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42)
  • 29화

    얼굴에서 표정을 싹 지우고 입을 열었다.

    “고용인들 복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디가 잘못됐나요? 내가 멀론 경의 바쁜 일정을 걱정하는 것과 같아요.”

    딱딱한 어조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공작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는 정도는 할 줄 알아서 조금 더 효율적인 작업 환경에서 일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에요.”

    “…….”

    “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작성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게, 합리적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고용주의 마땅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는데, 멀론 경의 생각은 다른가 봐요?”

    “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네. 다만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서 말입니다. 고용주가 고용인들의 교육을 위해 비용을 지출하는 사례는 제국 역사상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흠, 그렇게 나오시겠다?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서 이곳 사정이나 역사 같은 건 잘 몰라서요.’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그럴듯한 포장이 필요했다.

    “멀론 경, 여긴 윌트슨입니다. 제국 역사상 그 어디에도 없던 전쟁 영웅의 성 안에서 숨 쉬고 살고 있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요.”

    “…….”

    캬아… 멘트 좋고!

    멀론 경의 뚱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 남편은 제국의 첫 번째가 된 사람입니다. 나는 그 무엇으로든 제국의 첫 번째가 되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멀론 경은 어떤 사람인가요? 혹시 제국의 첫 번째가 되는 것이 두려운가요?”

    어머, 나 말 너무 잘하는데?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다다다 나왔다.

    할 말을 잃은 멀론 경의 입이 일자로 꾸욱 다물어졌다.

    ‘여전히 불손해.’

    조용히 앉아 조쉬 멀론의 대답을 기다렸다.

    두 눈을 똑바로 크게 뜨고 그를 봤다.

    그 역시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마주 봤다.

    ‘뭐야? 기 싸움이라도 하려는 거야? 감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강인하면서도 이성적이고, 현명한 주인마님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감정적인 대응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조쉬 멀론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고마워요. 이만 나가 보세요.”

    “그럼 쉬십시오, 마님.”

    멀론 경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흐읍… 하아….”

    심호흡을 크게 내쉬어야 했다.

    제대로 해결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찝찝한 생각이 들었다.

    멀론 경의 뚱한 태도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가 보였던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와 태도가 괜히 나에 대한 감정이 묻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그저 워낙 바쁘고 피곤한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떨어지니 잠시 짜증이 치밀었던 거겠지.’

    애써 멀론 경을 위한 변명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이너 피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이너 피스는 찾아오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이를 으드득, 갈았다.

    스트레스 제로의 인생을 꾸려 가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   *   *

    델리아 슈라더 후작 부인의 일 처리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세 귀족 가문과 세 실내악단의 계약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그중 한 실내악단이 오늘 윌트슨 공작성으로 출근했다.

    악단 단원들은 모두 제도에 거처를 두고 있었는데 제도와 뎀프샤까지는 공작성에서 계약한 마법 마차를 추가 운행하기로 했다.

    네 명으로 구성된 단원들은 1층 로비에 마련된 연주 단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전에 2회, 오후에 4회 공연이 진행되며, 한 회 공연당 30분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공연과 공연 사이에는 30분 내외의 휴식 시간을 가집니다. 점심 식사 휴식은 2시간입니다. 여기 일정표입니다.”

    악단의 단장이라는 여자의 이름은 알렉사였다.

    그녀가 조곤조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공연 일정을 말하고는 해당 내용이 적힌 양피지를 내게 건넸다.

    일정표를 쭈욱 훑어본 나는 초록색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내린 알렉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휴식 시간에는 1층에 있는 게스트룸을 대기실로 사용하면 돼요. 편히 쓸 수 있도록 방 4개를 미리 준비해 뒀답니다.”

    “어머, 개인 대기실까지 준비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물론이죠. 윌트슨 공작성에 있는 동안에는 편하게 지내면 좋겠어요.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집사장이나 하녀장에게 얘기해 줘요.”

    “알겠습니다, 공작 부인.”

