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말도 안 되는 게임(3)
“…이, 이, 게 지금 무슨……!”
날카로운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목에 닿을 것 같았고, 나는 돌처럼 굳어 눈만 굴릴 뿐이었다.
그는 아까와는 180도 다른 모습으로 나를 추궁해 왔다.
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 거지?
“수상하군요. 어떻게 당신이 밀리센트 저택에 들어올 수 있는 거죠?”
“그, 그야 여긴 제 방이고, 이 집의 막내딸이니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일단, 이 칼 좀…….”
내가 칼을 가리키자 세이먼이 눈을 날카롭게 뜨며 칼을 거두었다.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전히 의심쩍다는 말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밀리센트가의 영애라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밀리센트 가문은 이남 이녀의 네 자제분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의 존재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의심 반, 호기심 반 정도 섞인 표정이었다.
나도 물론 의문이 가득했다.
내 방은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안다고 해도 2층 발코니에 대체 어떻게 올라온 것인지.
궁금하다고 해서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것인지.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이 남자의 물음에 대답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눈에 보이는 호감도 3%.
‘아, 지금이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가?’
미연시 게임 속이라면 바람처럼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의 장면도 충분히 가능했다.
여주인공에게 칼을 들이대는 미친 남주인공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 이것도 기회다.
또 언제 만날지 모르니까 지금 호감도를 올려서 퀘스트를 깨 보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집의 막내딸입니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아 이렇게 숨겨지고 있지만… 오늘 운명처럼 유리츠 님 같은 기사분을 만나 얼굴을 알리게 되었네요. 어머니가 아시면 분명 화를…….”
최대한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는 오히려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이런 다락방에 사십니까?”
그러고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아마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건…….”
“바깥에 나오지 않으시면서 공작령에 계시지도 않고, 왜 수도의 저택에 계시는 것입니까?”
“그런 게 아니라, 아직 제가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가 되지 않았고, 또 어렸을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탓이지요.”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호감도가 1% 하락했습니다.]
+
이름: 세이먼 유리츠
나이: 18
직위: 유리츠 가문의 기사
호감도: 2%
+
나는 마음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호감도가 쉽게 떨어진다고?
분명 게임에서는 호감도가 떨어지는 일이라고는 손에 드물게 꼽혔다.
남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을 한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내가 왜 내 방에서 이런 상황을…….
목 뒤로 땀이 삐질 흘렀고,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스, 스물둘입니다.”
“둘째 따님이신 메리텔 님이 열아홉입니다. 분명 좀 전에는 막내 따님이라고.”
젠장, 모르고 환생 전의 나이를 말해 버렸다. 바보같이!
[호감도가 1% 하락했습니다.]
“아니, 잠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
“제, 제가 잠시 착각했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 그만.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정식으로 제 허락을 맡은 뒤 출입해 주시죠.”
상황을 무마해야겠다는 생각에 호감도는 안중에도 없이 빠르게 말해 버렸다.
그러자 세이먼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락방이라 당연히 막내 따…님의 방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범한 것도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만 가 주세요. 어머니께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하군요.”
나는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고, 세이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창문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대체 2층으로 어떻게 올라온 거야, 저 남자?
그나저나,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호감도를 2%나 까먹다니!
“그래도 제한 시간은 3일이니…….”
평소 게임할 때는 잔머리 하난 잘 굴렸던 나인데,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굳어 버렸던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이먼은 분명 아까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친절한 남자였는데, 방금은 누구보다 날카롭고 의심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젠장.”
나는 다시 탁자에 앉아 손톱을 깨물었다.
“내일부터, 제대로 해야겠어.”
게임이 날 죽이려 한다면, 그 장단에 놀아나 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침이 밝았고 넝마 같은 커튼 사이로 따가운 햇빛이 들어왔다.
다락방에서 네가 볼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라는 듯 얇고 가느다란 햇빛이었다.
한두 벌 정도밖에 없는 일상복 중 하나로 갈아입은 뒤, 복도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나의 언니로 보이는 단발머리의 여자.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세게 쓰는 것이, 동생으로 취급도 안 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까지 벌레 보듯 할 일이야?
이 집 사람들은 개복치마냥 예민한 편인가?
본 게임에서는 집안 사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터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사가 필요했다.
나는 언니를 지나쳐 가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언니.”
그러자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이렇게 인사를 건넨 것이 처음이라는 듯,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너… 무슨 바람이라도 든 거야? 어제 외출 뒤로 머리가 어떻게 돌아 버린 거니?”
날카롭지만 떨리는 목소리.
적대적이지만 어딘가에서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기색이 느껴진다.
내가 마냥 당하기만 하는 구박덩어리만은 아니다 이건가.
나는 예의 바른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소리세요. 아침 인사를 드리러 가는 참이랍니다.”
싱긋 웃으며 입꼬리를 올리자 언니는 구역질이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미쳤어.”
그녀는 한 손에 든 부채로 입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나를 지나쳐 갔다.
더 이상 상대도 하기 싫다는 표정.
기억에 따르면 언니의 이름은 헬리오네 밀리센트다. 사 남매 중 세 번째로서, 장녀이지만 나이 터울이 있는 탓에 첫째 오빠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도 사치스럽고 허울뿐인 언니였지.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겠어.’
