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07)화 (107/156)

106화. 정령국(1)

“‘케이오스’의 본거지는 레인타운이야.”

나는 세이먼에게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잰퓨어에게 말했다.

그러자 잰퓨어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루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쩌다가… 알게 되었어. 자세한 거까진 나도 몰라.”

“분명 그들의 본거지는 아리안 섬이라고 들었는데…….”

잰퓨어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손톱을 깨물었다. 나도 그들의 본거지가 레인타운일지 아리안 섬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세이먼이 잘못 알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레인타운 마을이 규모가 작으니 그곳부터 조사해 보는 게 빠를 거야. 여기서 훨씬 가깝기도 하고.”

내가 조언하자 잰퓨어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보는 많을수록 좋겠지. 고마워, 루나.”

“아냐, 내가 뭘.”

굳이 세이먼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말해서 좋을 것도 없었거니와 딱히 잰퓨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나, 너는…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잠시 수심에 잠겨 있던 잰퓨어가 고개를 들며 나에게 물었다.

당분간 학교는 정비 공사 때문에 수업이 없을 예정이기 때문에 묻는 것 같았다. 그의 물음에 나는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정령국에 가는 것.

샐라임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정령왕을 만나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려면 정령국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원래는 오성석을 이용해서 시스템에서 벗어난 뒤에 아무런 제약 없이 정령국으로 떠나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처참하게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샐라임과의 약속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의 자유로운 해방을 위해서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북쪽 숲으로 갈 거야.”

“뭐? 북쪽 숲? 그 위험한 곳에 간다는 거야?”

정령국에 간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령국으로 갈 수 있는 통로인 북쪽 숲으로 갈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아까처럼 잰퓨어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갈 이유가 있어. 아주 중요한 약속을 지켜야 하거든.”

“하지만… 북쪽 숲은 베테랑 모험가들도 목숨을 잃는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어. 정확한 정보도 없는 데다가 우리가 사는 지형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들었거든. 설마 혼자 가는 건 아니지?”

“혼자는 아니고… 둘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머릿속에 샐라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잰퓨어가 표정을 싹 바꾸며 나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슨 소리야, 루나. 북쪽 숲은 3인 이상 파티를 만들어서 가라는 지침이 있을 정도의 만만치 않은 지역이야. 같이 가는 사람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이서 갔다가는 꽤 힘든 여정을 보내게 될지도 몰라.”

“정말이야?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샐라임이 북쪽 숲에 관련해서 따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뭐야, 그렇게 위험한 곳이었으면 진작에 말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샐라임을 포함해서 둘이라고 한 거지, 사실상 나 혼자나 다름이 없다고!

“실력 좋은 사람으로 한 명을 더 끼우는 게 나을 거야. 물론 그런 사람을 찾는다면 네 앞에 한 명이 있긴 하지만.”

실력 좋은 사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명의 사람이 있긴 했다. 물론 내 주변엔 실력 있는 사람이 여럿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 최고라고 부른다면 단연코 에르셈프만 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왕자가 내 부탁으로 같이 여정을 떠나 줄 수 있을까? 심지어 정령국까지 가는 길에 몇 개의 국경을 넘을지도 모르는데? 원래 게임에서도 에르셈프는 여행을 좋아한다는 설정이 있긴 했지만 마물이 쳐들어왔던 지금 같은 상황으로는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에르셈프가 된다고 해도, 3인을 채우기 위해서는 한 명이 더 필요했다.

아까는 샐라임을 끼워서 말했지만 그는 사실상 힘을 전혀 쓸 수 없으니…….

“고마워, 잰퓨어.”

“역시 내가 필요한…….”

“실력 좋은 사람들을 찾아볼게.”

이후에 잰퓨어와 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첫 임무인 고블린의 자루를 가지러 갔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잰퓨어는 내가 템트의 꿈속에 들어갔을 때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묻기도 했다.

“어……. 그냥 평범한 꿈이었어.”

“그래? 누가 등장했는데?”

“남자 몇 명이 등장하기는 했는데, 별거 없었어.”

“남자 몇 명? 루나 너, 지금 날 두고 다른 남자랑 놀았다는 거야?”

“무, 무슨 소리야. 너, 너도 등장했다고.”

“내가 나왔다고? 어떻게 등장했는데?! 꿈속이니까 달콤한 키스 정도는 했겠지?”

“뭐래, 됐어. 조용히 좀 해.”

어느새 밤이 깊어진 우리는 기숙사까지 같이 돌아갔다. 밤이지만 주변은 밝았고, 사람들도 신나게 백야제를 즐기고 있었다.

기숙사 건물 앞까지 도착한 우리는 왠지 모를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을 느꼈다.

평소처럼 어두운 밤이 아니라 백야여서 그런 건지, 이제 잰퓨어가 떠날 것을 알아서 그런 것인지, 혹은 둘 다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우리는 기숙사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섰다. 어두운 그늘 아래에 서자 잰퓨어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졌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였다. 시간이 다가온 것을 알아서인지 잰퓨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엿한 남자의 굳은 표정이 드러났다.

