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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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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내가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행위가, 침대를 박차고 몸을 들어 올리는 행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게 느껴졌다.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을 마시고 카펫이 깔린 바닥에 정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호흡에 집중하며 요소킨의 기본 동작을 기억나는 대로 하나하나 해 나갔다.

    열어 둔 창문으로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흐읍… 후우… 흐읍…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목을 360도로 돌리고, 팔을 좌우로 늘이고, 다리를 쭈욱 뻗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태동이 느껴지면 잠시 멈춰 아이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아가도 엄마 따라서 운동하는 거야? 아가는 아빠와 닮은 기운을 타고났대. 그렇다면 우리 아가도 최소 전쟁 영웅쯤은 되겠구나!”

    혼자 말하고, 혼자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젠 아이와 이렇게 대화 나누는 것도 많이 익숙해졌다.

    처음엔 혼잣말이지만 ‘엄마’라는 호칭을 내뱉는 것조차도 무척 어색했었는데 말이다.

    잠시 후,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서 제크론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그가 바쁜 일정 때문에 일찍 식사를 마치는 탓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때마침 그가 식당에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살짝 부은 눈까지 자다가 방금 깨난 것 같았다.

    “이 시간에 보는 건 오랜만이군.”

    “좋은 아침이에요.”

    신문에서 눈을 뗀 제크론이 편안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에 비하면 참 많이도 달라졌다.

    제크론뿐만이 아니었다.

    식당 안의 하녀들 역시 훨씬 편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자연스럽게 제크론 옆에 앉았고, 내 앞에는 금방 다양한 음식들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당신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네, 덕분에요.”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브로콜리 수프를 떠먹으며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당신 덕분에 요소킨 수업도 들었고, 신전에서 치료도 받았잖아요. 당신 덕분에 몸 상태가 점점 호전되는 것 같아서요.”

    “아, 그 얘기군. 난 당신 제안에 승낙한 것밖에 없어.”

    “그러니까요. 그래서 고마워요.”

    “그, 그래.”

    제크론이 부끄러운지 다시 시선을 신문으로 돌렸다.

    그러자 붉게 달아오른 그의 귀가 여실히 드러났다.

    고맙다는 인사에 이리도 부끄러워할 이유는 또 뭐람.

    푸흣,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앞에 있는 그린빈 베이컨 샐러드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포크로 콕콕 찍어 한입 가득 채운 후 야무지게 씹고는 꿀꺽 목 아래로 넘겼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새로운 제안거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크론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향했다.

    아침이라 그런가.

    아니면, 머리가 헝클어져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원래 부스스한 재질의 남친짤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런가.

    남청색 눈동자에 깃든 청량감이 다른 때의 배에 달하는 것 같았다.

    꼴깍, 마른침이 절로 넘겨졌다.

    “실내악단이 오고 나면 언제 날 잡아서 티파티를 주최해 보고 싶어요.”

    “당신이? 티파티를? 주최한다고?”

    아, 자주 봤던 표정이다.

    놀랍다는 표정 말이다.

    “이제 아는 얼굴들이 좀 생겼으니, 그들과 친구가 되어 볼까 하고요.”

    “친구? 당신이?”

    에이, 이 사람이 또 그런다.

    어금니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금방 친구가 될 수는 없겠죠. 그러니까 자주 티파티를 열어서 자주 얼굴도 보고 말도 섞어 보고 해야죠.”

    “그렇게 하도록 해.”

    “티파티도 스트레스 해소, 즉 정신 건강을 위한 것이니, 내 내탕금에서 지출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지원해 주는 거 맞죠?”

    내 물음에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정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나는 크루아상을 뜯어 입 안에 넣었다.

    보드라운 질감의 빵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   *   *

    윌트슨 공작 부인의 전속 하녀인 케이트와 주디의 삶은 요즘 많이 변했다.

    불과 두 달 전만 하더라도 극한의 직업이라며 모두의 위로를 받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오히려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돼 감개가 무량할 정도였다.

    늦은 밤, 케이트는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하얀 종이 위에 열심히 깃펜을 놀리며 새로 배운 글자를 연습하는 중이었다.

    룸메이트인 주디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안 자?”

    “응, 좀만 더 하다가 자려고. 먼저 자.”

    “대단하다, 너. 피곤하진 않아?”

    “피곤하지만 재밌어. 넌 숙제 다 끝냈어?”

    “아니, 아직. 지금 너무 졸려서 못 하겠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할래.”

    헤헤, 주디가 멋쩍게 웃다가 다시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마님 정말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대단하신 것 같아.”

    “왜?”

    “대체 어느 귀부인이 사용인들 글공부 선생님을 따로 불러다가 교육시켜 주시겠어?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진짜.”

    “그러게 말이야. 내가 요즘 글공부 중이라니까, 우리 엄마는 눈물까지 흘리셨다니까.”

