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6/23)

6장




아리엘의 티 파티 소식은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어린 대공자비가 품격 높은 파티를 해냈다는 것과, 대공이 그녀를 위해 지은 아름답고 거대한 유리온실은 몇날며칠 사교계 여자들의 화두에 올랐다.

모두 아리엘을 부러워하느라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다이아나가 예측했던 대로, 아리엘이 선물한 색깔 실링왁스도 대 유행을 했다.

아리엘이 직접 장인에게 주문해 제작한 펄 실링왁스는 항상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매는 귀족들의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었다.

특히 여자 귀족들 사이에서 매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편지로 친분을 쌓는 영애들,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색깔 실링왁스로 편지를 봉하는 일이 허다해졌다.

그 와중에 실비아를 비롯해 아리엘에 대한 악의적인 말을 했던 몇몇 영애들이 지방 영지로 추방되었다는 이야기가 쫙 퍼졌다.

이유는 마티어스의 눈 밖에 났다는 것.

“마티어스 대공께 감히 무례를 범했다면서요?”

“세상에! 목숨을 부지한 걸 감사해야겠네요.”

아리엘은 그들이 추방당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 하고 그저 이렇게만 생각했다.

‘마티어스님은 외부인에게 무척이나 단호하시구나.’

한편, 성공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한 아리엘에게는 초대장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각종 실내 파티, 무도회, 티 파티, 자수회, 승마회…….

“괜찮은 모임들이 많습니다, 아리엘님.”

란셀 후작 부인은 상당히 들뜬 표정으로 아리엘에게 어느 모임을 가실거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아리엘은 모든 초대를 정중히 거절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모임에 나가지 않을래요.”

그녀는 얄팍하게 사람들을 사귀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소모임들은 루시안의 아내로서 꼭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원래 해야 할 일들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아리엘이 사교 활동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것을 밝히자 사교계에는 소문이 슬금슬금 퍼졌다.

대공과 대공자가 아리엘을 너무나 아낀 나머지 집안에 꽁꽁 숨겨놓는다는 소문이었다.

다이아나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들은 아리엘은 까르르 웃고 말았다.

“마티어스님이랑 루시안이 날 숨겨놓고 싶어한다니. 말도 안 돼.”

다이아나는 즐겁게 웃는 아리엘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결과적으로 모임에 나가지 않기로 선택한 게 아리엘이긴 하지만, 소문도 신빙성이 있는데……?’

무도회 때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보여준 태도를 미루어 봤을 때 이런 소문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종일관 아리엘을 애지중지 싸고 돌던 마티어스와, 춤 한 번 추겠다고 금기를 어기고 요하네스 를 뛰쳐나온 루시안.

아리엘을 제외한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대공가 남자들이 그녀에게 쏟아 붓는 진득한 보호본능을.

‘하지만 뭐…… 아리엘이 모른다면 그걸로 됐어.’

다이아나는 전적으로 아리엘 편이었다.

아리엘이 깨닫지 못했다면 그건 아리엘 탓이 아니라 대공가 남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 것이다.

‘평소 행실을 잘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 * *


모임은 거절했지만, 아리엘은 친구인 다이아나와 세실과 자주 어울렸다.

아리엘이 모니카 공작가나 하이츠 백작가로 놀러 가는 건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어서 주로 두 친구가 놀러 왔다.

봄 무도회 시즌이 끝나고 비교적 한가해진 다이아나는 두꺼운 영지 경영책을 싸짊어지고 방문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영지 경영 공부를 하는 걸 질색하신다니까. 글쎄, 차라리 로망스 소설을 읽으래.”

귀에 깃펜을 꽂은 보랏빛 머리의 소녀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아리엘의 방에서 책을 펼쳤다.

세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모친도 그러신다.”

“세실네 부모님도 검을 배우는 걸 반대하시는거야?”

다이아나가 묻자 세실이 딱딱하게 고개를 저었다.

단정하게 묶은 물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검술 수련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무가의 딸이니까 자기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면 좋다고 여기셔.”

“그럼?”

“내가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는 걸 꺼려하시지. 오빠들은 내가 검을 잡는 걸 우습게 여기고, 여동생은 날 이해하지 못해.”

세실의 집은 형제가 무척 많다고 했다.

무신 집안 아들로서 기사 지망생인 오빠 세 명에, 여동생 하나. 세실을 통해 듣는 5남매의 일상은 항상 떠들썩했다.

하지만 좋은 얘기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여동생 베릴은 그야말로 레이디의 귀감인 애야. 그래서 그 애와 난 늘 비교를 당하곤 했어.”

세실의 오빠들은 여동생들을 소개할 때 세실보다는 세실의 여동생 쪽을 더 자주 불러냈다.

“검을 든 여동생보다는 손수건에 자수를 놓는 여동생 쪽이 더 자랑스러운 거겠지.”

잠시 묵묵히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나는 기사가 되고 싶어. 아버지나 오라버니들처럼.”

검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그 전에도 자주 했지만 세실이 이렇게 확실한 목표를 말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오라버니들과는 달리 나한테는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제국에 여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는 아예 기사로 지원할 수조차 없게 되어 있었다.

세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이아나와 세실이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자 자연스럽게 아리엘에게 시선이 모였다.

아리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은…….”

그러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리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뭔가 다이아나와 세실에게 힘이 될 만한 얘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아리엘의 가족들은 반대는 고사하고,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앞에서 아버지의 학대 때문에 아직도 몸에 흉터가 남아있다는 것이나, 오라비가 심심하면 개를 풀어서 자신을 물게 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

“…….”

아리엘의 어두워진 얼굴을 본 다이아나와 세실이 마주보았다.

아리엘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아참, 아리엘. 내가 이번에 밀키 바이올렛 색깔 잉크를 샀단 얘기를 했던가? 내 정신 좀 봐! 그 얘길 깜빡하다니!”

다이아나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아리엘은 애써 표정을 바꾸고 웃었다.

“얼른 얘기 해줘, 다이아나.”

다시 소녀들의 수다가 계속되었다.

다이아나와 세실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 아리엘은 아까부터 생각해왔던 말을 꺼냈다.

“있잖아. 다이아나. 네가 괜찮다면 내 방에 책을 놔두고 갔다가 놀러 온다는 핑계로 공부하러 오면 어때?”

다이아나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그녀가 아리엘을 답삭 끌어안았다.

“진짜? 그래도 돼?”

“그럼!”

다이아나는 안 그래도 어머니 공작 부인이 책을 빼앗으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말하며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었다.

아리엘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뻐졌다.

그녀는 세실에게 돌아섰다.

“아, 그리고 세실. 집에서 정식으로 검 수련하는 게 어렵다면 여기 와서 해도 돼. 우리집에 기사단이 있거든. 수련장도 있고, 검 수련에 도움이 되어 줄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세실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그런…… 그건…….”

얼마 후 얼굴이 빨개진 세실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아리엘은 활짝 미소지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누군가 마법을 갈고 닦을 기회를 제공했다면, 자신도 마냥 무력하게 살지는 않았을지 몰랐다.

작은 도움이라 할지라도 절박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것인지 아리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친구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헥터와 랄프한테 세실에 대해 한번 말해봐야겠어.’

잔뜩 감동받은 두 친구가 돌아가고 나서 아리엘은 침대에 풍덩 몸을 던졌다.

베개에 얼굴을 묻자 배싯 웃음이 나왔다.

“내일부터 나도 열심히 해야지.”

친구들의 모습을 보자 그녀도 자극이 됐다.

아리엘은 마법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리라 다짐했다.


* * *


마티어스는 아리엘이 여자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리엘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친구들 이야기를 재잘대면 의자에 기대 앉아 조용히 들어주었다.

아리엘은 그런 마티어스가 정말 좋았다.

무뚝뚝하긴 하지만 마티어스 같은 아빠가 있다면 영원히 정에 굶주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디저트로 바닐라 크림을 얹은 쁘띠 브라우니가 나왔다.

‘아,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

아리엘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디저트를 포크로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진하고 꾸덕한 브라우니가 기분좋게 녹아내렸다.

식후 음료로는 청포도 즙이 들어간 산뜻한 음료를 홀짝홀짝 마신 아리엘은 문득 텅 빈 마티어스의 잔을 바라보았다.

“마티어스님.”

“그래.”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마티어스님은 와인을 안 드세요? 술 드시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오래 지켜본 뒤에 아리엘이 내린 결론이었다.

마티어스는 차나 다른 음료는 마셨지만 와인 등의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봄 무도회에 갔을 때도 황제가 샴페인을 권하자 거절했다.

‘그 땐 황제 폐하의 권유를 거절하셨다는 것 자체에 놀랐지만…….’

집에서도 식전이나 식후 음료로 술을 마시지 않는 걸 보면 마티어스는 아예 술을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리엘이 궁금하단 눈으로 초롱초롱 바라보자 마티어스가 못 이기겠다는 듯 픽 웃었다.

“라카트옐은 보통 인간들처럼 술 같은 것에 취하지 않으니까. 알콜의 효과를 제하면 맛은 그저 역할 뿐이라.”

어라? 하지만 결혼식 날 루시안은…….

“그럼 어린 라카트옐은요?”

“성체가 아닌 라카트옐은 다르지. 오히려 보통 인간들보다 더 면역이 없는 편이다.”

“아…….”

그렇다면 루시안이 취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생각한 아리엘은 힐끔 마티어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나저나 마티어스님은 정말 숨기려는 기색이 없으시구나.’

히스는 아리엘더러 무방비하다고 했지만, 아리엘은 대공가 사람들이 더 그런 것 같았다.

‘방금도 마티어스님 좀 봐. 그러다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걸 남에게 들키면 어쩌시려고…….’

아리엘은 괜히 자기가 더 걱정돼서 안절부절못했다.

물론 이걸 루시안한테 물으면 ‘알게 된 놈을 죽이면 되지.’하고 대답할 것 같지만…….

혼자서 루시안의 말투를 상상한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녀를 잠자코 응시하던 마티어스가 물었다.

“왜. 식후 음료를 혼자서 마시는 게 적적했나?”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저는, 저는 마티어스님이 술을 안 드셔서…… 더 좋아요.”

그 말을 하는 아리엘의 고개가 절로 수그려졌다.

그녀는 술 취한 남자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다.

아리엘의 친부인 루실리온 후작이 술을 마시면 그녀를 미친 듯이 때렸기 때문이다.

아리엘이 어른 남자인 마티어스에게 익숙해지는 데에는 그가 술을 멀리하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마티어스가 조용히 아리엘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만 자러 가라.”

“……네.”

아리엘은 냅킨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보통 때는 앉은 자리에서 아리엘을 자러 보내던 마티어스가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티어스님?”

아리엘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그가 허리를 굽혔다.

마티어스의 입술이 아리엘의 이마에 닿았다.

“잘 자거라.”

아리엘은 뺨을 동그랗게 만들며 살며시 웃었다.

마티어스가 굿나잇 키스를 해주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는 기분이 좋아져서 폴짝거리며 다이닝 홀을 나섰다.

남겨진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푸르스름한 저녁 달이 떠 있었다.

“……블루 블러드 문이 뜰 때가 왔군.”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위험해.”

마티어스는 멀찍이에 서 있던 집사 알렌을 불렀다.

알렌이 와서 서자 마티어스가 말했다.

“채비해라. 잠시 저택을 비워야겠다.”

“예, 대공 각하.”

그냥 나가려던 마티어스가 문득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아리엘이 마시던 청포도 주스 잔이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

마티어스는 나가면서 알렌에게 명령했다.

“다음부터는 내 잔에도 식전후주를 채워. 알콜 없는 걸로.”

“예…….”

명령을 받는 알렌의 주름진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어렸다.

그 모습을 본 마티어스가 말했다.

“뭐지? 할 말이라도 있나?”

알렌은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가리기 위해 손으로 입을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마님에게 푹 빠진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은 항상 보기 좋았다.


* * *


마티어스가 저택을 비운 지 일주일 째.

브루노어는 요즘 아리엘에게 흙 원소를 다루는 마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흙 원소는 여러 방면으로 응용할 수 있습니다.”

브루노어가 허공에 마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동굴에서 마법사가 광맥에서 순수한 광물을 뽑아내는 그림이었다.

“광맥에 섞인 금속을 다루는 것.”

그리고 그가 부드럽게 손을 휘젓자 그림이 바뀌었다.

회오리바람 모양의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바람원소와 합쳐 모래바람 일으키기.”

브루노어가 손끝을 튕기자 그림은 운석의 비가 퍼붓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돌이나 바위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기 등.”

아리엘은 그림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과거에 그녀가 썼던 공격 주문 중 하나가 떠올랐다.

“메테오 플러시…….”

브루노어가 맞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리엘은 과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가 원소 마법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메테오 플러시는 그녀 주변의 어떤 마법사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주문이었다.

