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42)
  • 100화

    케이트의 반응에 내 안에서 고개를 내밀던 용기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안 돼! 용기야, 조금만 더 힘을 내 줘!’

    앙다문 어금니에 지그시 힘을 주며 겨우겨우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보냈다. 

    “윌트슨 백작님과 백작 부인은 어떤 분이셔?”

    너도 알다시피 난 기억이 없어서 말야, 하, 하하….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케이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케이트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뜸을 들였다. 

    대답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궁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입술을 주시하며 기다렸다. 

    마침내 케이트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꽤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하긴 우리 사이가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다. 

    고용주의 시부모님에 대해서 말할 때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기에… 윌트슨 백작님은 조용하고 깔끔한 신사셨고, 백작 부인께서는 뎀프샤를 불편해하셨어요.”

    “아.”

    “주인님도 불편해하셨고, 마님도 불편해하셨고, 공작성의 모두를 불편해하셨던 것 같아요.”

    “불편하신데 왜 굳이 오시겠다고 하신 걸까?”

    “그러게요.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나와 케이트의 고개가 동시에 갸우뚱 기울어졌다. 

    아니, 아니지!

    나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면 어쨌든 윌트슨 백작 부인께서 특별히 나만 불편해하셨던 건 아니지?”

    “네, 그렇지는 않으셨어요. 그런데….”

    물음에 대답하던 케이트가 순간 멈칫하더니 내 눈치를 쓰윽 살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내 추궁에 케이트가 꼴깍, 소리 나게 마른침을 삼키는 게 아닌가. 

    거기에서 나는 모든 기대를 내려놨다. 

    “그런데 마님께서 특별히 불편해하셨죠.”

    “마님? 나? 내가?”

    “…네.”

    케이트는 고통스러운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어렵게 대답을 뱉어 냈다. 

    순간 기운이 쪽 빠졌다. 

    “그, 그랬구나….”

    역시 그랬던 거였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엘프윈이었다. 

    하긴 세상만사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엘프윈의 입장에서 시부모님의 방문은 절대 반가운 행사가 아니었으리라. 

    사실 엘프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남편의 부모님이라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취향도, 연령대도 다른, 별로 친하지 않은 어색한 사람들이니까.

    후우…. 나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한 줄기 남은 희망을 담아 물었다. 

    “그럼… 내가 시부모님들을 특별히 불편해한다는 걸, 시부모님들께서도 알았니?”

    케이트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내 눈치만을 살폈다. 

    대답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난 괜찮으니까, 사실대로만 말해 줘.”

    “네, 뭐… 공작성의 모두가 눈치챘던 것처럼 윌트슨 백작 내외께서도 다 눈치채신 것 같았어요.”

    “뭐? 공작성의 모두가? 역시 그랬구나.”

    싫은 티를 팍팍 냈나 보다. 

    모두가 눈치챌 정도로. 

    으이구, 엘프윈! 대체 왜 그랬던 거야! 

    그녀를 완전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뒷수습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아쉬운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후우, 또다시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마음 속 용기란 녀석은 아예 땅굴을 파고 있었다. 

    그때였다. 

    케이트가 애써 명랑한 목소리를 만들며 말했다. 

    “그런데 마님! 지금도 윌트슨 백작님 내외가 불편하실 것 같으세요?”

    “네 얘기를 들으니까 불편해졌어.”

    “제 생각은 달라요.”

    “뭐?”

    뭐가 다르다는 걸까?

    케이트가 하려는 말의 의미가 제대로 와닿지 않아 되물었다. 

    “마님께선 어차피 과거에 대한 기억도 없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지금 그대로의 모습대로 백작님 부부를 맞으시면 될 것 같아요.”

    “…….”

    “지금의 마님은 예전의 마님과는 많이 달라지셨어요. 제가 그렇게 느끼고, 공작성의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시 마시고 저희를 대할 때처럼, 귀부인 친구 분들을 대할 때처럼 친근하고 상냥하게 대하시면 전혀 문제없을 것 같아요.”

    “…….”

    “백작님 부부도 전혀 까다로운 분들이 아니시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걱정부터 하지 마세요.”

    “케이트, 정말 고마워. 지금 그 말, 정말 큰 힘이 됐어. 진짜야. 고마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나는 케이트를 와락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랐는지 케이트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이내 편안하게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럼 나는 뭐부터 하면 좋을까?”

