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5/23)
  • 5장




    아리엘의 일정은 그날부터 데뷔탕트 준비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다이아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사교계 데뷔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목소리 높여 알려주었다.

    “그건 귀족 영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야. 소녀의 로망, 꿈의 무도회!”

    숨도 차지 않은지 다이아나가 연이어 말했다.

    “잘 들어, 아리엘. 데뷔 드레스는 말이야. 두 벌이야. 등장할 때 입는 드레스, 그리고 무도회 드레스. 등장 드레스는 무조건 흰색이어야 해. 무도회 드레스는 무지무지 예뻐야 하고!”

    드레스가 두 벌이나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아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마침 방문해 있던 의상실 마담 헬렌을 돌아보았다.

    “헬렌?”

    “공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등장 드레스는 모두 흰색이라 디테일한 고급스러움이 중요하고, 무도회 드레스는 눈에 띄는 아름다움이 제일 중요하지요.”

    다이아나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좀 통하네.”

    그녀가 부채로 테이블을 우아하게 내리쳤다.

    “좋아. 이제부터 우리의 목표는 하나야. 아리엘라 라카트옐의 눈부신 데뷔탕트!”

    힘을 합치기로 한 다이아나와 헬렌은 아리엘에게 잘 어울릴만한 것들을 대결하듯 말하며 등장 드레스의 윤곽을 잡아나갔다.

    “드레스 밑단은 진주가 좋을까요, 보석이 좋을까요?”

    “진주가 좋겠어. 대신 알이 큰 걸로. 우아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이 나게.”

    “치마는 겹겹으로 하되 무게를 가볍게 해서 소녀스러움을 살리지요.”

    “맞아. 순수하고 청초한 어린 신부의 이미지인 거지. 자수도 들어가야 해.”

    아리엘은 그들이 펼쳐놓은 것 중 그녀의 마음에 드는 것들을 말해주는 것 외엔 할 일이 딱히 없었다.

    헬렌은 등장 드레스는 라카트옐 저에서 작업하고, 무도회 드레스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만들겠다고 했다.

    “아름다움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어서요.”

    헬렌을 신뢰하는 아리엘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드레스 외에도 관심 쏟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한편, 데뷔날이 결정된 이후부터 수잔은 아리엘의 몸관리를 ‘특별 등급’으로 올렸다.

    그녀는 하얀 도자기 욕조에 아리엘을 하루 세 번, 소금 목욕, 향유 목욕, 거품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백설같이 흰 피부를 더욱더 눈부시고 반짝거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은 더욱 공들여 빗고 머릿결에 좋은 향유로 마사지해가며 감아주었다.

    평소엔 깔끔하게 잘라주기만 했던 조그만 손톱들도 줄을 써 가며 세심하게 둥근 모양으로 다듬었다.

    예법 선생인 란셀 후작 부인은 가르쳐줬던 것들을 다시 벼락치기로 되짚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황제 폐하, 황후 마마, 황태자 전하, 대공 각하. 이 네 분 외에는 아리엘님보다 높은 사람은 없답니다. 자, 높은 분들에게 하는 인사와 낮은 사람들에게 하는 인사를 구분해보세요.”

    아리엘은 배운 대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살포시 인사했다.

    높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릎을 굽히며 허리를 숙이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는 고개만 살짝 움직인다.

    “훌륭하시군요. 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인사하시면 됩니다.”

    “말을 걸 때에는요?”

    “원하는 사람에게만 말을 거세요.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면 최대한 짧게 대답하시고요.”

    란셀 후작 부인이 이마를 짚었다.

    “하아…… 이번 무도회에 아리엘님 혼자 데뷔하실 줄 누가 알았답니까.”

    후작 부인이 이토록 긴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도회의 데뷔자 명단에 아리엘의 이름을 올린 후에야, 그녀 외에 데뷔하는 영애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올해 데뷔하는 영애들은 모두 황궁 무도회 이전에 선을 보인 참이었다.

    ‘혼자 데뷔하시면 주목을 많이 받으시겠지만, 시선이 집중돼서 작은 실수도 크게 보일 수 있지.’

    더구나 아리엘은 역대 데뷔자들 중 가장 어렸다.