오직 아리엘만 가능했다.

그녀가 원소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브루노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브루노어가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 산을 이루고 있는 바위같이 큰 것부터 아주 작은 흙먼지까지. 대부분의 자연물이 흙 원소에 속해 있지요.”

히스가 신이 난 어조로 끼어들었다.

“그래서 흙 원소는 연금 마법하고도 친하다고! 재료가 다 자연에서 나오니까.”

브루노어가 나이답지 않은 파워로 히스에게 따악! 꿀밤을 먹인 뒤 설명을 이어 갔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생명과 <공명>하는 것이랍니다.”

이번에는 그림이 세 개로 쫙 갈라졌다.

마법 시약이 든 유리병.

꽃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법사.

엄청나게 커다랗게 자란 나무.

“흙 원소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마법 시약을 만드는 데 쓰이는 까다로운 식물들을 직접 키워낼 수 있습니다. 싹을 틔우는데 10년이 걸리는 식물도 10초만에 싹을 볼 수 있죠.”

브루노어가 두 번째 그림을 쿡 찍었다.

“온 땅에 뿌리로 연결되어있는 식물들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곳의 상황도 전해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아주, 아주 고난이도이지만요.”

그가 손바닥을 슥 움직이자 앞의 두 그림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지막 그림만 남았다.

작은 사람 앞에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있는 그림이었다.

브루노어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지금 아리엘님이 배우실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인가요?”

아리엘은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브루노어를 바라보았다.

“흙 원소를 통해 식물과 공명해서 그들이 빨리 자라게 돕거나 훨씬 더 크고 실한 과실을 맺게 하는 것이지요.”

“와아…….”

“이제 본격적으로 배워볼까요?”

브루노어는 꼼꼼히 기본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 아리엘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식물과 공명하는 연습을 하세요. 아리엘님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지가 뻗고 봉오리가 꽃으로 만개하도록.”

숙제를 받은 아리엘은 며칠동안 정원에서 끙끙거리며 식물과 공명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동화되어주는 흙 원소들과는 달리, 식물들은 예민하고 새침해서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후아, 어렵네…….”

아리엘은 보드라운 잔디밭에 몸을 누이며 중얼거렸다.

“흥. 역시 잘 안되지?”

언제 왔는지 히스가 아리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리엘이 그를 올려다보자 히스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이 천재 마법사님이 좀 도와줄까?”

아리엘은 누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앉았다.

“어떻게?”

“그런 게 있어.”

히스가 제 콧등을 엄지로 문지르며 잰 체를 했다.

“뭔데, 히스?”

아리엘이 히스에게 바짝 다가가 앉자 히스가 얼굴을 붉히며 펄쩍 뒤로 물러났다.

“야, 너, 넌 좀! 갑자기 가까이 오지 마. 놀랐잖아!”

하지만 요 며칠 해답을 찾으려 고생한 아리엘에게 그런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그녀는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크흠.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고.”

히스는 곧장 털어놓을 마음이 없는 듯 했다.

이 잘난척쟁이!

아리엘은 이런 마음을 담아 히스를 빤히 노려보았다.

히스가 자꾸만 유치하게 굴어서일까?

그녀도 히스 앞에서는 자꾸만 유치해지는 기분이 든다.

“……으. 알겠어. 힌트를 줄게.”

아리엘이 지그시 노려보자, 그 시선을 못 견딘 히스가 입을 열었다.

“마나에 특별히 잘 반응하는 종류의 나무들이 있어. 그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

“풀이나 꽃이 아니라 나무부터? 어렵지 않을까?”

“그건 잘 모르는 소리야. 풀이 나무보다 훨씬 까칠해. 나무는 무뚝뚝해도 관대하다고. 이 바보야.”

“그렇구나…….”

어쩐지. 내가 말을 거는 풀마다 죄다 뾰로통하게 침묵하더라.

“그럼 마나에 잘 반응하는 나무는 어떤 건데?”

아리엘의 질문에 히스가 손가락으로 라카트옐 저택 부지 안의 작은 숲을 가리켰다.

“프라카티아 나무. 예전에 저기서도 본 적 있어.”

“우리집 숲에서?”

“응.”

순순히 대답한 히스는 너무 좔좔 말해주고 있는 제 꼴을 깨닫고 확 얼굴을 붉혔다.

“미쳤네. 아 내가 왜!”

힌트만 주려고 했는데 술술 다 말해버린 게 분한 것 같았다.

그가 아르랑거리며 말했다.

“됐지?! 난 알려줬다. 가보든지 말든지!”

후다닥 도망가려는 소년을 아리엘이 불러세웠다.

“저, 히스.”

“왜!”

아리엘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같이 갈래? 저번에 숲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었잖아.”

저번엔 둘다 카라멜 태피의 강렬한 유혹에 굴복하는 바람에 못 갔었지만.

아리엘의 말을 들은 히스는 예전에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나랑 정원 너머 숲에 갈래? 가서 내가 마법 보여줄게.’

“으…… 그때 내가 무슨 생각으로.”

히스는 다갈색의 뒷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마법사들은 원래 약속을 잘 하지 않는다.

약속을 중요시여기기 때문이다.

‘왜 자꾸만 저 조그만 여자애한테 휘말리는 기분이지?’

스스로를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알았어. 가 주면 되잖아.”

히스는 결국 아리엘과 동행하게 되었다.

원래도 호기심 때문에 몰래 뒤따라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히스는 툴툴거리며 아리엘을 이끌었다.

“빨리 와.”

라카트옐 저택을 벗어나 블랙 가든 쪽 정원을 지나면 호수가 있고, 그 위에 호수를 가로지르는 석조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넘어가면 멀리 푸른 사자 기사단 건물의 첨탑이 보이며 비로소 숲이 드러난다.

숲까지는 엄밀히 말하면 저택령 안인데도 어린 소년과 소녀의 걸음으로는 꽤 오래 걸렸다.

숲 안으로 들어서자 연둣빛의 나뭇잎들이 살랑이며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늦봄을 지나는 작은 숲 안은 밝고 아름다웠다.

“나무뿌리에 걸리면 넘어지니까 발 밑 조심해. 우왓!”

콰당탕.

히스가 푹신하게 깔린 이끼 더미 위로 넘어졌다.

조심하라고 해놓고 자기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에, 아리엘은 놀란 것도 잊고 까르르 웃어버렸다.

“뭐야, 히스. 나더러 조심하라며.”

“너, 너 웃지 마! 야, 웃지 말라니까!”

아리엘은 쿡쿡 웃으며 생각했다.

‘히스는 정말 귀여운 것 같아.’

웃는 아리엘을 향해 펄펄 뛴 히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일어났다.

그때였다.

민망해서 소리나게 손을 탁탁 터는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기 있다!”

그들이 찾던 프라카티아 나무였다.


* * *


아리엘과 히스는 달려서 커다란 프라카티아 나무로 다가갔다.

프라카티아 나무는 고대의 식물처럼 얇은 줄기에 긴 이파리들이 빼곡히 달린 나무였다.

나무에서 허브처럼 쌉싸름한 향기가 났다.

아리엘은 나무 둥치에 손을 대 보았다.

손에 마나를 조금 불어넣자 나무가 후우웅- 하며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무가 뿌리로 수분을 빨아들이듯 아리엘의 마나를 조금 흡수했다.

짧은 찰나 아리엘의 머릿속에 나무의 수액이 흐르는 혈관들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나가 나무의 잎맥 안을 돌면서 심상을 만들어 낸 듯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와…….”

정말이었어. 마나에 반응하는 나무가 있었어!

아리엘은 신기해하며 몇 번이나 나무와 마나로 소통해보았다.

프라카티아 나무는 느긋하게 어린 소녀를 받아주었다.

마나 소유자에게 태생적으로 관대한 것 같았다.

한참동안 나무에 등을 기대고 인사하듯 교감하던 아리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히스.”

“어?”

“이 나무는 너무 어른 나무라서, 자라는 걸 도와주는 건 무리이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

고개를 끄덕거린 히스가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그럼 작은 프라카티아를 찾으면 되잖아. 프라카티아는 주변에 씨앗을 뿌리는 나무라서, 잘 찾아보면 아기 나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그때, 아리엘이 기대어 선 큰 프라카티아 나무가 미약한 신호를 보냈다.

오른쪽으로 가보라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나무가 일러준 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뒤에서 나무들을 살피며 아리엘을 따라오던 히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찾았다!”

아리엘의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나무가 일러준 곳에는 정말로 아리엘 무릎 정도 높이의 작은 프라카티아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어리지만 완벽한 프라카티아였다.

히스가 무릎을 꿇고 아기 프라카티아를 살펴보았다.

“이 녀석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다치지 않게 너희 정원으로 옮겨심자. 매일 여기에 찾아올 수는 없으니까.”

“응.”

히스가 마법으로 모종삽을 구현했다.

아리엘도 땅을 파는 걸 도우려고 했지만 히스가 막았다.

“놔둬. 여자애 손에 흙 묻히게 하면 할아버지한테 볼기짝을 얻어맞을걸.”

화난 브루노어가 보이기라도 하는지 히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무를 옮겨 심는 건 마법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히스가 꽤나 능숙하게 어린나무 주위의 땅을 둥그렇게 파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리엘은 옮겨 심어질 아기 프라카티아를 안심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귀여운 어린 잎사귀를 쓰다듬으며 마나를 살며시 불어넣자 아기 나무가 쫑긋 귀를 세우며 아리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여기도 좋지만, 우리 집 정원도 밝고 좋은 곳이거든.”

아리엘은 나무를 쓰다듬으며 머릿속으로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렸다.

흘러들어오는 마나를 통해 그 이미지를 읽은 아기 나무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줄기를 살랑거렸다.

나무와 이미지를 주고받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아리엘에게 그 일은 너무나 쉽고 자연스러웠다.

구슬땀을 흘리며 구덩이를 파낸 히스가 물었다.

“온실에 심을 거야, 아니면 정원 공터에 심을 거야?”

아리엘은 브루노어가 마법으로 보여준 그림에서 아주아주 커졌던 나무를 떠올렸다.

“이 나무가 커지면 온실 천장을 넘을지도 모르니까 바깥에 심을래. 장소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좋아.”

히스가 마법의 그물로 흙덩이가 주렁주렁 맺힌 아기 나무의 뿌리를 감싸준 뒤 바깥으로 꺼냈다.

나무가 나온 곳에 오목한 자리가 남았다.

아리엘은 아쉬움이 남아 자꾸만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대로 흙을 덮으면 금방 잊어버릴 텐데…….’

“히스.”

“왜.”

“우리 여기에 뭐 묻어놓고 갈까? 기억할 수 있도록.”

“뭐?!”

히스가 얼굴을 붉히며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나더러 그런 계집애 같은 짓을 하자고?”

얘 좀 봐.

아리엘은 허리에 척 손을 얹었다.

“여자애든 남자애든 땅에 뭔가를 묻을 수 있는 거잖아. 묻는 게 여자들만의 일이라면 남자들은 무덤도 만들 수 없을걸.”

“윽. 그건 그렇지만…….”

논리에서 밀린 히스가 눈을 도르르 굴렸다. 여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아리엘은 갈수록 말솜씨가 늘고 있었다.

한참만에 히스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 그런 건 네 남편하고나 해.”

루시안하고?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루시안하고 땅을 판 뒤에 뭔가를 묻으란 말인가?

하지만 삽을 든 쪽이 루시안이라면…….

파묻고 있는 게 피투성이 사람으로밖에 상상되지 않는걸.

“내가 루시안하고 왜 이런 걸 해?”

히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야 이런 건 개인적인 거니까. 뭐, 추억이나…… 그런 거. 중요한 사람하고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히스랑 나도 개인적인 관계잖아. 난 루시안의 아내로서 너를 대하는 게 아닌데.”

“……그럼?”

히스가 우물거리며 물었다.

아리엘은 방긋 웃고 대답했다.

“너도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야, 히스.”

그 말을 들은 히스의 얼굴이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무, 무슨…….”

아리엘은 다갈색 머리카락에 오묘한 금안을 가진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히스는 아리엘에게 특별한 친구였다.

다이아나와 세실과는 좀 달랐다.

그들과는 여자 친구들만의 공감대가 있듯, 히스와도 특별한 공감대가 있었다.

이제 열 살인 아리엘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가슴이 부풀고 여자 티가 나기 시작하는 열다섯의 친구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그녀 자신이 유년기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었다.

아리엘은 히스와 있을 때면 제 나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초콜릿 머핀을 입가에 막 묻혀가면서 먹어도 창피하지 않고, 서로 유치한 장난을 칠 수도 있다.

평민 출신인 히스와 회귀 전 하녀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살았던 아리엘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격의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지.’

둘 사이에는 같이 마법을 배우는 마법사로서의 공감대도 있었다.

