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새로운 삶(1)
남자의 미소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선물……?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나는 소원을 들어 달라고 했지, 선물을 달라고 한 적은 없다고!
억울함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자 그가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만 조심히 돌아가시길.”
그러고는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겼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나를 둘러싼 하얀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이윽고 내가 앉아 있던 하얀 의자도 고운 입자가 되어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나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걸 느꼈다.
요지경을 보는 것처럼 어지러운 기분을 느낄 때, 하얀빛이 내 몸을 감싸더니 나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뜬 곳은, 오성석을 던졌던 길거리가 아닌 기숙사 방 안이었다.
악몽을 꾸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번쩍! 떴다.
나를 반기는 익숙한 하얀색 천장을 보았고, 나는 홀린 듯이 오른손을 뻗어 허리춤에 샐라임이 있는지 확인했다.
샐라임은 제자리에 있었다. 내가 누워 있는 곳도 항상 자던 기숙사의 침대였고, 시계를 바라보니 다음 날 오후 한 시였다.
뭐야, 내가 꾼 게 그저 꿈은 아니겠지? 오성석은 어디에 있지?
주머니를 마구 뒤져 보았지만 오성석은 나오지 않았다. 새하얀 세계에서 잘생긴 남자를 만났던 게 꿈은 아니었던 것이다.
남자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내가 마티스 소속의 소녀라고 했던 것, 시스템을 파괴해 달라는 내 소원을 들어주면 다른 소속의 반발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작은 선물 하나를 보내 놓겠다는 것까지.
혼미한 정신 상태로 머리를 더듬고 있을 때였다.
“시스템은 파괴된 건가?!”
아주 불길한 예감이 나를 휩쌌다. 소원을 들어주면 문제가 생긴다는 남자의 말마따나 시스템은 없어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만약 파괴된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상태창.”
시스템이 아직도 있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예전에 한 번 자동으로 떴던 ‘나에 대한 상태창’을 다시 한번 실행시켜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눈앞에 글자들의 나열이 떠올랐다.
+
이름: 루이아나 밀리센트
나이: 16
직업: 하급 정령술사
보유 스킬:
-패시브: 검술 Lv.8, 체술 Lv.6, 정령술 Lv.12
-액티브: 불꽃 칼날, 붉은 낫, 채찍질, 물방울 무도, 찔러 베기
호감도:
세이먼 유리츠 74%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60%
잰퓨어 이브 41%
레크리드 니엘 35%
베탄 오스가르드 26%
+
“이, 이게 뭐야……?”
나는 보자마자 3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혀가 굳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 호감도들은 대체 뭐야. 왜 저런 수치를 가지고 있는 거냐고!
분명 기억상으로 레크리드와 베탄의 호감도는 다른 셋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그리고 세이먼의 호감도 또한 70%를 넘지도 않았었고. 그런데 왜 지금 다섯 명의 호감도가 전체적으로 다 올라 있는 거지?
“생각해 보니 엊그제부터 호감도가 올랐다는 음성을 들은 적이 없어…….”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레크리드 집에 간 것부터 시작해서 분명 오를 만한 상황이 많이 있었는데.
‘세계의 틈’을 찾으러 나설 때부터 그토록 중요하던 호감도가 계속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전처럼 내가 못 들은 거뿐이라고 생각하며 한 번도 그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성석이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믿기도 했고.
“허…허…….”
오로지 호감도가 오르는 음성에 기대어 호감도를 판단했는데, 지금 보니 뭘 믿고 그렇게 시스템을 신뢰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호감도창 이곳저곳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내 눈앞에 한 문장의 알림창 하나가 떠올랐다.
[‘호감도’의 알림이 꺼져 있습니다.]
“…뭐……?”
알림이 꺼져 있었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호감도는 오르는데 아무런 음성이 들리지 않았던 거야? 왜 갑자기 알림이 꺼진 건데?
여러 의문으로 다시 호감도창을 눌러 보았지만.
[‘호감도’의 알림을 켤 수 없습니다.]
라고 뜰 뿐이었다.
다시 시도.
[‘호감도’의 알림을 켤 수 없습니다.]
[‘호감도’의 알림을 켤 수 없습니다.]
[‘호감도’의 알림을 켤 수 없습니다.]
“…….”
세 개가 연달아 나오는 바람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치…….”
게임을 하다가 다음 레벨로 넘어갔을 때 난이도가 바뀌는 경험을 한 것 같았다.
갑자기 업그레이드가 되어 룰이 바뀌고, 설정이 바뀌는 느낌.
그리고 빌어먹게도 이것에 적응하는 건 온전히 플레이어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참담한 기분에 침대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샐라임이 말을 걸었다.
“루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냐? 네가 오성석을 던지고 나서부터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물을… 받았어요. 오성석을 던졌을 때는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저한테 소원이 뭐냐고도 물어봤었고요.”
“뭐? 정말 신이라도 만난 거냐?”
“신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렇게 잘생길 수가 있나? 저도 아직 정신이 몽롱해서 제대로 분간이 안 돼요.”
사실이었다. 핑크빛 칵테일을 홀짝이며 나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더냐?!”
“그건… 잘 모르겠어요. 뭐 자기네들의 사정이 있다고 말하긴 했는데…….”
“사정?”
“그러고는 선물을 보냈다고 했어요. 시스템은 사라지지도 않았구요. 없애 달라는 시스템은 안 없애 주고 대체 이걸 왜 보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할 때였다. 내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시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다시는 들어서는 안 될 목소리였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에 나는 입을 헙,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환청을 듣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분명 시스템을 없애 달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어째서 퀘스트 알림음이 들리는 거지……?
