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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80화 (80/85)
  • 외전 2화

    달콤한 기억에 푹 빠져 있던 연서는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얼른 상념을 걷어냈다.

    “팀장니임,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연서 앞에 샌드위치 상자를 내려놓은 이는 같은 팀 오미현 주임이었다. 그 옆엔 김다혜 대리도 함께였다.

    “고마워요. 두 분,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네. 팀장님도 같이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제육 나왔거든요.”

    오미현 주임이 엄지를 내세웠다. 사내 식당은 밥이 맛없기로 소문나 제육과 돈가스가 나오는 날에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다음에 먹을 기회가 있겠죠.”

    “에휴. 그나저나 센터장님 정말 너무하신다니까. 매번 팀장님한테만 그러시구.”

    “걱정해주는 거예요?”

    “당연하죠.”

    “근데 팀장님은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되신 거예요?”

    옆에 선 김다예 대리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묻자 오미현 주임이 대리님, 하고 작게 불렀다. 무례한 질문을 하지 말란 의미였다.

    연서의 눈치를 흘긋 살핀 김다예 대리가 말끝을 흐렸다.

    “아니. 난 그냥 궁금해서…….”

    사실 연서는 내심 당황했다. 궁금해할 수는 있어도 직접 물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어물쩍 넘어가는 것보단 차라리 이 기회에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낙하산이란 오명도 조금은 옅어지지 않을까.

    “원래 국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었어요.”

    연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여기까지 닿은 건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단 마음 때문이었다. 직원들과도 같은 마음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 그래서 세원 쪽으로 입사하신 거예요?”

    김다예 대리가 되물어 연서가 수긍했다.

    “네. 비슷해요.”

    “간호사라니, 완전 멋지다. 팀장님이랑 잘 어울려요.”

    오미현 주임이 손뼉 치며 눈을 빛내자, 김다예 대리가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선 말했다.

    “사실은 전부터 궁금했거든요. 팀장님은 자기 얘기를 잘 안 하시니까 막 상상만 불어나는 거 있죠. 왜 낙하산이란 말도 돌구…….”

    “대리님.”

    오미현 주임이 눈치 주며 부르자, 김다예 대리가 저도 민망했는지 헛기침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께서 워낙 우리 복지관 핫스타시잖아요.”

    “제가 핫스타예요?”

    “어머, 모르셨어요? 연일 장난 아닌데? 미모의 여성에겐 언제나 사연이 붙는 법이라고요!”

    김다예 대리가 침을 튀길 듯 얼굴을 붙여오기에 연서가 미소를 만들었다.

    “병원 일을 하다가 세원 그룹 일가 중 한 분을 간병했어요. 그분이 이 자리를 마련해 준 거나 다름없고요.”

    연서는 사실을 바탕으로 적당히 둘러댔다.

    “그렇게 된 거구나. 하긴, 요즘 시대에 백도 능력이니까요.”

    백이란 단어가 돌부리처럼 연서의 마음에 턱 걸렸으나, 김다예 대리는 제법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연서의 표정을 살피던 오미현 주임이 대신 사과했다.

    “죄송해요. 팀장님, 대리님께서 궁금한 걸 잘 못 참아서…….”

    여전히 눈이 초롱초롱한 김다예 대리에게 악의는 없어 보였다. 맞는 말이니 화를 낼 만한 일도 아니었다.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열심히 배울게요. 많이 도와주세요.”

    연서가 이쯤 마무리할 생각으로 말했다.

    직원 대부분이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연서도 관련 자격증이 있긴 했지만 직원들에 비하면 이쪽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연서가 부드럽게 웃자 얼른 드시라며 김다예 대리가 샌드위치를 손짓했다.

    “이제 어서 드세요.”

    그래도 고깝게 봐주지 않아 고마웠다. 차라리 이렇게 앞에서 묻는 게 나았다. 뒤에서 흉보고 배척하면 틀림없이 괴로울 테니까.

    아무래도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처음부터 신중하게 팀원을 꾸렸다. 소통이 한결 수월할 거란 생각에 비슷한 나이대로 팀을 구성했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팀을 만드는 데까지 도움을 준 태헌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일에 쉽게 우울해질 순 없었다. 샌드위치를 몇 입 먹은 연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업무를 시작했다.

    *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퇴근 시각에 다다랐다. 6시 정각이 되자마자 연서는 팀원들에게 퇴근을 알리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팀장님, 오늘 데이트하시죠?”

    김다예 대리가 묻기에 왜 그러냔 의미로 고개를 갸웃했다.

    “입술 바르시고 거울도 보시길래요. 그거 반지, 남자친구죠? 커플링 맞죠?”

    낮에 사적인 대화를 조금 나눴더니 궁금한 걸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김다예 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곤 연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사실 여태 기혼이란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몰아치는 업무와 센터장의 호출을 감당하기에도 바빴다. 개인적인 얘기를 한 게 오늘이 거의 처음일 만큼 사적인 정보를 교류할 새가 없던 거다.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네요. 저 결혼했어요. 이건 결혼반지고요.”

