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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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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응…원이요?”

안 그래도 동그랗고 툭 튀어나온 멀론 경의 두 눈이 더 튀어나오려고 했다.

그런 불상사는 막아야 했기에 얼른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일도 하고 공부도 하는 삶은 몹시 피곤할 거잖아요. 그래서 간식으로 약간의 응원을 하고 온 참이에요. 하녀장에게 당부했어요. 앞으로 수업 시작 전에는 매일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라고요.”

“아, 그러시군요. 저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인데 마님께서는 이렇게나 꼼꼼하게 챙기시는군요.”

“멀론 경은 워낙 바쁘잖아요. 공작성 안에서 진행되는 일이고, 게다가 내가 먼저 제안했던 일이니 내가 챙기는 게 당연하죠.”

호호호,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 편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진짜 별거 아닌 일이기는 했다.

생각을 잘 정리해 뒀다가 제대로 명령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입으로만 일하는 느낌인데.’

전생의 대한민국에서 몸을 굴리며 뼈 빠지게 일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말로만 명령을 내리는 지금의 일들은 식은 죽 먹기 중에서도 꿀 난이도였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일로 칭찬을 받다니.

모든 게 다 감사할 따름이다.

“참, 멀론 경에게 전달할 게 있어요. 잠시 시간 괜찮나요?”

멀론 경을 데리고 내 침실로 갔다.

그리고 준비해 뒀던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감사 선물이에요. 요소킨 수업 운동실을 만들어 준 것도, 야학 수업을 개설해 준 것도 고마워요. 멀론 경이 매번 수고가 많아요.”

“아…?”

제크론의 보좌관은 내 감사 인사에 매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봉투를 건네받는 그의 손가락이 조금 떨렸고, 봉투를 열어 본 그의 두 눈이 다시 휘둥그레 커졌다.

저런.

눈이 점점 튀어나오겠어.

그러면 안 될 텐데.

“…호텔 숙박권에, 식당 이용권에, 게다가 의상실 이용권까지… 이게 다 뭔가요, 마님?”

멀론 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여동생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부모님과 함께 동생들을 제도에 초대해서 며칠 동안 관광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준비해 봤어요.”

“아….”

“물론 공작성에 초대하는 것도 너무 좋지만, 젊은 영애들은 지방 영지보다는 제도 구경을 훨씬 더 좋아하니까요.”

“하긴, 그렇죠.”

멀론 경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답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어때요? 꽤 괜찮은 생각이죠? 가족들을 초대하는 김에 멀론 경도 며칠 휴가 내시고요.”

“감사합니다, 마님. 부모님과 동생들한테 처음으로 점수 딸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여자 마음은 여자가 잘 아는 법이니까 분명 동생들도 좋아할 거예요. 나만 믿어요, 멀론 경.”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멀론 경이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게 느껴져서 뿌듯했다.

내내 무뚝뚝했던 그에게 이 정도의 감사 인사를 받게 될 줄은 예상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갑자기 멀론 경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와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해졌다.

“…죄송하다뇨? 뭐가요?”

“마님께 불충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많았습니다.”

“아… 그거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굳이 모른 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와의 대화가 불편했던 순간들이 간혹 있었고, 그에 대해 당사자가 사과하고 있으니 말이다.

“역시 알고 계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다 지난 일인걸요. 사과받았으니 이젠 다 잊을게요.”

“위벨 메시나 증서 때문에 화가 났었습니다. 웃기죠.”

허심탄회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그의 얼굴에 자책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윌트슨 공작가의 영원한 가보가 될지 모르는 증서를 마님의 신성수 치료에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

“마님과 아기님을 위한 것이 결국은 윌트슨 공작가를 위한 것이다, 라는 각하의 말씀도 이해가 되지 않았죠. 어리석게도 말입니다.”

“…충분히 이해해요. 멀론 경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도 있었어요.”

내가 그의 입장이었어도 화가 났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제크론을 옆에서 보필했던 충신이었고, 그만큼 윌트슨가를 사랑했다.

그 중요하고, 그 대단한 것을 한 사람의 신성수 치료에 사용했으니 충분히 화가 날 만했다.

나조차 백지 소원권과도 같은 위벨 메시나 증서에 대해서 알게 됐을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모두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니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마님. 절대로요.”

“네?”

“마님의 건강을 위해, 배 속 아기님의 건강을 위해… 앞으로 더욱 예민하게 챙기시면서 건강에 힘써 주세요. 그래서 꼭 건강한 아기님을 출산해 주세요.”

“멀론 경….”