    할 말을 다 마친 내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기억 안 나세요?”

    “네?”

    단장의 미소가 왠지 좀 차가워진 기색이 느껴졌다.

    엘프윈과 과거에 뭔가로 엮였던 사이인가?

    그 사건이 뭔지는 몰라도 썩 좋은 사건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단장의 얼굴에 떠오른 냉랭한 기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제가 워낙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해서요.”

    호호, 내 입에서 어색하고 민망한 웃음이 작게 흘러나왔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예전에 린스키 대공저 파티에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마님,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하려던 말을 다 끝마칠 수 없었던 알렉사는 헐레벌떡 달려온 하녀 주디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 주인님?

    제크론은 오늘 성에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 주디가 한쪽 눈을 아주 살짝 찡긋 감으며 내게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닌가.

    그제야 눈치챘다.

    ‘후훗, 깜찍한 내 하녀 좀 보게!’

    주디는 난감한 상황에 갇힌 나를 구해 주려고 핑계를 꾸며 냈던 것이다.

    주디가 ‘쿵’ 해 줬으니, 이번엔 내가 ‘짝’ 할 차례였다.

    “어머, 그러니? 대체 무슨 일로 급하게 찾는 걸까? 얼른 가 봐야겠네. 단장님, 그럼 연주 부탁드려요.”

    나는 손을 팔랑 흔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귀엽고 앙큼한 내 하녀에게 어떤 칭찬의 선물을 줘야 좋을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알렉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미동도 않고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녀를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용기가 들지 않았다.

    잠시 후, 아름다운 선율이 공작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1층 로비에 마련된 연주 단상은 특수 제작한 것으로 소리를 증폭하는 데 탁월한 기능을 자랑했다.

    3층의 개인 응접실에서도 연주 소리가 부족함 없이 들려왔다.

    ‘그래, 이거야! 이 느낌이야! 캬아… 좋다, 좋아!’

    소파에 기대 두 다리를 쭈욱 뻗어 앉아 허브차를 홀짝이며 들려오는 음악을 음미했다.

    “그런데 주디, 예전에 대공저 파티에 대해서 내가 뭔가 얘기를 한 적이 있니?”

    아까 그 초록 머리의 단장이 어디 대공저라고 이름을 말했던 것 같은데, 이 세계의 이름은 내가 단번에 알아듣기에는 좀 어려운 감이 있었다.

    “린스키 대공저 파티 말씀이세요?”

    “응, 맞아! 그 이름이었던 것 같아! 그날 무슨 얘기 못 들었어?”

    “그게….”

    주디는 뭔가를 알고 있는 낌새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말하기를 꽤나 꺼려 하는 눈치였다.

    “아까 저 초록 머리한테서 날 구해 준 건 정말 고마웠어, 주디. 그 여자, 내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

    “제가 그날 일에 대해서 기억하는 건 단 하나예요, 마님.”

    “그게 뭔데?”

    “파티에서 돌아오신 마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셔서는 엄청 씩씩대셨어요.”

    “왜 화났다는 말은 안 했고?”

    “그게… 드레스가 겹쳤다고 하셨어요.”

    “드레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엘프윈의 드레스는 최고급에다가 화려했을 텐데.

    ‘그런데 악단 단장과 드레스가 겹쳤다고?’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내가 기억을 못 하자 주디는 답답해졌는지, ‘에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물론 마님께서는 마담 린다 님의 작품을 입고 가셨죠. 그런데 상대 여성은 모조품을 입으셨던 것 같아요.”

    “아….”

    “그… 마님께서 가짜가 어쩌고, 부끄럽지도 않냐 어쩌고 하셨던 기억이 있어요.”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쭈뼛쭈뼛 이어 가던 주디는 이야기를 겨우 마치고 내 눈치를 살폈다.

    제 고용주 앞에서 고용주 본인의 허물을 까발리는 게 역시 쉬운 역할은 아니다.

    “하지만 모조품은 범죄잖아? 아니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묻자, 또다시 주디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저기… 기억을 잃으신 마님을 위해 제가 한 말씀 덧붙이자면요.”

