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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2/142)
  • 82화

    제크론이 재빨리 설렁줄을 당겼고, 곧바로 하녀와 매튜가 달려왔다. 

    깨어난 나를 본 그들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제크론은 그들에게 꾸물거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의 명령에 따라 주디가 자고 있는 아기를 안고 왔다. 

    주디는 아기를 내게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련님이세요, 마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받아 안았다.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제크론이 내 팔을 받쳐 준 덕분에 아이를 안을 수 있었다. 

    아기가 칭얼거리면서 눈을 떴다. 

    “으애…애앵…!”

    “쉬이…. 저런, 엄마 때문에 잠이 깼구나.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쉬이….”

    나는 팔을 좌우로 흔들며 아기를 달랬다. 

    잠시 칭얼거리던 아기는 금세 그대로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쉬이… 착하네, 우리 아리. 엄마 말도 잘 듣네. 고마워, 아리야.”

    꿈만 같은 현실에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이 믿기 힘들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벅찬 감동만이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힘이 점점 빠지는 게 느껴진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눈꺼풀이 닫혔고, 암전이 찾아왔다. 

    *   *   *

    그 뒤로 며칠 동안 나는 잠깐 깼다가 잠들고, 다시 깼다가 또 잠들기를 반복했다. 

    깰 때마다 아기를 안아 보고, 식사도 하고, 매튜에게 진찰도 받고 그리고 신녀님들께 신성수 치료도 받았다.

    하지만 잠에서 깼다고 할지라도 의식은 여전히 흐릿한 상태였기에 당시의 기억이 별로 남지 않았다. 

    단지 기억에 남는 것은 제크론이 내내 내 곁을 지켜 줬다는 것 정도였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따뜻하고 단단한 품 안에서 눈을 떴다.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크론이라니! 

    행복에 겨운 나날이었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흐르자, 나는 깨어 있는 시간이 점점 늘었고, 침실 안에서 천천히 걷는 정도로 움직일 수도 있게 됐다. 

    “그렇다고 당신까지 여기에서 식사를 계속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젠 좀 살 만해졌다고 나를 내치려는 건가?”

    “아니, 내치다니, 그게 아니라….”

    내 물음에 제크론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도 안 되는 질문으로 받아쳤다. 

    그 바람에 나는 할 말이 없어져 앞에 놓인 양송이 감자 수프를 괜히 휘휘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제크론은 바로 눈매를 풀며 빙그레 웃었다. 

    “이 정도쯤은 하게 해 줘. 욕심 같아서는 아예 여기에 책상을 두고 모든 업무를 당신 옆에서 보고 싶을 정도니까.”

    “그건 절대 싫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이. 응?”

    “…알았어요.”

    한숨을 삼키며 동시에 수프를 떠먹었다.

    열심히 칼질을 하던 제크론은 잘게 썰린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날 위하는 다정함이 도가 지나쳤다. 

    “이제 칼질은 직접 할 수 있어요.”

    “이 정도쯤은 하게 해 줘. 욕심 같아서는 아예 여기에 책상을….”

    “아, 알았어요.”

    계속 같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들으나 마나 무슨 말을 할지 알았으니까. 

    나는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이번엔 빵을 잘게 썰고 있는 제크론을 바라봤다. 

    열심히 손을 놀리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진심이라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또다시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꾸욱 눌러 담았다. 

    “당신, 답답하진 않아?”

    “답답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매튜가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침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 따라야죠.”

    “침실 안에 화분을 좀 들여놓을까? 그러면 정원 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을까? 온실처럼 말이야.”

    제크론이 무척 진지해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대체 이 안에 어느 정도의 화분을 들여놓으려고?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화분은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괜찮아요. 대신….”

    “대신?”

    제크론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영롱한 푸른 눈동자에 내 모습이 온전히 비쳤다. 

    나만을 담은 그의 눈동자라니. 

    심장이 작게 두근거렸다. 

    “대신 매일 당신이 꺾어 주는 꽃 한 송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좋아.”

    잘생긴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한가득 들어찼다. 

    그가 잘게 썰어 준 빵 조각을 수프에 찍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열심히 씹었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턱 관절의 느낌, 입 안에 퍼지는 고소한 맛, 나에게로 향하는 제크론의 다정한 시선, 팔에 닿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그의 미소….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새로이 얻은 생명이었고, 새로이 얻은 인생이었다. 

    매 순간을 감사와 행복으로 채워 넣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   *   *

    요소킨 운동 수업이 있는 날.

    나와 디아브 백작 부인은 출산으로 인해 수업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프렛 백작 부인과 데이비스 자작 부인은 성실하게 참석하는 중이라고 했다. 

    수업 전, 침실로 찾아온 친구들과 간단한 티타임을 가졌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 반가웠다. 

