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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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화

    다음 날. 

    오전 늦게까지 늦잠을 잔 나는 겨우 눈을 떴다. 

    눈을 뜨긴 했지만 몸을 일으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귀족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처음 치른 큰 행사였기에 몸에 무리가 가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큰 행사도 아니지. 가족과 친한 지인만 초대했던 한 살배기 아이의 생일 파티였으니까.’

    친한 지인들만 초대한 소규모의 파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사를 치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세르안의 첫 생일 파티라는 타이틀은 거대해서 실수 없이 제대로 하고 싶다는 욕심에 무리한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침대 위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한참 동안 뭉그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케이트와 주디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깨셨군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많이 피곤하시죠?”

    “응, 아무래도 좀 피곤하네.”

    몸을 일으키며 내 전속 하녀들을 맞았다. 

    케이트의 손에 들린 은쟁반에는 간단한 아침 식사가, 주디의 손에 들린 바구니에는 편지 더미가 놓여 있었다. 

    평소보다 다섯 배나 많은 편지의 양에 놀란 나는 기함했다. 

    “어머, 그게 다 뭐야?”

    “뭐긴요? 편지들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건데?”

    “어제 파티에 오셨던 손님들께서 보내신 거예요. 파티 초대에 감사했다고, 즐거웠다는 내용일 거예요, 아마.”

    주디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두 줄은 어제 오셨던 분들이 보내신 편지들이고, 마지막 한 줄은 그 외의 분들이 보내신 편지들이에요, 마님.”

    “미리 분류까지 해 준 거야? 고마워, 주디.”

    “마님 덕분에 글을 읽을 수 있게 됐는데, 이 정도는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면서 해야죠!”

    “제 손이 더 빨랐다는 걸 기억해 주셔야 해요, 마님.”

    곁에 섰던 케이트가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공작성의 고용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글공부는 이제 시작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참여했던 고용인들은 모두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글공부가 아닌 문학 공부를 한다고 들었다. 

    시와 소설을 읽으면서 서로 느낀 점을 말하거나, 직접 써 보기도 한다고 했다. 

    수업 덕분에 점점 똑똑해지는 공작성의 고용인들이었다. 

    ‘나도 뒤처지면 안 되지!’

    나는 얼른 신문을 찾아들었다. 

    내가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케이트가 알아서 식사 테이블 한구석에 신문들을 쌓아 뒀다. 

    빙의한 이래로 지금까지 매일매일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내 소중한 하녀들이었다. 

    “오늘도 고마워.”

    “별말씀을요.”

    “저희도 항상 감사합니다.”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들이 오갔고, 하녀들은 곧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나는 홍차를 홀짝이며 신문을 펼쳤다. 

    매일 세 종류의 신문과 두 종류의 가십지를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는 것은 아니고 각 기사마다 제목과 첫 한두 문단 정도를 읽는 정도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오늘도 세계는 평화롭네.”

    신문을 몇 장 넘기던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실 내가 전생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신문을 지금은 매일 빼놓지 않고 읽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전쟁의 조짐을 파악하기 위해서. 

    3년 전, 원래는 각기 다른 세 왕국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지금의 제국이 만들어졌다. 

    왕국은 합쳐졌지만 온전한 통합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원작에 따르면 그 이후로도 제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내전이 터지고 만다. 

    그 시기가 바로 지금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짐이 하나도 안 보인단 말이지.”

    흐음….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신문을 살폈다. 

    그때였다. 

    한 기사가 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요소킨 운동에 대한 기사였다. 

    신문에 얼굴을 처박고 꼼꼼히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오호! 드디어 세워지는구나!”

    수도 라하브에서 차츰 유명세를 타고 있는 요소킨 운동이 과거 렐바크 왕국의 수도였던 살다나에서도 수업을 시작한다는 기사였다. 

    앨리슨의 주도하에 이루어 낸 업적이었다. 

    쉐리던에서 시작된 운동이 과거 렐바크 지역까지 퍼져 나가는 것은 의미가 컸다. 

    앨리슨이 말하기를 특히 렐바크 사람들은 보수적인 경향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했다. 

    그래서 앨리슨이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애를 많이 썼다. 

    살이 쏙 빠졌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렇게 성과가 나와서 너무 잘됐네!’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였다. 

    이번 일을 시초로 해서 요소킨 운동이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가길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이번 일을 시초로 해서 과거 렐바크 지역과 과거 쉐리던 지역 간의 문화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길 기원했다.

    “축하 편지와 선물을 보내야겠네!”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지에 해당 내용을 적었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사이이지만 이런 중요한 일은 콕 집어서 편지로 축하해 주는 게 친구의 도리였다. 

    다음 장으로 넘기니 또 아는 얼굴이 나왔다.

    “어머, 브렌트다!”

    재빨리 기사를 읽었다. 

    몇 주 전, 공작성을 나가 라하브에 자리 잡은 브렌트가 이번에 전시회 투어를 시작한다고 한다. 

    “우와…. 전시회 투어라니! 엄청 대단한 거 아닌가?”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라하브에서 시작한 전시회는 제국 곳곳을 돌 예정이라고 했다. 

    현재 두 번째 장소로 거론되는 지역은 과거 허드플란 왕국의 수도였던 코언이었다. 

