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29)화 (29/156)

28화. 타오르는 불꽃(1)

에르셈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말투에는 묘한 우월함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 둘이 지금 뭐 하는 거지?

나를 사이에 둔 채 이상한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중한 말투와 그러지 못한 내용. 마치 ‘내가 루나와 더 친하다.’라는 걸 어필하는 것만 같았다.

첫 번째 남자 주인공과 두 번째 남자 주인공 사이에 껴 있는 꼴이라니. 둘이 먹는 상황보다는 셋이 먹는 상황이 나을 거라 생각하여 세이먼을 데리고 온 것이 이런 일을 초래할 줄이야.

정말 내가 먹고 있는 샌드위치처럼 빵 사이에 꽉 낀 햄이 된 것 같았다.

에르셈프는 말을 하면서 깨작깨작 그라탱을 한 숟갈씩 입에 넣고 있었다. 왕자님이니 이런 음식은 시켜 둔 뒤 입에도 안 댈 거라 생각했는데, 은근 잘 먹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약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에르셈프에게 말을 걸었다.

“그라탱은 좀 먹을 만 한가요? 예전에 먹어 봤는데 나쁘지 않던데요.”

“루나, 에르셈프는 이런 음식을 먹는 게 고역이겠지요. 제 애플파이는 안 궁금한가요? 달콤하고 아주 풍미가 좋답니다.”

“입에 딱 맞는다네. 그러는 애플파이야말로 다 흘리면서 먹는 것이 반이나 입에 들어가는지 모르겠는걸.”

“충분히 많이 먹고 있답니다, 에르셈프. 제 식사를 걱정해 줘서 고맙군요.”

“걱정한 건 아닌데, 오해를 잘하는 편인가 보군.”

“…….”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무언가 말을 뱉었다가, 할 말을 잃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에는 내가 꼭 포함되어 있는데도 내가 이야기에 들어가려 할 때면 칼같이 배제한 채 둘끼리의 대화를 이어 갔다.

이 정도면 그냥 둘이 사귀어야 하는 거 아냐?

얼굴도 잘생겼는데 둘이 사귀면 참 볼만하겠…….

무슨 소리야. 정신 차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먹다간 체라도 할 것 같은 마음에 샌드위치를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그때, 나의 운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유일한 것.

저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며 킬킬거리고 있을 게임 마스터.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퀘스트가 내려오는 상황과 타이밍.

모두 최악이었다.

남주인공 한 명도 아니고 두 명과 있는데, 그것도 둘이 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퀘스트가 내려온다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주는 메시지와도 같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퀘스트를 열람했다.

+

# 제5 호감도 퀘스트

제목: ‘타오르는 불꽃’

내용: 두 남자 주인공과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당신, 당신이 먹고 있는 샌드위치를 남자 주인공 중 하나에게 직접 먹여 주시오.

제한 시간: 20분

보상: 전설급 아이템

페널티: 끝나지 않는 저녁 식사

+

“…….”

이제는 퀘스트를 읽고 눈이 띠용 떠지는 것은 익숙해졌다.

이 거지 같은 게임 시스템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어 가지고 놀려는 마음은 진작부터 알아챘다.

내가 그렇게까지 곤욕스럽길 바라나?

게임 시스템은 극한의 S가 아닐까?

가만히만 앉아 있어도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이 두 남자 앞에서 내가 정녕 생쇼를 하는 짓거리를 보고 싶냔 말이다…….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샌드위치를 먹여 주라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이제는 퀘스트의 내용에 당황하지 않을 짬밥 정도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완전 오산이었다. 퀘스트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에게 대담하고 어처구니없는 미션을 제공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 페널티.

끝나지 않는 저녁 식사라니.

이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지 않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인가?

죽을 때까지? 평생?

이 시간대에 갇힌다는 거야 뭐야.

그렇게 되면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흘러간다는 거지? 지옥의 형벌처럼 셋이서 계속 밥을 먹어야 하는 미래라는 건가?

그냥 퀘스트에 실패해서 어떻게 페널티가 부여되는지 시험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 정말로 이 시간대에 갇히게 되면 큰일 난다.

충분히 가능했다.

