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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96/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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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그래서 자네가 아르젠토 차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군그래?”

    제크론의 물음에 매튜는 다소 놀랐다. 

    엘프윈의 상태에 대해서 좀 더 추궁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엘프윈에 대한 믿음 때문인 것인가?

    매튜는 알쏭달쏭한 심정을 감추며 제크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맞습니다. 마님을 비롯한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귀족들이 아르젠토 차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현상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진척은 좀 있었나?”

    제크론의 날카로운 눈빛과 시선을 마주치자 매튜는 꼴깍,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상대를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매서운 눈빛이었다. 

    “아직 저 혼자 진행하는 조사라서 많은 진척은 없었습니다. 단지 위벨교에서 관리하는 약초인데도 불구하고 해가 바뀔수록 점점 더 많은 귀족들이 아르젠토 차에 중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아해하면서 해당 내용을 황립 의료 아카데미 측에 보고한 상태입니다.”

    “약초를 위벨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의료 목적 의외에는 사용을 금지한 약초이므로 위벨교에서 특별히 직접 재배하고 있습니다. 유통과 관리 역시 직접 하고 있고요.”

    “…….”

    입을 꾹 다문 채 듣고 있던 제크론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또 대신전이라니!

    매튜의 설명은 더 이어졌다. 

    “아르젠토 찻잎뿐만이 아니라 활용에 제약을 두는 약초 대부분을 위벨교에서 재배, 관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제크론은 생각이 많아졌다. 

    위벨교가 변이 마물 출현의 배후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문제의 피해자가 엘프윈이라는 사실이 제크론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중독 치료란 것은 하루 이틀 안에 해치울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절대 아닐 터였다. 

    제크론은 후우, 탄식 섞인 한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말했다. 

    “어쨌든 아르젠토 차 유통 관리를 허술하게 했다는 점에서 위벨교는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겠군.”

    “현상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 좀 더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 의문을 제기하고, 진상을 파악을 위한 조사단을 꾸리기에는 충분한 것 같군. 자네, 내일 나와 함께 입궁해서 황태자 전하를 알현해야겠어. 괜찮겠나?”

    흡, 갑작스러운 물음에 매튜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황태자 전하를 알현한다니!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에나 먼발치에서 뵀던 분을 가까이서 뵐 수 있다니!

    두근두근, 매튜의 심장이 작게 떨렸다. 

    “무, 물론입니다, 각하. 그렇게 알고 보고서를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그만 가 봐.”

    “네, 그럼.”

    매튜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하는데, 제크론이 다시 그를 불렀다. 

    “잠깐만.”

    “네?”

    “그….”

    제크론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제크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충 짐작한 매튜가 조용히 말했다. 

    “마님께서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중독 치료에 임하셨고, 지금은 깨끗하십니다.”

    “하지만 그 중독이란 것이… 어느 순간 끊었다고 하더라도, 한순간의 실수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던가?”

    제크론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유지하는 제크론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에 대해서만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떨게 되고 마는 걸까?

    매튜는 낯선 제크론의 모습에 내심 놀랐다. 

    매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향정신성 약초에 중독되는 경우 그 치료도 쉽지 않고, 설사 치료됐다고 하더라도 재발할 가능성이 몹시 높지요.”

    “…….”

    “하지만 마님께서는 건강해져야겠다는 의지가 워낙 확고하셨습니다.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 이후로도 제가 곁에서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마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그래. 그만 가 보게.”

    “네, 그럼 쉬십시오, 각하.”

    매튜가 나가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던 제크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계속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침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사랑스런 아내가 기다리는 침실로. 

    엘프윈도 분명 이 소식을 접했을 게 뻔했다. 

    ‘걱정하고 있겠지. 자책하고 있을 수도 있겠군.’

    엘프윈이 걱정하거나 자책하고 있는 모습은 싫었다. 

    어서 빨리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녀를 만나 괜찮다고 말해 줘야 했다.