과거 마법사 무리에 살 때, 아리엘은 같은 스승 밑에서 마법을 배운 동기들끼리 가까운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브루노어라는 스승 아래에서 마법을 배우니 아리엘과 히스는 동기다.

아리엘 생각에는 서로 각별할 이유가 충분했다.

게다가 히스는 말만 툴툴거리지 아리엘의 말을 항상 못 이기는 척 들어주곤 했다.

그가 보이는 소년다운 치기 아래에는 순수하고 착한 마음이 깔려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채 시선을 돌리고 있던 히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마정석을 만들어서 넣는 게 어때?”

“마정석?”

아리엘은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처음에 그녀가 뭔가를 묻어놓자고 제안했을 때, 마정석은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네.’

마정석이란 마법사가 자신이 소유한 마나를 뽑아 수정 모양의 결정으로 만든 것을 말했다.

이 마정석에는 특징이 있는데, 만들어 낸 주인이 나중에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여기에 땅을 팠던 흔적이 사라진 후에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을 기념하고, 어린 프라카티아의 첫 보금자리를 기억하는 데에 충분한 물건이었다.

아리엘은 선뜻 대답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

히스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 정도라면 괜찮겠지.”


* * *


둘은 구덩이 근처 나무뿌리에 걸터앉았다.

히스가 먼저 마정석을 만들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허공에 띄워 그 사이로 마나를 모아 내보낸다.

금빛의 마나가 천천히 점으로 모여들다가 행성의 고리 같은 흔적을 그리며 점점 불어났다.

“와…….”

아리엘은 과거 마정석을 만든 경험이 있었다.

회귀 전, 아리엘의 부친과 오라비가 그녀에게 이 일을 시켜 자신들의 사치에 보탰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히스의 손에서 마정석이 점점 수정 모양의 형태로 변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히스가 마나를 불어넣는 걸 멈추자, 히스의 손안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금빛으로 일렁이는 예쁜 빛을 내는 마정석이었다.

“예쁘다.”

아리엘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히스 눈동자 색깔이랑 비슷해. 정말 예뻐.”

부끄러운지 히스가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흐흠! 흠! 이제 너도 만들어.”

아리엘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몸 안에서 마나를 끌어내고 하나로 뭉치는 어렵지 않은 일.

과거 그녀가 만들던 마정석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창백한 흰색을 띤 수정 모양의 돌.

소금 덩이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손안에 마나가 모여 익숙한 결정 형태로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정도 커지자 아리엘은 마나를 불어넣는 걸 멈추었다.

툭.

아리엘의 조그만 손으로 마정석이 떨어져 내렸다.

딱딱하고 약간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떠서 자신의 마정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

지금 그녀의 손안에 있는 마정석은 아리엘이 알던 창백한 흰색이 아니었다.

달콤하고 선명한 붉은빛을 띤, 아주 아름다운 색깔이었다.

히스는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지만, 아리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과 똑같이 흰색일 줄 알았는데…….

어째서 색깔이 있지?

뭐야. 뭐가 달라진 거야?

“히스. 내 마정석에 색깔이 있어.”

넋이 나간 듯한 아리엘의 말에 히스가 대꾸했다.

“뭐? 그야 당연하잖아.”

“하지만…….”

과거에는 색이 없었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아리엘이 말을 잇지 못하자 히스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마정석에는 원래 그 사람 고유의 마나색이 담겨. 한 번도 본 적 없어?”

“…….”

“참고로 할아버지의 마정석은 초록색이야. 어릴 때 내가 그걸 집어삼키지 못하게 하려고 고생하셨다지.”

히스가 말을 듣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브루노어도, 히스도 마나 색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에게 마나 색이 있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회귀 전과 바뀐 것이 있다는 것만은 놀라웠다.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운명이 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히스가 말했다.

“마법에 자기 자신을 담을수록 색이 짙고 선명해진다고 그랬어. 넌 네 마법을 하고 있으니까 마나도 물드는 거야.”

“응…….”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깨달음이 찾아왔다.

‘과거에 나는 내 고유의 마법을 쓰지 못했던 거구나.’

색깔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 그것일 것이다.

아리엘은 히스와 자신의 마정석을 구덩이 안에 잘 집어넣었다.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이제 언제든 여기에 찾아와 볼 수 있겠지?’

그때 히스가 불쑥 아리엘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엘.”

“응?”

아리엘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히스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히스가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뺨이 아까처럼 붉어졌다.

“넌 왜 그렇게 결혼을 일찍 했어?”

“…….”

아리엘은 어리둥절해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히스가 진지해 보여서 그녀도 진지해졌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그냥 귀족이어서 아버지가 정해준 대로 결혼했다고 하면 히스는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후작가에서 도망쳐 나오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아리엘은 히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

얼마 전 여자 친구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아리엘은 다이아나에게조차 가족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마음 아파할 것을 알기에 더욱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히스에게는 왠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 친구들과만 나눌 수 있는 말이 있다.

그리고 히스에게만 나눌 수 있는 말 또한 존재했다.

아리엘은 천천히 옷 소매를 걷었다.

어린 소녀의 희고 가냘픈 팔이 드러났다.

아리엘은 팔 안쪽을 히스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보여?”

아리엘이 옷을 걷는 걸 보고 깜짝 놀라던 히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길게 난 채찍 자국이 있었다.

“아버지한테 맞아서 난 상처야.”

“뭐?”

히스가 펄쩍 뛰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아리엘을 훑어보았다.

한 줌도 안 될 것같이 조그만 여자아이가 눈앞에 앉아있었다.

“널…… 때렸다고?”

“응.”

대답한 아리엘은 무릎을 감싸 안았다.

히스에게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다리에는 오라비 제롬의 개에게 물린 흔적도 남아있었다.

“나는 후작가의 딸이야. 내가 그 집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결혼뿐이었어. 그리고 날 빼내 줄만큼 힘이 있는 가문은 라카트옐 뿐이었고.”

아리엘은 마법으로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모아 토끼 모양을 만들었다.

나뭇잎 토끼가 귀를 감싸쥐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히스. 나 여기 와서 정말 행복해졌어. 가끔은 믿기지 않을 만큼.”

지난 생에는 단 한 명도 없었던 좋은 사람들이 이제는 가득해졌다.

모든 게 과거에 만났던 루시안 한 명으로부터 시작된 인연이었다.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히스가 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함부로 얘기해서.”

“아니야. 나도 비밀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조금 후련해졌는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아리엘은 활짝 웃었다.

“책에서 봤는데 친구는 '비밀을 묻어주는 자'래. 내 비밀 잘 묻어놔 줄 거지?”

“마법사로서 맹세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겠어.”

아리엘은 키득키득 웃었다.

“가만 보면 히스는 너무 약속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아, 아니거든.”

“맞는데.”

좀 더 약게 굴어도 될 텐데.

히스도 착한 게 탈이라니까.

“그럼 구덩이 메우고 이만 돌아갈까?”

아리엘은 일어나서 옷자락을 탁탁 털었다.

일어나서 구덩이로 걸어가려던 그녀는 그만 나무뿌리에 걸리고 말았다.

“앗.”

쿠당 넘어진 아리엘을 보고 히스가 벌떡 일어났다.

“거봐. 내가 나무뿌리 조심하랬잖아.”

“아야야…….”

상처가 났는지 살피며 아리엘은 자신이 걸린 나무뿌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라?”

아리엘이 걸려 넘어진 건 나무뿌리가 아니었다.

“이게 뭐지?”

파헤쳐진 흙 사이로 짐승의 뼈 같은 것이 드러나 있었다.

아주 거대한 뼈의 일부인 것 같았다.

아리엘과 히스는 동시에 서로 마주 보았다.

등골이 싸늘해지며 온몸에 오싹함이 감돌았다.

아리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히스. 이렇게 큰 동물이…… 이 숲에 살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 기껏해야 토끼나 다람쥐, 새들뿐일걸.”

“그럼 이건…….”

히스가 조심스럽게 마법을 써서 흙을 좀 더 파헤쳤다.

엄청난 크기의 머리뼈가 차차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히스가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무슨 생물의 뼈인지 알 것 같아. 책에서 본 적이 있어.”

그 날, 아기 프라카티아 나무를 들고 돌아오는 길.

아리엘과 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택에 들어가기 직전에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다.

“히스. 오늘 본 거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브루노어에게도.”

창백한 얼굴의 히스가 대꾸했다.

“내가 바보냐.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걸.”

“일단 우리끼리만 좀 더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어.”

그렇게 약속한 둘은 각각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그 날 생각지도 못하게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버렸다는 것을, 그때의 아리엘은 알지 못했다.


* * *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자 제국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제국의 여름은 무더웠지만, 라카트옐 저택의 여름은 달랐다.

저택 안이 브루노어의 마법으로 항상 시원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엘과 친구들은 양산을 쓰고 유리 온실로 자주 나들이를 가곤 했다.

빼곡한 나무들 덕에 청량한 숲 향기가 나는 온실 안에서 먹는 얼음 디저트의 맛이 기가 막혔던 탓이다.

꿀을 섞은 유자 샤베트의 사각사각한 얼음을 떠먹으면서 더위를 식히면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버렸다.

“난 이만 일어나야겠다. 검 연습을 하러 가야 해.”

세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세실은 아리엘의 배려로 요즘 푸른 사자 기사단의 연무장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또한 세실의 수련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주었다.

처음엔 헥터와 랄프에게 말해봤지만 루시안에게 아리엘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절대 안 됩니다, 아기 마님.”

두 사람은 잠깐도 아리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기에 불가능했다.

그때, 랄프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네드에게 맡기는 건 어떠십니까? 네드는 기사단을 이끌고 있으니 훈련 시키는 데에 익숙할 겁니다.”

네드는 헥터, 랄프와 마찬가지로 소드마스터로서, 현재는 푸른 사자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었다.

아리엘은 조금 망설였다.

세실이 따로 검 훈련을 한다는 걸 하이츠 가문이 알게 되면 곤란했다.

“세실이 여기서 수련하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푸른 사자 기사단은 라카트옐의 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그러니, 누설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세실은 제국의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인 네드의 도움을 받아 수련을 하게 되었다.

“소드마스터님이 검을 봐주신다고?”

무가에서 자라, 소드마스터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세실이 기뻐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네드는 부하들을 미친 듯이 굴리는 걸로 악명이 자자한 훈련관이었다.

마수 토벌을 해야 하는 푸른 사자 기사단의 특성상, 의욕이나 노력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네드는 재능이 없는 사람은 가차없이 돌려보냈다.

재능이 있어서 기사단에 남더라도 극강의 훈련에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런 네드가 있기에 푸른 사자 기사단은 정예부대로 존재할 수 있었다.

세실을 가르쳐 본 네드는 랄프에게 무뚝뚝하게 한 마디를 남겼다.

“기본기는 나쁘지 않더군.”

하루만에 네드가 세실의 훈련을 거부할 줄 알았던 랄프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네드에게서 저 정도 말이 나왔다면 그건 재능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날듯이 아리엘에게 돌아와 말했다.

“무가 출신이라서 그런지 타고난 게 있으신 듯합니다.”

랄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네드 녀석은 검에 재능있는 사람에게만 저렇게 말하거든요.”

“잘됐네요!”

아리엘은 세실이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기뻤다.

하이츠 가문 사람들은 세실이 딸이기 때문에 그녀의 능력을 제대로 봐 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한편 다이아나는 공부와 사교 활동 모두 열심히 했다.

그녀는 비밀리에 영지 경영 공부를 하면서도, 파티나 모임에 꾸준히 참석해서 사교계 소식에 빠삭했다.

“요즘은 가을 무도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벌써부터들 가을 데뷔 무대를 궁금해하는 거지.”

지금 사교계의 관심사는 가을 무도회에 완전히 쏠려있었다.

무려 황태자와 라카트옐 대공자가 '함께' 데뷔하는 초유의 무도회 아닌가.

영애들은 언감생심 두 남자와 춤을 출 수 있기를 바라며 드레스를 주문했다.

“정말 어이가 없어. 황태자는 미혼이니 그렇다 치고, 왜 대공자님과의 춤을 탐내는 거야?”

다이아나는 양심 없는 것들이라며 신랄하게 욕을 해주었다.

“엄연히 아내가 있는데 그 앞에서 잘 보이려는 생각을 하다니!”

“괜찮아, 다이아나.”

아리엘은 루시안을 탐내는 영애들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화를 내주는 다이아나 때문에 마음이 따뜻해질 뿐이었다.

‘루시안이 다른 영애들을 신경 쓰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녀는 루시안과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영애들이 아주 터무니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결혼한 귀족들은 성년이 돼서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두 가문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거나,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아마 나랑 루시안도 이혼할거라고 생각하고 다들 그러는 거겠지.’

균형이 안 맞는 결혼은 쉽게 깨지니까.

