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둘만의 시간(1)
내 귀를 의심했다.
응?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에르셈프를 향해 휙, 몸을 돌렸다.
“무슨 소리죠?”
그러자 에르셈프는 잔뜩 짜증이 난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쏘아붙였다.
“붕대를 잘못 감았으니 피가 멈추지 않았던 게 아닌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에르셈프에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내가 에르셈프의 손길을 거절한 것이 화가 난 이유 같았다.
“…….”
하지만 나는 호감도가 오를까 봐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단 말이야.
그의 도움을 계속해서 받다가는 나중엔 그것이 당연해져서 거절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 아닌가?”
그는 자신이 붕대를 감아 줬었더라면 레크리드에게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레크리드는 응급 치료를 할 줄 알았잖아.
“아까부터 쭉 쓸데없이 혼자 하겠다고 우기질 않나.”
“…….”
“상대방의 호의를 무시하는 게 버릇인가 보군.”
그는 나를 비꼬기까지 했다.
에르셈프는 지금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호의는 거부하고 레크리드의 도움만 받으니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말이 심하네요, 에르셈프.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나는 침착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신경질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퀘스트에 실패해서 열이 받았는데, 팔은 아파 죽겠고, 지금 시간으로는 기숙사에도 못 들어가게 생겼다.
그런데 왜 자꾸 퉁명스럽게 구는 거야?
사실상 나도 딱히 잘못한 게 없었다. 내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럼 괜찮다고 받아들이면 되잖아?
나는 그만하라는 식으로 그에게 말했다.
“에르셈프, 제가 호의를 거절한 건 미안해요. 무시할 의도도 전혀 없었고요. 저도 아프고 힘들어서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저 혼자 해도 충분히 괜찮았고요.”
최대한 좋게 말한 거였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그저 서로 오해를 한 것뿐이니까 이 정도로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에르셈프는 아니었나 보다.
그는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평소엔 그렇게 유려하던 보랏빛 눈엔 심술이 넘실대고 있었다.
고집스러운 입에서는 가시 돋은 말만 쏟아져 나왔다.
“형편없이 붕대를 감아 놓고 괜찮다고 말하는 건가? 당신은 정말 상대방에게 배움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군.”
그는 나를 향해 냅다 쏘아붙였다.
허. 지금 내가 자기 호의를 무시했다고 칭얼거리는 거 아냐? 어린애도 아니고.
나는 참다 못해 한 마디 내뱉었다.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강요하지 마세요.”
그러자 레크리드가 저 가판대 위쪽에서 나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에르셈프한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으니까,”
[호감도가 1% 상승했습니다!]
“무작정 도와주는 걸 호의라고 생각하지 말란,”
[호감도가 1% 상승했습니다!]
“…….”
입에서 주절주절 나오던 말을 필사적으로 멈췄다.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게 이게 무슨 소리지?
호감도가 오르는 소리지, 이거?
잘못 들은 거… 일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돼. 이게 맞아?
왜, 왜 내가 에르셈프와 말다툼을 하는데 레크리드의 호감도가 오르는 거야?
내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레크리드를 올려다보았다.
+
이름: 레크리드 니엘
나이: 16
직위: 매그넘 마법 상점의 주인
호감도: 5%
+
그는 우리보다 높은 쪽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사건을 보는 사람인 양.
눈동자에 흥미로움과 놀라움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왕자님한테 저런 말을 할 수 있냐는 것처럼.
이럴 수가.
무료한 레크리드에게 뜻밖의 흥미로운 이벤트를 선사해 주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 왜 호감도가 올라가는 거야?
본 게임에서는 여주인공이 완전 청순가련한 스타일이었는데.
레크리드가 이런 모습에 반응을 보일 줄이야. 예상도 못 했다.
“…하.”
나는 말을 멈추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한테 괜한 화풀이하지 마세요.”