세이먼이 귀신처럼 밀리센트가의 저택에 드나들던 것도, 저택에서 탈출할 당시 안 열리던 뒷문이 열렸던 것도, 전부 게임 시스템이 이 세계를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 것으로 보아 나를 끝없는 저녁 식사 시간대에 갇히게 만드는 것쯤은 가능하게 보였다.

‘이런 젠장…….’

그리고 ‘전설급 아이템’이라는 보상.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전설급 아이템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유니크한 것인지를.

전설급 하나 뽑기 위해 일주일, 한 달을 존버 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궁금하긴 하잖아……. 전설급 아이템이라니.’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완전 유혹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퀘스트는 말도 안 되게 어려운 미션을 주며 엄청난 보상으로 날 유혹하고 있었다.

‘이 정도는 가능하지?’라면서.

나는 머리를 굴렸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내 샌드위치를 먹여 줄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면 한 가지 물음이 존재했다.

누구에게 먹여야 하지?

세이먼? 에르셈프?

세이먼의 현재 호감도는 41%. 에르셈프의 현재 호감도는 23%다.

거의 두 배가 차이나니 에르셈프에게 먹여 주는 것이 나은 건가?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호감도 시스템에는 룰이 있었다.

그건 바로 누적 호감도가 올라갈수록 호감도를 올리는 일이 어려워진다는 것.

그러니까 첫 번째 세이프 라인인 30%를 훌쩍 넘긴 시점에서 세이먼의 호감도를 올리는 일이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다.

예전에는 반에 찾아간 것만으로도 호감도가 올랐지만 지금은 별짓을 해도 웬만해서는 호감도가 오르지 않고 동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입단 테스트 때처럼 스킨십 같은 경우에는 강렬한 자극이기에 호감도가 오르고 말았지만.

난제다.

세이먼에게 먹여야 하는 것인가, 에르셈프에게 먹여야 하는 것인가?

샐라임과 의논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라면 어떤 묘한 방책을 내놓아 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천 년이나 살았으니…….

하지만 지금 남자 둘이 내 앞에 있는 시점에서 샐라임에게 말을 걸 수도 없는 노릇.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게 몇 분이나 내리 고민했을까.

그들의 대화 속에 끼어드는 것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루나의 입단 테스트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수련을 도와주었다는 말을 하시다니요, 에르셈프.”

“입단 테스트를 보았단 말인가? 언제, 어디서 했었던 거지?”

“이미 지난 일을 알아서 무엇하시겠습니까, 에르셈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아마 뛰어난 검술 실력을 뽐냈을 거야.”

“그걸 어찌 아는 거죠?”

“세이먼, 그녀와 검술 대련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건 아니지만 그녀가 오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알지요. 직접 보았기도 했고.”

“……오러를 쓰나, 루나?”

“모르셨군요, 에르셈프. 그녀는 입단 테스트 때 중급 몬스터를 오러를 이용해서 무찔렀답니다.”

“정말인가? 언제 한번 나와 다시 대련을 해 주면 좋겠어, 루나.”

“루나는 많이 바쁩니다. 그런 요구를 쉽게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지요.”

“어차피 항상 만나던 곳에서 보면 되니 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닐 거야, 세이먼.”

숨 쉴 틈 없이 이야기하는 그들의 대화에 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오러는 우연히 한 번 성공한 것뿐입니다. 앞으로 연습을 많이 해야 하구요.”

매일같이 오러를 공부할 세이먼과 에르셈프 앞에서 이야기를 하자니 약간은 민망해졌다.

게다가 검법A반 학생들 앞에서 검술을 논하는 꼴이라니, 웃기기 짝이 없었다.

그때,

대화가 딱 끊긴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입을 열었다.

검술에 대한 화제를 음식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제 샌드위치가 참 맛있네요!”

나는 두 개가 싸여 있던 샌드위치 중 새것 하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여전히 둘이 대화하고 있는 세이먼과 에르셈프에게서 관심을 빼앗아 오기 위한 것이었는데.

“……?”

“?”

둘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양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맛있게 먹어요, 루나. 잘 먹는 것이 참 보기 좋군요.”

“루나, 나와 식사를 즐기고 있다니 기분이 참 좋네.”

……첫 번째 시도는 실패였다.

그들의 관심을 끌어오는 것을 너무 쉽게 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음식을 곧잘 나눠 먹는 여자아이들과의 식사 문화를 생각했던 나는 그들에겐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나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이야기를 재개했다.

