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얼마일지 모를 시간이 지났다.
목욕 후, 간단한 식사를 끝낸 제크론은 조쉬와 함께 바로 엘프윈의 침실로 향했다.
신성수 치료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침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 케이트와 주디, 그리고 매튜가 앉아 있었다.
제크론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두 입을 꾹 다문 채여서 공기 중에는 짙은 적막만이 흘렀다.
고작 10분이 흘렀을 뿐이지만 한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
끼익.
마침내 침실 문이 열리고 신녀 아미트와 베로니카가 나왔다.
제크론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내는 좀 어떻습니까?”
“공작 부인께서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셨지만 편안하게 잠이 든 모습입니다. 낯빛도 훨씬 좋아졌고요.”
“감사합니다, 신녀님.”
제크론이 고개를 숙이자, 곁에 섰던 조쉬와 매튜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멀론 경, 자네가 직접 신녀님들을 대신전까지 배웅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각하. 신녀님, 이쪽으로 가시지요.”
아미트와 베로니카는 조쉬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뜨기 전 베로니카는 고개를 돌려 제크론을 봤지만 그는 이미 침실 안으로 황급하게 들어간 뒤였다.
베로니카의 가슴 속에 잠시 동안 떠올랐던 반가움은 갈 곳을 잃은 채 그대로 사라졌다.
대신 이유를 알 수 없는 쓸쓸함이 가슴을 어지럽혔다.
‘속세의 감정에 휘둘리지 마, 베로니카!’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계단을 내려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텅 빈 복도를 바라봤다.
* * *
신성수 치료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백지장처럼 창백했던 엘프윈의 안색이 이젠 봉숭아 빛으로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거의 들리지 않았던 숨소리도 이젠 새근새근 안정적으로 들렸다.
간단한 진찰을 마친 매튜는 침실 안에 회복을 돕는 향초를 켜 놓고는 자리를 떴다.
침실에는 잠이 든 엘프윈과 곁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제크론만 남았다.
그는 엘프윈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윈…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이제 눈만 뜨면 돼. 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서 눈을 떠서 날 보면서 웃어 줘.”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는 제크론의 손길이 다정했다.
그는 다짐했다.
엘프윈이 깨나기만 한다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가장 먼저 부드러운 눈빛과 달콤한 말을 바치리라.
매일매일 아침마다, 밤마다.
그리고 제 시간을 바치리라.
보좌관실을 더 확장하여 고용을 늘릴 것이다.
대부분의 업무는 보좌관들에게 맡기고 저는 엘프윈과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모두 엘프윈에게 바칠 것이다.
돈을 쌓아 두면 무얼 하겠는가.
앞으로는 내탕금 규칙도 없앨 것이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갖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깨기만 해, 엘프윈!”
그녀의 손을 붙잡은 그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눈꼬리 끝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뚝, 손등 위로 떨어졌다.
* * *
아직도 꿈속인 것 같았다.
눈 오는 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어두운 방 안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저쪽에 있는 문 틈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고민도 하지 않고 문 앞으로 걸어간 나는 문을 열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따뜻한 방이었다.
벽난로 앞에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무릎을 안은 채 웅크려 앉아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여자의 이름을 불러봤다.
“…엘프윈.”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가녀린 얼굴엔 울었던 흔적이 가득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 옆으로 가서 가만히 앉았다.
벽난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온기가 기분 좋게 내 몸을 감쌌다.
눈길을 걷느라 얼었던 몸이 스르르 녹았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물었다.
“누구시죠?”
“난… 너야.”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라니…. 그렇다면 당신도 사는 게 힘들겠군요?”
힘을 잃은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힘들 때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야. 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날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거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날 기다려 주고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거든.”
“…….”
“그러니까… 세상은 힘들지만 그래도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해.”
꼰대스러운 말에 그녀가 질릴까 봐 분위기를 가볍게 할 요량으로 나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나에게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벽난로를 멍하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당신이 나라서….”
“…….”
“내게도… 희망이 있는 것 같아서.”
그녀는 웃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울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속 장작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닿았다.
“엘프윈…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이제 눈만 뜨면 돼. 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서 눈을 떠서 날 보면서 웃어 줘.”
내내 기다렸던 목소리였다.
제크론의 목소리였다.
반가움에 놀란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제크론의 목소리는 내게만 들리는 걸까?
옆에 앉은 엘프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깨기만 해, 엘프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크론이 날 부르고 있었다.
그에게로 가야 했다.
나는 다시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을 열자 어둠이 짙게 깔린 공간이 나타났다.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운 공기에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용기를 끌어 모았다.
“제크론에게 가야 해!”
나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허억!”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거친 숨이 터져 나오며 몸 전체가 출렁거렸다.
그다음에 찾아온 것은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배 전체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아픈 배를 붙잡고 몸을 웅크리지도 못했다.
몸 전체에 힘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력이 이끄는 대로 축 늘어진 몸으로 두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엘프윈!”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촉촉하게 젖은 푸른 눈동자가, 조금 붉어진 코끝이 선명하게 보였다.
눈앞의 남자는 제크론이었다.
‘아직도 꿈인 건가? 아니면… 깬 건가? 그것도 아니면… 또 죽은 건가?’
날 바라보는 제크론의 눈빛은 무척 현실적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게 현실이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제크론은 분명 마물 토벌 작전에 참전했으니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뻐끔거려 봤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잠시만.”
제크론은 재빨리 물컵을 가져오더니, 내 머리 아래 베개를 하나 더 쌓았다.
숟가락으로 물을 떠 조심히 내 입술 틈으로 물을 흘려보내 주었다.
미지근한 물이 입 안을 적시자 정신이 좀 들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제크론은 진짜가 맞았다.
현실이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날 알아보겠어?”
이글거리는 짙푸른 눈동자가 간절하게 물었다.
나는 다시 입을 뻐끔거려봤다.
“제…크론?”
“그래, 맞아! 나야! 당신 남편이야!”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고마워, 엘프윈! 깨어나 줘서 고마워! 살아 줘서 고마워!”
제크론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계속해서 고맙다고 말했다.
잘게 떨리는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현실이 맞았고, 그 현실을 확실히 느끼는 내가 있었다.
“나… 살았어요?”
“그래! 엘프윈, 당신 살았어!”
나는 살았다.
죽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내 운명은 출산 중에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 확실히 살아 있어!’
가만….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느낌인데…?
그게 뭐지?
아, 맞다!
“…아기! 아기는요? 우리 아리는요?”
“아리도 건강해. 옆방에서 자고 있어.”
제크론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내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세상에!
‘내가 살고, 아리가 살았어!’
살았다!
운명을 이겨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