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위벨교의 암흑 군사라니?”
제크론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런 이름의 조직은 들어 본 적 없었다.
황실에 황실 기사단이 있는 것처럼 위벨교에는 성기사단이 있었다.
성기사단의 기사들은 신관, 신녀들과 마찬가지로 신성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런데 암흑 군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위벨교 내에 다른 군사 조직이 있었던 것인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저, 저들의… 시, 심장!”
“심장?”
“네, 그, 저… 심장 근처에 흉터가 있습니다.”
클라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이 침입자들의 상의를 파헤쳤다.
제크론은 직접 시체의 가슴팍을 확인했다.
클라크의 말이 맞았다.
다섯 시체들의 심장 근처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짙은 흉터가 나 있었다.
“이 흉터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그, 그 안에… 마법석을 시, 심었습니다.”
“마법석?”
“네. 그… 시체를 부검하면 나, 나올 겁니다.”
클라크는 여전히 벌벌벌 떨면서도 제크론이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했다.
제 목숨을 구하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모양이었다.
“포, 폭탄 같은 것이지요. 배, 배신하거나 포로로 잡히면 터지는.”
“아….”
클라크의 말에 제크론은 할 말을 잃었다.
조쉬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쉬가 끄응,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기상천외한 자들이네.”
제크론이 떨리는 클라크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우리와 함께 가 주겠소? 당신의 안전을 책임지리다.”
제크론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선 클라크는 푸른 불꽃이 이는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클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고 싶었으니까.
“좋소. 자, 시신들을 수습하고 마법 기사단 지부로 출발한다.”
제크론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제크론의 눈동자가 대뜸 커지는가 싶더니 몸을 날려 클라크를 감싸 안았다.
“악!”
놀란 클라크의 입에서 단말마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날아온 화살 하나가 제크론의 등에 깊숙이 박혔다.
“각하!”
조쉬가 제크론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제크론은 클라크를 품에 안은 채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각하를 호위하라!”
글렌의 명령에 기사들이 달려와 제크론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리고 글렌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니까.
“으으… 피…! 으으윽!”
제크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 놀란 클라크가 입에 거품을 물고 경기를 일으켰다.
* * *
대신관의 집무실.
촛불 하나만 조용히 타고 있는 내부는 무척 어두웠다.
거대한 인영이 초조한지 실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제길!”
대신관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 나왔다.
그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기도 하고, 꽉 말아 쥔 주먹으로 허공 어딘가를 때리기도 하면서 끝날 것 같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 서 있던 대신관은 홱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봤다.
마물 연구를 담당하는 고위 신관이었다.
그는 어두운 집무실 안을 보며 살짝 놀란 눈치였다.
“보고하세요.”
대신관의 입에서 딱딱한 명령이 떨어졌다.
신관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클라크 휴딧을 잡는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순간 대신관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 함께 있던 윌트슨 공작을 쓰러트리는 데는 성공했다고 합니다.”
“윌트슨 공작… 말입니까?”
여전히 실내는 어두웠지만, 대신관의 두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났다.
그 눈동자에 담긴 기이하고 흉포한 빛에 고위 신관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 * *
“아앗!”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렸다.
폭신한 카펫 덕택에 컵이 깨지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드레스 치맛자락이 찻물로 젖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놀란 주디가 곁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나는 손을 팔랑 내저으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젖어서 얼룩진 치맛자락 따위를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임무 수행 중 제크론이 화살에 맞았다니!
치료를 받아야 해서 당분간 돌아올 수 없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원작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전개였다.
하긴 변이 마물 조사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주인공의 부상은 다른 얘기다.
아무리 이야기의 줄기가 뒤틀렸다고는 해도 주인공이 시도 때도 없이 부상을 입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부상이 벌써 두 번째야.’
이야기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부보좌관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이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
“다친 몸으로는 텔레포트 이동이 어려워서 마법 기사단 페이거 지부에서 치료받고 계십니다.”
“페이거?”
“네.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이를 직접 봐야겠어요.”
“마님, 그건….”
부보좌관은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더 강경하게 말했다.
“그이가 다쳤어요. 당연히 보호자가 곁에 있어야죠.”
“그, 그렇지만….”
“잠깐만이라도 괜찮아요. 그이가 괜찮은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가서 조쉬에게 연락하세요.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마님.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한 부보좌관이 황급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서 있기 힘들었던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주디가 곁으로 다가와 내 손을 꽉 붙잡아 줬다.
“주인님께서는 괜찮으실 거예요. 전쟁 영웅이시잖아요. 그동안 수많은 위험 속에서도 결국은 살아남으시고 또 승리하신 분이시잖아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마님께서 가장 잘 아시잖아요. 네?”
주디의 따뜻한 응원의 말 덕분일까.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고마워, 주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눌러 담으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제크론이 무사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나와 매튜는 알타라스에 올라탔다.
케이트와 주디도 함께였다.
제크론은 임무 수행 시 텔레포트 이동 터널을 이용했던 것 같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임무 수행 중이 아니라 개인적인 방문이었기에 당연히 황실 마법 기사단의 텔레포트 이동 터널 사용을 제공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매튜가 반대하기도 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텔레포트 터널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사실 매튜는 알타라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썩 내켜하지 않았다.
제크론이 있는 페이거에 도착하려면 12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매튜는 여행 중간에 꼭 여관에서 쉴 것을 약속 받은 후에야 이번 여행을 승낙했다.
물론 그도 함께였고.
내가 탄 마차 앞뒤로 뎀프샤의 기사단을 태운 마차도 달렸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부분에서 전생에서의 삶보다 이곳에서의 삶이 더욱 좋았지만, 외출 시 대동 인원이 많아진 것만큼은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특권이었지만,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내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특권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달리는 마차 안, 케이트와 주디는 꾸벅꾸벅 졸기 바빴고, 매튜는 의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지러운 마음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고, 들고 온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변하는 창밖 풍경을 보며 제크론을 떠올렸다.
제발 큰 부상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리고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화살에 독이 묻어 있던 거라면? 마물로 실험을 하는 자들이니, 그런 짓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제크론이 마물의 독에 중독된 거라면 끔찍했다.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튜의 목소리였다.
“주인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
시선이 마주치자 매튜는 내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실 마법 기사단의 치유 마법은 꽤 효과적입니다. 위벨교의 신성수 치료와 맞먹는 수준이지요. 그러니 이번 부상으로 주인님께서 위험해지실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매튜의 단호한 어투가 믿음직스러웠다.
덕분에 조금 안심이 됐다.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의학 인재가 괜찮다면 진짜 괜찮은 것이리라.
“고마워요, 매튜.”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