말을 쉬이 잇지 못했다.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 것 같던 사람에게 이해받았을 때의 감격이란… 내가 가진 부족한 어휘들로 형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정말….”

후두둑,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내 눈물에 멀론 경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긴 모시는 상관을 울려 버린 꼴이니 당황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역시 자네가 사고 칠 줄 알았어. 감히 내 아내를 울려?”

별안간 제크론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각하! 그, 그게….”

“아, 여보, 그런 게 아니라… 흐흑….”

멀론 경을 두둔해야 했지만, 벌어진 입에서는 단어나 문장 대신 흐느낌만이 흘러나왔다.

멀론 경은 난색을 표하며 어버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아니, 여보… 흐흑, 자꾸만 눈물이…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정말… 흑.”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아무런 말도 제대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멀론 경에게 이해받았다’, ‘감동 먹어서 흘리는 눈물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이 중에 제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나와 줬으면 했지만 결국 나는 그 어떤 말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려 댔다.

바보처럼.

“자네에겐 나중에 자초지종을 듣도록 하지. 이만 가 보게.”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멀론 경이 꾸벅 절을 하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제크론이 흐느끼는 날 그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흐흑… 여보, 그게 아니고….”

“다 알아.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울고 싶은 만큼 울어. 괜찮으니까.”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내 등허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그날, 제크론의 품에 안긴 채 많은 눈물을 쏟아 냈고, 미안하게도 그의 셔츠를 완전히 적셔 버렸다.

*   *   *

오늘은 두 번째 신성수 치료를 받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긴장감이 내 몸을 감쌌다.

처음도 아닌, 두 번째인데도 그랬다.

주치의 매튜와 함께 위벨교의 대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의 정문부터는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야 했다.

진입로가 워낙 길어서 10분 넘게 걸어야 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진입로가 오늘따라 왠지 삭막하고 휑하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이곳에서 생명의 은혜를 받는 입장이라 모든 것을 감사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유 모를 걱정과 긴장이 앞섰다.

‘위벨 메시나 증서에 대해서 알아 버린 부담감 때문에 그런가?’

내 우울한 기분에 대한 이유를 대충 생각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찼다.

내가 어깨를 움츠리며 떨자 매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추우십니까, 마님?”

“조금요.”

매튜는 바로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덮어 줬다.

자상한 주치의다운 행동이었다.

“고마워요.”

“감기에 걸리면 안 되시죠.”

매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생긋, 웃었다.

수습 신녀를 따라 옷을 갈아입고 신성수 치료실로 향했다.

“오늘은 대신관님께서 공작 부인의 신성수 치료에 참관하실 예정입니다. 치료 중간에 잠깐 들어오셨다가 나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직접 마주치실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놀라실 필요 없으세요. 신성수 치료실을 참관하시는 것은 대신관님의 주요 일정 중 하나랍니다.”

“…….”

“오늘은 공작 부인의 치료 일정과 대신관님의 참관 일정이 겹쳐져서 공작 부인의 치료실을 찾게 되는 것이고요.”

“네.”

수습 신녀의 설명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스러워하는 날 안심시키려 해 주는 설명이겠지만, 왠지 그녀가 변명을 늘어놓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생겼다.

오늘따라 상대의 말투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나였다.

“오셨습니까, 윌트슨 공작 부인.”

“어서 오세요, 부인.”

“안녕하세요, 신녀님들.”

나를 맞아 주는 치유 신녀 아미트와 베로니카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내 몸의 치유를 담당하는 신녀들에게 생긋 웃어 보였지만, 신녀들은 주로 무표정 상태를 유지했다.

‘환자들에게 웃어 주지 말라는 규칙이라도 있는 건가? 치잇.’

괜히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서운한 생각과는 별개로 내 시선은 자연스레 베로니카 신녀에게로 향했다.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이자, 제크론의 운명이 될 여자였다.

베로니카는 눈꺼풀의 깜빡임과 눈동자의 움직임, 그리고 손동작과 발걸음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완전무결의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였다.

그녀의 곁에 서 있으니 어젯밤 제크론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양껏 쏟아 냈던 게 미안해졌다.

그녀의 남자를 빼앗은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아직 제크론은 분명 내 남편이 맞는데, 내 남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각… 끔찍해. 베로니카를 마주하는 이 상황… 참혹하다, 참혹해.’

처음으로 신성수 치료를 받게 된 것을 후회했다.

내 운명을 생명으로 이끌 치료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불경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로서는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빨리 치료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

제크론이 있는 곳.

나를 위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

공작성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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