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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55화 (55/85)
  • 55화

    *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서, 흔들면 흔들릴 거면서 고집을 부리는 한연서.

    “좋아한다면서 이렇게 헤어지자?”

    그런데도 이별할 수 있는지, 확인받듯 물었다.

    “얼마 못 갈 사이었어요. 조금 빨리 끝낸다고 생각하면 돼요.”

    태헌이 마른세수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빚은, 힘들겠지만 평생에 걸쳐서라도 갚을게요.”

    “입 다물어.”

    “그리고 현호 말이에요.”

    백현호의 이름에 태헌의 눈매가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제 눈가를 덮었던 손을 떼어낸 그가 비딱하게 물었다.

    “백현호 얘기가 왜 나오는 걸까.”

    “대만으로 보낸 거 이사님이죠?”

    “…우태선이 그래?”

    “왜 그러셨는지 탓하지 않을게요. 대신 현호, 제자리로 돌려놓으세요.”

    하, 그래 이제 알겠다.

    연서가 어울리지도 않는 모진 역을 자처한 이유는 바로 그 새끼 때문이었다.

    소꿉친구? 가족 같은 사이?

    그런 건 태헌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태헌이 가져야 마땅한 연서의 시간을 차지한 그쪽이 방해꾼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 더 확고해졌다.

    “이 지랄 하는 게 백현호 때문이었어?”

    “그럼요? 그런 짓을 벌이시고도 저한테 떳떳하신가요?”

    “못 할 게 뭐야.”

    “이사님은요, 비열해요.”

    “그래서 나와 이제 못 만나겠다? 눈물 나는 우정이네.”

    “네. 저는 사랑보다 우정이에요.”

    웃음이 샜다.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지.”

    연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하셔도 돼요. 어차피 그러려고 만난 건데 마무리는 하게 해드릴게요.”

    섹스할 수 있을 정로도 회복되었다고 바로 겁 없이 덤비는 게 딱 한연서답긴 했다. 그래서 태헌을 자극했다. 한연서니까.

    “연서야, 날 자꾸 개새끼로 만들지 마.”

    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사님은 원래 나쁜 사람인데, 그걸 제 탓하는….”

    태헌이 팔을 뻗어 연서를 당겨 품에 넣었다. 낭창하게 잡히는 허리를 껴안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거칠게 입술을 삼켜내자 알싸한 치약 향이 미뢰를 자극했다.

    뭐 마지막?

    숨이 차는지 연서가 고개를 옆으로 틀며 미약한 힘으로 태헌을 밀어냈다. 태헌이 놓치지 않고 연서의 머리칼을 걷어내며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흐읏……!”

    연서가 고통스러워할 때까지 물고 빨았다. 목과 어깨까지, 두루 자국을 남기며 성마른 욕심을 표출했다.

    흐린 숨이 터져 나오는 연서의 입술을 문지르며 태헌이 경고했다.

    “마지막인지 아닌지는 내가 정해. 싸구려처럼 굴지 마.”

    “싸구려에…… 동하셨네요.”

    연서가 제법 독기 서린 말을 내뱉었다. 그게 현호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자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그럼 너 원하는 대로 하든지. 넣고 빼고 박는 게, 무슨 큰 의미라고.”

    연서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한 손으론 링거대를 밀며 병실 입구로 향했다. 연서를 내려놓자, 그녀가 불안하게 뒤돌아보기에 등을 잡아 눌러 문을 보게 했다.

    “헤어지는 마당에 침대에서 오붓하게 살 부대끼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목적만 채우려면 이런 게 어울리지.”

    연서의 하의를 속옷과 동시에 잡아 내렸다. 연서의 손이 힘없이 뒤로 뻗어와 허우적거렸다.

    “여, 여기서는 싫어요.”

    “싫어? 시끄럽고 입 벌려.”

    태헌이 손가락 두 개를 연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제발, 저쪽으로 가서, 해요……. 여기는!”

    “제대로 핥아야지. 다치지 않게 하려고 배려하고 있잖아.”

    “이사님…….”

    “싸구려라며. 그럼 그에 맞춰 대우해야지 않겠어?”

    태헌의 손가락을 연서가 끝까지 거부했다. 태헌이 실소하며 파스너를 내렸다. 젖지 않은 곳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고 싶을 만큼 머리에 화가 올랐으나, 태헌은 결국 그러지 못하고 무릎을 굽혔다.

    “아, 이사! 으읏!”

    연서의 허리가 잘록하게 휘도록 머리를 박고 게걸스레 탐했다. 욕설이 가슴 속에서 빗발쳤다.

    흐느끼며 주저앉으려는 연서의 허리를 잡고 폭풍처럼 분탕 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헌의 얼굴이 온통 젖은 채였다. 입술을 핥으며 그가 응집한 열기를 밀어 넣었다.

    “이사님, 제발 들어가서 흐윽…….”

    “끝을 내? 넌 우리가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사특한 한연서. 불쌍하고 귀엽고 영악한, 그래서 자꾸 신경을 쏟게 되는…….

    그래서, 이제 조금 알 것 같은데 이렇게 끝을 내자고?

    연서가 현명한지도 모른다. 지금 끝을 내면 이 불쾌한 감정의 덩어리를 치워낼 순 있겠지.

    연서가 힘없이 흔들렸다. 숨죽이며 입을 막는 연서의 모습이 가학심을 부채질했다.

    태헌이 있는 한 이 근처에 허락 없이 얼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태헌에게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겠단 소리와도 같았다.

    스퍼트를 올렸다. 행위가 무르익을수록 쾌감보단 분노와 배신감이 더 크게 몰아쳤다.