    겨우 열 살짜리 소녀가, 제국 최대의 무도회에서, 혼자 데뷔라니!

    란셀 후작 부인은 생각만으로도 졸도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리엘은 평안하기만 했다.

    “별일 없을 거예요. 그냥 얼굴만 비치고 올 건데요.”

    “하지만…….”

    후작 부인은 몇 마디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교계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는 아리엘보다 겨우 몇 살 더 먹은 안하무인의 어린 영애들도 있었고, 제법 아가씨 티를 내며 혀 속에 칼을 감춘 영애들도 수두룩했다.

    처음 데뷔해 어수룩한 소녀를 곯려주는 건 사교계에서 빈번한 장난이었다.

    드레스에 무언가를 엎질러 못쓰게 만들거나, 드레스를 밟아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게 하거나, 말로 괴롭혀 주거나.

    데뷔자의 신분이 높아서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로 교묘히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드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란셀 후작 부인은 자신이 잘 붙어 다니며 커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겨우 열 살이신 대공자비께 사교계 싸움을 잘하시길 바랄 수는 없지. 내가 잘해야 해.’

    그녀는 후견인의 마음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며칠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아리엘은 깃펜을 들 짬을 얻었다.

    루시안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아리엘이 데뷔하는 이번 무도회에 루시안은 참석할 수 없었다.

    요하네스 아카데미는 아주 엄격해서 가까운 가족이 위독하거나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면 학기 중에 내보내 주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시안에게 그의 꼬마 아내가 데뷔탕트를 치른다는 소식은 전해주어야 했다.

    아리엘은 조금 높은 책상에 팔을 짚고, 깃펜을 잉크에 콕 담갔다.

    깃펜 끝이 진한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루시안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고 느껴서 산 로얄 블루색 잉크였다.


    [친애하는…….]


    첫 인사말을 쓰려는데 목구멍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와아, 어색해.

    아리엘은 연갈색의 깃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

    루시안에게 편지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멀리 아카데미에 있으니까 편지를 쓰려면 못 쓸 건 없다.

    하지만 루시안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 루시안이 차분히 편지를 읽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달까……?’

    아리엘의 마음속에서 루시안이라는 생물과 소녀의 편지는 1억 광년 정도는 먼 존재였다.

    루시안은 깨알같은 글씨나 아기자기한 편지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머나먼 아카데미에서 당장 돌아와서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게 더 그의 방식일 것이다.

    아리엘은 시무룩해진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어차피 보내도 읽어줄 리가 없잖아.’

    답장을 받을 거라는 기대는 당연히 못하고.

    다이아나랑 편지할 때와는 다르다구.

    아리엘은 깃펜을 내려놓고 말랑한 뺨을 팔에 기대며 폭 엎드렸다.

    그나저나…….

    ‘데뷔 소식을 들으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꼬맹이 네가 그럴 나이는 됐던가? 하고 밉게 말하겠지?

    눈앞에서 들으면 조금 화가 날 테지만 멀리 떨어져서 상상해 보니 살며시 웃음이 났다.

    루시안은 분명 ‘과자부스러기나 흘리고 다니는 어린애가 데뷔는 무슨 데뷔.’ 하며 비웃을 게 뻔했다.

    ‘어쩌면…… 여기 있었다면 반대했을지도 몰라.’

    마티어스는 아리엘이 원하는 건 대부분 허락해주는 주의인데, 루시안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다.

    ‘으으,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편지를 써야지.’

    아리엘은 다시 몸을 일으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별 신경 안 쓸 거라고 생각하자, 오히려 긴장이 풀려서 글이 술술 나왔다.

    아리엘은 황실 무도회에서 데뷔를 하게 됐다고 짧게 적은 후, 아래에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덧붙였다.

    원소 마법을 배운다거나, 별채 보관고에 들어가 봤다는 얘기, 오늘 먹은 디저트…….

    다 쓰고 나서는 봉인을 했다.

    붉은 밀랍을 촛불에 녹여 동그랗게 부은 후 인장을 찍는 것이다.

    밀랍으로 실링하는 건 위험해서 수잔이 도와주었다.

    밀랍이 완전히 식은 뒤 수잔이 편지를 내밀었다.

    “자, 아기 마님.”

