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밤의 산책(2)
‘잰퓨어 막기 대책.’
그 대단한 해결책은 바로, 그와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
하지만, 친구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법.
누가 그랬다. 우정 또한 호감의 일종이라고. 그러니 나는 잰퓨어와 우정도 없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우정조차 존재하지 않는, 아무런 애정도 없는 친구 상태.
‘친구’라는 단어만 겨우 붙일 수 있을 정도의 관계 되기 프로젝트!
일명 ‘가짜 친구 되기’다.
나는 눈을 감고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가짜 친구 되기 스킬 첫 번째.
말투는 무조건 퉁명스럽게.
퉁명스러운 말투에는 “야,”,“이 XX야.”,“뭐 하냐?”등이 해당된다.
“루나, 어서 와요, 밤바람이 참 좋죠?”
잰퓨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에게 날씨에 대해 물었다.
여기서 최악의 대답이란?
‘바람이 참 시원하네요.’라든가,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네요.’와 같은 말은 절대 금물이다.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는 상대가 저런 말을 내뱉으면 오해하기 딱 좋다.
나도 너한테 관심이 있다고 말해 주는 꼴이니! 그러니 나는,
“야.”
짧은 한 음절을 선택했다.
그러자,
“네? 절 불렀나요, 루나?”
그가 다정하게 대답했고,
“응. 이제 말 놓으려고.”
싹수없기 위해서는 반말 모드로 가야 한다. 허락을 맡을 필요 따위 없다.
그냥 말 놓으면 놓는 거지 뭐.
잰퓨어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도 말 놓을게.”
역시 그는 눈치가 빠르고 적응이 빨랐다.
나는 눈을 흘겼다.
오늘만은 태어나서 예의라고는 배운 적 없는 탕아에 빙의할 것이다.
“루나, 아까는 밥 먹고 잘 들어갔어? 그 험악한 사람들 때문에 데려다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못 먹을 이유가 있나?”
“…그건 아니지만 데려다주면 좋잖아. 얼굴도 더 볼 수 있고. 우리 친구라며.”
“내가 발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래.
그냥 미친 척 한번 하자.
쟤가 뭐라고 하든 비꼬고 조롱하는 거다.
나는 뇌를 거치지 않고 생각나는 말들을 내뱉었다.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긴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다. 이렇게 해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으니!
절대로 그가 형성하는 애정 어린 분위기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자, 그다음.
두 번째 단계다.
가짜 친구 되기 스킬 두 번째.
상대방이 무어라 이야기해도 내 이야기만 하기!
여기서 절대 리액션을 하면 안 된다. 대화가 안 통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니까!
“그럼 이제 학교 밖으로 나가 볼까? 내가 통하는 문을 알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곤하지?”
“피곤해? 나가서 바람을 쐬면 좀 나아질 수도 있어. 야시장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많으니까.”
“잠이 솔솔 오네. 안 졸려, 잰퓨어?”
“루나랑 있는데 졸릴 리가 있을까, 나는 아주 상쾌하고 쌩쌩하다고. 참, 아까 내가 보낸 운디네는 잘 만났어?”
“그러고 보니 내일 정령술과 임무가 걱정이네. 난이도가 높으면 어쩌지?”
“걱정하지 마, 루나. 전투 경험이 적다고 했지? 내가 옆에서 다치지 않도록 도와줄게.”
“…….”
허.
생각보다 꿋꿋하다.
내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데, 그는 내 말에 대답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말도 이어 나갔다.
쉽지 않은 상대인걸.
“운디네에게 준 쪽지가 없어져서 온 걸 보니 잘 만난 모양인가 봐?”
그리고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싱그러운 얼굴로 내 말을 받아칠 수 있는지 대단할 따름이었다.
“…….”
나는 이제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말에 전혀 집중하지 않는다는 몸짓.
내가 대답이 없자 잰퓨어가 새삼 아까와는 다른, 약간은 수줍은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옷이 바뀌었네.”
“…….”
“잘 어울려.”
그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보자마자 호감도가 올라간 까닭을.
내 평소 모습과 다른 화려한 드레스 차림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나는 그저 아이템을 착용했을 뿐인데 그것에 영향을 받을 줄은 몰랐다.
고작 5%가 올랐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그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눈빛이 더 애정 어린 것 같기도 하고.
나를 게슴츠레 쳐다보는 눈길부터 수줍음이 섞인 목소리까지.
“굴러다니는 걸 주워 입은 것일 뿐이야.”
무려 전설급 아이템이 굴러다니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원래 아무거나 입어도 그렇게 잘 어울려? 내일 학교에 가면 모든 시선을 빼앗겠는걸.”
“오버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난 빈말은 안 하는데. 우린 친구니까 다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그는 여전히 생긋생긋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잘 먹히지 않는다는 생각에 세 번째 단계에 돌입하기로 했다.
이 단계까지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쩔 수 없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마지막 수를 쓰는 수밖에.
친구라는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게 없다.
이성이더라도 한 번에 ‘우린 친구야.’라고 못을 박아 줄 한마디.
바로,
“잰퓨어, 사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좋아하는 이성 이야기를 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동성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관계라고 포지션에 선을 긋는 거다.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지 않는가!
자고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좋아하는 이성을 털어놓는 것만큼 직방인 게 없었다.
내 말에 잰퓨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그래진 눈동자가 나를 향했고, 그 속에는 불순한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말하지 마.”
그는 듣지 않길 원했다.
“응?”
“말하지 말라구. 앞으로 하려는 말.”
그러고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왜?”
“넌 이제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러고는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허리를 굽혀 내 고개에 자신의 얼굴을 맞추었다.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고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질세라 그의 말을 받아쳤다.
“엄청 많이.”
