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42)

57화

나는 들고 있던 손수건을 불쑥 내놓으며 말했다. 

“이거… 출정식 전날에 아내가 남편에게 손수건을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해서요.”

“…….”

“케이트가 준비해 준 거지만 아래 이니셜은 내가 직접 수놓은 거예요.”

그가 천천히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이니셜은 썩 좋은 솜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일일 강사 주디에게 칭찬도 들었다. 

“고마워, 엘프윈…. 당신은 정말….”

어설픈 자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제크론의 얼굴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이지러졌다. 

하아, 짧고 굵은 한숨도 들렸다. 

“그럼 주무세요.”

용건을 마친 나는 몸을 돌렸다. 

내일은 중요한 날이었다. 

그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발걸음을 떼려고 할 때였다. 

그가 내 손을 붙잡았다. 

“같이….”

걸음을 멈춘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짙은 군청색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같이 잘까, 우리?”

아, 입이 벌어졌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저렇게 위험한 눈빛을 하고, 느슨한 가운 틈으로 근육이 보기 좋게 박힌 상체를 드러내 놓은 채… 같이 자자고 말해 버리면…. 

대체 어쩌자는 건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한낱 엑스트라인 엘프윈의 몸과 한낱 독자인 내 정신은 이 세계의 원앤온리 남주인 제크론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밤이니까.’

촉촉하게 젖은 푸른 눈동자가 뿜어내는 빛이 진득하게 내게 와서 붙었다. 

유난히 붉어 보이는 입술이 씰룩거렸다. 

“…응?”

“좋아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내 손을 제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말캉한 감촉이 이마에 기분 좋게 닿았다. 

*   *   *

꼴깍, 당시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신이 점점 또렷해져서 문제였다. 

그런데 제크론은 새근새근 잘만 자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그의 자는 얼굴을 봤다. 

음영이 진 탓에 얼굴이 더욱 깊고 진해졌다. 

콧대와 턱 선이 더욱 날렵해 보이고, 원래 짙은 눈썹은 한층 더 까맣게 보였다.

게다가 속눈썹은 또 얼마나 길고 풍성한지.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에 질투가 날 정도였다. 

선명한 인중과 입매,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완벽한 남자가 내 옆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몸을 뒤척이던 그가 내 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팔은 내게 닿지 못하고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베개에 닿았다. 

잠들기 전 그가 쌓은 베개였다. 

“같이 자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까 뒤척이다 당신 다치게 할까 봐, 그래서 이렇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 

큼직한 베개 두 개를 사이에 길게 놓으며 제크론이 빙그레 웃었다. 

그땐 피식 웃으며 장난말에 응수했지만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쉬웠다. 

그것도 몹시. 

임신한 몸은 호르몬이 들쑥날쑥해서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점은 갑자기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욕구였다. 

야릇한 욕구.

매력적인 제크론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으려니, 잠옷 사이로 보이는 가슴팍을 보고 있으려니, 방금 전 이마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원작 소설 속 여러 장면들이 허한 내 마음을 괴롭혔다. 

19금 로판 소설답게 줄거리 중간 중간 빛을 발했던 야릇한 베드신들 말이다. 

‘제크론은 무척 절륜했다지, 아마? 이렇게 자는 모습은 순한 어린 양 같은데, 베로니카와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어땠으려나?’

한 마리의 야수였으려나? 흐흐, 절로 음흉한 미소가 입가에 만들어졌다. 

그때였다. 

옆으로 누운 제크론이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몸을 뒤척였다. 

“흐음…. 음….”

그가 깼을까 봐 긴장한 나는 어깨를 웅크리며 얼른 눈을 꾹 감아 자는 척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다시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제크론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마치 나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내 시선은 그의 입술에 완전히 붙잡혀 버렸다. 

‘고 녀석, 참 맛있게 생겼네.’

그렇지만 참아야 했다. 

그의 입술을 보고 있으려니 두근두근, 자꾸만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몸도 더워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머리까지 뜨거워져 미칠 것 같았다. 

난 인내심이 많은 편이지만 호르몬이 요동치는 이때 잘생긴 남편을 옆에 두고 편안히 자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 시작된 열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안 되겠어!’

미치기 전에 스스로를 구해야 했다. 

나는 부스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실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때 뭔가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어머, 깜짝이야!”

제크론이었다. 

