… 설마 아니시죠, 각하?”
“…….”
하지만 제크론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멀론 경은 울상인 얼굴로 나를 봤다.
“설마 그럴 리가요. 걱정 마세요, 멀론 경. 공작님이 부르지 않으시면 제가 부를게요. 저도 곧 바빠질 예정이라서요. 그래서 비서가 필요할 것 같거든요.”
“우와, 마님의 비서 말씀이십니까? 정말이십니까? 그건 더 좋습니다!”
멀론 경이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제크론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멀론 경은 바로 어깨를 움츠렸다.
이내 내게 다시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는 제크론이었다.
* * *
째앵!
샴페인 잔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늦은 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2층 테라스에 앉은 나와 제크론은 그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중이었다.
곳곳에 놓인 조명 덕분에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은 한눈에 보였다.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은 제크론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일은 세르안이랑 셋이서 소풍이라도 갈까?”
“소풍이요? 당신 정말 이틀 동안 쉬기만 하는 거예요?”
“물론이지. 일정 줄이느라 열심히 굴러다녔으니 휴식이 필요하다고.”
“당신이 아니라 멀론 경이 굴렀겠죠!”
“조쉬가 구르면 나도 같이 구르는 거라고. 그런데 당신 은근히 조쉬 편만 드네? 나 좀 서운해질 것 같은데?”
제크론이 눈꼬리를 내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근히 멀론 경의 편을 든 게 아니라 대놓고 들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이런 데는 눈치가 별로 없는 제크론이니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에이, 설마요. 제가 멀론 경의 편만 들 리가 있어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멀론 경의 편을 드는 게 결국 당신을 위한 일이잖아요.”
“흐음, 그런가?”
제크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샴페인을 들이켰다.
눈꼬리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을 보며 서운한 감정은 이미 다 풀린 것 같았다.
역시 쉬운 남자였다, 내게만은, 무한대로.
“소풍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어디가 좋겠어? 가보고 싶은데 있어?”
“흐음… 그러게요. 어디가 좋을까요?”
나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여러 곳을 떠올려 봤다.
수도에 예쁘게 조성된 공원에 가는 게 나을까?
아니면 한적한 시골 별장에 가는 게 나을까?
‘우리 세르안이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래도 한적한 곳이 좋으려나?’
어느새 곧 두 살이 되는 세르안은 아장아장 넘어지지 않고 잘 걸을 수 있게 됐다.
말도 곧잘 해서 간단한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많이 컸지만 그래도 아직 어렸다.
그래서 하루 종일 마차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곳으로의 여행은 역시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알타라스를 타고 가면 되니 제국 내 웬만한 곳은 다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제국 지도를 요리조리 뜯어 보고 있을 때였다.
내 쪽을 보고 있는 제크론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났어요?”
“엘프윈 당신만 괜찮다면….”
제크론이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말꼬리를 흐렸다.
대체 어디를 가고 싶어서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의아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가고 싶다는 데라면 분명 좋은 곳일 것 같아요! 자, 그러니까 주저하지 말고 말해 봐요, 어서!”
“…서덜랜드, 당신 부모님 댁에?”
“아….”
제크론의 입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지명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서덜랜드는 제국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엘프윈의 친정인 하이그린 백작가의 영지였다.
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엘프윈의 부모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말았다.
“제크론, 당신 휴가는 고작 이틀뿐인데 서덜랜드까지 가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휴가 일정은 일주일 더 늘리지 뭐.”
“당신도 잘 알잖아요. 부모님이 워낙 바쁘신 거. 그래서 작년에 우리 세르안 첫 번째 생일 파티에도 참석하지 못하셨고요.”
“당신 말이 맞아. 하긴 워낙 바쁘신 분들이긴 하지. 그런데 얼마 전에 안부 편지를 보냈거든.”
“안부 편지요? 당신 그런 얘기 안 했잖아요.”
제크론이 서덜랜드에 계신 부모님과 따로 연락하며 지낸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응. 가끔 편지 주고받고 있었어.”
“…그랬군요.”
“그래서 답장을 받았는데 보름 전에 귀국하셔서 요즘은 영지에서 지내고 계시다고 하더군.”
“…….”
나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잘못하면 유리잔을 떨어뜨릴 것 같아서였다.
제크론은 내가 긴장한 모습에 다소 난감해졌는지 열심히 내 눈치를 살피며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당신이 내키지 않으면 꼭 갈 필요는 없어. 아무리 알타라스를 타고 간다고는 하지만 좀 멀기도 하고 말이지.”
“…….”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우리 결혼한 지 이제 3년인데 그 동안 한 번도 못 뵀잖아. 우리 부모님은 여러 번 뎀프샤에 방문하셨지만 당신 부모님은 그러지 못하셔서…. 그게 좀 당신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그건 초대할 때마다 부모님이 바쁘다고 하셨기 때문이잖아요.”
순간 울컥해서 제크론에게 대꾸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동안 나도 부모님과의 만남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이면 안부 편지를 보내면서 뎀프샤에 초대한다는 내용을 꼭 넣었다.
작년 세르안의 첫 번째 생일 때도 그랬다.
하지만 매번 다른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오지 못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또 조금은 안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부모님을 만나게 된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엘프윈의 몸에서 눈을 뜬 뒤로 부모님을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이번에 처음으로 그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훅 밀려왔다.
내가 언성을 높이자 놀란 제크론이 두 손을 내저으며 나를 달랬다.
“아, 물론 그랬지! 그건 나도 아주 잘 기억해.”
“…….”
“그냥 심각하게 생각하고 한 말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마. 난 무조건 당신 뜻에 따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