    아리엘은 얼굴 바로 앞에 내밀어진 편지에 어리둥절해졌다.

    수잔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쪽 하세요, 쪽.”

    얼결에 아리엘은 편지 봉투의 구석에 쪽, 조그만 입술 도장을 찍었다.

    화장을 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수잔?”

    수잔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아내가 남편에게 편지 보낼 땐 이렇게 하는 거랍니다.”

    아. 그런 거구나…….

    아리엘은 자신이 제대로 했는지 확신이 없어서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이제 된 거겠지?

    그녀는 하얀 뺨을 동그랗게 만들며 뿌듯하게 웃었다.

    편지는 마법 게이트를 통해 부쳐졌다.

    아리엘이 무도회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소식이 갈 것이었다.

    아리엘은 편지를 보낸 뒤, 보냈다는 걸 금방 잊어버렸다.


    * * *


    제국립 요하네스 아카데미. 밤.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의 기숙사 특실은 벽난로 불빛 외엔 없어 어두컴컴했다.

    열네 살의 소년이지만 이미 키가 훤칠해 서너 살 많은 상급생들과 눈높이가 비슷한 그는 지금 어둠 속에 오만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반쯤 느슨하게 풀어놓은 폭력적인 기세와 날 선 듯한 눈빛.

    그 루시안이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의자 옆에 위치한 편지함은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서신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초대장들이었다.

    귀족, 황족 자제들의 교육기관이다 보니 이 안에서는 수많은 정치 활동이 벌어졌다.

    귀족 영애들의 소모임처럼 이곳에도 승마 모임, 체스 모임, 카드 모임 등 사교 모임이 빈번했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귀족 자제인 대공자 루시안에게는 당연히 참여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가 그런 하찮은 모임에 강림해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모임 주최자들은 여전히 루시안에게 초대장을 보내왔다.

    어차피 루시안이 안 올 걸 알면서 왜 아직도 보내냐고?

    이유는 하나였다.

    죽을만큼 무서워서.

    초대장을 보내도 루시안이 오지 않을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내지 않는다면……?

    그 결과를 굳이 상상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무시해서 보내지 않았다고 꼬투리를 잡아서 소멸시킬지도 몰라.’

    루시안이 아카데미에 나타난 지 몇 달째.

    아카데미의 모든 이들은 그의 무자비함과 잔혹함을 확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높은 지위와 압도적인 아름다움,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우월한 검술.

    루시안이 가진 매력들은 모두 '공포'라는 한 단어에 묻혀버렸다.

    대공자에게 어쭙잖게 접근했다가 손쉽게 지옥을 본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 내에서는 루시안의 심기를 거스른 뒤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루시안은 손끝을 까딱여 푸르스름한 소드 마나를 풀었다.

    그러자 편지함 속의 모든 서신들이 거칠게 멱살 잡힌 듯 홱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루시안은 무료함을 달래기라도 하듯, 편지의 발신인을 확인하고 벽난로에 던져 넣기를 반복했다.

    종이가 타는 걸 보는 것도 성가셔서 소드 마나로 빠르게 살라버린다.

    불에 던져진 서신들은 불길에 닿아보기도 전에 이미 다 타서 후드득 재로 떨어졌다.

    지루한 유희처럼 그 행동을 반복하던 손이 멈칫했다.

    겉봉에 받는 사람 이름, '루시안 D. 라카트옐'이라고 적힌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달랐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정성 들여 쓴 '아리엘라'라는 이름.

    루시안은 나머지 서신들은 확인도 하지 않고 통째로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우아한 곡선 끝에 푸른 불꽃이 확 번지며 재가 일었다.

    하지만 그 어떤 재의 가루도 감히 루시안의 몸에 앉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평소 같으면 편지를 뜯는 데에도 소드 마나를 사용했을 테지만, 루시안은 제 손으로 직접 봉인을 뜯었다.

    밀랍 봉인에는 뚜렷한 사자 문양이 찍혀있었다. 라카트옐의 문장이다.

    젖먹이 새끼 고양이 같은 아리엘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서 루시안은 픽 웃음을 흘렸다.

    냉혹한 대공자 루시안을 아는 이가 보았다면 누구라도 경악할만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눈으로 훑는 루시안을 벽난로 빛이 비추었다.

