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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9)화 (119/156)

118화. 24시간이 모자라(3)

원래의 나였으면 질색을 하며 손을 내쳤을 것이었다. 아니면 이왕 지껄인 김에 더 해 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그의 말투가 미묘하게 나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나, 이런 거에 넘어가는 여자였어?

“뭐라는 거예요. 자, 많이 봤으니까 됐죠? 이런 시답잖은 거나 시키고, 선생님도 정말 제자 하난 잘 둔 거라구요.”

“이걸로 주세요.”

“?”

내가 놀란 표정으로 그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베탄이 대답 대신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진짜 사는 거예요? 왜요? 저 안 할 거예요. 제 취향 아닌데?”

“그냥 사 주는 거야.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오호, 받는 사람 마음은 생각도 안 하고 선물 고르는 사람도 있군요?”

“…예전부터 사 주고 싶었어.”

“네?”

“네 은발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뭐라도 사 주고 싶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잘 어울리는데 굳이 안 할 건 뭐지? 패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라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

“흠, 이건 너무 사랑스럽다고요.”

맞았다. 이 머리띠는 레이스까지 앙증맞게 달려서 러블리함을 최대치로 뽐내고 있는 액세서리였다. 이건 양 갈래 머리가 잘 어울릴 법한 소녀한테 줘야지, 나 같은 쿨한 여자한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인생을 산 세월이 있어서일까? 나는 자꾸만 어른처럼 굴려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튼 간에, 이건 안 할 거예요. 선생님이 리본이라도 매면 생각해 볼 만하지만요.”

그리고 나는 나이가 무색하게 어린아이처럼 굴려는 베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갑자기 가판대에 올려져 있는 빨간색 리본을 집어 들더니, 자신의 머리 쪽으로 가져다 대는 것이다.

“잠시 해 봐도 되죠?”

“네……? 네. 그럼요.”

가판대 주인 또한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하나라도 더 파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돈의 맛을 잘 아는 듯한 주인의 눈빛은 언제든지 ‘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이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선생님, 드디어 미친 건가요?”

“잘 안 되는군.”

“…….”

“좀 해 줄 수 있어?”

태어나서 한 번도 리본을 묶어 볼 리 없을 것 같은 이 남자는 낑낑대며 자신의 짧은 머리를 어떻게든 리본으로 감싸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좀 해 줄 수 있냐며 이제는 허리를 숙여 자신의 머리를 나에게로 가져다 댔다.

“됐어요. 이리 줘요.”

그의 머리에서 리본을 휙 낚아챈 나는 리본을 다시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이건 안 사는 거로 할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괜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베탄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왔다.

“선생님, 제정신이에요? 키는 멀대같이 큰 남자가 무슨 리본을 매려 하고 있냐구요.”

“안 풀었네?”

“네?”

“머리띠 말이야.”

그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베탄이 이상한 짓을 해서 이걸 풀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좀 와 봐.”

그런데 그때,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 확인해 보니 아까 시장가에서 보았던 화가 아저씨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손에는 붓을 든 채로.

“무슨 일이십니까?”

베탄이 나보다 먼저 다가가 물었다. 아저씨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애인 되는 사람인가? 이 아가씨 머리가 너무 특이하고 아름다워서 말이야.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거든. 허락해 주겠나?”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며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이쪽으로 오라는 껄렁했던 대사치고는 순박해 보이는 사람 같았다.

“네, 뭐. 상관은 없어요. 괜찮죠, 선생님?”

“…….”

베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저씨는 신이 난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들고 다닐 수 있게 작은 종이에 그려 줄게. 이쪽으로 붙어 봐. 친해 보이게끔.”

“?”

“뭘 붙어요?”

“지금은 둘이 너무 어색해 보이잖아. 어깨에 팔이라도 두르던가, 팔짱이라도 끼라고.”

아저씨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만 그린다는 거 아니었어?

“선생님, 선생님도 같이 그린다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싫으면 죄송하다고 하고 그냥 가죠.”

“…….”

“어차피 시간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있으니까…….”

“아니, 그리는 게 좋겠어.”

베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화가에게 손짓을 하며 어서 그리라는 사인을 보냈다.

“좀 더 붙으라니까!”

아저씨는 우리의 자세가 못마땅했는지 다시 한번 외쳤다. 그러자 베탄이 살며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묻자, 베탄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붙으라잖아. 시간도 없는데 빨리 하고 가야 할 것 아닌가?”

“변명도 진짜…….”

“변명이라니, 섭섭한 소릴 하는군.”

“선생님이 섭섭할 게 뭐가 있어요……!”

그의 품에 안겨 최대한 입술을 움직이지 않으며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괜히 행동 하나하나가 삐걱대는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베탄은 낮게 중얼거렸다.

