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적안의 남자(2)
나를 바라보는 베탄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의 눈은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어떤 거짓도 고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조건이 뭐죠?”
내 물음에 베탄이 낮은 음성으로 조용하게 읊었다.
“나중에 내가 널 필요로 할 때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야.”
“절 이용한다고요?”
“그래. 숨겨 놓은 카드 같은 거지.”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매력적인 미소는 왠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더 큰 걸 바랄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강해질 수 있다면 저 조건 정도는 쉽게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목숨이 걸린 일이라거나,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어쩌지?
“나중에 제가 모른 척하면요?”
내가 묻자 베탄이 가뿐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 걱정하지 마.”
“…….”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베탄은 모습이 온통 검은색이어서 그런지, 지금 시간이 밤이어서 그런지, 음험한 악마 같았다.
나, 좋은 거래한 것 맞겠지?
뒤늦게 걱정이 몰려오긴 했지만 금세 털어 버렸다. 부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감을 잃는 짓도 없으니까.
“그럼 이만 가지.”
그는 나를 게이트 안으로 이끌었다.
슈우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고 우주에 온 것처럼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테일러 마을에 도착했다.
“허억…….”
멀미가 난 탓에 게이트에 빠져 나와서 숨을 몰아 내쉬자 베탄이 다가왔다.
“몸이 너무 약해. 앞으로 하루에 다섯 끼씩 먹어.”
“네?”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내일 아침 6시까지 게이트 앞으로 와. 장소를 옮길 거니까.”
그는 무작정 자기 할 말만 다 쏟아부은 다음 휙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갔다.
베탄은 아카데미가 아닌 자신의 거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뒤에서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 * *
다음날 나는 새벽 일찍 몸을 일으켰다.
어제 웨어울프에게 맞은 곳들이 아직 회복이 덜 되어 쑤시긴 했지만 움직일 만했다.
사실 몸이 아픈 건 문제가 아니었다.
잠도 못 자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샐라임의 기분을 풀어 주는 일이었다.
내가 베탄에게 검술을 배운다는 걸 듣자마자 샐라임은 완전히 토라져 버린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공을 들여서 나를 가르쳤는데 이렇게 배신을 하냐며 하루 종일 투덜거렸다.
“샐라임, 미안해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됐어. 잘생긴 게 최고라는 거지. 나는 칼 속에 갇힌 정령 나부랭이고.”
아주 삐딱한 태도로 내 모든 말들을 받아치며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해해. 검술은 직접 몸을 부딪치며 가르쳐야 하니까. 그래도, 나랑 상의 한번 없이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몇 시간을 달래고 달래 그를 잠재운 나는 그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 * *
“하암…….”
졸린 눈을 비비며 기숙사를 나섰다.
게이트에 도착하자 베탄이 미리 도착해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6시가 되지 않았는데도 베탄은 먼저 와 있던 것이다. 재빨리 다가간 나는 그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몸은 괜찮나?”
그가 먼저 말을 꺼낸 탓이었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딱딱한 말투로 내뱉었다.
뭐야, 왜 챙겨 주는 말을 하지?
“네. 괜찮아요.”
나는 간단하게 대답하며 그의 호감도를 살폈다.
+
이름: 베탄 오스가르드
나이: 21
직위: 램클리프 마법 협회의 총기사단장
호감도: 0%
+
여전히 0%는 맞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를 부르려다가 다시 한번 멈칫했다.
그 이유는 바로,
“저… 제가 뭐라 불러야 할까요?”
베탄을 어떻게 부를지 모르겠다는 점 때문이었다.
5살이나 차이 나는 사람에게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오…빠…?는 미친 거지. 제정신이냐.
“뭐?”
베탄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약간 미간을 찌푸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호칭 말이에요.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
그러자 베탄이 눈을 흘기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편한 대로 해. 상관없으니까.”
“그 말이 제일 어려운 말인데…….”
베탄은 어서 빨리 게이트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후다닥 그를 따라갔고, 움직일 장소를 골랐다.
“히드라 언덕으로 갈 거야.”