“화풀이라고? 나는 평소와 같았는데 왜 혼자서 그렇게 느낀 거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 분명 좀 전에는,”
“루나야말로 상점 주인에게 그렇게 신원을 마구 밝히나? 본인의 처지도 모르고?”
“에르셈프랑 상관없는,”
[호감도가 1% 상승했습니다!]
“…하.”
내가 또다시 말을 멈췄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러다간 레크리드가 나한테 사랑에 빠져 버리기라도 할 것 같으니까!
어떻게 내가 입을 열 때마다 호감도가 올라갈 수 있어!?
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레크리드와 에르셈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기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레크리드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에르셈프.
두 번째 남주인공과 네 번째 남주인공, 이 둘 사이에 껴서 지금 내가 뭔 고통을 받고 있는 거지?
째릿.
내가 눈을 매섭게 뜨며 레크리드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잘못은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내 입을 막고 있지 않은가.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레크리드는 지금까지 흥미를 보였던 것에 시치미를 뚝 떼며 나를 쳐다보았다.
왠지 아까보다 나에게 관심이 생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체념하고 말았다.
“이만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내가 자리를 박차며 상점에서 나왔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바로 뒤쫓아 나왔다.
“어딜 가는 거지, 혼자!”
그의 말을 무시하며 큰 길가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에르셈프와 더 이상 말을 섞을 힘이 없었다.
그는 내가 그의 애정 표현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어린 애처럼 투정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뭐라 대답하든 자기 마음대로 들을 게 뻔했고, 자기는 원래 그래도 되는 것처럼 틱틱 댔다.
나는 뭐 부처님이라 그런 걸 받아 주는 줄 아나?
휙,
그때, 금세 다가온 그가 내가 다치지 않은 쪽의 팔을 잡더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밤에 혼자 어딜 간다는 거야, 안 그래도 쫓기고 있는 사람인데!”
그의 말에 내가 몸을 확 돌렸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그에게 말했다.
“…….”
“아까 괴한한테서 구해 준 거 고마워요. 저를 챙겨 주려고 한 것도 고맙고요. 호의는 거절해서 미안해요. 그러려던 의도 아니었어요. 괜히 에르셈프까지 힘들까 봐 그랬던 건데, 오해를 사고 말았네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저한테 화풀이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까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강요하지 마세요.”
내가 조근조근 말을 내뱉었다.
아까는 나도 흥분했지만 찬 바람을 맞으니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고, 감정적으로 크게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그저, 최대한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뿐이라고.
내가 먼저 화를 누그러뜨리며 사과를 건네자 에르셈프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어둑어둑한 거리엔 우리 둘밖에 없었고, 간간이 밤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에르셈프가 입을 열었다. 긴 고민 끝에 나온 말 같았다.
“뭐라 안 할게.”
“…….”
“그러니까…….”
나는 이어서 말하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그때 에르셈프가 고개를 푹 숙였다.
회색 머리칼이 툭 떨어졌고,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 다니지 좀 마.”
얼굴이 가려져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화를 누그러뜨린 상태였다.
사실 그가 나에게 화를 낸 것도, 나를 위하다가 오해를 산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도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그의 짜증을 받으려니 날카로워졌던 것이다.
“…알겠어요.”
게임 속 에르셈프의 성격이 떠올랐다. 좋은데 좋다고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을 꽁꽁 싸매기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란 걸 알았기에 나는 이해가 되었다.
“마차를 잡아서 돌아가요.”
내가 훌훌 털어 버린 목소리로 말하자 에르셈프가 곁눈질을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
그가 별다른 말이 없자 내가 에르셈프를 이끌었다. 레크리드의 상점에 가서 마차를 잡을 수 있는지 물어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뜻밖의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간대엔 마차가 없어요.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으니까요.”
마차를 타고 테일하트 거리로 깊게 들어온지라 걸어갈 수도 없었다.
어쩔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 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에르셈프가 입을 열었다.
“자고 가지.”
“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뭐라고?
그러자 에르셈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위험하게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나을 거야.”
