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42)
  • 97화

    메리엔의 말이 맞았다. 

    마르코스 백작은 로저먼드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으로 엘프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로저먼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자, 자!”

    그때였다. 

    제나가 짝, 손뼉을 치면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지금 와서 이렇게 끝도 없이 잘잘못을 따져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맑고 명랑한 목소리가 아담한 개인 응접실 안에 울렸다. 

    제나는 부드러운 표정과 몸짓을 동원하며 말을 이어 갔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 아이를 다정하게 타이르는 엄마와도 같은 태도였다. 

    “그날 월시 소공작님은 술에 취해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들을 꺼내셨고,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소공작님의 이야기를 경청했지요.”

    “…….”

    “원래 파티란 그런 장소잖아요? 월시 소공작님의 잘못도, 듣고 있던 누군가의 잘못도, 들었던 말을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흘렸을 누군가의 잘못도, 소공작님을 초대한 우리들의 잘못도 아니란 말이죠.”

    다정한 어조로 이어지는 제나의 말을 듣고 있으니 로저먼드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어쨌든 저가 스스로 그들의 파티에 갔고, 스스로 술을 마셔서 취했고, 스스로 입을 열어 엘프윈에 대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으니 말이다. 

    제나가 조종하는 대로 사고 회로를 틀어 버린 로저먼드였다. 

    끄응, 탄식 섞인 한숨이 힘없이 터져 나왔다. 

    로저먼드의 표정 변화에서 그의 심경 변화를 명확히 읽어 낸 제나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 이제 어쩌겠어요. 이미 일은 벌어졌는걸요. 가십지에 기사는 실렸고, 수도의 많은 사람들이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기사를 읽었지요.”

    “…….” 

    로저먼드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앞으로 엘프윈과 마주 보며 서로를 향해 방긋방긋 미소 짓는 일은 없으리라. 

    앞으로 엘프윈이 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는 일은 없으리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로저먼드는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는 이 여자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꼴불견일 테니까. 

    로저먼드는 스스로 술잔을 채우고는 고개를 젖혀 벌컥벌컥 들이켰다. 

    메리엔이 포크로 딸기를 찍어 로저먼드에게 넘기며 말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가십지에 실린 내용을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해요. 그리고 믿는 사람조차 시간이 지나면 또 금방 잊어버리지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월시 소공작님.”

    로저먼드는 메리엔이 건네는 포크를 엉거주춤 받아들었지만 선뜻 딸기를 입 안에 넣지는 못했다. 

    메리엔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멍 난 그의 가슴을 메워 줄 확실한 위로는 되지 못했다. 

    그때였다. 

    제나가 이번에는 좀 더 은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 가십지 기사가 월시 소공작님에게는 좋은 일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엘프윈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양산하는 기사인데, 그게 어떻게 제게 좋은 일이 된단 말입니까?”

    이상한 말이었다. 

    로저먼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전히 목소리에 적의가 담겨 있었다. 

    호호, 가볍게 웃은 제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대화에서 제가 느낀 바로는… 월시 소공작님께서는 아직도 윌트슨 공작 부인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그, 그건….”

    로저먼드는 차마 아니라고 시치미를 뗄 수 없었다. 

    그날 파티에서 술에 취한 채 많은 정보와 더불어 많은 감정을 쏟아 냈기에.

    “어쩌면 이번 기회에 소공작님께서는 윌트슨 공작 부인을, 옛날 애틋했던 소꿉친구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어요, 말을 마친 제나가 호호호, 산뜻한 웃음을 흘렸다. 

    로저먼드는 제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한 문장만은 로저먼드의 뇌리에 깊숙이 뿌리박혔다. 

    ‘엘프윈을 되찾을 수 있다고?’

    수도 사교계의 중심이라는 두 공녀와 로저먼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   *   *

    “하아…아아암!”