“엄청 많이?”
“하늘만큼 땅만큼.”
내가 눈빛 하나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하자 그가 약간은 눈썹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좋은 이유가 뭔데? 나보다 잘생겼어? 멋있어?”
“뭐?”
나는 그의 말에 얼어 버렸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자기보다 잘생겼냐고? 멋있냐고?
“당연한 거 아냐? 넌 내 눈에는 하나도 안 멋있다고.”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중얼댔다.
그러자 잰퓨어가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자기보고 안 멋있다고 하는데 왜 웃는 거냐고.
헛웃음은 아닌 거 같은데, 내 말을 제대로 안 듣고 있나?
“내가 아직 너한테 점수를 못 땄네.”
“…점수?”
“날 보고 안 멋있다고 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거든.”
허.
완전 골 때렸다.
왕자병 말기나 다름없었다.
무슨 쌍팔년도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사를 읊어?
“웃기네. 너 그 정도 아니거든?”
내가 한껏 비웃는 표정으로 그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었다. 세이먼이나 에르셈프라면 몰라, 너는 절대 그 정도 아니다, 이 말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자 그는 약간은 진지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 궁금한 거야, 이거?
진지한 거냐고.
“그야 너는 장난스럽고 가볍고, 진지하지 못하니까.”
그저 느끼는 그대로 대답했다.
나에게 잰퓨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이 정도였다.
“아하.”
아마도 잰퓨어의 피부는 강철로 되어 있을 거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내가 저런 말을 쏘아붙여도 그는 표정 하나 뒤바뀌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얼굴.
마치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굴었다.
“이제 알겠다.”
“뭘?”
“네 취향.”
그는 짧게 대답하며 굽혔던 허리를 곧게 폈다.
내 키가 그의 목 언저리까지 오는 것을 보니, 새삼 그의 키가 큰 것이 느껴졌다.
그때,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야!”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손전등과 같은 마도구를 이리저리 비추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었다.
나는 뜻밖의 상황에 깜짝 놀랐고,
잰퓨어는 순식간에 내 팔목을 잡더니 나를 이끌고는 다리 뒤쪽을 향해 뛰었다.
그는 마도구의 빛을 피해 다리 난간 옆 물탱크 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숨을 곳이라고는 물탱크 뒤편밖에 없었다.
물탱크는 좁고 높은 원통형이었기에 우리는 바짝 붙어서 숨어야 했다.
자칫해서 걸렸다가는 기숙사 퇴출이었다.
이럴 수가.
내가 이런 위험 요인을 감수하면서 다리에 나왔다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친구 관계가 깨져서 앞으로 수업이 힘들 것 같았다고!
잰퓨어는 나를 물탱크 뒤쪽 편으로 집어넣으며 자신으로 내 몸을 가렸다.
“쉿.”
숨을 죽이라는 뜻으로 그가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며 나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몸이 밀착되었다.
너무나도 가까웠다.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자칫하면 코가 부딪힐 것 같았다.
“너, 너무 가까운데.”
그러자 그가 물탱크 밖을 잠깐 확인하더니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입을 막았다.
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커다란 손에 내 얼굴이 묻혔고, 나는 동그란 눈으로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경비원은 마도구로 이리저리 빛을 휘두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칫해서 물탱크 뒤쪽으로 온다면 무조건 걸릴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몇 걸음 남지 않았다.
제발, 제발 돌아가라…….
잰퓨어는 나에게 좀 더 몸을 붙이며 나를 구석으로 더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무릎으로 내 다리 옆을 짚은 뒤 팔은 내 얼굴 옆으로 대며 아예 몸을 겹친 상태로 만들었다.
“흐으…….”
내가 숨이 막혀 오자 소리를 내었고, 그는,
“잠깐만 참아.”
귀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어찌나 가까웠는지 그의 입술이 내 귓불에 닿은 것 같았다.
“분명 여기 있었는데, 고새 도망쳤나?”
경비원은 물탱크 옆까지 다가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더 이상 들어가면 짙은 풀밭이기에 이만 포기하며 등을 돌렸다.
찰싹 찰싹.
나는 내 입을 막은 그의 손을 때리며 얼른 풀어 달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그는 천천히 내 입에서 손을 뗀 뒤 나와 눈을 맞추었다.
“갔어?”
내가 묻자,
“응.”
그는 대답했지만 몸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
“…….”
여전히 얼굴은 가까웠고 그의 숨이 느껴졌다.
어두워서 내 붉어진 얼굴이 가려진다는 것에 감사했다.
“저리 가라.”
나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그는 힘을 푼 채 순순히 뒤로 물러나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리 와.”
그러곤 쪼그려 앉아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됐어.”
내가 그의 손을 탁, 치며 혼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잰퓨어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흥미로운 모양새를 그린 눈과, 입꼬리를 당겨 만든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내가 눈을 흘기며 그를 쳐다보자 볼에 옆으로 보조개가 파이는 것이, 원래 이런 게 있었나 싶었다.
그는 물탱크 옆으로 고개를 빼고는 확실히 경비원이 갔는지를 확인했다.
“당분간은 잘 못 만나겠는걸.”
그리고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내 팔목을 잡고는 나를 빼내 주었다.
“앞으로 만날 생각도 없었어.”
내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그는 이번엔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 이제 반에서만 보자.”
그러고는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당최 그는 내 말을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은 알았다고 하는데 표정은 전혀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었으니까.
아니, 그냥 내 말을 자기 좋을 대로만 듣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 같았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뭘 그렇게 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이어야만 안 들키고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는 여자 기숙사 문을 향해 나를 이끌더니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에 따라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그는 여전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예쁜 초록빛 눈동자를 빛내며.
“내일 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