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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54화 (54/85)
  • 54화

    *

    연서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도 곤란해요. 이사님이 나쁜 사람이라서요.”

    “기어오르는 것도 귀엽고.”

    태헌이 연서의 뺨을 문질렀다. 부쩍 살이 빠진 뺨이 거슬렸다. 태헌은 요동치는 속내를 감추려 턱에 힘줬다. 연서와 있을 때면 그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는 문득 잔혹하고 차갑단 비난에 더욱 단단하게 요새를 세울 수밖에 없던 어린 날이 떠올랐다. 아이다울 수 있는 시절부터 아이다움을 거세당해서일까. 연서가 저를 어리게 만들고 있음에도 그게 달가웠다.

    연서의 따뜻한 체온이 요람 같았다. 태헌의 영혼이 평안해졌다.

    그의 고민이 이제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단 신호였다.

    그는, 그녀를…….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태헌이 혼잣말처럼 질문했다. 여전히 어질거리는 흙탕물 같았다. 그러나 흘러가는 방향이 한연서 쪽이란 게 확실했다.

    “어떻게 버려.”

    버릴 수 없단 속삭임을 다르게 오해한 연서가 혼란에 빠졌다.

    연서는 설마 자신을 버리고 싶어진 건지. 그래서 태선이 말했듯 망가뜨리고 싶어진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 대신, 태헌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키스해 주세요.”

    숨결이 서로의 시선처럼 얽혔다. 가까운 곳에서 염탐하던 입술이 포근히 겹쳤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뒤통수와 등줄기 발끝까지 이르렀다.

    부드러운 살점이 조금씩 문질러지고 미끈한 틈으로 혀끝이 밀려들었다. 찾아오는 그를 살짝 핥아 올리자 태헌이 턱을 틀며 좀 더 깊게 감아올렸다.

    비음처럼 신음이 샜다. 고막이 끈적해질 때까지 혀를 얽었다. 관계하는 것처럼 혀가 들쑥날쑥 좁은 공간을 헤집었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저 멀리 도달할 무렵, 태헌이 입술을 뗐다. 달궈진 숨소리와 박동이 그를 향해 가삐 들락거렸다.

    꼭 잡고 있던 태헌의 옷깃을 놓은 연서가 옆자리를 툭툭 쳤다.

    “여기 누워 보세요.”

    “좁을 텐데.”

    “안 될까요?”

    태헌이 피식 웃더니 연서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목 아래 팔을 넣어 팔베개했다. 태헌이 팔베개를 해준 건 처음이었다. 연서는 울듯이 웃으며 그의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근육에서 연서와 비슷한 박동이 느껴졌다.

    “마지막 맞선이 내일이었나.”

    “그런 걸 꼭 지금 말해야 해요?”

    연서가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좋았는데.

    “내일 하루 두 시간이면 전부 끝나.”

    연서가 제 뺨으로 향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안 가면 안 돼요?”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너도 동의한 일 아니었어?”

    “이사님에겐 누군가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게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저는 힘들어요.”

    태헌이 손을 들었다. 그리곤 연서의 눈가에서 흐른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가지 않겠단 말을 해주지 않았다.

    연서가 원하는 말을 영원히 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나무와 불처럼 두 사람은 달랐다. 그래서 연서는 이해받을 수 없었고, 태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자리만 갖는 관계에 많은 걸 바라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기엔 연서는 그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태헌을 마음에 둔 날부터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단 걸 이제야 알겠다.

    그의 무심함에 날마다 마모되어갔다. 그래서 제로가 되었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까지 잔인한 그가 버거웠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기대조차 전부 메말라선 다시는 그를 향해 피지 못할 황폐한 사막이 되었다.

    연서가 눈을 감았다가 들며 심호흡했다. 생각해둔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들고 그걸 전달하는 과정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렵지만, 이젠 해야 할 말이었다.

    “이사님.”

    “응.”

    “헤어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단번에 태헌의 눈빛이 빙판처럼 서늘해졌다.

    “그러는 게 맞아요.”

    “내 눈 보고 다시 말해 봐.”

    강한 힘으로 연서의 턱이 잡혀 탁한 시선에 얽매였다.

    “아까 어떤 남자를 봤어요.”

    “남자?”

    “절 보더니 도망가는데……. 전에도 몇 번 본 것 같았어요.”

    “그래서.”

    태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물었다.

    “그 사람 저 감시하는 거잖아요. 이사님이 지시한 거죠?”

    “그게 이유가 돼?”

    “언제부터 제 주변에 사람을……. 한마디 말도 없이, 이건 아니잖아요.”

    “그럼 네가 박 교수를 만나든, 우태선을 만나든. 내가 몰라야 하나?”

    “김 비서님한테 들은 줄 알았어요. 김 비서님 통해서 아는 건 줄 알았다고요. 저는 모르는 사람을 통한 게 아니라!”

    고양된 음성 끝이 가늘게 떨렸다.

    “누구에게 듣든 널 보호하려던 목적은 같아.”

    “아뇨. 이런 건 보호가 아니라 감시예요.”

    “사람 붙이는 건 당연한 거야. 이 바닥 생리가 그래.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니 너는 보호 받아야 돼.”

