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자수를 다 마치고 침실에 혼자 남아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제크론이 돌아왔다.
“왔어요?”
“늦게까지 못 자게 한 것 같군. 피곤하면 먼저 자지 그랬어.”
“피곤하지만 졸리지는 않았어요.”
당신과의 마지막 밤인데, 그럴 수 없죠. 나는 제크론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말을 속마음으로 남겨 뒀다.
그가 대뜸 내 손을 잡아끌었다.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뭘요?”
“와 보면 알아.”
제크론은 왠지 좀 신이 난 것 같았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바로 내 침실의 옆방이었다.
옆방이라고는 하지만 각 방이 워낙 커서 방문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방문을 열기 전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두 눈을 가렸다.
시야가 완전히 까맣게 닫힌 상태에서 그의 손만을 의지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렸고, 그의 손에 이끌린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마침내 눈을 가렸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와아….”
아기 방이었다.
밤인데도 조명을 밝혀 둔 덕분에 방 안은 환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면이었다.
각 면마다 파스텔 톤으로 사계절 숲속의 모습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중앙에는 아기 침대와 그 위에서 빙그르르 돌고 있는 모빌이 보였다.
‘여기에 누워 칭얼거리는 아이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침대 위에 놓인 이불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보드라운 감촉이 기분 좋게 닿았다.
동시에 눈가에 열이 확 몰려들었다.
눈물을 애써 참으며 방 곳곳을 둘러봤다.
작은 드레스룸에는 각양각색의 아기 옷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벽장에는 다양한 장난감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뒹굴며 놀 수 있게 꾸며진 커다랗고 폭신한 러그까지.
“옆방을 아기 방으로 꾸미고 있는 걸 전혀 몰랐어요. 바로 옆방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었죠?”
놀란 나머지 벌어지는 입을 두 손으로 가리며 외쳤다.
제크론의 얼굴이 환한 미소로 밝게 빛났다.
“특별히 주의를 줬지. 깜짝 선물이니 절대 모르게 해야 한다고. 당신이 운동하는 시간에 집중적으로 움직였고.”
“…고마워요.”
“당신 출산일 전에는 꼭 돌아오도록 노력할 거야.”
“…….”
“그러니까 나 없는 동안 가끔 이 방에 들러서 우리 세 식구가 함께할 날들을 상상하면서 시간 보내라고.”
제크론이 출산일 전에 돌아온다면 어쩌면 오늘 밤이 우리의 마지막 밤이 아닐 수도 있다.
세 식구가 함께할 날들이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어느새 두 눈에서 굵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 마지막이 아니라면 좋겠어. 제크론을 다시 또 볼 수 있으면 좋겠어! 잃고 싶지 않아.’
나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갑작스런 반응에 놀랐는지 제크론이 잠깐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두 팔로 내 머리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흐흑…. 흑!”
눈물은 어느새 흐느낌이 되어 갔다.
토닥토닥, 그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너른 품 안에 나를 단단히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점차 안정감을 느꼈다.
“정말… 고마워요.”
“…….”
“…진짜, 정말… 고마워요.”
“저기, 그런데 엘프윈?”
조용한 목소리가 이제는 내 것이 된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눈물로 일렁이는 시야 속에서도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리면서 올라가는 게 보였다.
“고맙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이 듣고 싶은데.”
의미가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이라니?
“감사해요?”
“그거 말고.”
“그럼… 영광입니다?”
풉, 그가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을 참지 못하고 뱉어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간이 좁아졌다.
“아까 초상화 작업할 때 당신이 들었던 말, 그 말… 나도 듣고 싶어.”
“어떤…?”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불현듯 낯 뜨거웠던 장면이 생각났다.
‘뭐야…. 설마?’
에이, 아니겠지.
나는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남자가 내가 읽은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맞는지 잠시 헷갈렸다.
소설 속 남주는 분명 모든 이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소 냉랭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보좌관을 비롯한 사용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아내인 엘프윈에게도 차가운 남자였다.
본가 가족들과도, 다른 귀족들과도 특별한 연을 만드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이 세계의 창조자, 작가가 이 남자에게 부여한 설정이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캐릭터 붕괴 아닌가?’
눈앞의 이 남자는 지금 눈웃음 살살 지으면서 ‘좋아해요.’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까지 흘렸던 감동의 눈물이 어느새 쏙 들어갔다.
“응?”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으윽….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달달함의 범위를 초과했다.
졌다.
처음부터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좋아…해요?”
“말꼬리를 꼭 그렇게 올려야겠어?”
우와, 게다가 이렇게 까탈스럽기까지 하다고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응?”
또다.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항복!
“좋아해요.”
질리고 질려서 두 손 두 발 다 드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말꼬리가 올라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제크론의 입꼬리가 양옆으로 주욱 길게 늘어졌다.
이 남자는 옆구리 찔러 절 받았다는 사실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제크론이 나를 다시 안았다.
내 등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아까보다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중저음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당신, 많이 좋아해.”
두근두근, 내 여린 심장이 빨라졌다.
마지막 밤이니 사치를 부리기로 했던 것을 떠올리며 지금 이 순간도 맘껏 즐기리라 다짐했다.
쿵쾅쿵쾅, 단단한 가슴팍 안에서도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 * *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달빛이 어슴푸레 드는 천장을 멀뚱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무척 피곤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초상화 모델을 하느라 계속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저녁에는 난생처음 자수 놓는 법도 배웠다.
게다가 지금은 자정이 넘은 시각.
평소대로였다면 쿨쿨 잠에 빠져들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산달에 다가가는 몸은 곧잘 피곤을 느꼈고, 수면 시간이 배로 늘었다.
‘그런데 아직 조금도 졸리지 않아.’
하아,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바로 제크론 때문이었다.
옆에서는 새근새근, 잠든 그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장을 보며 바로 누워 있는데, 그는 내 쪽을 보며 옆으로 누워 있어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그대로 닿았다.
뜨겁고 간지러운 감촉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같이 자자고 왜 말을 꺼내서는!’
미쳤지, 미쳤어! 모두 내가 자초한 화였다.
남을 탓할 수 없었다.
아니, 그래도 남을 탓하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잠에 못 들어 끙끙 앓고 있는데, 옆에서 세상모른 채 쿨쿨 자고 있는 제크론을 탓하고 싶었다.
한 시간 전, 목욕을 끝내고 살짝 젖은 머리로 나를 맞았던 그를 탓하고 싶었다.
청량하면서도 동시에 섹시한 그의 얼굴과 가슴 근육을 탓하고 싶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창조자를 탓하고 싶었다.
“후우….”
한숨이 튀어나왔다.
한 시간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 * *
아기 방에서의 낯부끄러운 고백 후,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 침실로 향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은 후에는 무척 부끄러운 나머지 정신이 아찔해진 바람에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밖에 안 들었다.
제크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터질 듯 새빨갛게 붉어진 그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허둥지둥 내 침실로 돌아온 나는 케이트와 주디의 도움으로 목욕을 마쳤다.
침대에 누우려는데 손수건을 아직 전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출정식 전날 밤에 전해 줘야 하는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행운의 부적 같은 미신적 관습이었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적 존재뿐이었다.
침대에 누우려다 말고 손수건을 들고 제크론의 침실로 찾아갔다.
제크론의 방과 내 방은 같은 층에 있지만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좀 걸어야 했다.
다행히 복도에는 조명 등이 드문드문 있어서 걷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똑똑똑.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벌써 잠들었나?’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제크론의 오늘 일정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으니까.
‘그냥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타월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 제크론이 문 건너편에서 나왔다.
문 앞에 선 나를 보자 그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동그랗게 커졌다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