“히드라요?”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히드라만큼 괜찮은 상대가 없어. 그리고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는 나에 대한 호감도가 0%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에게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같이 있을 때도 나를 잘 쳐다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가 나를 향해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한 번 있었는데, 내 팔목을 보았을 때였다.
“원래… 이렇게 얇나?”
그는 지금까지 여자를 가르쳐 본 적은 없다고 했다.
맨날 땀 냄새나는 힘 좋은 남자들과 부대꼈다고.
“그 정돈가요. 그래도 악력은 좋아요.”
“…….”
그가 턱을 괴고는 내 팔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쳐다볼 일인가?
“자칫하면 부러질 것 같잖아.”
그는 마치 얇은 유리병을 보듯이 나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약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나는 전생에 헬스를 했던 경험 때문에 약하다는 말은 거의 욕이나 다름없게 들려왔다.
자존심 상한단 말이지.
“네 시간 간격으로 끼니를 먹어. 그 정도는 먹어야 훈련을 따라올 수 있을 거다.”
안 그래도 어제 했던 말 때문에 나는 다섯 끼 분량의 음식을 싸 왔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검술 수련에 들어가기 전 여러 가지 당부를 전했다.
수련에 임하는 건 좋지만 잠을 줄이는 건 금물이라고 하거나, 잘 먹는 것도 훈련의 일종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조언을 주의 깊게 들었다.
말을 길게 늘어놓던 그는 이내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검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거지?”
의아함이 섞인 말투였다. 정령술사인데 왜 검을 배우냐는 것이겠지.
하지만 예선전 때 정령술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정령술을 쓰지 못하게 될 상황에 처했을 때는 그것을 보조해 줄 2차 기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2차 기술로 선택한 것이 바로 검술이다.
게다가,
“오러를 발동할 수 있는데 정령술만 하기엔 아깝잖아요.”
타고난 것도 있고 말이다.
베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숙련된 검사가 아닌 자가 오러를 쓰는 일은 드물긴 하지.”
그는 이미 내가 오러를 쓴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베탄이 손을 탁! 튕기며 화제를 돌렸다.
“본선 1차 경연이 5일 남았지. 하지만 하루에 한 팀씩 경연을 하니 네 팀 순서가 언제인지에 따라 수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을 거야.”
“맞네요.”
“네 목표를 알려 주마. 본선 1차 경연 때까지 내가 알려 준 스킬 하나를 완벽하게 익히는 거야.”
“스킬 한 개요?”
고작 한 개라는 것에 놀랐다.
샐라임에게 하루에 몇 개씩 스킬을 배웠던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 한 개야. 하지만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해. 이것이 너를 지키고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될 거다.”
하지만 그는 여러 가지를 익히는 것보다 한 가지를 파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좋습니다. 바로 시작해 보죠.”
내가 검을 꺼내 들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검을 쓸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 이걸 쥐어라.”
그는 가방에서 꺼낸 목검을 쥐여 주고는 내 숏 소드를 뺏어 갔다.
숏 소드를 나무 밑에 내려놓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 목검을 완벽하게 휘두를 줄 알 때까지 소드는 잡지 않는다.”
단호하게 말한 그가 팔짱을 끼며 나에게 어서 휘둘러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항상 차고 있던 샐라임이 허리춤에 없자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핫!”
하지만 어리광을 부릴 순 없는 법.
나는 목검의 손잡이를 세게 잡고는 힘차게 공중을 갈랐다.
부웅!
그러자 베탄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목검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
“손잡이를 이렇게 쥐어라. 엄지손가락으로 이곳을 지탱해야 훨씬 힘이 고르게 들어갈 수 있어.”
그는 손수 내 손가락을 펴 주고 접어 주며 올바른 그립을 알려 주었다.
굳이 이, 이렇게까지 해 준다고?
“다시 한번.”
그의 말에 내가 목검을 휘둘렀다.
부웅!
아까보다 훨씬 안정적인 자세가 나오는 것 같았다.