“…음.”
나는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여행자든 모험가든, 밤에는 움직이지 않고 다들 하루를 묵고 간다. 밤에는 숲에서 내려오는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고, 이용할 수 있는 시설도 없기 때문이다.
여관이라고 해 봤자 여행자들이 쉬어 가는 곳일 뿐이고 에르셈프의 말처럼 위험하게 밖에 있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괜찮을까?
혼란스러운 생각에 확실하게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네요.”
마침 우리 눈앞엔 <여행자들의 나뭇잎>이라는 여관이 있었다. 겉모습도 깔끔해 보였기에 하룻밤 자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에르셈프는 왕자잖아요.”
에르셈프가 왕궁의 법에 갇히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며 여행을 즐기는 사람인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여관에서 묵어도 되는 것인가?
에르셈프는 멀리서 봐도 반짝거릴 정도로 왕족의 태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곳에서 하룻밤을 지낸다고?
“게다가 이렇게 궁을 비워도 되는 건가요? 다들 걱정할 것 같은데.”
“크게 문제 될 것 없을 거야. 어서 가지.”
그러나 에르셈프는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여러 번 경험해 본 것처럼 익숙하게 나를 이끌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엔 한 할머니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제야 눈을 뜨며 손님을 맞이했다.
“방 두 개만 주시오.”
에르셈프가 로브의 모자를 눌러 쓰며 말했다.
아.
방을 두 개 쓰려고 했던 거구나.
이 바보야, 당연히 같은 방을 쓸 리가 없겠지!
그런데,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어쩌지, 방이 다 나갔다오.”
할머니는 귀찮다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대꾸했다.
“이번에 북쪽 숲에서 건너온 모험가들이 잔뜩 있어서 아마 이 근방 여관들은 다 차 있을 걸세.”
할머니의 말을 듣자 나는 머리를 탁,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잘 곳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엄습한 것이다.
밖에서 노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이 위험한 곳에서?
하지만 에르셈프는 알겠다며 나를 문밖으로 이끌었다.
“루나, 다른 곳으로 가 보지.”
에르셈프와 나는 할머니에게 안내받은 <이슬 먹은 쉼터>로 갔고, 그곳에서도 똑같은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이 시간엔 빈방이 하나도 없을 거야.”
그리고 나는 점점 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설마…….
두 번째 여관도 실패한 우리는 마지막으로 가장 허름한 여관으로 향했다.
벌써 시간은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테일하트 마을을 걸어서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이라고 판단되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로 <모험가의 동반자>였다.
똑똑.
문을 두드린 뒤 들어간 우리는 카운터에서 일을 보고 있는 작은 소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남아 있는 방이 있나?”
에르셈프가 물었고, 소년은 목록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보자…….”
“…….”
“방 하나가 남아 있네요. 같이 쓰시겠어요?”
소년의 말에 에르셈프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하고 싶냐는 눈빛.
“…….”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잘된 일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었다. 노숙을 하는 것보다야 낫긴 낫지.
그런데 같은 방을 써야 한다고?
내가 아무런 대꾸를 않자 그가 나를 빤히 보더니 다시 소년을 향해 말했다.
“주게.”
에르셈프는 방 키를 받았고, 나에게 어서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이 방법밖엔 없다는 걸 알았다.
당장 이 마을을 나갈 방도도 없을뿐더러, 방 하나를 찾은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상대가 에르셈프냔 말이야.
그를 따라 여관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표정이 저절로 굳었다.
나는 남자랑 한방을 써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도 없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에르셈프가 방문을 열었다.
달칵.
허름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깔끔했다.
화장실도 딸려 있었으며 침대도 넓은 게 하나가 있었고, 소파와 티 테이블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이 제멋대로 삐걱거렸다.
“바…방이 참 좋네요?”
에르셈프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건지, 정말 별생각이 없는 건지, 아까부터 표정이 똑같았다.
그리고, 에르셈프가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먼저 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