라카트옐 대공가의 직계에, 최연소 소드마스터.

루시안은 어느 면으로 보나 엄청난 신랑감임에 분명했다.

그에 비해 아리엘의 조건은 별 볼 일 없었다.

친정인 루실리온 후작가가 크게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나마도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혈통을 의심받는 상태였다.

아리엘의 자리를 노리는 영애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리엘이 달래자 조금 진정한 다이아나가 팔짱을 끼고 투덜거렸다.

“이게 다 그것 때문이야.”

“응?”

“대공자님 얼굴.”

“으응?”

다이아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라카트옐이면 라카트옐이지 왜 얼굴까지 가져서, 양심없는 것들을 홀리냐구!”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말을 이해했다.

하긴. 계약 결혼 상대인 그녀도 루시안의 얼굴에 종종 숨이 막히는데, 면역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이대로 놔뒀다가는 다이아나가 루시안에게 반한 영애들 목록까지 읊을 기세라 아리엘은 살그머니 대화 주제를 옮겼다.

“저, 있잖아. 황태자 전하는 어떤 분이셔?”

아리엘의 물음에 다이아나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

“음…….”

어릴 적부터 황태자비 후보로 낙점되었던 다이아나는 황태자 디트리히와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만남은 둘 모두에게 전혀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다이아나는 황태자비라는 자리보다 모니카 공작위를 더욱 중시했고, 디트리히도 그녀에게 예의 이상의 관심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글쎄. 외모는 금발 녹안에…… 상냥한 분이지. 하지만 그게 진짜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어.”

금발에 녹안?

순간 아리엘의 머릿속에 스쳐지나 가는 소년의 얼굴이 있었다.

데뷔 날 테라스에서 마주쳤던 정중한 금발의 소년.

하지만 아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참.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사람은 레온 영식인걸.’

아무튼, 이번 가을 무도회에 가면 싫어도 황태자를 보게 될 테니 미리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아기 마님. 모니카 공녀님. 간식 드실 시간이에요.”

온실까지 간식을 가져온 수잔이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안을 채운 커스터드 크림 안에 과일이 콕콕 박힌 오븐식 팬케이크였다.

“와, 마침 배고팠는데!”

“수잔, 고마워요!”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수잔이 가져다 준 간식에 환호하며 신나게 포크를 집어 들었다.


* * *


친구들과 오전 시간을 보낸 아리엘은 오후가 되자 히스와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라카트옐 가문에는 책이 많았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 양피지로 엮었던 책이나, 목판으로 엮인 기록물까지 쌓여있었다.

크게 책이 보관되어있는 장소는 세 군데였다.

왕관 인장 열쇠로 열고 들어가야 하는 기록고, 마티어스의 개인 서재, 그리고 중앙 도서관.

그중 아리엘과 히스가 주로 머무는 건 중앙 도서관이었다.

중앙 도서관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만큼 높은 책장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돔형의 천장에 그려진 벽화는 신화 속 한 장면을 그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아리엘과 히스는 관련 있어 보이는 책들을 한 아름 안고 구석진 곳으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요즘 그들은 숲에 갔던 날 발견한 뼈에 대해 몰래 조사하고 있었다.

히스가 가죽 커버로 장정된 두꺼운 양피지 책 한 권을 펼쳤다.

오래된 책인 듯, 책의 이음새에서 쩌적 하는 소리가 났다.

“아까 이 책에서 뼈 그림을 찾았어.”

그가 보여준 양피지 책에는 잉크 삽화와 설명이 들어가 있었다.

각종 고대 괴물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몇 장을 휙휙 넘기던 히스가 어떤 페이지에서 멈추고 손가락을 짚었다.

“이것 봐. 그날 봤던 거랑 비슷하지?”

아리엘은 삽화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단단해 보이는 비늘로 뒤덮인 날개를 지닌 거대한 파충류 괴물 그림이 양피지에 그려져 있었다.

머리뼈의 크기나 모양이 숲에서 본 것과 거의 똑같아 보였다.

“정말…… 비슷하네.”

“그렇지? 놀라지 마.”

히스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건 와이번 그림이야.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 마수.”

“……!”

아리엘은 놀란 숨을 헉 들이마셨다.

와이번.

그녀도 들어본 적 있는 마수였다.

과거 마법사 무리에 있을 때 '와이번의 독'은 가장 비싼 마법 시약 재료 중 하나로 불렸다.

와이번을 사냥할 수 있는 인간이 없어서, 죽은 와이번에게서만 독을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오래전 멸종되어서 와이번의 독은 마탑에만 남아있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히스. 와이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잖아.”

“맞아. 여기 설명을 읽어보면, 이런 종류의 마수들은 다 고대에 사라졌어.”

“그런데 어떻게 이 저택에 뼈가 묻혀있을 수 있는 거지?”

“그게 의문이야…….”

히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서 턱을 괴었다.

“원래 와이번이 출몰했던 곳은 지금의 북부 산맥 고대 숲 너머야. 이곳과는 엄청나게 떨어져 있지. 여기까지 와서 죽었다기엔 이상해.”

옳은 말이다.

마법 게이트를 통하지 않는다면 북부 산맥까지는 엄청나게 오래 걸린다.

날아서 이동했다고 해도 먼 거리였을 것이다.

게다가 마수가 서식지를 그렇게나 벗어난다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럼 역시 죽은 와이번을 옮긴 거겠지?”

“아마도.”

와이번은 무척이나 거대한 괴물이고, 포악한데다 독성이 강해서 살아있을 땐 만질 수도 없다.

그러니 누군가 죽은 와이번의 뼈를 가져다 묻은 게 분명했다.

아리엘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하필 뼈를 묻어놓은 걸까?”

“맞아. 독을 원하는 거였다면 날개뼈의 독침만 가져와도 됐을 텐데 말야.”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결국 아리엘과 히스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뼈를 좀 더 관찰해봐야겠어.”

아리엘은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 가보자.”

“아냐. 아리엘 넌 호위가 달려있으니까 나 혼자 다녀올게. 그려와서 함께 보면 되잖아.”

“……좋아.”

그들은 그 뒤에도 고대 괴물을 기록한 책을 뒤지며 조사를 계속 했다.

“뼈를 묻어놓은 사람을 찾으려면, 아무래도 라카트옐 저택이 세워지기 전에 저 땅이 누구 것이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

아리엘이 말하자 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그건 네가 알아볼래?”

“응.”

몇 시간 후.

브루노어는 히스와 아리엘을 찾아 헤매다가 도서관에 있는 두 아이를 발견했다.

두 아이는 책더미에 둘러싸인 채, 서로 기대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우유 냄새가 날 것 같은 어린 소년소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브루노어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가까이 다가간 브루노어가 두 사람이 읽고 있던 책을 들여다보았다.

“…….”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새에 그는 10년쯤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결국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는 건가.”

브루노어는 몸을 굽혀 잠든 손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제 어깨에 기대어 놓은 소년은 퍽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브루노어의 입에서 낮고 애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는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자가 이 보석 같은 소녀를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소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다 자신에게 들킨 적이 수두룩했으니까.

브루노어가 느끼기에도 아리엘에겐 무언가가 있었다.

아리엘이 숨기고 있는 건지, 그녀도 모르게 그녀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분은 나조차도 파악이 되지 않으니…….”

그렇게 중얼거린 브루노어는 이 사랑스러운 제자들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우지 않기를 바라며, 잠든 아이들에게 마법으로 행복한 꿈을 선사해주었다.


* * *


아리엘은 오랜만에 나들이 마차를 타고 외출을 했다.

새하얀 보닛을 쓰고 연핑크색 외출용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오늘 세실과 함께였다.

본격적으로 검을 배우면서 진검이 필요해진 세실과 무기상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다이아나도 함께 가고 싶어했지만 모니카 가의 가문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오지 못했다.

“세실. 생각해둔 검이 있어?”

아리엘의 물음에 세실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연습용 검이면 된다. 나중에 정말로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지는.”

전통 있는 무가인 하이츠 가문에는 몇 개의 보검이 있었다.

세실은 늘 그 검들을 동경하며 자랐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 베릴이 물려받을 보검은 없었다.

검은 모두 오빠들의 몫이었으니까.

세실은 언젠가 그 보검들 중 하나를 물려받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엘. 오늘 함께 나와줘서 고맙다.”

“세실…….”

아리엘을 바라보는 세실의 강직한 눈동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세실은 원래 여자 아이들끼리의 우정을 믿지 않았었다.

대쪽같이 곧은 성정의 그녀는 말로 교묘히 서로를 공격하는 사교계 영애들과 맞지 않았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다 보니 같은 핏줄을 가진 여동생 베릴과도 잘 지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리엘과 다이아나를 만난 뒤로 그녀의 생각은 바뀌었다.

다이아나는 세실이 경멸했던 영애들처럼 말솜씨가 뛰어났다.

하지만 그 우아한 말로 오직 틀린 것만을 비난했다.

소문과 가십을 좋아하더라도 친한 친구들 외에는 떠벌리지 않고, 면전에서 남을 상처주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친구를 위해서라면 발벗고 나서는 의리까지 갖추고 있었다.

다이아나와는 성격이 맞지 않음에도 세실은 그런 그녀를 다른 영애들처럼 경멸할 수 없었다.

또, 아리엘은 세실에게 매우 특별했다.

세실은 자신의 신념대로 늘 강직하게 행동해왔다.

하지만 그녀는 겉과 달리 속이 여렸다.

가족들이 검을 드는 그녀를 못마땅해하거나, 영애들이 비웃을 때면 쉽게 상처를 받았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겉은 누구보다 여려보이는 아리엘의 한 마디가 그녀를 바꾸어 놓았다.

‘영애가 검을 드는 게 왜 특이하죠? 그건 특별한 거예요.’

아리엘은 겉은 솜사탕처럼 부드럽지만 내면이 단단했다.

세실은 그런 아리엘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두 친구는 세실에게 현실과 타협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오빠들이 충고라며 했던 말.

‘세실. 언제까지 그렇게 뻣뻣하게 살 거니? 너도 다른 영애들과 어울리며 사교술과 말솜씨를 늘려야지.’

‘동생아. 어머니 말씀대로 검을 포기해라. 여자 인생에는 그게 더 낫잖아.’

그들과 똑같이 그런 걸 요구하지 않는 아리엘과 다이아나에게, 세실은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나도 두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러기 위해 세실은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었다.


* * *


무기상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상점 벽에는 도끼와 검, 철퇴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가득 걸려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외팔에 갈고리를 꽂은 험상궂은 상점 주인이 그들을 반겼다.

아리엘은 최대한 어른스럽게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 영애가 쓸 연습용 검을 찾고 있네.”

“제가 도와드리지요.”

상점 주인은 뜻밖에도 친절하게 검 고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초심자에게는 이 정도가 적당하지요. 좀 더 무게를 더하시려면…….”

검을 좋아하는 세실은 완전히 넋을 잃고 설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신중해서 안심이 되었다.

잠시 뒤 세실이 미안한 듯 말했다.

“아리엘, 아무래도 좀 오래 걸릴 것 같다.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아리엘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세실은 계속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결국 아리엘은 웃으며 항복했다.

“알겠어. 그럼 다이아나 선물을 사러 가기로 한 곳에 먼저 가 있을게. 천천히 와.”

아리엘은 따로 데리고 나온 호위 기사들을 세실 옆에 붙여놓고, 헥터와 랄프만 대동한 채 가게를 나왔다.

라카트옐 저택만큼 아름답고 호화로운 곳은 바깥에 없지만 오랜만에 외출을 해서인지 걷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무기 거리를 벗어나 타박타박 걷고 있을 때였다.

“아리엘 영애.”

누군가가 아리엘의 앞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헥터와 랄프가 서로의 검을 맞대고 아리엘 앞을 번개처럼 막아섰다.

둘의 검이 부딪히며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상황을 바라보았다.

아리엘 앞에 나타난 사람이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제가 놀라게 해드린 것 같군요.”

모자 안에서 찬란한 금발이 드러났다.

아리엘은 그를 알아보았다.

“레온 영식……?”

“기억하시는군요.”

호위 기사들에게 가로막혔는데도 그는 전혀 기분 상한 눈치가 아니었다.

아리엘은 서둘러 헥터와 랄프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는 사람이에요.”

두 소드마스터는 천천히 검을 거두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리엘은 금발의 소년에게 격식을 차려 말했다.

“용서하세요. 제가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극히 드문 터라.”

“아닙니다. 갑작스레 나타난 제 잘못이지요.”

디트리히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은 미소였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발과 더해지자 성스러운 느낌마저 풍겼다.

그의 미소를 본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정말…… 왕자님 같은 사람이야.’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레온 영식은 몸이 약해서 아카데미에 가지 않은 것 아니었나?

이렇게밖에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아리엘이 그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자 디트리히는 의아한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몸이 약한 것이 걱정된다고 말하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았다.