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왔다.
메이드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무슨 행사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저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집안 사람이 물어볼 법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맨날 방 안에 갇혀 있으니 집안 사정 같은 건 하나도 모르겠지.
지나가던 메이드 한 명을 붙잡고 묻자 메이드는 나를 슬쩍 쳐다봤다.
“…풉.”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며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것이다.
“허.”
지금 나, 하녀한테도 무시당한 거 맞지.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걸.
크흠.
목을 가다듬은 채 어깨를 곧게 폈다.
일상복으로 입은 천 드레스의 가슴팍이 쭉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작 가문이라는 명성답게 휘황찬란한 벽지 무늬와 황금색으로 수를 놓은 카펫,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장식품들이 복도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살 때의 좁았던 우리 집에 비하면 여기는 완전 왕궁 수준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집의 자제다.
즉 이 집안의 것들이 모두 나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남주인공들과 이어지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려면 돈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해…….’
집을 구경하려던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어머니에게로 바로 갈 생각이다.
계단을 올라 안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낮은 굽의 구두는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메이드들 사이에서 나는 개의치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똑똑.
고풍스러운 와인색 바탕에 양각이 화려하게 새겨진 문.
그 누구라도 함부로 들어온다면 위협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풍겼다.
“카인?”
안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드인 줄 알았나 보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한번 사뿐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똑똑.
“들어오래도!”
안에선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히스테리가 찾아온 모양인지 잔뜩 신경질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이쯤이면,
똑똑.
“아악!”
벌컥!
여자의 문을 여는 거친 손길에 깜짝 놀랐지만 놀란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
“뭐?”
“좋은 아침입니다.”
“허.”
여자는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뭐니, 너? 재수 없게 어딜 기어들어 와?”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신경질 따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차라리 전생의 엄격한 아버지가 보여 준 속 모를 분위기가 더 무서웠지,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은 더 다루기가 쉬웠다.
“공작님은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하늘색과 금색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가득 찬 침실은 한눈에 봐도 눈이 부실 만큼 화려했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탁자에는……
‘아침부터 술을 드셨군.’
온갖 술병과 여러 가지 잔들, 파이프 재떨이로 보이는 유리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알코올 중독?’
사뿐히 방 안에 입성한 나는 가볍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은 어디 계시죠?”
밀리센트 공작부터, 그러니까 아버지부터 만나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보아하니 이 여자는 허울뿐인 안주인인 것 같고. 정작 필요한 정보는 공작을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계획에 필요하기도 하고 말이지.
“지금 나 놀리니?”
여자, 그러니까 공작 부인은 아까보다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걸음을 옮겨 탁자 앞에 앉았다.
홀짝,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할게. 날 놀리냐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너도 지금 날 무시하냔 말이야!!”
쨍그랑!
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나를 향해 던졌다.
순식간에 유리잔이 내 옆의 벽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고, 내 하얀 드레스에는 붉은색 액체가 적셔졌다. 그리고,
주르륵.
유리 조각을 맞은 내 얼굴에서는 피가 흘렀다.
‘이게 진짜…….’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주먹을 쥐고 부들거렸다.
‘그래, 참아. 곧 있으면 여기도 탈출이야. 탈출하면 이유 없이 구박받을 필요 하나도 없어.’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부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계획 변경이다.
지금으로선 이 여자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도 없을뿐더러, 아니 신뢰가 뭐야, 사람으로서 마주할 수도 없다.
한 번 더 벌레 같은 취급을 느낀 나는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어머,”
“입도 열지 마. 역겨워.”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았다,
“당장 나가. 아침부터 네 얼굴을 보니까 토기를 참을 수가 없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방 안을 빠르게 탐색했다.
이곳은 분명 부부의 침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공작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지?
게임에서는 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장면이 몇 번이나 나왔으니 죽거나 사라진 건 아닐 테다.
방 안을 훑던 내 눈이 한군데서 멈추었다.
짐 가방…….
멀리 여행을 갈 때 챙길 법한 큰 짐 가방이 몇 개씩이나 구석에 정렬되어 있는 것이다.
‘밖으로 나도나?’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남편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침실과 누가 봐도 남자가 쓸 법한 짐 가방. 그리고……
“외출하셨나 봐요?”
내 한마디에도 떨리는 눈동자로 다시 한번 더 술잔을 던지려 팔을 올리는 모습.
“후우…….”
하지만 그녀는 힘을 주었던 팔을 내리며 말했다.
“루나. 네가 아무리 배다른 자식이라도 나는 네 어머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공작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네 처분을 다시 한번 고려해 보아야 하겠구나.”
힘겹게 체통을 지키려는 그녀의 말투.
확실하다.
남편이 밖으로 나돌아 히스테리가 생겨 버린 아내.
대한민국에서는 뻔하디뻔한 사랑과 전쟁 스토리다.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 어머니. 저도 잠시 아버지가 그리워 그만…….”
고개를 45도로 돌리며 한 손을 입가에 갖다 대었다.
작은 웃음이 지어진 것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처량한 목소리로 응대한 나는 뒤를 돌아 문 앞으로 향했다.
술잔을 한 번 더 맞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벌컥.
“이만 쉬세요, 어머니.”
가벼운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온 나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