쥐는 방법만 바꿨을 뿐인데도 어깨와 팔에 쓸데없는 긴장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쁘지 않아. 하지만 어깨를 그렇게 쓰면 안 돼. 좀 더 내리치는 느낌으로, 그렇게.”
그러고는 이번엔 내 어깨와 팔을 잡더니 직접 올바른 자세를 만들어 주었다.
“…….”
그는 아주 깊게 집중한 것 같았다.
누구보다 진지한 태도로 내 자세를 만드는 것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눈빛에서는 잘못된 곳을 짚을 수 있는 날카로움이, 손짓에서는 노련함이 묻어 나왔다.
“이렇게요?”
“좋아. 얇은 종이를 가르는 느낌으로 휘두르는 거야.”
그가 알려 준 정석의 자세는 생각보다 불편했다.
하지만 그 불편한 자세가 몸에 익을 때까지 수천 번이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라고.
“잘했어. 금방 알아듣는구나. 이 자세를 잊으면 안 돼.”
그는 의외로 칭찬을 잘 해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쁜 말이라고는 절대 안 할 것 같은데.
“두 시간 준다. 자다가도 휘두를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연습해 와.”
베탄은 그 말을 끝으로 나무 밑에 기대어 앉았다.
나는 언덕 한쪽에서 자리를 잡고는 똑같은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부웅!
부웅!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고, 나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줄도 모르고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
기척 없이 나타난 베탄이 내 뒤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살포시 내 몸을 안았다.
나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베탄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앞에 봐.”
그러고는 왼팔과 오른팔의 각도를 조정해 주었다.
“…….”
나는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는 게 어디 있어! 우람한 가슴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붉은 얼굴로 그가 알려 준 대로 칼을 휘둘렀다.
“덥나?”
빨개진 내 얼굴을 본 그가 물었다.
“좀 덥네요, 하하.”
내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베탄이 눈치채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챘다면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을 거다.
“흐으…….”
나는 몰래 그의 눈을 바라보며 호감도를 확인했다.
여전히 0%였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불안감이 들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0%라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얘, 남자 주인공 맞지?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거 아니지?
기억을 의심해보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베탄 오스가르드.
정확히 기억나는 이름인걸.
이렇게 0%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확 호감도 인플레이션이라도 일어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지 않도록 베탄을 일관성 있게 대해야겠다.
“루이아나, 다시 집중해.”
“네!”
나는 또다시 지옥 같은 반복 훈련에 들어갔다.
* * *
“휴식이다.”
베탄의 간결한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몇 시간이 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다 보니 시간 감각이 없어진 탓이었다.
“?”
베탄이 나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에게 다가가자 큰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베탄이 입을 열었다.
“밥 안 먹나?”
그의 말에 나는 아차, 싶어서 옆에 두었던 배낭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음식을 꺼내 바닥에 두었다.
“선생님은요?”
베탄은 아무것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길래 의아해진 내가 물었다.
“난 안 먹어도 돼.”
“제 것 좀 드세요. 음식 많아요.”
이것저것 많이 가져온 내가 베탄에게 권유했다. 지금 안 먹으면 배고플 텐데.
“…….”
대꾸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베탄에게 내가 사과 하나를 쥐여 주었다.
“저 혼자 먹기 좀 그렇잖아요.”
챙겨 주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했다.
나와 사과를 번갈아 쳐다보던 베탄이 눈썹 하나를 치켜올렸다.
“안 먹으면 제가 불편하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서 이것저것 먹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경치 좋은 언덕에서 말이다.
“…….”
그제야 그는 사과를 아삭, 하고 베어 물었다.
봐 봐, 주면 잘 먹을 거면서.
나는 빵을 뜯으며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사람이 참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쓸데없는 이야기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아직 나랑 친해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가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렇지 않게 수습한 내가 빵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자 사과를 다 먹은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나를 내려다본 채 입을 열었다.
“많이 먹어 둬. 먹고 나선 다른 훈련을 할 거니까.”
“어떤 거요?”
“스킬을 배울 거야. 이제부터 각오해.”
“헉…….”
“울어도 안 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