    “그래, 그래. 어서 말해 줘.”

    “모조품이라고는 하지만 사용하는 옷감의 질이 완전히 다르고, 디테일 역시 마찬가지라서요. 제대로 보지 않으면 모조품인지도 모를 정도예요.”

    “…….”

    “옆에 놓고 봐도 다른 옷처럼 보일 정도라고 했어요. 그래도 세세히 뜯어 놓고 보면 모조품인… 뭐, 그랬대요.”

    “그…래?”

    순간 뜨끔했다.

    사실 내가 한 일도 아닌데 뜨끔하는 게 좀 억울하긴 했지만 말이다.

    주디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보자는 식으로 말이다.

    “저희 평민들의 옷은 대부분 어느 디자이너님의 모조품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몰랐는데, 그렇대요. 우리가 알 리가 있겠어요?”

    “아… 그랬던 거구나.”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엘프윈이 괜한 트집을 잡았던 것이구나.

    초록 머리 단장은 제가 입은 옷이 어느 디자이너의 모조품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직접 눈으로 보고도 엘프윈과 같은 디자인의 옷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엘프윈의 공격을 받았으니 얼마나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웠을까.

    얼굴이 홧홧하게 달궈졌다.

    하지만 역시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알렉사는 실내악단의 단장이라고는 하지만 평민이고, 나는 엄연히 공작 부인인데, 저렇게 먼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고?

    내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눈치 빠른 주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저 단장이라는 여자는 한때 귀족이었다고 해요. 한미하기는 하지만요. 아마 그래서 더….”

    내 눈치를 살피던 주디는 말을 끝까지 다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하려던 말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알렉사는 그래서 더 자존심이 상했으리라.

    ‘이를 어쩐다?’

    앞으로 일주일에 이틀씩은 계속 봐야 하는 얼굴인데, 몹시 껄끄러워진 이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루 종일 음악이 흐르는 성을 만들고 싶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실내악단을 고용했다.

    성 안에 감미로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는 있는데, 내 마음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이런….’

    *   *   *

    오늘은 슈라더 후작 부인 일행과 제도의 유명 디저트 가게에서 티타임을 갖기로 한 날이었다.

    배가 점점 더 불러서 이젠 제법 드레스 위로 볼록한 배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몸 상태는 전보다 훨씬 나아져서 걷거나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걷다가 다리가 후덜덜 떨리거나, 갑자기 눈앞이 핑 돌거나, 찻잔을 잡으려는데 손이 잘게 떨리거나 하지 않았다.

    좋은 변화였다.

    내가 공작성에서 눈을 뜬 지도 이제 거의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그동안 열심히 먹고 움직인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유 신녀로부터 신성수 치료를 받은 덕분이 큰 것 같았다.

    몸이 훨씬 가뿐해진 것도 있었고, 마음 역시 개운해졌다.

    확실히 믿을 구석이 생긴 기분이랄까.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 달라지지 않을 리가 있겠어?’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그 덕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확실히 옅어진 것 같았다.

    이 역시 좋은 변화였다.

    오늘의 약속 장소는 요즘 제도에서 핫하다고 소문난 디저트 가게 ‘플라워 앤 케이크’였다.

    가십지에도 하도 많이 언급된 탓에 나도 가게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황태자비가 이곳의 케이크를 자주 찾는다고 해서 입소문이 났다고 했다.

    게다가 최근 초상화에도 이 가게의 케이크를 장식품으로 썼다고 하니, 황태자비의 이곳 케이크 사랑이 어마어마한 것 같았다.

    디저트 가게는 이름과 어울리게 꽃장식이 가득했다.

    간판부터 시작해서 입구와 벽까지 모두 꽃으로 꽉 차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사뿐사뿐 걸어서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눈으로 봐도 믿기 힘든 광경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하아? 이런 미친 사람들을 봤나!”

    필터를 거치지 않은 거친 말이 그대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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