마나 소유자이기에 몸이 약한 편인 아리엘은 그런 문제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조금 우회한 답변을 했다.

“……호위도 없이 다니시는 것 같아 퍽 염려스러워서요.”

“예? 하하하!”

아리엘의 대답에 디트리히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호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라오고 있는 모양이다.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여 이해했다는 표시를 했다.

디트리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잠시 함께 걸으실까요.”


* * *


두 사람은 약간 거리를 벌린 채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가 아리엘이 입술을 떼었다.

“그때 영식이 했던 말. 여러 번 생각났어요.”

테라스에서 만난 금발의 소년은 자신이 루시안을 이용하려 한다고 말했다.

가끔 아리엘은 그 말을 떠올리며 레온에 대한 과거의 일을 기억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에 대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리엘의 말을 들은 디트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그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여름 잎사귀 같은 녹색 눈동자가 그녀를 가득 담았다.

“저는 아리엘 영애가 궁금했습니다.”

“제가요?”

놀란 듯 튀어나온 아리엘의 물음에 디트리히가 대답했다.

“예. 놀라운 분이라고 생각했죠. 영애는 대공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요.”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내가 남편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나요?”

“…….”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디트리히가 빙긋 웃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내라면 그가 두려운 사람이라는 것쯤은 아실 테지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여름 태양볕에 아리엘의 걸음이 느려지자 디트리히가 광장 구석의 석조 벤치로 그녀를 이끌었다.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깐 그가 정중하게 손짓했다.

“앉으세요. 볕이 뜨거워 잠시 쉬셔야 합니다.”

아리엘은 잠시 망설였지만 어지러웠기에 사양하지 못했다.

앉고 보니 레이디처럼 대접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쑥스러워졌다.

‘왕자님 같은 사람이 정중하게 대해주니까 뭔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

몸이 약한 레온 영식보다 자신이 먼저 지쳤다는 것이 좀 부끄럽기도 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아리엘 영애?”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물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요.”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저를 영애라 칭하시는 건 잘못이에요. 저는 이미 결혼한걸요.”

겨우 열 살 먹은 소녀, 그것도 겉으로는 기껏해야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앳된 목소리로 하는 말이라 꼭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아리엘이 결혼했고, 대공자비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잠깐 당황한 듯하던 디트리히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실례를 범했군요. 제 속마음이 그만 밖으로 나와 버렸나 봅니다.”

“속마음이요?”

영문 모를 그의 말에 아리엘이 되묻자 그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냥하게만 보였던 그의 녹색 눈동자에 단호한 빛이 서려 있었다.

“저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걸 믿지 않거든요.”

“…….”

아리엘은 침묵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친 대공자가 첫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루시안이 아리엘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나면 믿었다.

루시안이 워낙 잔혹하고 난폭한 이미지를 쌓아둔 덕이었다.

둘은 계약 관계라서 진짜 신혼부부들처럼 굴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곁을 허락하는 것만으로 그가 반했다는 말을 광신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다 보았다는 디트리히는 여전히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리엘이 묻자 그가 망설임없이 답했다.

“루시안은 그런 종류가 아니니까요.”

루시안과 친분이 있다더니 대단히 확신할 근거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리엘은 그에 대해 길게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디트리히가 자신의 추리를 이어갔다.

“분명 무슨 거래가 있었을 겁니다. 소문은 대공께서 영애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아들과 짝지어 주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대공자와 영애 사이에 직접적인 거래가 있었겠지요.”

아리엘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알 수 있는 걸까?

그러나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다.

“믿지 않으시는 분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드려도 소용없겠죠.”

그녀의 똑 부러진 대답을 들은 디트리히가 쓰게 웃었다.

당황하지 않다니.

“……매번 저를 감탄시키시는군요.”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루시안은 제멋대로에 편하게 사는 대공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제국을 위해 큰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인지 알면서 옆에 계시는지 궁금하군요.”

아리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다들 내가 루시안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에 대해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없네요.”

단호하게 말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이번 가을 무도회에 나오시나요? 루시안이 데뷔하는 자리인데, 영식도 오시면 함께 인사할 수 있을 거예요.”

대화가 끝났다는 것을 명백히 알리는 아리엘의 말에 디트리히가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물론 저도 참석합니다. 제 데뷔날이기도 하거든요.”

이쪽도 열네 살이었구나.

말투가 어른스러워서 조금 더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아리엘은 양산을 펼치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그럼 나중에 뵈어요. 레온 영식.”

굽슬거리는 환한 금발의 미소년이 정중하게 그녀를 배웅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디트리히와 헤어진 아리엘은 곧장 세실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걸음걸음마다 복잡한 마음이 엉겨들었다.

하지만 왠지 디트리히가 그녀를 해치기 위해 한 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꼭 나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었어…….’

그가 나쁜 사람같지 않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는 뭘까?

루시안과는 어떤 관계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아리엘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가을이 돼서 루시안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루시안에게는 모든 복잡한 걸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능력이 있으니까.

물론 그 과정에 피가 낭자할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나중에 생각하자.’

아리엘은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털어버리고 세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들어섰다.


* * *


9월이 되자 사교계는 가을 무도회 시즌을 맞아 흥분에 가득 찼다.

아리엘은 그 흥분의 열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도 아침 일찍부터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났다.

어젯밤 아리엘이 부탁한 대로 깨우러 들어온 수잔이 후후 웃었다.

“어머, 아기 마님. 제가 깨워드리기 전에 일어나셨네요.”

“수잔. 몇 시예요?”

아리엘이 눈을 비비며 묻자 수잔이 윙크를 하며 대답했다.

“아직 여유가 있답니다. 얼른 세수하신다면요.”

아리엘은 후다닥 이불을 걷고 달려 나왔다.

오늘은 루시안이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아리엘은 고양이 세수를 하고, 사랑스러운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빗어 예쁘게 리본을 달았다.

그리고 수잔이 입에 넣어주는 담백한 올리브 빵을 먹으며 옷까지 챙겨입자 아래층이 시끌시끌해졌다.

“수잔! 나 먼저 내려가요!”

“아기 마님, 뛰지 마세요! 넘어지세요.”

뒤에서 수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엘은 서둘러 층계를 내려갔다.

중앙 홀까지 달려나가자, 저 멀리 현관에 사용인들과 줄지어 서 있는 노집사 알렌이 보였다.

아리엘을 본 알렌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마님.”

다른 사용인들 또한 절도있게 아리엘을 향해 인사했다.

제자리에서 인사를 받은 아리엘은 알렌의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

“알렌. 루시안은요?”

알렌이 주름진 얼굴로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늘상 이 노집사의 엄격한 모습만 봐온 다른 사용인들이 그의 미소에 놀란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리엘의 뒷편을 힐끗 본 알렌이 고개를 낮춰 말했다.

“이제 들어오시는군요.”

“……!”

때마침 그녀에게도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은 뒤를 돌아, 현관 뜰에 멈춰 서는 마차와 그 마차에서 내리는 칠흑 같은 흑발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린 루시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바람이 지나가며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지상에 강림한 인외의 존재 같은 기운도 함께 퍼져나갔다.

폭력적인 기세를 느른하게 감춘 소년은 지독하게 위압적이고 또 끔찍이 아름다웠다.

그가 눈을 돌려 아리엘이 서 있는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그가 말하는 입모양이 보였다.

“아리엘라.”

차갑던 루시안의 표정이 바뀌었다.

노골적으로 열기를 띤 눈빛.

아리엘은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루시안.”

그가 순식간에 성큼성큼 걸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아리엘은 반가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루시…….”

그런데 제대로 입을 열기도 전에,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이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꺅.”

놀란 아리엘은 짧은 비명을 내며 그의 어깨 옷자락을 붙잡았다.

루시안이 쿡쿡거리며 웃는 진동이 느껴졌다.

“꼬맹이는 여전히 꼬맹이군.”

명백하게 놀리는 건데도 지금은 상관없었다.

아리엘은 그에게 안긴 채 얼른 루시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와.

분명히 뭐라고 할 말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 다 까먹어 버렸다. 가히 파괴적인 미모였다.

아리엘이 말없이 그를 보며 헤헤 웃자 루시안이 별안간 얼굴을 찌푸렸다.

요요하게 미간을 좁힌 그가 명령했다.

“보고 싶었다고 말해.”

“네?”

“얼른.”

아리엘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명령에 따랐다.

“보, 보고 싶었어. 요?”

그녀의 말을 들은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가 아리엘의 뺨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그래. 이제 좀 균형이 맞는군.”

두 작은 주인을 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루시안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젓자, 사용인들이 우수수 뒤로 물러났다.

겉옷을 받아든 알렌이 그에게서 넥타이까지 받아들려는 듯 다가왔다.

루시안은 자연스럽게 목을 옆으로 틀어 타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알렌에게 내밀려다가…….

“아.”

그가 자신에게 안겨있는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루시안의 눈이 찰나 악랄하게 빛났다.

“이제는 맬 줄 아나?”

그가 풀어낸 넥타이를 아리엘 눈앞에 드리웠다.

깃털 장난감으로 새끼 고양이를 놀아주는 듯한 행동이었다.

“윽…….”

루시안의 넥타이를 못 매서 쩔쩔맸던 기억이 떠오른 아리엘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아리엘의 반응을 본 그가 픽 웃고는 손을 거두어 알렌에게 넥타이를 맡겼다.

그리고 분홍빛으로 물든 아리엘의 뺨을 쿡 찌르며 말했다.

“매는 건 상관없어. 풀 줄만 알면 되지.”

“루시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아리엘의 이마에 다시 키스한 그가 그녀를 내려주었다.

숨쉴 틈도 없이, 협박하듯 속삭인다.

“내 걸음을 못 따라오면 다시 들고 갈 거야.”

그 순간 아리엘은 진심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제가 다 크면, 제발 루시안보다 다리가 길어지게 해주세요.’


* * *


루시안이 정식으로 돌아온 이유는 가을 데뷔 무도회 때문이었다.

루시안 뿐 아니라 요하네스 아카데미에 다니는 모든 귀족, 황족 남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탔다.

가을 무도회는 그들이 합법적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시즌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시기에 결혼할 상대를 찾고, 약혼을 하는 일이 많았다.

어찌 보면 봄보다 더욱 커플이 많이 탄생하는 때였다.

심지어 황궁 무도회는 귀족 모두에게 초대장이 가기 때문에 낮은 가문의 귀족들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럴듯한 작위나 재산이 없는 하위 귀족 가문의 영애나 영식은 최선을 다해 꾸미고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

반면 가문끼리의 정략결혼이 약속된 영애, 영식들은 자기들끼리 파트너를 이루어 서로를 탐색했다.

가을 무도회는 마치 사교계의 혼인 전쟁터와 같았다.

루시안의 데뷔 준비는 가문 차원에서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데뷔 무도회까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거의 미리 준비해 두었고, 루시안은 결정만 하면 되었다.

“대공자님, 이것 좀 결정을!”

“작은 주인님 이것도 결정을……!”

“부디 이번엔 태우거나 부수지 마시고…….”

책임을 맡은 재무관 달튼과 총괄 집사 알렌이 루시안에게 몰려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를 귀찮게 하는 사이, 아리엘도 나름 바빠졌다.

데뷔는 루시안이 하지만 아리엘도 아내로서 함께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담 헬렌의 의상실에서는 아리엘의 데뷔 때만큼 공들인 드레스를 몇 벌이나 보내왔다.

모두 예쁜 드레스라 고르기가 힘들었지만, 루시안의 예복 겉 체인에 고정된 보석이 청보석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아리엘은 하늘빛의 물색 드레스로 결정했다.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퍼지면서도 부드럽게 물결치고 팔과 상체부분에 얇은 시폰으로 청순한 러플이 달린 드레스였다.

마담 헬렌이 직접 다이아몬드로 수놓은 은은한 나비 모양 보석 자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원래부터 이걸로 고르셨으면 했어요, 전.”

“맞아요. 다 예쁘지만 이게 제일 아기 마님께 잘 어울렸어요!”

옆에서 옷 시중을 들어주던 하녀들이 수선을 떨며 좋아했다.

아리엘은 고른 드레스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초콜릿색 리본이 달린 우윳빛의 고급스러운 포장 상자에 다시 넣어서 드레스룸으로 가져갔다.

가을 시즌 중에 무도회에 갈 일이 더 생긴다면 그 때 입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뭐,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아리엘은 꽤 피곤한 사교계 행사를 생각하고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고개를 젓지?”

“힉!”

아리엘은 갑자기 나타난 루시안 때문에 깜짝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또 창문으로 넘어 들어온 건지, 그는 창가에 서 있었다.

“히끅. 루시안, 놀랐…… 히끅, 잖아요.”

그가 살벌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남편을 보고 놀라다니. 혼나야겠는데.”