“루나.”

“…….”

“잊으면 안 돼.”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무얼 잊지 말라는 것일까.

“응.”

“나도, 나와 함께 한 추억도, 나와 함께한 너 자신도 모두 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최대한 절제한 것 같았다.

나 또한 떠날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동안 즐거웠다고, 비록 시스템에게 놀아난 것뿐일 수 있겠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라고.

“처음에는 단지 의무라고 생각했었어.”

“…….”

그래서, 입을 열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는 없겠지만 꼭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어느 샌가부터 네가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거야. 몬스터에게 맞고 있는 너를 지나칠 수 없었고, 다친 너를 가만히 놔둘 수 없었어. 처음엔 그냥 도의적 책임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중엔 알았지. 이젠 정이 들어 버렸다는 걸.”

“…….”

“그냥 그렇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 난 항상 너를 밀어 내기만 했지만 나 또한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

나 혼자 감정을 털어놓았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민망해진 나는 급하게 말을 수습했다.

이런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닌데, 잰퓨어를 앞으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묘해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최종 퀘스트를 위해 잰퓨어의 호감도를 올려야 하니 그를 만나야 하긴 하겠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때, 잰퓨어가 입을 열었다.

“루나, 나는 지금까지 사람을 쉽게만 만나 왔어. 만남이라는 것에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았지. 동생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일까, 누군가와의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웠거든. 그런데 너를 만나고 나 또한 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어. 사람에게 기대고, 또 기대하고 싶었던 거야. 사실… 아직까지 이유는 모르겠어. 이렇게 나한테 못되게 구는 루나가 왜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뭐?”

“한번 이유를 찾아보려고. 당분간 널 볼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의 내 시간을 가지며 너에 대한 이유를 찾을 거야. 그러니까…….”

“…….”

“조금만 기다려 줘.”

오묘한 빛을 띠는 하늘에는 옅은 별이 이리저리 수놓여 있었다. 언뜻 보면 안 보일지도 모르는 그것들은 어느샌가 내 눈에 들어와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응.”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잰퓨어는 누구보다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툭, 하고 얹어지는 그의 손바닥에 나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고, 순식간에 그가 나를 와락,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에 잰퓨어가 나를 만날 때마다 안았던 느낌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느릿하게 내 몸을 감겨오는 그의 품은 마치 나에게 맞춘 것처럼 틈 없이 밀착되었다.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반대로 그는 큰 숨을 내쉬며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포옹에서 나를 향한 그의 애정이 느껴졌다. 왠지 모를 포근함에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가 말한 기다려 달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나에게 무얼 바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묻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날 둘러싼 이 기류를 온전히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내 어깨의 자신의 얼굴을 묻었고, 나는 두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감쌌다.

* * *

다음날이 되자마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이유는 바로 정령국에 가야 할 파티원 멤버를 모집하기 위해서!

사실 생각해 놓은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일단 첫 번째로 지정해 놓은 에르셈프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직 학교 안을 돌아다니는 에르셈프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르셈프!”

그는 나를 보자마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 그의 앞에 서자 그는 커다란 키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루나.”

에르셈프는 묘한 표정과는 다르게 평소처럼 딱딱한 말투를 일관했다.

“요새 바빠요?”

혹시라도 일이 있을 수 있는 에르셈프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에르셈프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래요? 그러면…….”

“…….”

“에르셈프, 혹시 북쪽 숲에 가본 적이 있나요?”

“옆 나라에 갔다 오면서 들른 적은 있어. 왜 그러지?”

“제가 북쪽 숲에 가려고 하거든요.”

“…왜 그런 위험한 곳에 가려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잰퓨어와 반응이 똑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남주인공들은 나를 너무 과잉보호하려는 성향이 강하단 말이야.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안 그래도 북쪽 숲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요. 에르셈프, 혹시 괜찮다면…….”

“나보고 같이 가 달라는 건가?”

눈치 빠르게 알아챈 그는 나에게 물었고, 나는 바로 고개를 거세게 끄덕거렸다.

“맞아요.”

“…….”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냉큼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을 건 알았지만 그래도 기대는 하고 온 건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때, 에르셈프의 뒤쪽에서 병사 한 명이 에르셈프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왕자님!”

그가 뒤를 돌자 병사는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더니, 입을 열었다.

“게이트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크기가 크진 않지만 수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왕자님께서 해 주신다면 며칠 안에 금방…….”

“알아서 해.”

“네?”

병사가 에르셈프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에르셈프는 보랏빛 눈동자를 흘기며 그에게 짧게 명령했다.

“혼자서 하라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

“언제까지 내가 시시콜콜 관여를 해야 하는 거지?”

“와, 왕자님…….”

병사가 땀을 삐질 흘리며 어색한 웃음을 짓자 에르셈프가 한 치의 아쉬움 하나 없다는 듯 등을 휙, 돌렸다. 내 표정을 확인한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내뱉었다.

“몸이 안 좋아졌어. 그러니 오늘부로 나는 이 편성에서 빠질 거니까, 그렇게 알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