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8)화 (8/156)

7화. 히아신스(1)

“왜, 재밌는데. 더 해 봐.”

그녀는 나와 가장 먼 맨 끝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신고식이 이 정도면 약한 거 아냐?”

“그렇긴 해. 보통 이 정도에서 안 끝나니까.”

주변에 있는 한 아이가 그녀의 말을 받았고, 그녀는 얼굴에 비웃음을 띠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척을 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다. 그녀는 충분히 겁낼 만한 무서운 사람이었다.

뒷배경이 탄탄해서 그녀의 잘못을 품어 주기에 충분했고, 매사에 겁도 없어서 여주인공에게 온갖 괴롭힘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으니까.

나를 조종하던 남자아이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이내 나를 향해 바람을 가볍게 후, 불었다.

“꺅!”

또 한 번의 비명을 지른 나는 이제는 몸이 고꾸라졌다가 바로 하기를 반복했다.

보는 사람마저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워 안쓰러움을 자아낼 법한 몸짓.

남자아이는 자신의 능력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내 내 가방은 고꾸라져 바닥으로 내용물을 와르르 쏟아 내기 시작했다.

히아신스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또각또각 다가왔다.

“어머, 어쩌니. 누가 이것 좀 치워 줘 봐.”

탁, 가방에서 떨어진 수첩 한 개를 가볍게 발로 찬 히아신스가 말을 이었다.

“가까이 가기 어렵잖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치욕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복이 길고 두꺼운 로브 형태이기에 옷자락이 뒤집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그것도 나보다 새파랗게 어린 아이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은 내 성깔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너 세이먼이랑 아는 사이야?”

그리고 히아신스는 입을 열었다.

나는 몸이 자유롭지 못한 그사이에도 그녀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아까 세이먼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 건가?

하지만 엄청 많은 아이들이 세이먼과 대화하고 있었는데 굳이 나한테?

‘혹시 아이들한테서 빠져나와 나한테 다가온 걸 보고 이러는 건가?’

히아신스는 세이먼에 대해 상상 이상의 집착을 가진 캐릭터였다. 그가 다른 여자와 대화하는 꼴도 못 볼 정도였으니까.

“무슨 소리지 그게? 내려놓고 말해.”

나는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럼 세이먼이 그렇게 다가갈 리가 없잖아.”

예상이 맞았다.

그녀는 아까 세이먼이 나에게 다가온 모습을 보고 오해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오히려 그를 떼어 내려는 것인 줄도 모르고, 단단히 오해를 한 거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학생회장이어서 말을 섞은 것뿐, 다른 뜻…….”

“학생회장인 줄은 어떻게 알았대? 오늘 전학 왔다며?”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임 스토리여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었다고, 변명하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결국, 내 몸은 고꾸라짐을 반복하며 허공에서 계속 춤을 추었고, 나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내려 주기 싫으시다 이거지.’

나는 주머니에서 아까 학장실에서 사인을 하고 넣어 놓은 펜 하나를 꺼냈다.

‘내 살길은 내가 마련하는 수밖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목표에 집중했다. 그리고 완벽한 타이밍을 노렸다.

기회는 한 번뿐.

몸이 계속해서 움직이는지라 조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휙!

나는 손에 쥔 펜을 날 조종하던 남자아이의 손 옆으로 조준했고, 펜은 날카롭게 떨어져 정확한 위치에 박혔다. 다행이다.

“악! 깜짝아!”

남자아이는 깜짝 놀라며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고, 나는 동시에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꽤 높았던 높이라 엉덩이가 얼얼했지만 나는 금세 일어나 몸을 바로 움직였다.

이건 충동적인 움직임이었다.

인내심의 한계에 달할 때까지 나를 건든 너희들이 잘못한 거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를 위로 솟아 올렸던 남자아이의 멱살을 잡아 눌렀다.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봐?”

남자아이는 또래에 비해 마르고 작은 체형이었고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내가 압박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손에 쥔 힘을 더욱 세게 하며 목을 눌렀다.

“켁! 놓고! 말해!”

남자아이는 두 손으로 나를 떼어 내려 옷자락을 마구잡이로 뜯었지만 나는 온갖 힘을 다해 버텼다.

전생에 운동을 했던 게 여기서 빛을 발하는구나. 물론 몸은 다르다고 하지만 위급 시에 어떤 식으로 몸을 써야 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원래 여주인공 같았으면 저항 한 번 못 해 보고 엉엉 울며 반 아이들에게 조롱을 받았을 거다.

‘웃기지 마.’

나는 그런 성격이 못 되었다.

누군가를 먼저 건드는 성격은 아니지만 나를 먼저 건들 경우에는 크게 꿈틀거리는 편이었다.

“켁켁!”

나는 그제야 손에 힘을 풀고 멱살을 놓았다. 나도 물론 체력이 다했었기 때문이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이 몸은 너무나도 체력이 약했다.

게임의 피 통으로 따지면 풀 피의 수치가 너무나도 낮았다.

“미쳤어? 너 이런 짓을 하고 여기에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남자아이는 악에 받쳐 소리를 쳤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듯이 말하네? 누가 먼저 건드렸는지 같이 알아볼까?”

그러자 남자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는 아무 말 하지 못하였다.

어쨌거나 아이들이었다. 크게 소리치면 누구든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라고?

어디서 이런 취급 한번 못 받아 봤겠지. 온실 속 화초처럼 어화둥둥 떠받들어 주는 소리나 들으면서 자랐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달랐다.