    예전이었으면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란 말에 어떻게든 행복의 회로를 돌려보려 애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젠 지친 것 같다. 그의 섹스 파트너가 되기 위해 일일이 감시받아야 한다면 그런 건 그만하고 싶었다.

    “…여기에 그 사람, 데려오셨잖아요.”

    태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헛숨을 내쉬었다.

    “누구. 이해신?”

    “왜 그러셨어요?”

    “그게 마음에 안 드셨고.”

    “사람 마음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짓밟을 수가 있는지……. 저는요, 이사님이 무서워요. 자꾸 상처를 주니까.”

    태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드에 걸터앉은 그의 등이 멀게만 느껴졌다. 등진 채로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연서를 바라보았다.

    “머리 좀 식혀. 내일 얘기하지.”

    “지금 얘기하고 싶어요.”

    “쉬어.”

    태헌이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

    가지 말란 그런 말 하나 들어주지 못할 거면서, 이별을 반대하는 그는 감당하기에 무거웠다.

    *

    날이 밝을 때까지 태헌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독한 위스키를 퍼부었으나 수면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헤어지자던, 연서의 목소리가. 그때의 표정이 수마보다 더 강렬한 기세로 태헌을 덮쳐왔다.

    레지던스 피트니스 클럽을 찾아 한 시간 넘게 땀을 뺐다. 샤워하고 그가 찾은 곳은 회사가 아닌 병원이었다.

    8시면 연서도 일어났을 시간이었다. VIP 병동의 장점은 주변이 조용하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호들갑과 관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

    연서의 존재가 세상에 어떻게 비치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서에 대해 아무렇게나 떠드는 건 싫었다.

    자신의 소유에 대해 떠드는 게 불쾌한 게 아니라, 한연서라는 인간에 대해 멋대로 재단하는 게 꼴사나워졌다.

    정해진 스케줄을 미루고 연서에게 왔다. 밤새 고민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별을 말한 괘씸한 그녀를 설득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연서의 원대로 들어줄 순 없었다. 그의 갈망은 여전했고 이별을 말하기엔 일렀다.

    딱딱한 바닥에 태헌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연서의 병실 앞. 태헌은 조이듯 답답해진 심장 부근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누군가로 인해 마음 졸이고 일상을 위협받는 기분은 질 나쁜 음식을 삼킨 것처럼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병실 문을 열고 걸어가 창가에 선 연서의 옆 모습을 본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한연서, 네가 이겼다.

    태헌이 가라앉은 음성을 토해냈다.

    “식사는.”

    그리고 난 절대로 널 놓을 수 없다.

    “…출근 안 하셨어요?”

    연서는 세수했는지 앞머리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에선 샴푸 향이 났다.

    붓기는 온전히 사라져 예전처럼 티 없는 얼굴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에요?”

    태헌의 새벽을 통으로 날린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시간에 병원을 찾은 그를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내가.

    “하던 얘긴 마무리 지어야지. 머리는 좀 식혔나?”

    “…….”

    “끝을 내는 건 내 쪽이야. 분명 그런 조건이었던 것 같은데.”

    “마음 떠났는데, 꾸역꾸역 만날 순 없잖아요.”

    마음이 떠났다. 꾸역꾸역?

    “뭐 하는 짓거리야.”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침착한 어조에 슬슬 화가 올라왔다.

    “맞선이 그렇게 마음에 걸려? 의미 없는 일이란 거 너도 알잖아. 그래서 네 손에 맡겼고.”

    “그게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하나요? 왜 저를 그 자리에 데려간 거예요? 정말 배려였어요?”

    태헌이 잠시 화를 삭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서를 괴롭히고 싶던 유치하고 저열한 본성을 연서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뭐 어떠한가. 그게 연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인데.

    그녀를 그런 식으로 소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연서가 헤어지잔 말을 꺼낼 만큼 싫었다면 재고할 여지가 있었다.

    “불쾌했다면 그래, 내 실수야. 인정해.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거야.”

    “이사님은 참 쉽네요.”

    “한연서는 어렵지. 오늘 맞선 취소하면 되겠어?”

    연서가 조금 놀란 듯 커다란 눈동자를 잘게 흔들었다. 다갈색 이채를 띤 예쁜 눈에 태헌이 담길 때다가 그는 성욕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도 그 눈동자를 핥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럴 수 있는 거예요?”

    “해결 못 할 일은 아니야.”

    “…할 수 있는 거였네요.”

    그녀가 바스라질 듯이 웃었다. 가뜩이나 늘 위태로워 보이던 그녀가 한층 더 처연해 보였다.

    태헌이 바라던 모양이 아닌, 눈가를 찡그린 채 웃는 연서는 그의 가슴을 좀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가지 말라고 할 땐 들어주지 않았으면서.”

    솔직히 말하면, 맞선이 연서가 헤어지자고 할 정도의 큰 이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계를 절연할 만큼 연서에게 중대한 사안이라면 조금 귀찮아져도 손을 쓸 순 있었다.

    “그래서 지금 네 비위 맞추려고 하잖아.”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맞선 문제로 연서가 태헌의 예상보다 더 상처 받았다. 태헌의 잘못이 일부분 있었다.

    인정한 태헌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사과하지.”

    “…그만 만나요, 우리.”

    하나 연서는 이미 답을 내린 듯, 어제보다 단호한 어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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