    “네에?”

    김다예 대리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놀랐는지, 업무 마무리를 하던 이들의 이목이 연서에게로 한꺼번에 쏠렸다.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 그들의 반응에 연서도 함께 놀라며 말을 이어갔다.

    “아이도 있는걸요. 벌써 여섯 살이에요.”

    “진짜, 진짜요? 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팀원들이 모두 기함했다. 너도나도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연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결혼은 언제 했냐, 남편은 몇 살이냐, 아이는 딸이냐 아들이냐. 성심껏 대답해주던 연서는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쩌죠? 이만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먼저 갈게요. 내일 뵐게요.”

    메시지는 태헌에게서 온 것이었다. 벌써 주차장에 도착했단 단순한 내용인데도 심장이 가빠졌다. 제 차는 두고 가니 뒷일이 조금 번거로워지겠지만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가장 먼저 사무실에서 나온 연서는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갑자기 센터장이 부르지는 않을까, 불길한 생각이 들었으나 다행히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몹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길쭉한 세단과 등을 보이며 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직하고 너른 어깨가 얼마나 반가운지. 그를 향한 감정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었지만 지금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설렘이었다.

    연서는 얼른 다가가 태헌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남편의 향이 폐부 깊숙이 스미자 비로소 숨을 쉬는 기분이 들었다.

    “뛰다 다치려고 그래?”

    “안 돼. 뒤돌면 안 돼요.”

    혹시 누군가 태헌을 알아볼까 봐 고개를 저었다. 비밀 연애하듯이 태헌의 배웅과 마중을 마다하고 있었다.

    혹시 태헌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녀가 세원 그룹의 일원이란 것도 알려진다.

    연서는 태헌이 내어준 그늘 안에서 호화로운 시작을 했다.

    그러니 고집일지 모르겠으나 당분간이라도 자신의 힘으로만 업무를 수행하고 싶었다. 적어도 한 달 뒤의 자선 파티까지만이라도.

    연서의 노고가 들어간 자선 파티가 성공리에 마감한다면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 순조롭게 팀을 이끌기 위해선 팀장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야 할 때였다. 그 전에 태헌의 존재가 알려지면 무용지물이 될 터고.

    태헌은 대답 대신 제 허리를 감싼 연서의 손을 꽉 잡았다. 가닥가닥 얽혀오는 길쭉한 손가락이 전하는 체온에 피로감이 차츰 옅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재단 사람들이 없단 걸 확인한 연서가 태헌의 앞으로 섰다. 태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껏 한결같이 근사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단 뜨거운 고백을 매일 듣지 않았다면 우태헌이 방부제를 품은 기계 인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태헌의 외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나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어른 남자의 매력이 더해져 어제보다 더…… 좋아서.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난 미치겠어. 매번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싶은데, 못 하니까 죽을 맛이야.”

    “얼른 차에 타요.”

    그녀가 뺨을 살짝 붉히자, 태헌이 고개를 살짝 내린 뒤 앙증맞은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연서가 놀라 흠칫 어깨를 떨었다.

    “누가 봐요.”

    “허락이 점점 인색해지는 것 같은데.”

    “진짜 안 돼.”

    태헌이 다시금 고개를 틀어 다가왔다. 하지만 누가 볼 새라 연서는 얼른 손등으로 입을 가린 뒤 조수석을 향해 종종 뛰었다.

    바깥에서 애정 표현을 하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손잡는 걸 제외하면 연애 초반의 연인처럼 쭈뼛대기 일쑤였다. 여전히 떨리고 설레서….

    연서가 차에 오르기 무섭게 안전벨트를 멨다.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 뒤를 쫓기는 듯한 불안감이 해소될 거란 생각이었다. 연서는 차장을 통해 센터 본관에서부터 이어지는 계단을 흘긋거렸다.

    아직은 아무도 안 보였다. 그러나 퇴근 시간이라 곧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올 것이다. 차에 올라탄 태헌이 핸들을 쥐는 모습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이제 얼른 가요.”

    “그렇게까지 경계해야겠어?”

    “말했잖아요.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응.”

    말해놓고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단 걸 아는 연서의 입술이 안으로 말렸다. 태헌에게 괜한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래, 가자.”

    “은호는 저녁 먹고 있대요. 조금 전에 통화했어.”

    차가 출발하자 연서는 미뤄뒀던 은호 얘기를 했다. 아이를 낳고 가장 크게 바뀐 점이 바로 화제였다.

    부부의 공통된 관심사는 은호였고 두 사람 모두 바쁜 터라, 함께 있는 시간 틈틈이 은호에 대한 정보를 교류했다.

    그럴 때마다 태헌과의 애정도 좀 더 돈독해지는 기분이었다. 같은 길을 함께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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