그렇게 나타나면 아무리 남편이라도 놀라거든요.

아리엘은 대들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근데, 달튼은 어쩌고요?”

“성가셔서 치워 버렸어.”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어, 어디로요?”

“멀리.”

짧게 대답한 그가 아리엘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리 와.”

아리엘은 고분고분 그에게 다가갔다.

루시안에게서 싸한 잉크 냄새가 풍겼다.

결재 서류에 어지간히도 묻혀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리엘이 가까이 가자 루시안이 창틀에 기대며 물었다.

“드레스. 골랐나?”

“아. 골랐어요. 보실래요?”

“됐어.”

곧장 가서 드레스 장을 열려는 걸 루시안이 막았다.

손목을 붙잡힌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시안이 삐딱하게 웃고는 품 속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자.”

“이게 뭐예요?”

“열어 봐.”

아리엘은 그의 말에 따라 상자를 열었다.

또각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났다.

“……루시안?”

아리엘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오만하게 속눈썹을 기울이며 말했다.

“네 거다.”

그가 건넨 상자 안에 든 것은 목걸이였다.

가느다란 나비 모양 참 아래에 물방울 모양 다이아몬드가 달린 목걸이.

심장이 멎을 만큼 예뻤다.

방금 그녀가 고른 물색 드레스에 꼭 맞을 것 같았다.

어, 근데 내가 이 드레스를 고른 줄은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것보다…….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루시안. 이거…… 왜 주는 거예요?”

목걸이가 홀릴만큼 예쁜 것과는 상관없이, 그가 그녀에게 따로 목걸이를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대공자비 위신 때문이겠지만.’

아리엘은 이미 안주인으로서 보물고 열쇠-금으로 용무늬가 아로새겨진-도 받았고, 마티어스가 헬렌에게 주문한 장신구들도 갖고 있었다.

필요한 건 모두 있다는 말이다.

이번만 해도 헬렌이 그녀를 위해 디자인한 머리장식 세트가 이미 와 있는 상황이었다.

대공자비의 이름에 모자람이 없는, 아주 예쁘고 비싼 것들이.

그러니 아리엘로서는 루시안이 이러는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질문을 들은 루시안이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그의 주변 기류가 확 바뀌었다.

“뭐라고?”

아리엘은 조금 무서워졌지만, 용기를 짜내 다시 물었다.

“줄 이유가 없잖…… 아요. 이유가 뭐예요?”

지난번 무도회에서 향기 마법이 걸린 붉은 튤립을 가득 받았을 때, 아리엘은 처음으로 이 생각을 했었다.

‘왜?’

라카트옐 남자들이 하는 것은 뭐든 정도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그 날 루시안이 보낸 튤립은 대공가 위신을 세우는 것 이상이었다.

보란 듯이 아리엘의 머리색과 같은 붉은 꽃에, 값비싼 마법을 걸어서, 엄청난 양을 보내왔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가장 아름다운 루시안 본인이 직접 왔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걸까?’

아리엘은 그녀가 대공자비로서 누리는 것들을 대부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사용인들이 주는 것들이나 마티어스의 선물들을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루시안과 아리엘 사이의 거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뭘 주든 그건 '대공자비'에게 주는 것이니 괜찮았다.

납득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물건은 루시안의 위신과 관련이 있으니 오히려 신경을 썼다.

그래도 하나하나가 모두 고맙고 기뻤고, 매일 충만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루시안이 직접 주는 건 달랐다.

그는 그들 둘 사이의 계약 결혼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우리는 계약 상대일 뿐인데.’

아리엘은 대공자비로서 받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루시안에게 받은 것은 이미 넘치도록 많다.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도록 결혼해주는 것.

성인이 될 때까지 이 집에서 보호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리엘에게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더구나 이제 아리엘에게는 필요한 물건이 모두 있었다.

계약에 나와 있는 대로 루시안은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아내로서도, 그의 마법사로서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인데 말이다.

그러니 루시안에게 따로 개인적인 선물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대공자비로서 살면서 받은 물건들은 나중에 이혼할 때 다 놓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시안에게 따로 선물을 받는다면 이곳을 떠날 때 놓고 가야할지, 가지고 가야할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유가 없다면…… 받고 싶지 않아요.”

오싹해질 만큼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위협하듯, 무척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받아. 명령이야.”

……명령이구나.

선물이 아니라 명령이라면 받아야겠지.

아리엘은 군말 없이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루시안이 나지막하게 실소했다.

“하.”

그가 손을 뻗어 아리엘의 하얗고 말랑한 뺨을 세게 잡았다.

“아야. 르히안!”

아파서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부르자, 루시안이 비뚜름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지독히도 어두워 보였다.

“내 데뷔 때 내가 준 목걸이를 해. 이것도 명령이야.”

“……네.”

아리엘은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가을 데뷔 무도회 날이 되었다.

아리엘은 미리 골라놓은 물색 드레스를 입고, 루시안이 준 물방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했다.

다이아몬드 위에서 가냘픈 나비 모양 참이 날갯짓을 하듯 흔들렸다.

“…….”

가만히 목걸이를 만져본 아리엘은 마지막으로 어깨 뒤로 늘어지는 베일을 걸쳤다.

드레스처럼 은은한 물색빛을 띤, 속이 비치는 소재의 베일은 자잘한 보석을 흩뿌린 듯 반짝거렸다.

베일의 매무새를 만져준 마담 헬렌이 목걸이에 대한 칭찬을 건넸다.

“드레스와 이만큼 잘 어울리는 목걸이는 없을 거예요. 정말 아름다운걸요.”

아리엘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헬렌 말대로 루시안이 선물한 목걸이는 무척 예뻤다.

목걸이 케이스를 본 헬렌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며 깜짝 놀랐었다.

케이스 바닥에 작게 들어간 서명이 그것을 입증했다.

‘당연히 비쌌겠지……?’

겁이 나서 헬렌에게 가격대를 물어보진 못했지만 분명 엄청나게 비쌌을 것이다.

설마 내가 평생 벌어도 못 갚을 돈인 건…….

아리엘은 조그만 미간을 심각하게 찌푸렸다.

루시안이 명령이라고 해서 받긴 했는데 목걸이를 볼 때마다 기분이 오묘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헬렌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공자님.”

“……!”

아리엘은 그녀가 보고 있는 거울에 비친 루시안의 형상을 발견했다.

세상에. 또 언제 나타난 건가요, 루시안?

헬렌이 빠르게 인사한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헬렌이 가버리자 아리엘의 방 안에는 그녀와 루시안만 남았다.

루시안이 뚜벅뚜벅 걸어와 아리엘 앞에 섰다.

루시안은 완전히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늘씬한 몸을 드러내는 흑색 예복에, 그의 눈동자를 닮은 심연 같은 사파이어가 박힌 타이 체인 장식.

그가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기자 소매에 달린 커프스 장식이 눈에 띄었다.

블랙 오닉스라고도 부르는 최상급의 흑마노 단추였다.

사각형으로 컷팅된 모양은 심플했지만, 매우 오래된 에이션트 급 원석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마법의 힘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어떤 귀중한 장식을 갖다 대어도 루시안 자체만큼 심오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흰 피부와 대비되는 새카만 머리카락과 속눈썹은 날카롭게 빛나는 흑요석을 연상시켰고, 악마적인 아름다움을 띤 붉은 입술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외모로 빚어진 생명체였다.

아리엘은 새삼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진짜 잘생겼다.’

루시안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턱 아래를 들어 올렸다.

그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말했다.

“숨.”

“……네?”

“숨 쉬어.”

그제야 아리엘은 자신이 숨 쉬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크게 숨을 내쉬자 루시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턱에서 손을 뗐다.

“날 기다리게 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했잖아.”

그가 낮게 위협했다.

“내가 직접 찾으러 올 테니까.”

말을 마친 루시안은 아리엘을 끌어당겼다.

아리엘은 아직도 얼떨떨한 정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솜털처럼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든 루시안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좀 빨리 내려가 볼까.”

그리고 아리엘은 머지않아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꺄악!”

루시안이 그녀를 안은 채 창문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으므로.


* * *


가을 무도회는 봄 때보다 훨씬 더 사람이 많았다.

가장 큰 황궁 홀에 발 디딜 틈 없이 귀족들이 가득 들어찼다.

황궁의 입구마다 용 모양의 화려한 검은 석상이 머릿돌처럼 놓여있었다.

내부 장식도 아주 화려했다.

올리브 가지 모양의 은촛대가 곳곳에서 환하게 불을 밝혀서 저녁인데도 실내는 대낮같이 환했다.

설탕 공예로 만든 아름다운 장식들은 보기만 해도 감탄을 자아냈다.

무도회가 시작하기 전 귀족 남녀들은 홀에 모여서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며 웃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대공자 루시안이 들어서자, 가득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양옆으로 쫙 갈라서서 그와 아리엘에게 길을 터 주었다.

확연히 소리가 줄어든 웅성거림만으로도 귀족들이 라카트옐 대공가에 가진 두려움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궁 시종이 겁먹은 목소리로 대공자 부부의 이름을 외쳤다.

“루,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 대공자님과 아리엘라 라카트옐 대공자비님 입장하십니다!”

아마도 시종은 루시안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인간들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아리엘은 힐끔 루시안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시종을 벌레만도 여기지 않는 듯, 무관심한 태도였다.

그녀는 휴우, 크게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대공자 부부 입장이 끝나자 황제와 황후가 들어섰다.

“제국에 축복을.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귀족들이 황제 부부에게 예를 취했다.

황제는 너그럽게 웃으며 무도회 홀 안을 둘러보았다.

평소의 사교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십대의 소년들이 회장에 가득한 것을 본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다들 모였군. 오늘의 주인공들이 있어 무도회가 더욱 빛나는구만.”

“정말 그렇네요, 폐하.”

황제가 짧게 시선으로 라카트옐 대공자를 찾았다.

그는 루시안이 참석했다는 것에 깊이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난 번 둘만 남았을 때 무슨 짓을 당했는지, 황제는 루시안에게 친한 척도 하지 않고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황태자뿐이었다.

귀족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황후가 살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황태자 디트리히도 올해로 14세가 되었소. 이번 무도회에서 그를 선보이려 하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 아들 디트리히는 황가의 독자로서 역대 황손들 중 가장 성력을 많이 가지고 있소. 나와 황후는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지. 자, 긴 말은 필요없고.”

말 끝머리에 박수를 딱 친 황제가 시종에게 눈짓했다.

황궁 시종이 목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외쳤다.

“황태자,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 전하 들어오십니다!”

휘장 뒤에서 눈부신 금발을 가진 소년이 걸어나왔다.

하얀 예복을 입고, 녹색의 에메랄드 보석을 단 미소년이었다.

굽슬대는 그의 금발이 회장 안의 등불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마찬가지로 색이 옅고 긴 속눈썹과, 성력을 담고있는 듯한 녹색의 눈동자도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황태자를 처음 보는 영애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공자 루시안의 천상계 미모가 그녀들의 호흡을 빼앗아가고 시공간을 얼려버린 듯 했다면, 황태자 디트리히의 외모에는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미소년인데도 루시안만큼의 위압감을 주지 않는 점도 한몫했다.

등장한 디트리히가 귀족들 앞에서 우아하게 인사했다.

“나는 제국의 아들, 황태자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이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그런데 그중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는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당연히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루시안이었고, 남은 한 사람은…….

말도 안 돼.

‘저 사람은…… 레온 영식이잖아?’

그녀가 알던 '레온 영식'의 정체가 황태자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아리엘이었다.

아리엘이 놀라자 루시안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그러지?”

“저 사람…… 아니 저분이 황태자 전하예요?”

“그래.”

“하지만 분명히 레온 영식이라고…….”

당황스러워 하는 아리엘에게 그가 말했다.

“레온은 저것의 미들네임 중 하나야.”

“황태자 전하라는 말은 안 했는데…….”

“널 속였나보군.”

루시안의 목소리가 조금 더 은밀하고 난폭해졌다.

“감히 거짓말을 했으니, 죽여줄까?”

아리엘은 조그만 이마를 짚었다.

어휴. 라카트옐 남자들 생각이란.

어떻게 이렇게 항상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걸까?

무엇보다 루시안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아무 짓도 하지 말아요, 루시안.”

열심히 당부한 아리엘은 다시 황태자 쪽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아도 레온 영식이 황태자였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왜 말해주지 않으신 걸까?’

무도회는 이제 시작하는 참이었다.

그리고 가을 무도회의 오프닝 댄스는 당연히 가장 신분 높은 남자인 황태자의 몫이었다.

“황태자. 첫 춤으로 무도회를 열거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디트리히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발을 떼었다.

삼삼오오 모인 미혼의 영애들은 모두 기대하는 얼굴로 몸을 떨었다.

다들 황태자에게 선택받고 싶어 안달이 난 듯 했다.