사색이 된 얼굴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리고 멍하니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던 나는 이내 ‘열람’ 버튼을 눌렀다.
“여, 열람…….”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차마 내용을 확인할 용기가 없어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세게 깨물며 한쪽 눈을 떴을 때,
“이런 제기랄…….”
저절로 욕설이 내뱉어졌다.
+
선물! 최종 퀘스트
제목: ‘진짜 남자 주인공은 누구일까?’
내용: 당신에게 해당된 다섯 남자 주인공들의 ‘애뮬릿’을 얻으시오. (‘애뮬릿’을 얻는 조건: 호감도를 100%까지 올리기.)
주의 사항: 호감도가 100%에 달할 경우, 기존의 스토리대로 사망함.
제한 시간: 없음
보상: 시스템 파괴
페널티: 사망
+
그 어떤 때의 퀘스트보다 불친절한 설명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
지, 지, 지금 얘가 뭐라고 하는 거야? 나만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최종 퀘스트는 뭐고,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데? 선물이라며! 분명 선물을 보내 준다며!
“이건 선물이 아니라 빅 엿이잖아!!”
나는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법이 어딨어? 이럴 거면 애초에 오성석이 소원을 이루어 주는 돌이라고 하면 안 되지!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했는데……!”
멘탈이 탈탈 털리는 기분에 나는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하도 어이가 없는 탓에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 것이다.
“주, 죽일 거야…….”
선물이랍시고 최종 퀘스트를 보내 준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얼굴만 반반하면 다야? 이렇게 상도덕이 없는 경우가 어디 있어?
“무슨 일이냐, 루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난리를 치는 나를 보며 샐라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최종 퀘스트가 왔어요. 남주인공의 호감도를 올리래요.”
“뭐? 그게 대체 뭔 말이야. 갑자기 최종 퀘스트라니?”
“그러니까요. 저는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부터 잘못되었던 걸까요……? 왜 이런 시련이 저를 찾아왔을까요…….”
“…일단 퀘스트의 내용이나 들어 보자. 정확히 뭐래냐?”
“남주인공의 ‘애뮬릿’을 얻으래요. 얻는 방법은 호감도를 100%까지 올리는 거고요.”
“하지만 분명 호감도가 100%에 달하면 너는 죽는 엔딩에 처하는 게 아니었나?”
“…….”
샐라임의 말이 맞았다. 게다가 퀘스트 또한 어찌나 친절하신지 직접 말해 주고 있었다. 호감도가 100%에 달하면 죽을 수 있다고.
“제대로 본 게 맞아?”
“…맞아요. 그리고 이 퀘스트를 성공하지 못할 시 사망이라고 적혀 있어요. 성공하면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써 있고요. 저도 이해가 안 돼요. 퀘스트 내용 자체가 모순인데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당최 감도 안 잡힌다고요.”
나는 샐라임에게 남자를 만났던 기억과 퀘스트의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잠자코 숨을 죽인 채 내 말을 듣던 샐라임은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네가 시스템에서 벗어나려면 남주인공의 ‘애뮬릿’을 얻어야 하고, ‘애뮬릿’을 얻으려면 남주인공의 호감도를 100%까지 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될 경우엔 네가 죽는다는 말이지?”
“그런 것… 같네요.”
“미안하지만 이건 그냥 널 시스템에서 못 빠져나가게 한다는 말 아니냐?”
“…….”
샐라임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뿐이었다.
너무나도 절망스러웠기 때문일까.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어흐윽…….”
“루, 루나…….”
샐라임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만이 내 귓가를 메웠고, 나는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이 미친 새끼들아…….”
오성석을 얻어 이 시스템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 보고 지내 왔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둘러싼 이상한 다섯 명의 남자들, 조금이라도 오를 때마다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던 호감도, 나를 갖고 놀다 못해 저세상 직전까지 내모는 퀘스트, 목을 조여 오는 제한 시간과 페널티까지.
오성석이라는 희망을 보고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살아 왔는데, 결국은 그런 것 따윈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슬프고 절망스러웠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미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대체 얻는 게 무엇인지 멱살이라도 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루나, 잘 생각해 봐 봐. 너는 그 전설의 돌인 오성석까지 구해서 신과도 같은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이 과연 네가 빈 소원을 콧방귀 뀌듯이 단숨에 무시해 버렸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그렇잖아. 네가 만난 남자가 그 시스템을 없애 줄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며. 그 남자는 분명 널 괴롭히고 있는 시스템보다 상위의 존재일 거야. 그리고 너에게 딱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을 거고. 내 생각에 이건 마치…….”
“해결책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 언뜻 보면 너를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탈출구가 있을 거야. 그것을 알아내는 것 또한 퀘스트 내용의 일부인 거고.”
“…….”
샐라임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어제 만났던 남자가 내 소원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선물이 선물이 아닌 건 맞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모순적인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는 힌트가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나, 그러니까 코부터 닦고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마음이 진정되고, 새로 생긴 아주 작은 실낱같은 희망에 나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래, 죽으란 법은 없다.
나를 어떻게 해서든 이 게임 안에 가둬 두려 한다면 나는 악착같이 벗어나려 할 거다. 하지만…….
“너무 어렵잖아! 뭐 더 단서 없어?! 단서를 내놓으라고!”
나는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다.
“이해가 하나도 안 되잖아! 난이도를 조정하든가 나를 빼내 주든가 하나만 해!”
침대를 팡팡 때리며 온몸으로 소리치듯이 시위했다.
나를 가지고 놀 거면 적어도 실마리 하나 정도는 더 내놓으란 말이야!
라는 마음으로.
“……?”
그런데 그때, 귓가엔 낯선 음성이 한 번 더 울려왔다.
[힌트가 도착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