    케이트가 지난 비번에 집에 잠시 들렀을 때, 딸의 글공부 소식에 눈물짓던 어머니의 주름 많은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데 말이야.”

    “응, 뭐?”

    방금 전까지 졸려서 연신 하품을 내뿜던 주디의 목소리가 다소 심각해졌다.

    “클로디가 좀 질투하는 것 같아. 루퍼트 아저씨도 그렇고. 넌 그런 낌새 못 느꼈어? 내가 괜히 예민한 건가?”

    “어, 맞아! 나도 느꼈어.”

    클로디는 세탁 담당 하녀이고, 루퍼트는 정원 관리 담당 하인이다.

    그들은 공작 부인의 아량으로 글공부를 하게 된 케이트와 주디를 특히나 부러워했다.

    “지금이야 뭐, 장난으로 그런 내색을 비치는 정도인데, 점점 더 심해질까 봐 그게 걱정이야.”

    “그러게. 마님께 알려야 하나?”

    두 하녀의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얼마 전 마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조언이 필요할 때는 지체 말고 너희들의 목소리를 들려줘. 알다시피 나,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태니 특히나 너희 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 그래 줄 수 있겠니?”

    케이트와 주디는 이런 것도 조언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말씀을 드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아…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케이트와 주디가 꺼낸 이야기를 곰곰이 듣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사소한 혜택일지라도 누군가는 받고, 누군가는 받지 못한다면 차별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미리 얘기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야. 관련해서 멀론 경과 얘기해 봐야겠어. 멀론 경을 불러 줄래?”

    “네, 알겠습니다, 마님.”

    케이트와 주디는 잰걸음으로 바쁘게 나갔다.

    아무래도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하아….”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의 발단은 매우 사소한 것에서부터였다.

    전생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 혹은 잠을 잘 때도 종종 오디오북을 들었던 습관이 있던 나는 어느 날 케이트에게 부탁했다.

    “케이트, 나 책 좀 읽어 줄래?”

    “네에? 그게… 저는 책을 못 읽는데요, 마님?”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뭔가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너 지난번에 책꽂이에서 책 꺼내 오라고 할 때 잘 가져왔었잖아?”

    “그건 책 표지를 기억해 뒀던 거구요.”

    “내가 어느 날짜의 무슨 신문을 찾아오라고 했을 때는?”

    “글자 모양으로 구분했어요. 숫자는 읽을 수 있고요.”

    “아… 그랬던 거구나.”

    힘없이 벌어진 내 입은 한동안 제대로 다물어지지 못했다.

    케이트는 아무렇지 않은데 괜히 나만 놀라고 당황했다.

    케이트는 꽤 영리한 축에 속하는 하녀였다.

    책이나 신문을 가져오라는 심부름도 실수 없이 잘 하기에 너무도 당연히 그녀가 글을 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니.

    게다가 글자를 모른다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이곳은 평민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제공되지 않는 곳이란 것을 말이다.

    귀족들이 부와 명예, 게다가 지식까지 점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내가 귀족의 몸에 빙의돼서 안심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찝찝한 마음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내 곁에서 날 돕는 전속 하녀들의 세상은 조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하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모두 나를 위해서였다.

    케이트와 주디가 글을 편하게 읽고 쓸 수 있게 되면 그녀들에게 다양한 심부름을 걱정 없이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면 내가 낮잠 잘 때 10분씩 책 읽어 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들은 처음엔 영문을 몰라 했지만, 나중엔 몹시 기뻐했다.

    주디보다 케이트가 좀 더 기뻐했다.

    글선생은 멀론 경을 통해서 구했다.

    큰 사안은 아니라 제크론에게 말하기보다는 멀론 경과 의논했더니, 그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다.

    월수금, 오후 한 시간씩 내 침실에 딸린 개인 응접실에서 수업이 진행됐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사용인들 사이에서 말이 나온다는 이유로 중간에 멈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시작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되고 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업에 집중하는 케이트와 주디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멀론 경이 노크와 함께 내 방으로 들어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님.”

    “어서 와요, 멀론 경. 여기 앉으세요.”

    그의 얼굴은 오늘도 어두웠다.

    눈 밑에 거뭇한 다크서클이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요즘 일이 많아 바쁘시죠?”

    “마님의 걱정 덕분에 조수를 두 명 더 채용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조금 더 여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쉬 멀론은 말로는 감사하다고 했지만, 그 말에 영혼이 별로 담기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러려니 했다.

    “케이트와 주디가 하는 글공부를 공작성의 모든 사용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요?”

    그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안 그래도 원래 개구리눈처럼 동그랗고 조금 돌출된 눈이었는데, 더 동그랗고 더 돌출된 모양새가 되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그런 생각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의 입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쉬 멀론은 화가 나는 것을 애써 참는 눈치였다.

    그의 날 선 반응에 당황했다.

    그래도 엄연히 내가 그의 고용주인데 이런 태도는 꽤나 불손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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