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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99/142)
  • 99화

    아미트와 베로니카는 집무실 내부의 어두운 분위기에 놀라 잠시 눈이 커졌으나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신관 앞에 다소곳한 자세로 섰다. 

    “대신관님, 찾으셨습니까?”

    “그래요. 편하게 앉으세요.”

    대신관의 명령에 따라 아미트와 베로니카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대신전의 분위기를 아미트와 베로니카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떨어진 대신관님의 호출이었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아미트와 베로니카를 마주 보는 대신관의 표정은 밝았다. 

    대신전 전체의 어수선한 분위기나 집무실의 어두운 분위기와는 무척 달랐다. 

    “오늘 신녀님들을 부른 이유는 윌트슨 공작 부인의 신성수 치료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신관의 말이 떨어진 순간 신녀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윌트슨 공작 부인의 신성수 치료는 이미 한 달 전에 끝났고 공작 부인은 건강을 회복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신녀들의 얼굴에 들어찬 의문을 모르지 않았던 대신관이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지난번 베로니카 신녀가 말했던 대로 윌트슨 공작 부인의 신성수 치료는 위벨 메시나 증서의 사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성수 치료 환자들과는 그 기준을 달리할 필요가 있지요.”

    어두운 집무실 안에 침착한 대신관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아미트와 베로니카는 입을 꾹 다문 채 대신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사실 베로니카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지난 한 달 동안 윌트슨 공작 부인의 안부가 무척 궁금했다.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신성수 치료가 끝나자 접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려 베로니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궁금해하는 것뿐이었다. 

    무작정 편지를 써 볼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참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간혹 신문 기사에서 윌트슨가의 이야기가 다뤄졌다는 점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은 워낙에 약한 체질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신녀님들의 생각은 어떤지요?”

    베로니카는 바로 입을 열어 찬성의 의사를 전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직 수습 신녀인 자신의 의견보다는 직속 사수인 아미트 신녀의 의견이 더욱 중요하리라. 

    역시 대신관의 시선도 아미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아미트는 대신관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의 고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대신관님의 사려 깊으신 결정에 윌트슨가는 물론이고 국민들도 경의를 표할 것입니다.”

    “베로니카 신녀의 생각은 어떤가요?”

    “저도 아미트 신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대신관의 물음에 베로니카는 짧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대신관이 다시 한번 내용을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달에 한 번씩 대략 6개월 정도 신성수 치료를 더 이어 나가는 것으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명 받들겠습니다.”

    아미트와 베로니카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아미트가 소리 없이 히죽거리는 베로니카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네.”

    방글방글 웃는 베로니카를 보며 아미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집무실에 혼자 남은 대신관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위벨교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윌트슨 공작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에게 보여 줘야 할 위벨교의 모습이어야 했다.

    *   *   *

    햇살 좋은 오후. 

    위든을 데리고 주디와 함께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벤치에 앉아 위든의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으며 쉬고 있는데, 주디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역시 위든은 제 말보다는 마님 말씀을 잘 듣네요. 동물이지만 그래도 역시 주인을 알아보는 걸까요?”

    “그런 것 같아?”

    “네. 저랑 산책할 때는 줄 당김이 심했거든요. 어찌나 쌩쌩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하던지. 위든 꽁무니를 따라 다니느라 힘들어서 혼났다니까요!”

    “어머나, 위든! 주디를 힘들게 한 게 너 맞아?”

    위든의 이마에 입술을 비비며 물었지만 털북숭이 강아지는 대꾸 없이 그저 얌전히 내 무릎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또 그 모습이 주디는 서운했던 모양이다. 

    주디가 목소리가 더 뾰족해졌다. 

    “와아, 얘 좀 봐! 오늘은 마님과 함께여서 그런지 짖지도 않고 무척 차분하네요. 마치 다른 강아지 같아요.”

    “그 정도로?”

    “네, 정말 그렇다니까요. 너, 그렇게 사람 차별하면 못 써!”

    “왕, 왕!”

    주디의 면박을 알아들었는지 위든이 짧게 대꾸했다. 

    위든의 갑작스러운 짖음에 놀란 주디가 어깨를 움찔 떨면서 외쳤다. 

    “이것 봐요! 나한테만 짖는 거!”

    “와앙! 왕!”

    “너, 또!”

    “왕!”

    “야!”

    “푸흡. 그러고 있으니까 둘이 대화하는 것 같아.”

    “마님!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놀리는 게 아니라, 웃겨서.”

    울상을 짓는 주디에게는 미안했지만, 강아지와 다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호호호 웃음이 자꾸 흘러 나왔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혼자가 아니라 곁에 위든과 주디가 함께 해 줘서 즐거운 산책 시간이었다. 

    “자, 한 바퀴 더 돌아야지! 위든, 가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위든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   *   *

    산책 후, 소파에 반쯤 누워서 쉬고 있는데,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편지가 가득 담긴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은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몸짓은 언제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고마워, 패트릭.”

    내 감사 인사에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마저 깔끔했다. 

    역시 베테랑 집사장다운 면모였다. 

    “윌트슨 백작 부인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마님.”

    “윌트슨 백작 부인이라면…?”

    순간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버벅거렸다. 

    윌트슨?

    윌트슨은 나와 제크론인데?

    근데 여기는 공작가인데?

    그렇다면 윌트슨 백작 부인은 누구란 말이지?

    “공작님의 어머니십니다.”

    “흡.”

    순간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나는 벌떡 허리를 세워 바른 자세로 앉았다. 

    히끅,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까지 나왔다. 

    집사장의 얼굴에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 드리워졌다. 

    “가장 위에 놓인 편지입니다.”

    “고, 고마워, 패트릭. 알았으니, 이제 그만 나가 봐. 히끅!”

    “네, 마님.”

    단정한 인사를 마친 집사장이 나가자마자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로 손을 뻗었다. 

    핏기가 싹 가신 손등이 창백했다. 

    편지를 가만히 노려보던 나는 용기를 끌어 모아 봉투를 뜯었다. 

    편지는 출산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고생이 많았다는 위로의 말로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세게 뛰기 시작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뎀프샤를 방문해서 우리 며느리와 손자 얼굴을 보고 싶구나.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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