이번엔 자신의 검술 실력과 나의 검술 실력의 상관관계에 대해 논했고, 이어서 누가 더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는지를 경쟁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꽤 어려운 테스트였다.

아까 부여받았던 ‘잰퓨어와 친구가 되시오’ 같은 퀘스트는 약과나 다름없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그렇게 머리를 꽁꽁 싸매던 나는 결국 두 번째 말을 내뱉었다.

이번엔…… 충동적인 것이었다.

“샌드위치 맛이 좀 이상한 것 같네요!”

……하.

나에게 이런 연기를 시키다니, 정말 최악이다.

연기를 하면서도 수십 번의 현타가 나를 때려 왔다.

“맛이 이상한 것 같다구요, 루나?”

세이먼이 먼저 관심을 보였고, 에르셈프가 이어서 말을 했다.

“왜, 어느 부분이 이상하다는 거지?”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까는 맛있었는데, 두 번째 것은 약간 상한 것 같기도 하고 맛이 좀 오묘하네요. 한번 제 걸 먹어 보,”

‘실래요?’가 끊기며 에르셈프가 말을 받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상한 음식은 당장 버려. 먹었다가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군. 역시 이런 곳은 믿을 수 없는 음식을 파는 것인가.”

“무슨 소리예요, 에르셈프. 이 샌드위치만 이상한 것이겠지요. 전교생이 먹는 식당을 모독하는 건가요?”

“확대 해석은 사양일세, 세이먼.”

“루나, 먹지 말아요. 다른 음식을 사다 줄까요?”

“…….”

나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또 실패였다.

이 난관을 어찌 헤쳐 가야 한단 말인가.

제한 시간은 이제 채 십오 분을 남겨 두지 않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저녁 식사 시간과 전설급 아이템…….

다시 한번 페널티와 보상을 상기했다. 루이아나 인생 사전에 실패란 없었다. 내가 스스로 퀘스트를 거부하면 거부했지, 내 능력 부족으로 퀘스트를 실패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죽지 않고 환생한 사람으로서, 이 게임 시스템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 나가고 싶었다.

“버리는 건 좀 아깝고…… 제 걸 한번 먹어 보실래요? 괜히 제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결국 더 이상의 방법은 없는 것으로 판단, 그냥 내 것을 먹어 보라고 직접적으로 제안했다.

누구라도 먹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러자 둘은 동시에 나를 응시했다.

“루나가 음식에 이런 애착이 있는 줄은 몰랐군.”

“그렇게 상한 것 같다면 제가 항의를 해 볼게요, 루나. 억지로 먹으려 하지 말아요. 그러다 탈이라도 난다면…… 제가 슬플 것 같아요.”

……완전 대실패다.

이들은 내 음식을 먹을 생각은 단 일 퍼센트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왕자님한테 샌드위치를 먹으라고 하는 것이나, 세이먼에게 상한 음식을 먹어 보라고 하는 것이나, 둘 다 말이 안 되었다.

이런 바보, 루나. 애초에 말을 잘했어야지!

나는 나를 탓했다.

애초부터 엄청나게 맛이 근사하다면서 입가에 갖다 대었으면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호감도가 올랐겠지…….

진퇴양난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며 이대로 남은 십 분을 끝내야 하는 수밖에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저녁 식사 시간이라는 페널티라니.

그럼 내 인생은 여기서 종결되는 것인가.

아니면 페널티를 받은 상황에서 또 다른 선택지가 주어질 것인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둘 중 한 명의 입을 열고 샌드위치를 직접 넣어 주고 싶었다.

아니면 팔을 다친 세이먼에게 대신 애플파이를 먹여 주겠다며 입을 열게 한 다음 그 순간에 바로 내 샌드위치를 입에 쑤셔 넣는…….

말도 안 돼.

아니면 에르셈프의 주위를 딴 데로 돌린 다음 그 틈을 타 그의 그라탱에 내 샌드위치를 조금 잘라 섞어 놓는다면?

……더더욱 말이 안 돼.

나에게 이 정도의 창의성밖에 없었던 것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내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

순식간에 내 눈이 반짝, 빛났다.

이 상황을 구원해 줄, 해결책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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