    하품을 길게 터져 나오는데, 침실 문이 열리고 제크론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머지 하품을 애써 삼키며 제크론을 맞았다. 

    “어서 와요. 많이 늦었네요. 피곤하진 않아요?”

    “이제야 살 것 같군.”

    침대 안으로 들어온 제크론은 내 손에 입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은 손등이 간지러워 웃음이 났다. 

    “늦었는데,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지 그랬어?”

    “당신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내 손등에서 입술을 뗀 제크론이 고개를 들어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 맺힌 내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용기를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미안….”

    하지만 나는 시작한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제크론이 날 와락 끌어안은 탓이었다. 

    내 입술은 그의 가슴팍과 어깨 중간쯤에 닿아 막힌 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미안해. 내가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

    “처음부터 당신에게 관심을 충분히 뒀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어. 그래서 미안해.”

    그가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힘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엘프윈이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크론이 먼저 사과하자, 나는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따뜻해.’

    넓고 단단한 제크론의 품 안에서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는데, 그가 내 어깨를 감았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드디어 내 입술이 자유를 얻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당신이 먼저 선수 쳐 버렸어요. 그러니까 나는 고맙다고만 할래요.”

    제크론의 입매가 서서히 늘어나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당신은 윌트슨 공작 부인이야. 당신 뒤에 항상 내가 있다는 거 잊지 마. 내가 당신을 끝까지 지킬 거라는 것도.”

    이 보다 더 달콤한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내 시야에 걸리는 모든 장면이, 내 귓가에 걸리는 모든 소리가 그저 황홀하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날 황홀하게 만들었던 모든 장면과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뜨거운 숨결로 변했고, 곧장 내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   *   *

    진료를 다 마친 매튜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부터는 가벼운 산책을 시작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요소킨 운동도 할 수 있겠네요?”

    “네. 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만요.”

    “그야 물론이죠.”

    매튜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자, 매튜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어딘가 좀 불편해 보이는 미소였다. 

    매튜의 좁아진 눈썹 사이가 신경 쓰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주인님께서 아르젠토 차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마님.”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나는 얕은 한숨을 뱉으며 매튜를 지그시 바라봤다. 

    부디 내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매튜가 죄송하다고 하면 내가 더 미안해져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요. 그리고 다 사실이잖아요.”

    “…….”

    “내가 아르젠토 차에 중독됐었던 것도. 매튜가 날 치료해 준 것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절대로요.”

    “알겠습니다, 마님.”

    매튜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다른 얘기는 없던가요?”

    “각하께서요?”

    “네.”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나를 보며 매튜는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이해했다. 

    나에 대해 제크론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제크론이 한 말에 대해서도 내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으리라. 

    기다리고 있으려니 마침내 매튜의 입이 움직였다. 

    “대신전에서 관리, 감독하고 있는 약초들의 유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각하께서도 납득하시는 눈치셨습니다.”

    “그렇군요.”

    “잠시 후, 각하와 함께 입궁하여 황태자 전하께 보고드릴 계획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요?”

    “네, 그렇습니다.”

    대신전에 대한 의문 제기라니. 

    원작에서는 전혀 없었던 흐름이었다. 

    원작에서 부여한 대신전의 역할은 주인공들의 조력자였다. 

    제크론이 마물 토벌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신성수 치료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베로니카를 만나고, 또 대신전과도 인연을 쌓게 된다. 

    이후로 대신전은 내내 제크론에게 호의적이었다. 

    제크론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지금은… 매튜가 제기한 대신전에 대한 의문점을 제크론이 납득했다니! 그리고 황태자에게도 이 사실을 알릴 계획이라니!’

    두근두근, 심장이 작게 떨렸다. 

    엑스트라인 나나, 조연급인 매튜가 품는 의문과 주인공인 제크론이 품는 의문은 달랐다. 

    아무리 같은 상대에 향한, 같은 크기의 의문일지라도 말이다. 

    말로 제대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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