    연서의 가느다란 몸이 무식하게 치받는 그를 받아내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흐무러졌다. 힘으로 그녀를 세우고, 또 세웠으나 연서는 관계를 거부하듯 끝내 무너져내렸다.

    이보다 더 강제로 취할 순 있지만, 빌어먹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욕설이 목 언저리에 머물렀다. 마음처럼 그녀를 더 몰아세우지 못했다.

    여전히 성성한 것을 바지춤에 밀어 넣은 그가 옷차림을 정돈했다. 바삐 뛰는 심장이 머릿속을 깨뜨릴 듯 둔기처럼 그를 내리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헤어지고 싶어?”

    “이사님은 제가 원하는 걸 절대 줄 수 없어요. 이사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거예요.”

    연서가 젖은 눈으로 태헌을 올려다보았다. 주저앉은 연서를 일으켜 세우고 손수건을 꺼내 다리 사이를 닦아 주었다.

    “네가 끝내자고 한 거야. 후회하지 마.”

    태헌이 그녀를 스쳐 병실 문을 벗어났다.

    *

    연서의 수술을 집도한 주치의가 퇴원을 결정했다. 그녀는 퇴원을 하루 앞두고 병실을 정돈했다.

    입원 기간에 간병인을 자처했던 현영은 태헌과 헤어진 날 돌려보냈기에 커다란 병실엔 연서 혼자뿐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현호였다. 연서는 그간 현호의 전화를 피했다. 메시지로 잘 지내고 있다고 틈틈이 안부만 전했다.

    현호의 목소리를 들으면 병원에 있단 사실을 털어놓게 될 거고, 그러면 지방 촬영 중인 현호가 곧장 달려올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하나 더는 미루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전화하기 진짜 힘드네. 너 지금 어디야?

    “어디긴. 나야 고시원이지.”

    -하, 지금 내가 고시원 갔다 오는 길이거든? 너 방 뺐다며.

    현호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연서가 난감하게 이마를 긁었다.

    “미안, 사실은… 나 병원이야.”

    -어디? 강 여사님 병원? 내가 그리로 갈게.

    “맹장 수술했어.”

    -뭐? 수, 수술?

    “미안. 너 걱정할까 봐 말 못 했어.”

    -야, 한연서!

    현호가 크게 소리쳤다. 연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태헌의 문제에 치우쳐 현호가 얼마나 걱정할지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이러는 걸 더 걱정하는 거, 알아 몰라. 지금 어디야! 어느 병원이냐고!

    “소리 좀. 나 지금 퇴원해. 현호야, 전에 그 아이스크림 많이 주는 카페 기억해?”

    달콤한 와플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가득 얹어져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다고 깔깔 웃었던, 그 카페.

    “거기서 만나. 30분이면 도착해.”

    -하……. 너 진짜. 전화하면 바로 받아. 알았어?

    “응.”

    핸드폰을 내려놓은 연서는 베드에 앉아 창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5천만 원이 든 수표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태선에게 받은 봉투도 함께 놓았다.

    오후에 윤해가 온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그녀를 통해 태헌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복도에 나가 간호사가 없는 틈에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간 주변을 얼쩡거리던 남자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연서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아 치웠다. 파란 하늘에 짙은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헤어졌구나.

    *

    연서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찢어진 반 청바지에 하얀색 여름 셔츠,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현호였다.

    “현호야…….”

    “현호야, 현호야아?”

    “…언제 서울 온 거야? 지방에 있는 줄 알았어.”

    “일단, 타.”

    “카페는?”

    연서가 눈앞에 있는 카페 간판을 눈짓하며 물었다.

    “지금 그런 게 목으로 넘어가냐? 음료수 사놨으니까 차에 타라고.”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와플을 썰며 나눌 이야기는 아니지.

    현호의 차에 오른 연서는 제 몸을 샅샅이 훑는 소꿉친구의 시선에 머쓱하게 웃었다.

    “몸은 괜찮은 거야? 수술은 그건 언제 했는데.”

    “일주일 정도 됐어. 원래는 내일 퇴원인데 그냥 일찍…….”

    “너, 이거 뭐냐?”

    현호가 손을 쑥 뻗어 연서의 목 부근을 가리켰다.

    아차. 급히 목을 가리려 했으나 탁, 손을 쳐 낸 현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너, 남자 있냐?”

    “…있었는데, 없어.”

    “무슨 소리야, 그게?”

    태헌이 남긴 울혈이 아직도 남아 있단 걸 간과했다. 얼마나 씹어댔는지 한동안 피가 맺혔을 정도였다.

    “만나는 사람이 있었었어. 그런데 이제 헤어졌어.”

    “누구? 연애할 정신이 있었다고, 네가?”

    잠시 숨을 고른 연서가 입을 열었다. 시작은 어려웠으나 말을 하기 시작하자 어렵지 않게 태헌을 만나고 헤어진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빚을 갚아주고 잠자리를 원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짤막하게 끝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 한 거라곤 섹스뿐이었다.

    되게 별거 아니었어.

    “아직도 그 자식 좋아하지?”

    “…아니. 이제 안 좋아해.”

    “개뿔.”

    연서는 이런 때 숨겨지지 않는 미련이 야속했다.

    “뭐 남녀 문제는 내가 관여할 게 아니니까 됐다 치고. 빚은 일단 돈 끌어서 도와줄게.”

    “현호야, 그러지 마.”

    “그 자식한테 돈 갚나, 나한테 갚나. 내 쪽이 편하지 않겠냐? 그리고 헤어졌다며? 넌 자존심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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