“추억 하나 정도는 만들어도 괜찮잖아?”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이런 기록물을 남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세계엔 당연히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없었기에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긴 했다.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내가 새로운 모습으로 남기는 첫 번째 기록물. 그걸 베탄과 함께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묘한 감각을 그와 함께 느끼니 그를 향한 내 마음마저 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때문인지 나는 갑작스레 베탄이 나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

이름: 베탄 오스가르드

나이: 21

직위: 램클리프 마법협회의 총기사단장

호감도: 45%

+

그의 집에서 보았던 마지막 호감도보다 훨씬 올라 있었다. 둘이 붙어서 장을 본 게 큰 역할을 한 건가? 아니면 머리띠를 골라 주었을 때가 결정적이었나? 아니면 바로 지금?

“자, 다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분을 전봇대처럼 가만히 서 있었을까, 화가 아저씨는 다 되었다며 이쪽으로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자, 어때. 둘 다 인물이 출중해서 그림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아주 열심히 그렸다네.”

아저씨는 자랑스럽게 그림을 보여 주었고, 나는 고개를 내밀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

그림 안에는 정말 예쁜 한 쌍의 커플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가 아저씨의 실력이 좋은 건지 어색하게 서 있던 건 전혀 티 나지 않았다.

“자, 선물이야. 가져.”

그리고 성격마저 쿨하신 아저씨는 우리에게 그림을 건넸고, 나는 얼떨결에 그림을 받아 들었다.

“저희가 가져도 되나요?”

“당연하지. 남의 커플 그림을 가지고 내가 뭘 하겠나, 국을 끓여 먹겠나?”

“…….”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꾸벅 인사를 했다. 제멋대로 행동하기 짝이 없는 아저씨는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해 주었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오래 사귀어서 결혼까지 하라구.”

저런 말은 시장에 들어온 후로 귀에 피가 날 만큼 들었기에 이젠 부정도 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헛웃음이 픽 튀어나올 뿐이었다. 아주 그냥 자기네들 맘대로 보라지. 남녀가 붙어 있기만 하면 엮어 대는 이 사회가 문제라니까.

나는 그림을 주머니에 넣은 다음 베탄에게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 식재료를 산 다음에 갈 곳은 대체 어디일까.

“병원으로 갈 거야. 내가 입원했었던 마을 병원.”

“병원이요? 왜요?”

“아픈 아이들을 하루 동안 보살펴 주기로 했거든. 밥도 직접 해서 먹일 거야.”

“그래서 이렇게 장을 본 거군요?”

기사로 활동하는 베탄이기에 정의감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따로 봉사를 다니는 줄은 몰랐다. 이렇게 보니 겉은 매서워 보여도 속은 촉촉한 인간일지도?

“좋았어. 그럼 어서 가요. 저도 도울게요.”

나는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베탄과 24시간을 같이 쓸 수 있는 기회를 봉사하면서 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뭐 어떠한가,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걸.

지금까지 살아온 바에 의하면 내 뜻대로 인생이 흘러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젠 그냥 이 운명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서핑이나 타련다. 그러면 언젠가 매서운 파도도 겁나지 않아지겠지?

“루나, 무슨 생각해? 이쪽으로 와. 어린 애들은 짓궂을 수 있으니 단단히 각오해야 해.”

베탄은 나를 이끌며 당부의 말을 전했고, 나는 그것을 허투루 들은 것을 후회했다.

* * *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놀아 줘도 아이들은 지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틈만 나면 내 다리나 팔에 들러붙기 일쑤였다. 나중엔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 떨어져? 누나 팔 아프다니까!”

“이히히, 하지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기분이 좋단 말이에요.”

한편 베탄은 병원 입구에 들어왔을 때부터 인기 폭발이었다. 어린아이들과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지 다들 베탄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바빴다.

“선생님. 제가 그저께 여기 수술을 받았는데요, 너무너무 아팠어요.”

“그랬구나. 어디 한번 볼까? 내가 빨리 낫는 마법 주문을 걸어 줄게.”

능숙하게 아이들을 대하는 베탄은 자신이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치기도 했다.

“약 먹기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간호사 누나가 절 혼냈어요. 베탄 선생님이 가서 혼내 주세요.”

“약은 잘 먹어야 해요. 그래야 선생님처럼 멋진 기사가 될 수 있지!”

게다가 자신을 ‘멋진 기사’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완전 낯설어.”

생전 처음 보는 베탄의 모습에 나는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이 남자는 대체 몇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거야?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전부 다 준비해 놓았다.’인가?

그때, 베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저녁 준비를 하러 가야 해.”

“네. 가죠.”

“아이들이 머무는 병동에 주방이 따로 있어.”

베탄과 나는 시끌벅적한 아이들 무리에서 벗어나 한적한 소아 병동 앞으로 왔다. 아이들이 모두 바깥에 나와 있기도 하고, 저녁이라 그런 건지 굉장히 한적했다.

“오늘 신기한 경험을 다 해 보네요.”

“애들이 참 귀엽지?”

“귀엽다 못해 파격적인 수준인걸요. 제 귀가 뜯길 뻔했다고요.”

“하하, 루나 너는 말을 참 재밌게 하는 것 같아.”

“네? 제가요?”

나는 한 번도 베탄을 웃기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을 때도 그렇고.”

“…….”

“당연한 걸 모를 때도 그렇고.”

“…….”

“가끔 보면 다른 세계 사람 같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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