    난폭한 기세를 가라앉힌 그의 미색은 신이 내려보낸 천사처럼 빼어나게 빛났다.

    “…….”

    내용을 다 읽은 그가 묘한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놓았다.

    다시 겉봉을 집어든 루시안의 눈에 희미한 흔적이 잡혔다.

    초월적인 감각을 가진 그에게나 보일 법한 자국이었다.

    조그만 입술 자국.

    루시안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반대쪽 모서리에 한 번 더 입술이 찍힌 것을 보고는 참기 어려운 듯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미치겠군.

    “아리엘라 라카트옐.”

    그는 손끝을 휘둘러 서랍을 열고, 유리 상자 안에 고이 보관해놓은 것을 끌어왔다.

    삐뚤빼뚤한 이름 자수가 새겨진 하얀 손수건.

    그때 일을 떠올리자 루시안의 입매는 다시 요염한 곡선을 그렸다.

    다른 사람이 제 서툰 자수를 볼까 봐 걱정하는 게 훤하던 조그만 얼굴이 기억난다.

    “바보 같기는.”

    루시안은 그걸 다른 인간에게 보여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감히 누구에게 보는 걸 허락한단 말인가.

    이것은 완벽히 그의 것인데.

    “본 눈이 있다면 살려두지 않지.”

    냉혹하게 말한 그는, 상반된 손길로 편지를 정돈해 손수건과 함께 유리 상자 안에 넣었다.

    “데뷔라…….”

    그의 꼬마 아내는 확실히, 그의 명령대로 모든 걸 뒤집어 바꾸고 있는 중인 듯했다.

    집 안뿐만 아니라, 집 밖까지.


    * * *


    시간은 흘러 마침내 황궁 봄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닫혀있던 황궁의 정문이 활짝 열리고, 귀족들의 마차가 수없이 줄이어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는 그 어느 때보다 떠들썩했다.

    아리엘은 아침 일찍 방문한 란셀 후작 부인에게 막바지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시겠지요?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다이아나 공녀와 격식을 갖춰서 말하셔야 합니다.”

    “알아요. 이미 다이아나와 연습도 했는 걸요.”

    “또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란셀 후작 부인이 마지막 1초까지 당부를 쏟아놓고 돌아간 뒤, 아리엘은 마담 헬렌이 가지고 온 드레스를 피팅했다.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는 안나, 베키, 샐리 세 명의 하녀가 옷시중을 들었다.

    아리엘의 등장 드레스는 디테일에서 한 땀, 한 땀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하얀 드레스였다.

    상체 쪽엔 작은 진주와 비단실로 섬세한 자수가 놓였고, 겹겹의 흰 치맛단은 고상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흰색의 반투명한 소재로 만들어진 소매에는 은실 문양이 타고 오르듯 새겨져 있었다.

    허리 뒤로 눈부신 흰 새틴 리본이 묶여 청초한 꼬마 신부의 이미지를 더했다.

    어제 다이아나는 완성된 이 드레스를 보고 올해 데뷔 드레스 중에 가장 예쁘다면서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아리엘이 드레스를 다 입고 거울 쪽으로 돌아서자, 하녀들이 탄성을 질렀다.

    “아기 마님, 정말 예쁘세요!”

    “저 방금 심장이 잠깐 멎었어요!”

    아리엘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뺨을 붉혔다.

    ‘예쁘다.’

    몇 달 전,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렸던 결혼식이 생각났다.

    그때도 드레스를 입었었지만, 약식답게 얌전한 드레스였다.

    ‘진짜 결혼하는 신부의 드레스 같아.’

    마담 헬렌은 마지막으로 드레스 매무새를 만지고, 새로 디자인해 온 장신구를 꺼내왔다.

    헬렌이 자줏빛 벨벳 상자의 묵직한 뚜껑을 천천히 열자 안에서 눈부신 목걸이와 귀걸이, 작은 티아라가 드러났다.

    아리엘은 귀걸이를 보고 말했다.

    “헬렌, 나는 아직 귀를 뚫지 않아서…….”

    헬렌이 빙긋 웃으며 아이보릿빛 진주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손으로 옆을 누르자 귀에 다는 곳이 달칵 열렸다.