한국의 지옥 같은 중고등학교 생활을 겪으며 온갖 못된 짓을 하는 아이들은 수도 없이 봐 왔고,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강력한 멘탈은 필수였다.

내가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지며 매서운 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아신스였다.

“너… 진짜 어디서 굴러온 애 맞구나? 윌리어스 가라고 하더니… 귀족 집안 아닌 거 티 내는 거니?”

그녀는 상황 파악을 못 했는지 날 도발해 왔다.

나는 한쪽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곤 저벅저벅,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뭐라고 했지? 다시 말해 봐.”

나는 보이는 게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당장이라도 히아신스를 위협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열린 뒷문으로 다른 반 아이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젠장…….”

나는 조용히 살겠다고 분명 다짐했었는데, 전학 첫날부터 아이들의 관심을 사 버렸다.

그리고,

‘세이먼?’

웅성거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금빛 머리를 본 것은 착각이었을까.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봤나?’

그렇다면 왜 도와주지 않은 거지? 분명 아까는 F반에 무슨 일이 있으면 도와줄 것처럼 말했잖아.

혼란스러운 가운데, 앞문으로 첫 수업 담당 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교탁 앞에 엎어진 나의 가방과 마구잡이로 쏟아진 내용물들을 보고는 나와 히아신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히아신스? 무슨 일이지?”

나의 이름을 모르는 선생은 히아신스에게 물었고,

그녀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학생이 사고를 쳐서요. 수습하고 있었어요, 선생님.”

그리고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내 인내심 테스트와 다름없었다.

오히려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하며 선생을 바라보는 히아신스는 말을 이어 나갔다.

“루나가 같은 반 친구를 때리려고 해서……. 막아 준 것뿐이에요, 선생님.”

그렇게, 나는 복도 밖으로 쫓겨났다.

* * *

전학 첫날부터 복도로 쫓겨나는 신세라니.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속은 시원했다.

나에게 모욕을 준 남자아이에게 복수를 했으니까.

수업 종이 쳐 복도는 학생 한 명 없이 조용했고, 나는 그 속에 혼자 서서 발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아까 본 게 세이먼은… 아니었겠지.’

그라면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분명 도와주었을 텐데…….

‘잘못 봤을 거야.’

복도 창문에 몸을 기댄 채 나는 아까의 여파를 식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내가 심심한 걸 어찌 알았는지,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나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람.’

마음속으로 두 글자를 읊자 눈앞에 글자들의 나열이 떠올랐다.

+

# 제1 호감도 퀘스트

제목: ‘둘만의 시간’

내용: ‘세이먼 유리츠’와 단둘이 학생회실에서 시간을 보내시오.

제한 시간: 1일

보상: 2000골드

페널티: 10000골드 차감

+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상과 페널티가 골드로 주어진다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거 완전 RPG 게임이잖아.’

그렇다면 퀘스트를 통해 돈을 벌 수도, 잃을 수도 있다는 거다. 마이너스로 들어갈 땐 또 어떤 페널티가 있는 거지?

무려 만 골드 차감이었다.

내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금액은 백 골드.

게임을 처음 시작하는 플레이어에게 기본으로 제공되는 돈인 것 같았다.

만약 저 퀘스트를 실패할 시 9900골드의 빚을 진 사람이 된다는 거군. 설마 연 이자율은 없겠지?

일단 돈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시장에 가서 물품을 구매할 수도 있고, 밥을 사 먹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거지에게 적선을 할 수도 있었다.

‘페널티가 만 골드 차감이라면 그냥 무조건 퀘스트를 성사시키라는 말인데.’

하지만 둘이 한방에 있다 보면 세이먼의 호감도가 올라갈 수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돈을 얻느냐, 안전을 취하면서 빚쟁이가 되느냐, 둘 중 하나였다.

‘일단 퀘스트를 깨야 해.’

만 골드의 빚을 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백 골드로는 하루 식사를 하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살아가려면 무조건 퀘스트를 깨라 이거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왜냐하면,

‘호감도를 떨어뜨리는 방법 또한 존재하니까.’

무시하기, 다짜고짜 욕하기 등 비호감을 얻는 행동을 한다면 호감도를 떨어뜨리는 것 또한 가능했다. 이미 세이먼으로 경험해 본 적이 있기도 하고.

물론 그걸 행해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자고로 사람이란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상대를 밀치는 것을 쉽게 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아직 만나게 될 남주인공이 넷이나 더 남아 있는데 첫 번째 남주인공 루트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변수였던 히아신스.

그녀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는 악역인 그녀와 이번 생에는 절대 척을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열받게 했잖아, 먼저.’

뭐라고 했더라? ‘왜, 재밌는데. 더 해 봐.’?

완전 재수 덩어리였다.

게임에서도 열받는 캐릭터긴 했지만 직접 당하니 느낌이 완전 달랐다.

‘이미 척을 진 것 같고…….’

지금 수업 시간이 끝나고 반에 들어가면 히아신스와 또 말다툼이 시작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바로 옆자리이지 않은가.

내가 세이먼과 몇 분 대화했다고 나를 이렇게 미워할 정도면 이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거다.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한편으로는 세이먼이 불쌍하기도 했다.

히아신스를 거절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 주는 꼴이라니…….

하지만 지금 남의 처지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퀘스트를 깨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오늘 안에 세이먼과 학생회실에서 단둘이 있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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