‘황태자 전하와 춤을 추는 영애가 오늘의 주인공이 되겠지?’

모두가 이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황태자 디트리히는 다정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오늘 등장한 모습을 보니 용모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가 남아있었다.

황태자의 첫 춤 상대가 된다는 건 대단한 의미가 있다.

장차 이 나라의 황태자비, 나아가 황후가 될 가능성까지 지녔다는 것.

그 높은 자리에 매혹되지 않을 영애는 없었다.

“역시 그래도 모니카 공녀를 선택하시겠지요?”

“제 생각도 그래요. 공녀님 말고 누가 있겠어요?”

귀부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다이아나 모니카가 유력한 첫 춤 상대로 여겨졌다.

개국공신인 세 공작가의 딸 중 황태자와 나이가 맞는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서 있는 다이아나는 전혀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때, 황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미혼의 여성분께 제 첫 춤 상대를 청하면 혹여나 어른들이 황태자비를 들이실 때 눈여겨보실까 두렵습니다.”

그가 호소력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라도 완전히 녹여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이미 결혼하신 분들 중에 청해도 되겠습니까?”

황태자의 물음에 사교계가 조용히 웅성거렸다.

기대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드문 건 아니었다.

보통 황실이 아직 황태자비를 들일 생각이 없는 경우, 쓸데없는 염문을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 하곤 했다.

황태자에게 누이나 사촌 누이가 있다면 그들과 춤을 춘다.

누이가 없다면 황실 친척 여자들 중 한 명을 춤 상대로 고른다.

이 역할을 해줄 친척마저 없다면 황실과 가까운 귀족 가문의 부인이 대신하기도 했다.

디트리히의 말을 들은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황후도 그리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원. 네 말솜씨는 못 당하겠구나. 좋을 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디트리히가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귀족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혼의 영애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자기들 치맛자락만 쥐어짜고 있었고, 결혼한 부인들은 황태자가 어느 가문에게 영광을 베풀까 궁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깊이 고민하는 듯 그들을 둘러보던 디트리히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멎었다.

바로 루시안과 아리엘이 서 있는 곳이었다.

살짝 미소지은 디트리히가 목소리를 높였다.

“라카트옐 대공가와 황실은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친척이지요. 건국 때 황실이 라카트옐 가에 딸을 시집보낸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가 성큼성큼 걸어 대공자 부부 앞으로 다가왔다.

아리엘 앞에 멈춰 선 황태자는 고상한 동작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선연한 녹색 눈동자가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라카트옐 대공자비께 제 첫 춤을 청하겠습니다.”

네?

아리엘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상황 파악이 한 번에 되질 않았다.

그 '레온 영식'이 사실은 황태자 전하였다는 것도 아직 얼떨떨한데 갑자기 오프닝 댄스를 신청하다니?

그때 루시안이 그녀와 디트리히 사이로 끼어들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안 되겠는데.”


* * *


디트리히와 루시안의 시선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어깨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소유권을 강조하듯 그녀의 정수리에 슬쩍 입을 맞췄다.

“아리엘라는 내 아내야. 나와만 춤출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어린 영애들에게서 주책맞은 꺄아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변 여자 귀족들은 ‘어머.’ 하며 얼굴을 붉혔다.

“어린 신랑이 질투를 하는군요.”

“두 분 사이가 좋다더니 정말이었나봐요.”

하지만 루시안 가까이에 있는 아리엘은 지금 상황이 그렇게 낭만적인 게 아니란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루시안에게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불쾌의 기운은 상당히 어둡고 위험했다.

아까 디트리히를 죽이겠다고 한 말이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루시안. 여기서 그러면 대공가와 황실이 모두 곤란해지잖아요.”

“상관없어.”

그가 무감하게 내뱉었다.

“여기 있는 것들을 다 죽여버리면 되니까.”

잠깐만. 여러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을 너무 쉽게 결정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 루시안에게서 섬뜩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정말로 인간 목숨을 벌레 목숨처럼 여기는 듯한 기세였다.

‘이대로는 안 돼.’

아리엘은 라카트옐 가의 안주인인 자기 위치를 기억해냈다.

이 상황을 대공가가 난감해지지 않게 해결하고 싶었다.

그녀는 조그만 양손을 뻗어서 루시안의 얼굴을 잡았다.

“루시안.”

루시안이 순식간에 살기를 낮게 가라앉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앳된 목소리로 삐약삐약 설명했다.

“난 루시안 아내예요. 황태자 전하랑 춤을 춰도 루시안의 아내라고요.”

그가 오만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내 아내인 건 당연한 거고, 저것이랑 춤추는 게 싫은 건데.”

으…… 말이 전혀 안 통하잖아.

어떡하지?

아리엘은 고민하다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 보는 수밖에.

그녀는 루시안의 얼굴을 잡은 채로 까치발을 했다.

그리고 예고 없이…….

쪽.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는지 루시안이 움찔 놀라며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리엘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방긋 미소지었다.

“대공자께서 기꺼이 허락하시겠다네요.”

아리엘은 혹시 루시안한테 붙잡힐까 봐 얼른 디트리히가 내민 손을 잡았다.

나중에 루시안한테 엄청 혼날 것이 분명하지만, 일단은 라카트옐 가의 명예와 안위를 지키는 게 중요했다.

“…….”

아리엘과 디트리히가 오프닝 댄스를 위해 홀 중앙으로 나간 뒤.

남겨진 루시안은 조그만 입술이 닿았던 곳을 느리게 엄지로 쓸었다.

그에게서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당했군.”


* * *


아리엘은 온 사교계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 것을 느끼며 디트리히와 마주 보고 섰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고, 디트리히가 정중하게 춤을 리드했다.

그의 외양과 어울리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동작들이었다.

아리엘은 라카트옐 가의 명예를 걸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하나둘셋 박자를 셌다.

박자를 세는 건 춤동작뿐 아니라, 생각 정리에도 꽤 도움이 되었다.

춤이 중반쯤 왔을 때, 디트리히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저를 봐주지 않으시는군요.”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피하고 있던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녀는 또박하게 대꾸했다.

“레온 영식이 황태자 전하이셨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속여서 실망하셨습니까?”

디트리히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리엘은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되물었다.

“제가 실망할 이유가 있나요?”

“…….”

그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정중하게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황태자라는 것을 알면 저를 경계하실까 봐 숨겼습니다.”

“…….”

아리엘은 황제와 싸늘하게 거리를 두던 마티어스의 태도를 떠올렸다.

황가와 라카트옐 가는 황가 쪽의 일방적인 관심만 있는 관계인 듯했다.

황태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속인 게 용납되는 건 아니지만.

아리엘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넘겨 짚으셨네요. 저는 처음부터 루시안 때문에 전하와 이야기를 나눈걸요. 황태자 전하시라고 밝히셨어도 루시안 이야기라면 기꺼이 대화를 나눴을 거예요.”

디트리히가 유연하게 받아쳤다.

“아마 여태 대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요.”

읏. 아리엘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디트리히의 말이 옳다.

그녀는 대공저 사람들 말고 루시안에 대해 아는 사람을 처음 만나서 놀랐고 반가웠다.

그래서 경계를 늦추고 그와 말을 섞었다.

‘지난번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분은 정말 머리가 좋은 것 같아. 추론도 잘하고.’

섣불리 약점을 보였다가는 쉽게 간파당할 것 같다.

‘과거에 기억 나는 게 없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리엘은 마음속에서 황태자를 '신경 쓸 필요 없는 존재'에서 '요주의 인물'로 바꾸었다.

디트리히가 생각에 잠긴 아리엘의 손을 당겨 시선을 끌었다.

“지난번에 제가 한 말 기억하십니까? 대공자와 영애 사이를 믿지 않는다고 했었죠.”

“……그러셨어요.”

“그 말을 다르게도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그가 눈꼬리를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여러 소녀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할 것 같은 미소였다.

“저는 아리엘 영애께 관심이 있습니다.”

너무 놀라서 얼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네? 그게 무슨…….”

그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막았다.

“어떻게 해석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라카트옐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소녀가 궁금한 건지, 아니면 단지 영애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저조차도 잘 모르겠으니까요.”

춤이 끝나갔다.

디트리히가 물러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얼떨떨한 상태였지만 아리엘도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며 인사했다.

인사를 마친 그가 빙긋 웃었다.

“제 첫 춤의 상대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가을 무도회의 오프닝 댄스가 막을 내렸다.


* * *


디트리히와의 춤이 끝나자마자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낚아채였다.

“앗. 루시안.”

“이리 와.”

그녀를 끌어당긴 루시안이 디트리히를 향해 꺼지라는 듯 짧게 고압적인 눈짓을 했다.

두 소년이 가까이에 나란히 서 있으니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아마 이런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선과 악, 천사와 악마, 빛과 어둠, 낮과 밤.

디트리히는 더 도발하지 않고 정중하게 물러났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사라진 뒤, 아리엘은 곧장 루시안과 두 번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의를 차려 아리엘과 멀찍이 거리를 유지했던 디트리히와 달리 루시안은 그녀를 자신에게 바짝 붙여놓았다.

춤을 추며 루시안이 아리엘의 귓가에 위협하는 어조로 속삭였다.

“날 기만하고 갈 줄은 몰랐는데.”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겁을 주려는 거면 아주 성공적인 것 같다.

아리엘은 살그머니 눈치를 보며 어떻게 하면 덜 혼날까를 궁리했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작고 말랑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아까의 돌발 입맞춤을 떠오르게 하려는 것 같았다.

“네가 입맞춤 안 했다면 그것을 죽였을 거야.”

저기, 제가 지금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요……?

아리엘은 오늘 제국의 황태자가 자신 때문에 죽을 뻔하고, 자신 덕에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조그만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 하루는 못 떨어질 줄 알아.”

루시안이 벌을 주려는 듯 아리엘을 자기 품에 가둬놓았다.

키 차이가 하도 심해서 거의 그의 명치쯤에 고개를 묻고 있는 셈이었다.

‘하는 수 없지…….’

아리엘은 체념하고 그의 몸에 머리를 기댔다.

루시안의 옷에서 좋은 냄새가 풍겼다.

그의 체취였다.

서늘하고 박하처럼 싸한 느낌을 주는 향기지만 끝은 묘하게 달콤한 느낌.

‘루시안은 어쩜 향기도 이렇게 좋을까?’

신이 불공평하게 그에게만 좋은 것을 몰아 준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있으면서도 균형이 망가지지 않는 늘씬한 몸.

온갖 조화가 완벽하게 자리한 얼굴.

보통의 인간보다 확연히 존재감이 강한 아우라.

특유의 체취까지 사람을 매혹시키는 면이 있다.

심지어 뇌쇄적인 느낌을 주는 작은 눈물점의 위치도 완벽했다.

그의 난폭함이나 오만함마저도 압도적인 우월함을 강조해주는 느낌밖에는 주지 않았다.

‘정말 불공평하다니까.’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루시안이 갑자기 혼잣말을 해서 아리엘은 현실로 돌아왔다.

“널 데뷔시키는 게 아니었어.”

루시안이 희고 긴 손을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 사이에 얽으며 향기를 들이마시려는 듯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자꾸 벌레가 꼬이잖아.”

분명 인간을 비유한 말일 것이다.

근데 진짜 벌레처럼 여기는 것 같이 들리는 건 내 착각이겠지?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읏, 간지럽다고요.”

루시안이 어루만지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을 간지럽혀서 아리엘은 몸을 움츠렸다.

그가 하는 건 보통 새끼고양이를 가지고 노는 듯한 스킨십이지만, 가만히 있다보면 왠지 먹잇감이 된 기분이다.

그것도 아주 달콤한 먹잇감이.

다행히도 곧 춤곡이 끝났다.

두 곡을 연달아 춘 아리엘은 녹초가 되어 자리로 돌아왔다.

‘지쳤어…….’

하지만 그녀의 사정과는 달리 아리엘에게는 부러움의 시선이 쏟아졌다.

오늘의 주인공인 두 소년-대공자와 황태자- 모두를 차지한 데 대한 부러움이었다.

특히 황태자와 대공자 사이의 미묘하게 적대감이 섞인 기류는 모두의 흥미를 끌었다.

아리엘과 함께 자리로 돌아온 루시안은 즉시 기세를 내보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와. 마티어스님은 그래도 말로 거절해서 돌려보냈는데…….’

마티어스에 비해 루시안은 한 점 자비도 없이 냉혹했다.

그가 폭력적인 기세를 흩뿌리자 주위에 보이지 않는 원이 그려진 듯 사람들이 그 밖으로 바퀴벌레처럼 물러났다.

루시안의 기세는 보통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온몸이 짜부라지고 폐가 터져버릴 것 같은 압박감이 쏟아지는 걸 어떻게 견디겠는가.