    “뚫으시지 않아도 되는 귀걸이랍니다.”

    하녀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귀걸이를 달아주었다.

    드레스 밑단의 사랑스러운 진주 장식과 어울리는 귀걸이였다.

    귀걸이도 무척 예뻤지만, 장신구 중 가장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헬렌이 고심하며 디자인한 목걸이였다.

    대공가의 보물고에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진귀하고 아름다운 목걸이와 보석들이 매우 많았다.

    하지만 아직 어리고 몸집이 작은 아리엘이 착용하기에 그것들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헬렌은 장신구를 직접 디자인하기로 했다.

    대공가 보물고에서 필요한 보석을 지원받은 마담 헬렌은 엄청난 목걸이를 만들어냈다.

    일명 '다이아몬드 레이스 목걸이'.

    헬렌은 상자 가득 든 아주 작고 눈부신 다이아몬드들을 레이스 모양으로 짰다.

    단단한 다이아몬드에 구멍을 뚫어 실로 꿰어낼 수는 없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브루노어의 마법 공이 들어갔다.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레이스를 짠 목걸이의 가운데에는 물방울 모양 진주 펜던트가 늘어뜨려 졌다.

    숨이 막힐 만큼 예쁜 목걸이였다.

    아리엘은 떨리는 마음으로 목걸이를 착용했다.

    목걸이는 무겁지 않을뿐더러 어리고 사랑스러운 그녀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헬렌은 감동해서 촉촉한 눈으로 자신의 뮤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벨벳 상자에 남은 티아라를 집어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겠네요.”

    하녀들이 티아라를 두 손으로 받아 들어 아리엘의 머리 모양을 완성했다.

    아리엘이 가진 스칼렛 레드의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아름답게 늘어뜨리고 일부는 아름다운 모양으로 땋아 티아라로 고정했다.

    하녀들은 일국의 황녀님이 데뷔를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차림은 해보지 못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리엘은 결혼식 때 루시안에게 받았던 반지를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고 심호흡을 했다.

    ‘이제 정말 데뷔탕트를 치르는 거야.’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시야에 들어왔다.

    ‘와…….’

    긴 흑발을 늘어뜨리고 격식에 맞는 연회복을 입은 마티어스는 무척이나 근사했다.

    큰 키 때문에 늘씬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그의 몸은 연회복을 입자 소드마스터다운 근육이 드러나 탄탄하고 강인해 보였다.

    아리엘은 데뷔탕트에 마티어스가 함께 가준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보통 영애들이 데뷔할 때는 아버지나 오빠가 에스코트를 맡았다.

    아버지와 오빠가 없다면 친척 어른 남자나 사촌 오라비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아리엘은 아버지와 오빠가 모두 있었지만, 그들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하지만 마티어스가 에스코트를 해준다면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나를…… 딸처럼 여긴다고 말씀해주셨으니까.’

    아리엘의 친아버지인 후작과 오라비 제롬은 그녀를 딸, 여동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리엘이 그들을 의지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그녀를 가족으로 대해 주었다.

    가문의 울타리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기댈 곳이 되어주었다.

    ‘그러니 긴장할 필요 없어.’

    나한테는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이 있는걸.

    그게 설사 기한이 있는 것이라고 해도, 적어도 지금은.

    아리엘은 어깨를 조금 폈다. 허리도 더 꼿꼿하게 세웠다.

    워낙 몸집이 조그마해서 그렇게 해도 앳되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지만 마음가짐은 달랐다.

    아리엘이 다가가자 마티어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리엘라.”

    그녀를 본 마티어스가 놀란 듯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아리엘은 어쩐지 수줍어져서 시선을 떨구었다.

    마티어스가 성큼 다가와서 에스코트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아리엘이 조심스레 그의 손 위에 손을 내려놓자 마티어스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네 드레스 디자이너에게 상을 내려야겠군.”

    아리엘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냥 예쁘다고 해주시면 되는데 꼭 저렇게 돌려 말씀하신다니까.

    물론 자신은 마티어스의 그런 점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가자.”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훌쩍 안아서 마차에 올려주었다.

    어째서인지, 라카트옐 남자들하고 있을 때는 발이 땅에 오래 붙어있는 법이 없는 것 같았다.

