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비서-81화 (81/85)
  • 외전 3화

    요즘 같은 때에는 연서보다 태헌이 더 많은 시간 은호와 함께했다. 태헌의 입으로 듣는 은호 이야기는 한 끗 설명이 부족하지만, 그것대로 귀중했다.

    “그렇지 않아도 백현호가 은호 사진 보냈던데.”

    “정말? 나한텐 안 보냈는데, 태헌 씨한테만 보냈구나?”

    “네가 바쁜 걸 알아서 그러겠지.”

    “응.”

    연서는 태헌의 핸드폰을 열었다. 복잡한 패턴을 해제하고 은호의 사진부터 찾았다.

    “아 귀여워. 현호랑 꼭 붙어 있는 것 좀 봐.”

    현호. 은호. 이름이 비슷하다며 은호는 현호 삼촌을 꽤 잘 따랐다. 지영 이모는 물론이고, 지영의 언니인 지혜와 그 남편까지 두루 친밀했다.

    은호는 오늘 현호와 지영, 지혜 부부의 캠핑에 따라간 참이었다. 지혜의 아이들이 은호 또래라 통하는 구석이 많았고 가끔은 지혜의 아이들이 연서의 집으로 오는 둥, 격 없이 교류하고 있었다.

    은호의 사진을 넘겨 보는 연서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어쩜 이렇게 많이 컸을까. 이제 조금만 천천히 컸으면 좋겠는데.

    언젠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아이를 생각하면 서글퍼지곤 했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다짐하곤 했다.

    “둘뿐인데, 식사는 밖에서 할까?”

    “우리 그냥 집에서 선물 받은 와인 마실래요?”

    “그래, 그러지.”

    태헌이 단조롭게 대꾸한 뒤 핸들을 감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무슨 일?”

    “아침보다 표정이 안 좋아서. 미간이 1미리 정도 더 좁아졌어.”

    “그거 농담이에요?”

    태헌이 잠시 정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연서를 바라보았다. 연서도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점점 유해지는 그가 좋긴 했지만 이런 땐 차라리 농담하지 말았으면 했다.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지 못해서 더 미안해지니까.

    연서가 웅얼댔다.

    “하나도 안 웃겨.”

    “무슨 일 있는 거 맞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연서는 지친 마음을 애써 밝은 미소로 포장했다. 나날이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이지만 벌써 약한 소리를 할 순 없었다.

    태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와 살을 맞대며 살수록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단 염원이 강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은호를 키우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사소한 취미 생활을 찾았을 터다.

    세원 그룹 작은 사모님이란 이름을 달고 예전 같은 일상을 지낼 수 없단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속을까. 좀 더 뻔뻔하게 거짓말해야지.”

    태헌이 매끄럽게 핸들을 감으며 연서를 빈약한 연기력을 지적했다.

    사람의 귀함이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연서는 그래도 태헌에게 결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세원 그룹 안에서 입지를 다져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으니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팀장 다음은 센터장. 다음은 복지재단의 이사장. 태헌이 추진하게 될 연서의 승진 순위였다. 태헌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자리였기에 연서는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거라면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태헌의 삶에 완전히 녹아들 수 있을 테니.

    은호에게도 좀 더 멋진 엄마가 되고 싶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투정 부릴 수는 없어 변명만 늘어갔다.

    “정말이야.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요 며칠 계속 야근했잖아.”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길겐 못 기다려.”

    정면을 보고 운전을 재개하는 태헌의 말투에 약간의 싸늘함이 묻어났으나 이 이상 이해시킬 여력이 없었다.

    차가 조용히 굴러갔다. 태헌은 과묵했다. 그러면서도 해야 할 말은 꼭 잘했다. 반대로 연서는 쓸데없이 종알대길 좋아했고 진지한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싸해진 게 분명했다. 뭐라 해명하려던 연서는 결국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서가 입을 다물자 침묵이 유지되었다.

    빌라 입구가 보인다 싶더니 어느새 집 차고였다. 그런 중에도 손을 꽉 잡고 있던 터라 맞닿은 부분이 습하고 뜨거웠다. 연서가 손을 빼내려 하자 주차를 마친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어 그녀를 저지했다.

    “하라는 대로 눈에 안 띄게 잘 기다렸고, 그간 센터 근처엔 얼씬도 안 했어.”

    “그래서 미안하게 생각해요.”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걱정을 안 하고 배길까.”

    태헌 앞에서 표정 관리를 못 하는 스스로가 미워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밤의 강물처럼 깊은 태헌의 눈동자가 연서에게로 향했다. 차고에서 새어 나온 은은한 불빛이 밀폐된 공간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키스해줘.”

    태헌은 이렇게 언제라도 연서를 긴장감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연서를 봐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참아볼 테니까 많이 기다리게 하지 마.”

    연서의 눈동자가 수면 위의 물결처럼 잘게 파동했다.

    “여기서?”

    “장소가 중요할까. 그리고 어차피 집인데.”

    “어차피 집인데 조금만 더 움직여서 안으로 들어가요.”

    꼼질꼼질 빼내려던 손이 잡혀 그의 입술로 향했다. 태헌은 연서의 손등을 지나 손목을 가볍게 물었다.

    손목뼈가 그의 치아에 아프지 않게 부딪혔다. 통증보다 야릇한 쾌감이 더 컸다.