아리엘은 그 기세가 그녀에게만은 상당히 적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한편, 루시안의 두 번째 춤을 노리고 줄지어 서 있던 영애들은 시도를 해보기도 전에 실패하고 울상을 지었다.

“어떡해. 대공자님 눈에 띄려고 비싼 드레스도 맞췄는데.”

“춤은 이제 더는 안 추시려나 봐.”

“난 일부러 다른 춤 상대도 다 거절하고 왔는데!”

그리고 대공자가 춤을 전혀 추지 않는 덕에 그 다음 타깃이 된 황태자는 쉴 새 없이 춤 신청을 받았다.

바빠 보이는 그를 보며, 아리엘은 루시안이 혹여 디트리히에게 작게나마 응징을 하고자 춤을 추지 않는 건지 궁금해졌다.

물론 루시안은 누군가를 엿 먹인다면 크게 먹이지 작게 먹일 사람은 아니었지만.

“루시안, 그래도…….”

황궁 무도회에서 이런 살벌한 기세는 거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걱정된 아리엘이 살며시 입을 떼자 루시안이 조각 같은 턱선을 치켜들며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인간들 귀찮아.”

하지만…… 아리엘은 멀리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다이아나와 세실을 보며 시무룩해졌다.

내 친구들도 못 오고 있는걸요.

그러다 아리엘은 깨달았다.

그래! 루시안 곁으로 사람들이 못 오면 내가 친구들한테 가면 되잖아.

그녀가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가려하자 루시안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삐딱하게 아리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하루는 못 떨어진다고 했지.”

“잠깐만 갔다 올…….”

“싫어.”

빨려들 것 같은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까이 들이대며 루시안이 명령했다.

“내 옆에 있어.”

아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아리엘은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음, 아주 조금은……

논리 따위는 모두 건너뛰게 만드는 루시안의 얼굴 때문이기도 했다.

“……알았어요.”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나중에 봐.’

그녀가 친구들에게 못 갈 것 같다는 손짓을 하자, 다이아나가 음흉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세실은 얼굴을 붉히며 괜히 헛기침을 하는 것 같았다.

친구들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몰라도 아리엘은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휴…….’

이제 무도회 시작인데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이었다.


* * *


무도회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회장에는 틈틈이 샴페인이 돌았다.

제국에서는 성년이 아니어도 파티에서만큼은 술을 입에 댈 수 있었다.

파티에 나올 수 있는 데뷔 나이가 14세니까, 열네 살부터는 술을 마실 수 있는 셈이다.

물론 나이가 어린 데도 결혼을 해서 데뷔한 아리엘 같은 경우는 예외였다.

아리엘은 루시안과 그녀 몫의 샴페인을 받았지만, 그냥 들고만 있었다.

그런데도 공기 중에 알콜향이 떠돌자 약간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그녀는 루시안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

“루시안. 나 바람 쐬고 싶어요.”

잠깐 바깥바람이라도 쐬어야 이 저녁 시간을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찮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루시안이 몸을 일으켜 주었다.

아리엘과 루시안은 맨 끝 테라스의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루시안 때문에라도 주위에 아무도 오지 못할 건 확실했다.

“하아.”

바깥 공기를 깊이 들이쉬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들뜬 아리엘은 난간으로 달려가 매달렸다.

가을 풀벌레 우는 소리가 어두운 테라스를 가득 채웠다.

아리엘이 마나로 살짝 빛의 구를 만들자 그것을 본 반딧불이가 은은한 초록빛을 내며 모여들었다.

원소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후로 새나 동물들은 아리엘을 보통 인간들을 피하듯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와서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아리엘이 반딧불과 장난치는 것을 지켜보던 루시안이 툭 말을 던졌다.

“너. 벌레들과 너무 잘 놀아주는 것 같은데.”

“……?”

이번엔 좀 헷갈린다.

저 '벌레'는 반딧불을 말하는 걸까, 아리엘의 친구들을 말하는 걸까?

아리엘은 약간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벌레들은 저를 4층 창문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니까요.”

아까 집에서의 일을 언급하자 루시안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떻게 저렇게 웃는 소리까지 예쁜 걸까?

변성기의 소년이라면 목소리가 좀 안 예쁠 법도 한데.

“내가 꼬맹이 널, 그런 식으로 죽이지 않을 거란 건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알아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라고요…….”

아리엘이 입속말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아까 루시안이 자신을 안은 채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을 때 아리엘은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물론 감은 눈을 떴을 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땅 위에 있었지만.

그녀는 놀란 나머지 루시안이 대체 어떻게 다치지 않고 뛰어내린 건지 보지도 못했다.

‘아마 봤더라도 어떻게 한 건지 이해 못했을 거야.’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생각하던 아리엘은 살짝 추위를 느끼고 에취- 재채기를 했다.

모여들었던 반딧불이가 우수수 달아났다.

루시안이 낮게 혀를 찼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약해 빠질 수 있는 거야?”

그가 자신이 입고 있던 흑색의 예복 겉옷을 벗어서 건넸다.

제국의 가을은 낮에는 따뜻하지만, 밤엔 좀 쌀쌀하다.

게다가 여자들의 무도회 드레스는 보통 얇은 편이었다.

팔과 가슴 쪽에 시폰 장식이 달린 아리엘의 물빛 드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밤에 바깥에 나와 있기엔 옷이 얇았다.

아리엘은 짧게 코를 훌쩍이며 루시안의 옷에 팔을 꿰었다.

조그만 아리엘에게 그의 옷은 너무 커서 소매 길이가 한참 남았다.

손을 소매 밖으로 뺄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루시안이 입었을 땐 분명 상의였는데, 아리엘에겐 거의 원피스 길이라서 좀 쑥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체온이 묻은 겉옷 안쪽은 온도가 높았다.

“따뜻하다…….”

‘그리고 루시안 냄새가 나.’

박하향 같은 싸한 체취를 맡자 마음이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좋아. 아리엘은 헐렁한 루시안의 옷을 여며 입고 헤헤 웃었다.

몸도 따뜻해졌겠다 가만히 루시안을 구경하던 그녀는 문득 물었다.

“근데요, 루시안. 내가 황태자 전하랑 무슨 얘기 나눴는지 안 물어봐요?”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만하게 대꾸했다.

“물어볼 필요 없어.”

“왜요?”

“그 자식이 네게 염병할, 소곤거린 건 다 들었으니까.”

으응?

“어, 어떻게요?”

분명 대화가 들릴만한 거리는 아니었는데……?

루시안이 비뚜름하게 시선을 내리며 당연한 얘기라는 듯 대답했다.

“난 라카트옐이야.”

아리엘은 조금 입을 벌렸다.

물론 그 한마디로 다 설명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루시안은 정말 대단하네.

‘소드마스터라서 그런가?’

하지만 아리엘의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닐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난간에 등을 폭 기대며 물었다.

“루시안. 이번에는 얼마 동안 있다가 돌아가요?”

“한 달.”

“우와, 길다…….”

말만 신혼이지 아리엘과 루시안은 한 달도 붙어있어 본 적이 없었다.

결혼하고 겨우 하루, 아리엘이 죽을 만큼 아팠을 때 고작 2주 같이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한 달은 엄청나게 길고 특별한 일이 분명했다.

‘물론 우리는 계약 관계니까, 신혼이라는 말이 꼭 맞는 건 아니겠지만…….’

그때, 루시안이 그녀에게 슥 다가왔다.

다가온 그가 그녀를 가두듯 아리엘이 기대 있는 난간의 양옆을 천천히 짚었다.

“왜. 내가 오래 있는 게 싫은가?”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편이 집에 머무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안 싫어요.”

“그럼?”

아리엘은 머뭇거렸다.

마음속에 드는 기분은 확실한데 그걸 말하려니까 어쩐지 부끄러워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

루시안이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잡아먹힐 것 같은 오싹함과 두근거림이 동시에 아리엘에게 찾아왔다.

한동안 그녀를 보던 그가 억누른 신음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끝이 아리엘의 목걸이에 달린 가냘픈 나비 모양 참을 스쳤다.

“넌 이것을 닮았어.”

이글거리는 무언가를 감춘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거칠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아리엘은 루시안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대공저 앞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녀가 만든 나비 모양의 마나는 루시안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루시안이 진득한 소유욕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내가 널 붙잡았어. 내 손아귀 안에 넣었고. 넌…… 겁도 없이 천적의 손에 제 발로 떨어졌지.”

아리엘은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관심을 빼앗아간 건 그의 말이 아니라 표정이었다.

루시안은 어딘지 뒤틀린 것 같았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에 대었다.

“루시안. 왜 슬퍼 보여요?”

그가 방어적으로 그녀의 손을 떨쳐냈다.

아리엘은 난간에 등을 대며 조금 물러났다.

“슬프다고? 이 내가?”

사납게 되물은 그는 매혹적인 제 흑발을 한 손으로 헝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웃기는 소리. 그건 내가 아니야.”

왜 이 순간 그 말이 떠오르는 걸까.

레온 영식으로만 알았던 황태자가 했던 말.

‘그는 그런 종류가 아니니까요.’

아리엘은 디트리히가 루시안에 대해 했던 말과 지금 루시안이 하고 있는 말이 같은 의미라고 느꼈다.

노려보는 루시안이 무서웠지만, 아리엘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걸요.”

루시안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탐색하듯 매섭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아.”

아까보다 진정되어 보이는 루시안이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가 몸에 힘을 빼고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의 이마에 머리를 툭 기댔다.

“……아리엘라, 넌 겁을 좀 배울 필요가 있어.”

아리엘은 눈을 깜박거렸다.

“나 겁 많은데요? 아까 창문에서 떨어질 때도 막 소리 질렀고…….”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이 못 이기겠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떨림이 이마를 통해 전해져 왔다.

이마를 뗀 그가 아리엘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진짜 겁이 많다면 날 보고 도망쳤어야지. 결혼하자고 조를 게 아니라.”

아, 원래의 루시안이다.

다시 제멋대로에 자신을 놀리는 그로 돌아온 걸 보고 아리엘은 퍽 안도했다.

여전히 아까 루시안이 보인 괴로운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아리엘은 테라스 난간에 올려놨던 샴페인 잔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둘 중 하나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루시안. 우리 건배해요.”

“뭘 위해서?”

“축하해야죠. 오늘은 루시안의 데뷔탕트 날이니까요.”

그의 눈썹이 오만하게 찌푸려졌다.

“그딴 걸 왜 축하해.”

아리엘은 불만스레 뺨을 가득 부풀리고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축하할만한 날이잖아요. 자. 빨리 짠, 해요.”

루시안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픽 웃었다.

그가 아리엘의 잔에 자기 잔을 챙 부딪쳤다.

“건배.”

“건배!”

아리엘은 활짝 웃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기분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루시안이 곧장 샴페인을 황궁 덤불에 쏟아버리는 것을 본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키득거렸다.

미성년의 라카트옐 남자는 보통 인간보다 더 술에 면역이 없다는 마티어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루시안이 성년 되기 전에 술 취한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면 이상한 걸까?’

술 마신 남자라면 무조건 무섭고 싫은데, 루시안은 다르게 느껴졌다.

‘루시안은 내가 자길 무서워하길 바라는 것 같지만…… 난 이미 루시안의 모습을 아는걸.’

과거에 아리엘은 그를 만났었다.

그녀가 열일곱, 그가 스물 한살일 때였다.

적으로 만났는데도 루시안은 그녀를 해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리엘은 지금의 그가 무섭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그녀를 해칠 리 없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아리엘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루시안. 우리 이제 안으로 돌아가요. 다이아나랑 세실도 보고 싶고요.”

“내 앞에서 다른 것들 보고 싶다는 말 하지 마.”

루시안이 위협하듯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쳇, 말도 못하게 해.

아리엘은 황궁 시종에게 돌려줄 샴페인 잔을 챙긴 뒤 루시안의 뒤를 따라 무도회 홀로 돌아갔다.

들어가면서 그녀는 루시안이 다시 특유의 난폭한 기세를 두르려는 걸 막았다.

“잠깐만 참아봐요. 사람들이 겁먹잖아요.”

그가 삐딱하게 말했다.

“무서워하라고 하는 건데.”

“어휴, 정말…….”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사람들 틈을 지날 때였다.

“대공자님, 대공자비님.”

누군가 용감하게도 루시안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나이가 꽤 많은 초로의 남자 귀족이었다.

인상이 정직해 보였다.

“저는 북부의 녹스 남작입니다.”

루시안은 무관심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적대감을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대단한 자비를 베푼 셈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달랐다.

“……!”

그녀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숨을 헉 들이쉬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창백해진 손끝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망치로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이 그녀의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말도 안 돼.’

아리엘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과거에 녹스 남작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악당인 '그'의 수하로 지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녹스 남작만큼은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녹스 남작은, 과거의 그녀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이었다.



<2권 끝.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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