    항상 그들이 들고 다니거나 안아주니 아리엘이 걸어 다닐 틈이 없었다.

    이어 그도 올라타면서 마티어스가 덧붙여 말했다.

    “오늘은 너를 위한 날이 될 거다.”

    그렇게, 화려한 데뷔 무도회의 막이 올랐다.


    * * *


    황궁 무도회는 화려했다.

    3년 전에 열렸을 때보다 더욱 신경을 쓴 듯한 모양새였다.

    3년 전에는 어려서 황궁에 오지 못했던 열넷, 열다섯, 열여섯 살의 영애들은 구경하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까마득히 높은 무도회 홀의 천장에 별같이 무수한 금빛 샹들리에가 걸려있었다.

    발이 닿는 곳마다 붉은 융단 카페트가 깔려있었고, 곳곳에는 황가의 꽃인 수선화 장식이 아름답게 놓여있었다.

    황실이 봄 무도회에 신경 쓴다는 것은 곧 청춘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

    눈치 빠른 축들 사이에서는 슬금슬금 이야기가 돌았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신붓감을 벌써부터 고르시려나 봅니다.”

    “이제 14세이시니 이른 것도 아니지요. 호호호!”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손을 잡고 2층의 거대한 문 뒤에서 호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뷔탕트의 절차였다.

    그 날 데뷔하는 영애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곧장 입장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리고 무도회가 시작하기 전, 데뷔를 알리는 이름이 불리면 등장해 모두 앞에 서게 된다.

    지금 그녀가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사치스러운 금의 방이었다.

    금박을 덧입힌 벽과 천장이 눈이 아리도록 휘황찬란했다.

    순금으로 칠을 한 장식품과 금실로 짠 휘장도 방 안에 가득했다.

    하지만 아리엘은 다른 어린 영애들과 달리 황궁의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

    라카트옐 저택이 집인 그녀에게 이 정도 화려함은 익숙했다.

    ‘제국에서 황궁보다 호화로운 곳이 있다면 그건 바로 라카트옐 대공저’라는 우스갯소리가 실화였던 셈이다.

    마침내 시간이 되었다.

    “마티어스 엘윈 라카트옐 대공 각하와 아리엘라 라카트옐 대공자비 드십니다!”

    무척 긴 소갯말이 들려오고 문이 열렸다.

    무도회 홀 안의 빛이 쏟아져 내려와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리엘라.”

    “네,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었다.

    아리엘은 하얗고 눈부신 드레스 자락을 살짝 쥐고 문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한편 대공의 이름을 들은 사교계는 충격에 빠져있었다.

    마티어스 대공이 참석했다고?

    무려 13년 동안이나 사교계에 등장하지 않은 그 대공이?!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거 맞나?’

    ‘믿을 수가 없군!’

    ‘황제 폐하께서 무도회에 신경 쓰신 이유가 이것이었나 봐!’

    그리고 13년 전의 마티어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라카트옐의 위압감을 직접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경험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또, 오늘 혹시 그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당장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은 몸을 사려야겠어.’

    ‘가급적이면 대공 각하와 눈을 마주치지 말아야지.’

    그때, 왕궁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뷔하시는 아리엘라님은,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님의 아내 되는 분이십니다!”

    아리엘이 등장하자 계단 아래의 귀족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막 데뷔하는 어린 영애를 환영하는 의식이었다.

    수백 명의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아리엘은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마티어스의 든든한 손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마티어스와 아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나. 정말로 대공께서 무도회에 나오시다니.’

    나이 든 귀족들이 박수 소리 사이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아들을 결혼시킨 나이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예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으세요. 13년 전에도 꼭 저런 모습이셨지요.”

    “다행히 지금은 기분이 나빠 보이시지 않으니…… 큰 문제는 없겠죠?”

    “그러길 바라야죠. 그런데 이렇게 오랜만에 나오신 이유가 뭘까요?”

    그의 등장에 한차례 충격을 받은 사교계는 이제 다른 것에 주목했다.

    바로 대공을 이곳 무도회로 이끌어 낸 사람.

    어린 대공자비 아리엘이었다.

    아리엘이 계단을 반쯤 내려가자 그녀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귀족들로부터 감탄의 소리가 퍼졌다.

