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에르셈프와 함께(1)
우리는 안내 방송에 따라 다 같이 경기장 입구로 향했다.
경기장 입구로 가면 어떤 곳일지 보일 줄 알았는데, 눈에 들어오는 건 거대한 문 하나뿐이었다.
“경기장 내부로 워프를 시켜 드릴 겁니다. 자리에 서서 이름표를 받으십시오.”
진행 요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차례대로 우리에게 이름표를 건넸다.
우리는 꼼꼼하게 가슴팍에 이름표를 붙였다.
“루나, 경기장에 떨어지면 일단 나부터 찾아.”
“네?”
“괜히 상대 팀에게 이름표를 뺏기지 말란 말이야. 그냥 너는 내 뒤에만 있으면 돼.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의 위치를 나에게 알려.”
에르셈프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타박하듯이 말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벌써부터 난리야. 나는 눈을 흘기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워프가 되면 팀원들은 각자 다른 곳으로 떨어진다고 했으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팀원들을 찾는 것이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도 일 인분은 해야겠어요.”
“……?”
내 말에 에르셈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자, 십 초 남았습니다. 다들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아 주세요. 카운트 다운 들어가겠습니다.”
요원의 말에 우리는 눈을 감았다.
곧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고, 숫자가 모두 떨어진 다음.
팟-!
순식간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시야가 무지갯빛으로 얼룩졌고, 게이트를 탈 때보다 10배는 더 강한 멀미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으윽…….”
그리고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거대한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나를 인지할 수 있었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주변을 확인했다. 내가 서 있는 이 거대한 벽은…….
“폐저택?”
크기는 아주 컸지만 낡아 빠져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저택의 벽이었다.
나는 저택 뒤쪽 마당에 떨어진 것 같았다.
앞선 팀들의 장소가 자연에 가까운 곳인 걸 생각하면 폐저택은 아주 예상 밖이긴 했다.
저택의 지붕 곳곳은 무너져 내렸고, 이곳저곳엔 거미줄이 두껍게 쳐져 있었다. 게다가 현실과 이곳의 시간은 다른 건지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해지는 분위기였다.
“폐허 탐험도 아니고, 뭐야…….”
나는 일단 팀원 중 한 명이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저택 앞쪽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벽에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나가자 대문까지 넓게 펼쳐져 있는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상대편 팀원으로 보이는 주황 머리 소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헙!”
나는 기둥 뒤쪽으로 쏙 숨으며 그의 움직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시합 전에 세이먼과 잰퓨어가 간단히 알려 준 정보에 의하면, 저 주황 머리는 검사였다.
그때, 주황 머리의 손이 드러났고, 그가 시퍼런 검을 들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역시나!
주황 머리는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정원 안쪽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일단은 팀원을 만나야 해.
나는 주황 머리를 뒤로 한 채 또다시 탐색을 나섰다.
나무 뒤에 숨어 가며 저택 앞쪽으로 가자, 저택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저기 안에 떨어진 사람도 있겠지.
순간 저택 안으로 들어가 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마음을 접었다. 성급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바깥에 있는 사람을 먼저 만나는 게 나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샤샥-
뒤쪽에서 수풀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 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곳이어서 그런지, 긴장이 심했다.
“루이아나 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팀원인 겐트였다.
“겐트 씨! 다행이에요. 별일 없었죠?”
선한 인상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루이아나 씨, 이쪽으로.”
겐트는 나를 분수대 뒤쪽으로 이끌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 본 사람 있나요?”
“상대편 팀원을 하나 봤어요. 주황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검을 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손에 무언가를…….”
“무언가를?”
겐트가 눈을 번쩍이며 나에게 묻자 내가 얼버무렸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러자 겐트가 잘 들으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새로 변해서 정찰을 마쳤어요. 지금 저택 바깥에는 저와 루이아나 씨, 그리고 주황 머리만 있어요. 나머지는 다 저택 안에 있다는 거죠.”
나는 그의 말에 빠르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2대 1이니 우리 둘이서 주황 머리를 잡으러 가면 되겠네요.”
“그렇죠. 맞아요. 아까 어디서 봤다고 했죠?”
나는 겐트를 이끌고 아까 주황 머리가 있던 장소를 향했다.
이미 그가 이동했을 확률이 높지만, 혹시 모르니 주변을 탐색하기로 했다.
다행히, 주황 머리는 꽤 눈에 띄는 편이어서 우리는 금방 그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저는 공격력이 약하니 루이아나 씨가 앞에서 주황 머리와 맞서줘요. 그 틈을 타 제가 이름표를 빼앗을게요.”
겐트의 주 능력은 새로 변하는 것이었기에 공격력이 약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샐러맨더, 카사.”
나는 나무 뒤에 숨어 샐러맨더와 카사를 내보낸 뒤 나는 버프를 걸어 줄 준비를 했다.
“채찍.”
푸른 채찍으로 정령들을 때리자 화르륵 소리를 내며 불타올랐다.
“전투 불능으로만 만들어야 해.”
샐러맨더와 카사가 빠른 속도로 주황 머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움직임을 눈치챈 주황 머리가 고개를 홱 돌려 검을 쥐었다.
탕!
탕! 탕!
주황 머리는 정령들의 공격을 피하며 검으로 거침없이 정령들을 내리쳤다. 그러고는 눈을 매섭게 떴다.
“정령술사는 어디 있지?”
살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움찔 몸을 움직였다.
친선 경기치고는 꽤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저벅저벅.