    ‘엘프윈은 나쁘지 않아. 그들이 나쁘지.’

    제크론의 꾹 다문 어금니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침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수도의 어느 귀족 저택. 

    늦은 시간까지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저택에서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젊은 귀족들이 모인 파티 현장은 한껏 들뜬 소리로 가득했다. 

    깔깔깔 웃는 소리, 잔을 부딪치는 소리, 담소를 나누는 소리, 언성을 높이는 소리, 음악 소리, 노래 부르는 소리.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들은 이 시간을 조금의 낭비도 없이 최고로 즐기고자 했다. 

    젊은 귀족들 사이에 제나 핸더슨과 메리엔 도론도 있었다. 

    무리의 중심에 앉은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하하하, 호호호 웃어 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인파를 헤치고 제나와 메리엔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들 앞에 선 남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들이 한 짓입니까?”

    순간 주위에 정적이 흐르고, 모였던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쏠렸다. 

    신나게 웃고 있던 제나와 메리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다 가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그녀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른거렸다. 

    “어머, 월시 소공작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최고로 다정한 눈빛과 최고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먼드의 일그러진 얼굴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지만, 제나와 메리엔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   *   *

    눈치 빠른 호스트는 세 사람을 위해 개인 응접실에 테이블 세팅을 지시했다. 

    셋만 남자 내려앉은 정적을 뚫고 1층 연회장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로저먼드는 목이 탔는지 샴페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잔을 깨끗하게 다 비운 로저먼드가 입을 열었다. 

    “이제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들이 가십지에 제보한 게 맞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어 말하는 로저먼드의 목소리에서 억눌린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엘프윈이 원망스러웠지만, 배신감에 절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그녀를 공개적으로 저격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엘프윈이 먼저 그의 손을 놓았더라도, 그는 절대로 엘프윈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로저먼드는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후우, 제나가 짧은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오해세요. 저희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대체 저희를 어떻게 보고 그런 오해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제나 말이 맞아요. 월시 소공작께서 핸더슨가와 도론가의 파티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메리엔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춰 붉은 입술을 주욱 늘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 내가 친히 알려 주겠노라, 라는 의미를 지닌 미소였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미소 말이다. 

    메리엔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시 현장에서 나눴던 말이 바로 기사화되는 파티가 이제껏 계속 이어졌다면 저희 가문이 수도 사교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겠어요? 그럴 리가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그, 그렇다면 대체 왜 엘프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가십지에 떡하니 실려 있던 겁니까?”

    마음이 급한 로저먼드는 말까지 더듬었다. 

    반면 제나와 메리엔, 두 공녀는 생글생글 웃는 눈빛으로 로저먼드를 빤히 쳐다보며 샴페인을 천천히 홀짝일 뿐이었다. 

    제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 저희 파티에서 월시 소공작님은 많이 취하셨죠. 기억나시나요?”

    “평상시 보다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신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취하셔서 그런지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발언에는 거침이 없으셨어요. 그것도 기억나세요?”

    “네, 뭐….”

    로저먼드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목소리가 작아졌다. 

    제나의 맵시 있는 입술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저희 파티에서만 그랬다는 정황도 없잖아요?”

    “무슨 말씀이죠?”

    “그러니까 제 말은… 저희 파티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른 파티에서도 술에 취해서 쉽게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해서 언급했을 수도 있다, 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하아! 로저먼드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새빨간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로저먼드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것들 보세요! 제가 엘프윈과 소꿉친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수도에 없습니다. 그러니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엘프윈에 대해서 제게 꼬치꼬치 물었던 사람도 없었지요. 그날 공녀들과의 파티를 빼면 말입니다.”

    “이상하다? 마르코스 백작님도 월시 소공작님과 윌트슨 공작 부인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걸로 알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그, 그건….”

    메리엔의 물음이 로저먼드의 허를 찌르자, 그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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