    “답장을 보내야죠.”

    “답장?”

    “네, 진심을 담아서요.”

    “그래.”

    “마침 마님께서 지난주에 주문하신 편지지가 도착했어요.”

    “아, 그 향기를 덧입힌 편지지? 벌써 왔어? 빠르네!”

    “네!” 

    “그럼 준비해 줄래?”

    “네, 마님.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케이트는 신이 났는지 거의 뛰다시피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새로운 편지지를 들고 올 케이트를 기다리면서 나는 윌트슨 백작 부인의 편지를 펼쳐 다시 꼼꼼히 읽었다. 

    어떤 식으로 내 진심을 담으면 좋을지를 궁리하면서. 

    *   *   *

    시어머니께 보낼 편지를 거의 마무리하는 중인데,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짧고 단정한 소리로 보아 집사장이 분명했다. 

    “들어와.”

    짧은 대답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집사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집사장의 손에는 편지가 수북이 쌓인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받는 편지가 점점 늘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감사하기도 했지만, 버거운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나는 빙긋 웃으며 집사장을 맞았다. 

    “고마워요, 패트릭.”

    “별 말씀을요. 대신전에서 온 편지를 가장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대신전에서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신성수 치료는 이미 한 달 전에 끝났다. 

    대신전에서 내게 따로 편지를 보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내게 왔다는 편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베로니카 신녀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베로니카 신녀요?”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고, 두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베로니카라니!

    반가운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베로니카와는 신성수 치료로 몇 번 만났을 뿐이었다. 

    게다가 치료 중 나는 잠에 빠지기 때문에 그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여자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녀는 모르는, 나만이 쌓고 있는 내적 친밀함 같은 게 있었다. 

    ‘무슨 일로 편지를 보낸 걸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급한 손길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편지는 베로니카의 생김새처럼 정갈한 글씨체로 채워져 있었다. 

    두근두근, 방정맞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편지 내용에 다시 놀랐다. 

    혼잣말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외치다시피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을 정도로.

    “뭐? 신성수 치료를 또 해 주신다고요?”

    *   *   *

    따사로운 오후.

    윌트슨 백작 부인이 유리 온실에서 친구들과 티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하녀장이 편지 봉투 하나를 들고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백작 부인 곁에 선 하녀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마님, 뎀프샤의 윌트슨 공작 부인께서 답장을 보내 오셨습니다. 티타임 중에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 무례인 줄은 알지만, 특급으로 배송된 거라 혹시 급박한 내용인가 해서요. 어찌할까요?”

    “특급이었다고?”

    “네.”

    편지를 받아 든 윌트슨 백작 부인의 미간에 바짝 좁아졌다. 

    특급이라면 걱정될 만도 했다. 

    자리에 모인 다른 귀부인들에게 양해를 구한 백작 부인이 다급한 손길로 봉투를 뜯었다. 

    편지를 재빨리 읽어 내려가는 백작 부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안 좋은 일인 걸까?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백작 부인의 얼굴로 향했다. 

    백작 부인이 눈썹을 찡그리면 그들도 눈썹을 찡그렸고, 백작 부인이 입술을 깨물면 그들도 입술을 깨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대요?”

    귀부인 중 한 명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마침내 윌트슨 백작 부인의 시선이 편지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해요.”

    “뭐가 이상한데요?”

    “내가 알던 며느리의 편지가 아닌 것 같아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 이렇게 다정하고 싹싹한 아이가 아닌데 말이죠.”

    윌트슨 백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시 읽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정중하고 세심한 안부 인사부터 시작한 편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백작 부부의 뎀프샤 방문을 반긴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글쎄, 긴 여행길이 걱정된다고 마법 마차를 보내 준다고 하네요? 알… 뭐라고 했더라? 아, 알타라스요!”

    “어머나, 세상에!”

    “마법 마차라니! 전 이제까지 딱 한 번 잠깐 타 본 게 다인데! 윌트슨 백작 부인, 부러워요!”

    “역시 성공한 아들을 둔 보람이 있네요!”

    윌트슨 백작 부인을 향한 시선에 부러움의 빛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부러움의 시선의 중심에 있는 윌트슨 백작 부인은 별로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상한지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또 왜요?”

    “이번엔 뭐가 이상한데요?”

    윌트슨 백작 부인의 반응에 다른 귀부인들의 표정도 어리둥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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