주황 머리는 마치 우리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주황 머리가 푸흣,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오지 그래?”
그는 정확히 우리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인기척을 그렇게도 기민하게 알 수 있다고?
“위치를 알지 못하도록 정령들을 돌려서 보냈는데, 소용이 없었나 보네.”
내가 중얼거리며 나무에서 몸을 드러냈다. 겐트 또한 몸을 움직여 내 뒤쪽에 자리했다.
주황 머리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미소를 빙긋, 지었다. 화색이 돈 얼굴이 마치 나를 기다린 사람 같았다.
“먼저 이렇게 나타나 주시다니, 운이 좋아도 너무 좋군.”
나는 겐트를 향해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2대1인 우리가 훨씬 유리해요. 제가 먼저 공격할게요.”
나는 다시 샐러맨더와 카사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중으로 붕 떠오르며 주황 머리를 향해 불을 쏘았다.
하지만 주황 머리의 속도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내 앞으로 돌진한 그는 순식간에 검을 휘둘렀다.
탕!
가까스로 숏 소드를 꺼내 그의 검을 막은 나는 적잖게 놀랐다.
이런 실력자가 있다고? 움직임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파르르르.
나와 그가 검을 겨눈 사이 카사가 화염을 쏘았다.
팟!
주황 머리는 화염을 피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고, 나는 동시에 그의 배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어림없지.”
내 주먹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허리의 각도를 변경한 그가 아예 옆으로 몸을 굴렸다.
풀밭에 엎어지며 공격을 피한 그가 다시 일어서며 검을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빠른 속도부터 그때그때 나오는 반사 신경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나 또한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그와 맞섰다.
탕! 탕!
챙!
화르륵. 화염을 쏘는 정령의 공격과 나의 연계 공격.
“생각보다 꽤 하잖아? 얼굴만 반반한 계집앤 줄 알았더니.”
주황 머리는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내뱉었다.
“너도 꽤 하네. 얼굴이 반반하진 않지만.”
내가 걸맞은 대답을 해 주자 주황 머리의 표정이 굳는 것이 보였다. 그때, 내 뒤에 서 있던 겐트가 소리쳤다.
“작전 변경이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작전 변경?
무슨 소리지? 우리가 작전을 짰던 적이 있던가?
내가 막 고개를 뒤로 돌리려던 참이었다.
“무슨 소리야? 겐트.”
주황 머리가 내 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뒤에 있는 겐트를 향해.
“이렇게 가다간 들킬 게 뻔해. 불꽃이 너무 눈에 띄어서 저 멀리서도 보일 지경이라고! 놈이 이쪽으로 왔다간 큰일이야!”
겐트가 주황 머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럼 어떻게 하란 소리지?”
“일단 저택 안으로 끌고 가야 해. 안에 모두 모여 있어. 내 마법으로 저 여자애를 기절시켜서라도 데리고 가자.”
“그렇게 되면 놈이 너무 흥분할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어. 네가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탓이잖아!”
겐트의 말에 나는 잠시 뇌가 정지되는 기분을 느꼈다.
“아하.”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저 망할 팀원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걸.
겐트는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띠었다.
“이제 알았나? 2대1이긴 하지. 그런데 네가 1이었어, 멍청아.”
겐트가 내 뒤에서 순식간에 캐스팅을 걸었다.
나를 향한 지팡이에선 알 수 없는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은 곧바로 내 쪽을 향해 날아왔다.
파앙!
하지만 그걸 막아 준 건 카사였다.
내 앞으로 날아온 카사가 나 대신 알 수 없는 빛을 맞았고, 동시에 펑! 하고 터지며 몸이 부서져 내렸다.
내가 주황 머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풀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게 마도구였나 보군.”
아까 주황 머리가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만지며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우리의 위치를 알았던 것도 너 때문이고. 그렇지?”
이번엔 겐트를 향해 말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마도구를 통해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저택 안에 모여 있다는 걸 아는 것도 그 덕분인 것 같고.
“이걸 똑똑하다고 해야 하나, 재수 없다고 해야 하나? 그놈이 맘에 들어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는걸.”
“뭔 개소리야.”
주황 머리가 알 수 없는 말을 해 댔다.
대체 이게 뭔 소리야.
여태까지는 그래도 본선 진출 몰아주기 비리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젠 학교 행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렇게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날 대하는 거지?
아까 주황 머리가 나에게 날린 일격도 그랬다. 내가 피했으니 망정이지 맞았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거다.
게다가 이름표 떼기 게임이면서, 둘 다 이름표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너네 뭐야. 왜 내 이름표는 쳐다보지도 않는 거지?”
“겐트, 캐스팅 한 번만 성공시키면 돼. 빠르게 처리하자.”
그 말을 끝으로 겐트는 나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동시에 주황 머리도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명의 공격을 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앗!”
마법 공격을 피하려 발을 움직이다가 잔디밭에 넘어지고 말았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겐트가 배신을 했으니 에이브 또한 마찬가지일 게 분명해.
내가 탈락하면 에르셈프 혼자 이 게임을 진행해야 하잖아?
안 된다. 여기서 이름표를 빼앗길 순 없다. 나는 무조건 비무 대회 상품을 타야 한다고!
망할 시스템을 생각하면서 잔디밭을 구른 뒤 잽싸게 일어났다.
이미 옷은 흙과 잔디로 더럽혀져 있었고, 주황 머리 때문에 생긴 팔의 상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때, 생각도 않던 목소리가 들렸다.
“꼬마야,”
언제나처럼, 재수 없게도 평온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