    그에게 길들었단 증거였다.

    “으응…….”

    연서가 절로 앓는 듯한 신음을 터뜨렸다.

    “요즘 더 마른 것 같아.”

    “아, 태헌 씨.”

    손목 안쪽으로 깊게 입술을 묻으며 그가 연서를 빤히 직시했다. 태헌의 손이 조수석 헤드레스트에 닿는 건 순식간이었다.

    바짝 가까워진 그의 존재감에 연서가 숨이 찬 것처럼 호흡을 흩트렸다. 열감이 손목 안쪽을 지나 뒷덜미와 아랫배까지 빠르게 고였다.

    태헌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그녀 입술 앞에서 멈추었다. 입술을 맞추겠단 신호였다.

    그러나 연서는 눈을 질끈 감은 뒤 그를 살짝 피했다. 다시금 턱이 잡혀 그의 시선 정면으로 붙들렸다.

    “이러면 더 못 참아.”

    “여기선, 안 돼.”

    “뭘 할 줄 알고 안 돼. 입만 맞출 거야.”

    태헌이 끈적한 밀어처럼 속삭이더니 연서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왔다. 지분거리는 손길이 과감하고 못되었다.

    “더한 것도 하고 싶은데 통 허락을 안 해주니까.”

    연서는 약 한 달 전쯤 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쉽게 불붙는 둘이지만, 늘 잠자리는 집이나 호텔로 사방이 막힌 곳에서 가졌다.

    연애 시절 몇 번 급하게 일을 치른 것을 제외하곤 차에서 관계한 건 몇 년 만의 일이었다. 그다음 날 차 시트를 새로 바꿔야 했다. 연서가 민망해 어쩔 줄을 몰라 하자, 태헌이 아예 폐차시키겠단 걸 울며 겨자 먹기로 말려야 했다.

    그런 일을 또다시 겪을 순 없었기에 연서가 부단히 그의 충동을 밀어내려 애썼다.

    “여기선…… 읏.”

    태헌이 말랑한 살 무덤을 부드럽게 짓이기며 아랫입술을 훔쳐 갔다.

    “손 감아.”

    “입만 맞춘다면서, 태헌 씨.”

    제법 단호하게 의견을 피력하자 잘생긴 눈썹이 들썩였다.

    “빨기만.”

    “우태헌.”

    “그렇게 부르면 더 흥분하는 거 알면서 그럴까. 입술 벌려.”

    태헌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반쯤 풀어 헤쳐진 연서의 블라우스 속을 유영했다. 태헌이 입 맞추며 손을 움직이는 탓에 마땅히 벗어날 틈이 없었다.

    가슴에서부터 단 숨이 터져 나와 그를 끌어안으며 허겁지겁 입술을 겹치고 끙끙댔다. 좁은 입 안을 꽉 채우는 부피감이 연서의 성욕도 단숨에 끌어올렸다.

    하얀 살갗에 그의 손자국이 붉게 남을 때까지 입을 맞추었다. 혼몽하다 못해 울기 직전이 되어서야 태헌이 물러났다.

    입술 사이로 긴 실이 늘어나자 그의 눈동자가 더 짙게 가라앉았다. 적신호였다. 연서가 호흡을 흩트리며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올라… 이제, 올라가.”

    “들어가서 할 거야. 뺄 생각 하지 마.”

    태헌이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바라보다 손수 단추를 채워주었다. 연서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를 맺을 거라면 차보단 집이 나았다. 은호가 새벽에 종종 깨는 터라 마음 놓고 관계한 지 오래되었다.

    연서도 몸이 달았으므로 그의 손을 꼭 잡고 태헌의 보폭에 맞춰 조금 빠르게 걸었다. 차고 엘리베이터 누르고 잠시 뒤 복도를 지나 거실에 들어섰다.

    대형 트램펄린과 전동자동차가 이목을 끄는 거실은 아이의 발달에 맞춰 알록달록하게 변한 지 오래였다. 은호가 클수록 가족 공용 공간인 거실을 넓게 설계하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하얀색으로 도배되었던 깔끔한 집이 조금씩 은호의 색으로 물들 때마다 웃음이 났다. 전면 창을 열고 정원으로 나가면 한쪽에 캠핑장이 있었고 아이 전용 수영장까지 자리했다.

    이젠 은호의 흔적이 없는 집은 상상되지 않았다. 은호가 보고 싶단 당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센터장이었다.

    연서는 핸드폰을 쥐고 태헌에게 잠시 기다리란 무언의 의미를 담아 싱긋 웃었다. 그녀가 한쪽에서 통화버튼을 누르는 동안 태헌이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여보세요.”

    연서는 살짝 굳은 목소리로 센터장의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불시에 날아든 통화는 짧게 끝났다.

    내용인즉, 내일 한 시간 일찍 나오라는 통보였다. 다만 이유를 덧붙이지 않아서 그 연유를 머리 아프게 추측해야 했다.

    이런 건 메시지로 전해도 될 텐데. 퇴근 후까지 괴롭히겠단 심산으로밖에 안 보였다.

    “휴…….”

    미약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연서가 벽을 짚었다.

    “무슨 전화였어.”

    태헌이 돌아왔는지 한 손에 생수병을 들고 있었다. 뚜껑을 연 그가 연서에게 물을 내밀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가 늘 챙겨주는 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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