나에게로 향한 푸른 눈동자가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방금까지 깊이 자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또렷한 눈빛이었다. 

“어디 가?”

“그….”

“내 얼굴 감상이 싫증 나서 가려던 건 아니지?”

뭐…야? 

다 보고 있었던 거야?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크론의 붉은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당신은 생각에 열중하다 보면 당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경우가 종종 있다는 거, 알아?”

윽, 저런! 

이놈의 입이 문제였다, 입이!

나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상황 판단에 나섰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정면 돌파 밖에는.

“내가 뭐, 뭐라고 했는데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듣기 좋았던 말은…. ‘절륜했다’와 ‘맛있겠다’ 정도일까?”

제크론이 이죽거렸다. 

아아, 나는 절망했다. 

그걸 들었다는 건, 거의 다 들었다는 소리였다. 

온몸의 피가 싹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바보다. 

이놈의 입은 철천지원수다. 

제크론의 붉은 입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 미치게 만들었던 요망한 입술이.

“맛있을 것 같으면 먹어 봐도 돼.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기꺼이 먹혀 주지.”

그는 꽤 신이 난 것 같았다. 

마치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한 마리의 늑대, 아니 여우 같았다.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빠져나갔던 피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또 열이 올랐다. 

어차피 마지막 밤이고, 우린 부부이다. 

‘망설이지 말자. 뒤로 물러서지 말자. 마지막이잖아.’

이를 앙다문 채 다짐의 말을 속으로 뇌까렸다. 

나는 일어서려던 몸을 다시 스르르 눕히며 제크론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이제 베개는 치우고, 날 안아 줘요.”

나는 내내 날 유혹하던 그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제크론은 처음엔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내 날 감싸 안고 그의 단단한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쿵쾅쿵쾅,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심장 고동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의 숨결이 내 입 안을 천천히 잠식해갔다. 

그날 밤, 뇌를 녹일 정도의 뜨거운 숨결이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렀다. 

*   *   *

다음 날 오전, 간단한 출정 의식이 진행된 후, 제크론과 그의 군대는 차드엘 산맥을 향해 먼 길을 떠났다. 

백마를 탄 제크론이 행렬의 가장 선두에 섰다. 

뒤에는 3천 명의 군사가 따랐다. 

하나의 영지에서 차출되는 병사 수 중 가장 많았다.

제국군의 병사 수와 맞먹는 정도였다. 

보통의 다른 영지에서는 천 명의 병사를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제국민의 안녕을 위협하는 마물 떼 척결에 성공하는 것, 그래서 많은 포상금과 함께 하루 빨리 가족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병사들의 가슴에 새겨진 목표였다. 

군사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다 비장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바로 제크론 윌트슨 공작 말이다. 

물론 그 역시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마물 토벌에 성공하여 하루 빨리 공작성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정에 나선 그의 표정은 비장하기 보다는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제크론의 뒤를 따르는 조쉬는 상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토록 웃음을 헤실헤실 흘리시는 각하라니. 이런 모습은 처음이군. 낯설어.’

조쉬가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제크론은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지금 당장 말을 돌려 돌아가고 싶어 미치겠군.’

엘프윈과 함께 보냈던 지난밤을 떠올리면 머리가 이상해졌다. 

함께 밤을 보내는 게 처음도 아닌데 전과는 완전히 달랐던 분위기가 지금 생각해도 신기했다. 

역시 최근 사이가 가까워진 만큼 침대 위에서도 서로에게 더욱 애틋했다. 

“그렇다면… 날 안아 줘요.” 

품에 안기던 엘프윈의 작은 입술에서 나온 말이 여전이 귓가에 맴돌았다. 

벗어나야 했지만 또 동시에 벗어나고 싶지 않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 목소리에 완전히 매혹된 채 그녀를 다시 품 안에 안고 싶었다. 

제크론은 다짐했다. 

최대한 빨리 마물 떼를 해치우고 최대한 빨리 공작성으로 돌아오리라고. 

‘최대한 빨리!’

제크론은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내내 그의 안색을 살피던 조쉬는 이제야 좀 안심했다. 

상관의 눈에서 번뜩이는 결의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야 좀 각하다운 얼굴을 하시는군. 다행이야.’

하지만 조쉬는 보지 못했다. 

바로 몇 분 사이에 제크론의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 풀어지고 입이 헤 벌어지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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