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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142)

122화

출발하기 전에 미리 예약한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작은 도시에 있는 3층짜리 여관이었는데, 보안을 위해 제일 위층 전체를 예약한 모양이었다. 

기사들은 순번을 정해 3층 복도와 건물 밖에서 보초를 설 예정이라고 했다. 

케이트와 주디의 도움으로 재빨리 목욕을 마친 나는 바로 침대로 향했다. 

공작성의 내 침실에 비해 침대는 작았고, 침구들은 표면이 거칠었지만 피곤한 몸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꿈을 꿨다. 

제크론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는 화살로 인한 부상으로 몸통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꿈인 걸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불러 봤다. 

“제크론!”

내 부름에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의 눈이 범상치 않았다. 

원래의 푸른 눈동자 대신 붉은 눈동자가 번득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마물의 독에 중독됐다는 뜻이잖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크론의 왼쪽 팔은 이미 사람의 팔이 아니었다. 

검고 울퉁불퉁 흉측한 피부로 둘러싸인 마물의 팔이었다. 

“아… 안 돼!”

나는 제크론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앞에까지 다가간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제크론! 날 알아보겠어요? 제크론! 나예요, 엘프윈! 제크론!”

제크론은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붉은 눈동자가 의아하게 빛났다. 

제크론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다 마물의 독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눈동자가 붉게 변하고, 몸이 서서히 마물처럼 변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기억을 잃는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나 보다. 

제크론의 등을 뚫었던 화살촉에는 마물의 독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제크론! 나란 말이에요! 흐흑… 당신 아내, 엘프윈이라고요! 날 기억해 내요! 흐윽… 기억하란 말이에요!”

목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외쳐 댔다. 

하지만 모든 게 헛수고였다. 

제크론은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붉은 눈동자에서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 제크론…!”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   *   *

눈이 번쩍 떠졌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느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여관방의 어두운 실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꿈이었구나! 다행이야, 꿈이어서!’

흐, 흐흐…. 힘없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누군가 들었다면 미친 사람의 웃음소리라고 여겼을 웃음이.

눈가를 만져 보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잠꼬대를 하면서 소리를 질렀던 모양인지 목이 칼칼했다. 

“아, 아… 크흠.”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선 나는 테이블로 가서 물을 따라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식히면서 넘어가자 좀 살 것 같았다. 

“아, 아… 아.”

목소리를 다시 내 봤지만, 역시 조금 쉰 것 같았다. 

‘대체 자면서 얼마나 소리를 질러 댔던 거야?’

스스로가 어이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느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열을 식힐 요량으로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불어왔다. 

까만 하늘에 걸린 반달이 선명했다. 

달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밤하늘 위로 꿈의 잔상이 나타났다.

붉은 눈동자를 한 채 나를 바라보던 제크론의 텅 빈 시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내 시야를 따라다니는 잔상을 없애 버릴 생각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려 심호흡을 했다. 

“흐읍… 하아!”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을 채우자 기분이 서서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어금니를 까득 깨물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단지 꿈이었을 뿐이야!’

소설을 읽은 탓에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이미지. 

육체는 피곤했고, 정신은 걱정으로 가득했던 탓에 꿈으로 발현됐을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단지 꿈.

‘내일 제크론을 만나는 거야!’

날 보며 싱긋 웃어 줄 제크론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웃음은 잠시뿐, 곧 잔소리를 퍼부을지도 몰랐다.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먼 길을 온 것에 대해 말이다. 

‘아니지. 어쩌면 오히려 더 좋아할 것 같기도 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은 역시 부인밖에 없다면서 호들갑을 떨며 좋아할지도 몰랐다. 

두 눈을 반달모양으로 접으며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쿡쿡 웃음이 났다. 

“으… 추워!”

열이 가라앉자 오소소 닭살이 일 정도로 서늘했다. 

어깨를 떨며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을 때였다. 

순간 까만 그림자가 스쳤다. 

‘뭐지? 새인가?’

놀란 가슴을 애써 추스르고 있는데, 까만 물체가 재빠르게 열린 창문으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아앗!”

너무 당황한 나는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방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까만 물체인 줄 알았던 것은 물체도, 새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까만 복면을 쓴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왔고 바로 내게 손을 뻗었다. 

“아….”

모든 일이 삽시간에 벌어졌고, 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손수건에 입이 막힌 채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   *

다음 날, 아침. 

케이트와 주디가 엘프윈의 침실을 찾았다. 

“마님, 깨셨나요?”

“식사 가져왔어요.”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자 그대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침실의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님?”

“마님!”

욕실에도 가 봤지만 텅 비어 있었다. 

드레스 룸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트와 주디는 서로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렸다. 

워낙 아침잠이 많으신 분이기에 벌써 혼자 일어나서 어딘가로 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낯선 곳에서 아무 말도 없이 혼자서 산책을 나갈 분도 아니었다.  

케이트와 주디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어떡해!”

“어쩌면 좋아!”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서 빨리 기사들에게 알려야 했다. 

케이트와 주디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황실 마법 기사단의 페이거 지부.

“절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큰 빚을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클라크가 제크론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난 며칠 동안 기사단의 보호 아래서 씻고 잘 챙겨 먹은 덕분인지 클라크는 꽤 멀끔한 상태였다. 

‘미치광이 외팔이’라는 별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신경 쓸 필요 없소. 변이 마물에 대해서 당신이 아는 것을 말해 주면 도움이 될 것이오.”

“물론입니다. 생명의 은인이시니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요.”

클라크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그리고 위벨교의 신전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물의 조사 연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위벨교 신전은 오래전부터 마물을 연구해 왔다고 했다. 

처음엔 마물을 없애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한 조사와 연구였다. 

하지만 점점 그 본질이 변질됐다고 했다. 

마물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해야 사람들은 두려움을 알고, 두려움을 알아야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신앙심이 뿌리 깊게 자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컸다. 

마물을 조사, 연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관과 신녀들이 부상을 입거나 죽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연구 과정 중에 팔 하나를 잃었습니다. 워낙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서 막을 방도가 없었지요.”

클라크는 텅 빈 한쪽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씁쓸한 감정이 가감 없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 한 클라크는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지금의 대신관, 크레이그 셰넌은 마물의 조사와 연구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인물입니다. 제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위벨교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적 한두 개쯤 있는 게 이상적이라는 말을 자주 했지요.”

클라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사실에 모였던 모두의 입에서 한숨이나 탄식, 혹은 침음이 흘러 나왔다. 

위벨교의 대신관이 저런 얼토당토 않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끔찍했다. 

제크론이 짓씹듯 내뱉었다. 

“제국을 하나로 만드는 것도, 위벨교의 위상을 공고히 세우는 것도 다 중요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것들이 백성들의 안녕과 생명보다 더 위에 있을 수는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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