    쉐리던 출신의 화가가 코언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오호, 처음이라니! 브렌트에게도 축하 편지와 선물을 보내야겠어!”

    메모지에 브렌트의 이름도 적었다. 

    나와 가까운 지인들의 이야기를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되는 경험은 신기했다. 

    그리고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내 친구들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나, 이런 사람들이랑 친하다고!’라고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핸더슨 공작가와 도론 공작가에 대한 소식이 아예 없네.’

    신문을 몇 번 뒤적여봤지만 역시 그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징조였다. 

    원작에서 두 가문은 내전이 발발하는 시점에 외교 로비스트로서 활약했다. 

    그러므로 두 가문이 잠잠하다는 소리는 제국이 평화롭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하리라. 

    “이대로 영영 존재감 없었으면!”

    후후, 소망을 혼잣말로 내뱉으며 신문을 넘겼다. 

    그리고 한 시간 더 신문을 읽고 나서야 바구니 안에 쌓인 편지 뭉치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읽어야 할 편지도 많았고, 답장해야 할 편지도 많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 열중해서 읽었던 신문들과 앞으로 읽어야 할 편지들을 번갈아 봤다. 

    내 지인들은 다양했고, 지인들의 활동 영역 또한 넓었다. 

    과거 쉐리던 지역뿐만 아니라 과거 렐바크 지역과 과거 허드플란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활동 영역을 자랑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분명… 교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 이어졌다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내 친구들만 해도 그랬다. 

    거리끼는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서로 비슷한 부분은 비슷해서 좋아했고, 서로 다른 부분은 달라서 신기해했다. 

    “흐음….”

    곰곰이 생각에 집중했다. 

    좁게 보면 그들은 내 친구이지만 넓게 보면 그들은 모두 각 영지의 영주였고, 다른 귀족의 친구이자 가족, 친척이었다. 

    “그래, 다 연결되어 있지… 어쩌면….”

    갑자기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쩌면 내가 원래 엘프윈과는 달리 친구들을 고루고루 사귄 덕분에 제국 내 분쟁이 줄고 화합의 분위기가 싹틔웠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래서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쯤 발발했어야 할 내전이 감감무소식이라는 생각.

    “나 뭐라는 거니, 참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어 피식, 웃음이 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편지로 손을 뻗었다. 

    바구니 가장 위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든 나는 봉투에 적힌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베로니카에게서 온 편지다!”

    허겁지겁 봉투를 뜯었다. 

    봉투를 뜯고 있는 시간도 아까워 서두르다 보니 자꾸만 손가락이 헛돌았다. 

    겨우 봉투를 다 뜯고 편지지를 펼쳤다. 

    베로니카의 정갈한 글씨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속 어딘가가 치유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현재 대신관과 함께 대륙 곳곳의 신전을 순방하는 중이었다. 

    베로니카는 대륙의 역사상 몇십 년 만에 나타난 성녀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할 일이 많았다. 

    모두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고, 보고 싶어 했다. 

    나는 잠시 편지를 내려놓고 베로니카와 대신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성녀의 타이틀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아니, 성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신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베로니카의 눈동자도 동그랗게 커졌다.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채 이곳으로 왔어요. 하지만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제게 특별한 신성력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성녀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저를 가둘 것 같다고 생각해요.”

    나는 준비해 온 말을 또박또박 이어나갔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제 자리에서, 제 주위 사람들과 함께요.”

    내 설명을 곰곰이 듣고 있던 베로니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역사책에서 읽은 적 있어요. 초대 성녀님께서도 같은 역할을 자처하셨다고 했어요. 특별한 이능이 발현됐던 게 아니셨죠.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작은 변화를 일으키셨던 분이라고요. 그렇죠, 대신관님?”

    “네, 초대 성녀님께서는… 그러셨습니다.”

    대신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 힘든 눈치였다. 

    성녀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면 세상 사람 모두가 우러러보고 사랑할 텐데 그런 자리를 마다하다니!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베로니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쩌면 위메나 님께서 대신관님의 기억을 그대로 두신 이유는 공작 부인의 의중대로 살아가는 것을 돕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말이에요.”

    대신관은 입을 꾹 닫은 채 생각에 잠겼다. 

    베로니카의 말을 곱씹으며 위메나 신의 음성을 다시 떠올리는 중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군요. 위메나 님께서는 기억하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도우라고 하셨죠. 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께선 지금 그대로 계셔 주십시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그리고 베로니카 성녀님.”

    나는 곧 다시 베로니카에게 받은 편지에 집중했다. 

    지난달에 시작한 순방 일정은 일 년이 내리 걸릴 예정이라고 했다.

    차근차근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베로니카는 지금 케인스 왕국이라고 했다. 

    작은 도시에 있는 작은 신전들을 우선 방문한다고 했다. 

    한 마을에 갔는데 마침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는 임산부가 있어 그녀에게 신성수 치료를 시행했다고 했다. 

    …그리고 치료 바로 다음 날, 건강하게 출산한 아이를 안아 볼 수 있었어요. 핏덩이 같은 갓난아기와 땀범벅인 산모를 보는데, 공작 부인과 도련님이 생각났지 뭐예요. 죽을 고비를 넘느라 고생했던 공작 부인을 떠올리니 눈물이 났어요.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살아 줘서 고마워요,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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