    “까꿍! 어머나, 웃는 것 좀 봐! 귀여워라!”

    “세르안은 윌트슨 공작님을 빼다 박았네요!”

    “그러게요. 눈동자 색만 빼면 윌트슨 공작님을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아요.”

    아기의 이름은 세르안으로 지었다. 

    제크론이 만든 이름 목록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는 식이었다.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인 아기 세르안이 기분이 좋은지 꺄르르 웃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 귀부인들이 꺄아 비명을 지르며 웃어 댔다. 

    작은 생명체는 침실을 넘어 거대한 공작성 전체의 분위기를 들뜨게 만들었다. 

    곧 잠이 든 아기를 유모가 옆방으로 데려갔다. 

    그제야 귀부인들의 관심이 차와 디저트로 향했고, 담소가 시작됐다. 

    요소킨 운동 친구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활기차고 즐거웠다. 

    침실에 혼자 있을 땐 축축 쳐졌는데, 그들과 함께한 짧은 시간 동안은 건강한 몸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몸은 좀 괜찮아요? 이렇게 오래 앉아 있어도 돼요?”

    “아직 침실 밖에는 못 나가고 있지만 안에서는 조금씩 움직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데이비스 자작 부인의 걱정 어린 물음에 나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디아브 백작 부인은 좀 어떻던가요?”

    “앨리슨도 아직 바깥바람은 못 쐬고 있지만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나저나 운동 회원이 늘었다면서요?”

    나는 메릴 선생님을 보며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메릴 선생님의 작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네. 저도 네 분이서 운동하다가 두 분이 빠지니 남은 두 분이 지루해 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너무 다행이지 뭐예요.”

    “정말 잘됐어요, 메릴 선생님!”

    “맞아요. 새로 오신 분들은 지난번 우리 인터뷰 기사를 보고 오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머나! 역시 신문 기사가 효과가 있군요!”

    “그러게요!”

    “이러다가 곧 주말 수업이 꽉 차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상상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벌써 가슴이 두근거려요!”

    메릴 선생님은 붉어진 얼굴을 감싸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메릴 선생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요즘 라하브에 교실 자리를 알아보고 있어요.”

    “라하브에 교실이요?”

    메릴 선생님을 제외한 모두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윌트슨 공작성에서 수업을 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대체 왜?

    우리의 놀라는 표정만 보고도 묻고 싶은 게 많다는 걸 알았나 보다. 

    질문이 시작되기 전 메릴 선생님이 먼저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요소킨 운동 회원들이 계속 늘어나게 되면… 윌트슨 공작성에서 계속 수업을 이어 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요. 신세를 지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죠.”

    하, 하하…. 메릴 선생님이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나는 조금 억울해져서 메릴 선생님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선생님, 신세라니요! 그렇지 않아요. 요소킨 운동은 제게 꼭 필요했고, 그래서 이곳에서 운동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제안드렸던 거예요.”

    “…….”

    “선생님 덕분에 규칙적으로 운동할 수 있게 돼서 건강해졌고 친구들도 생겼는걸요!”

    “네네, 잘 알아요. 저도 지금 당장 옮길 생각은 없어요. 그럴 수도 없고요. 하지만 요소킨 운동 수업을 듣기 위해 수십 명의 외부인들이 공작성에 들락거리는 것은 좀 걱정돼요.”

    아, 하긴….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요소킨 수업이 이대로 유행하게 된다면 점점 많은 사람들이 수업을 신청할 테고, 회원이 수 십 명으로 느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 많은 회원들을 공작성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무리일 수 있었다. 

    메릴 선생님은 말을 계속 이었다. 

    “공작 부인께서 공작성에서의 수업 진행을 제안해 주신 덕분에 가능성을 알게 됐다고 할까요? 저도 이제 슬슬 홀로서기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당장은 아니에요. 아직은 힘들어요.”

    메릴 선생님이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맞아요. 요소킨의 몸집을 불리려면 접근성이 좋은 수도에 자리를 잡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메릴 선생님.”

    “저희한테도 말씀해 주세요.”

    “맞아요.”

    “감사해요, 모두들.”

    메릴 선생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 모습에 내 눈가에도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뜨고 건강해져야겠다고 다짐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이가 메릴 선생님이었다.

    원작 소설에서 여주의 친구로 꽤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인 메릴 선생님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내 개입으로 그녀가 여주와 만나게 되지 못하면 원작의 흐름이 틀어질까 봐 걱정했으니까. 

    ‘앞뒤 맥락이 전혀 맞지 않는 걱정이었지.’

    원작을 틀어지게 만들어 목숨을 건지는 것이 내 목표였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고, 나는 바로 메릴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인연이 지금 이 자리까지 이어졌다. 

    나는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성공했고, 메릴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요소킨 운동 사업을 키워 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원작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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