    “어머나, 정말 예쁜 소녀로군요!”

    “대공자가 결혼했다더니 저렇게 환하고 반짝이는 소녀였나요?”

    “데뷔 드레스가 꼭 웨딩드레스 같아요. 귀여운 꼬마 새신부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아리엘의 귀여움을 보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과 귀족 남자에서부터 미혼의 처녀, 총각들까지.

    사람들은 아리엘에게 호의가 가득 담긴 표정을 보냈다.

    어린 영애들은 아리엘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우러러보며 소곤거리기 바빴다.

    “저 드레스 좀 봐. 대체 어디 의상실 것이지?”

    “난 저런 목걸이는 처음 봐요. 정말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죠?”

    “아, 나도 저런 붉은 머리였다면 좋았을걸. 흰 드레스랑 너무 잘 어울리잖아요.”

    그 사이에서 은근히 기가 산 건 아리엘의 드레스 디자인에 열성적으로 관여한 다이아나였다.

    뜨거운 관심 속에서 등장한 아리엘은 사람들에게 화답하듯 미소지었다.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도 녹을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라카트옐을 무섭고 폭압적인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는 사교계에게 그 미소는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라카트옐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저렇게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귀족들은 아리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대공님, 대공자님과는 완전히 다르시군요!’

    ‘그분들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데, 대공자비님은 사랑스러워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요.’

    등장한 아리엘은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함으로서 데뷔 의식을 이어갔다.

    “대공자비 아리엘라 라카트옐,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황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 그래. 대공가에 여자가 들어오다니, 제국의 홍복이야. 안 그렇소, 황후?”

    “예, 폐하. 어린 대공자비와 빨리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 나는군요.”

    황제는 아리엘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마티어스의 눈빛에 막혀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었다.

    귀족 무리 틈으로 섞여 들어가자 소녀들이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엘은 그사이에 섞여 자신에게 윙크하는 다이아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괜찮았어, 다이아나?’

    ‘완전 최고였어.’

    둘만 아는 눈짓 대화가 짧게 지나갔다.

    음악 연주를 위해 오케스트라가 나왔다.

    귀족들은 올해의 오프닝 댄스를 누가 맡게 될지 듣기 위해 황제 쪽을 바라보았다.


    * * *


    같은 시각.

    누군가가 테라스쪽 휘장 그늘 뒤에서 홀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을 녹여 뽑아낸 듯한 골든 블론드의 금발이 굽슬거리며 이마 위로 흘러내리고, 그 아래로 선해 보이는 녹안을 가진 소년이었다.

    이름은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태자로서 올해 열넷이 되었다.

    황태자이지만 제국립 요하네스 아카데미에 속하는 건 의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각 그가 무도회에 있는 것은 평범치 않은 일이었다.

    디트리히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황제, 시종장 데일, 황태자 본인뿐. 황후도 모른다.

    그는 황족의 특권으로 아카데미 측에 비밀스럽게 허락을 받고 이곳에 와 있었다.

    디트리히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 영애가 대공자의 아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그의 수족인 시종장 데일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정말 작군. 열 살이 맞는 건가?”

    “예. 후작가 출생 기록에 의하면 확실합니다.”

    디트리히의 입에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루시안이…… 한눈에 반했다라.”

    “그저 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 그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마티어스 대공이 저 애 때문에 직접 여길 나왔어.”

    “…….”

    황태자의 녹안이 호기심을 담았다.

    “대체 저 영애에게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이제 홀에서는 황제가 일어나 오프닝 댄스를 출 사람을 고르고 있었다.

    말이 고르는 거지 사실은 내정돼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분이 가장 높은 남자 귀족.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마티어스 대공이었다.

    대공비가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대공 부부가 오프닝 댄스를 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공비가 없는 상황.

    마티어스 대공은 어느 여자에게나 춤을 신청할 수 있었다.

    “올해의 오프닝은 라카트옐 대공이 하도록 하지.”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귀족들의 시선은 대공에게 쏠렸다.

    미혼의 결혼적령기 영애들 사이에서 기대감 섞인 소곤거림이 흘러나왔다.

    “어쩜. 대공자님을 워낙 일찍 얻으셔서 젊으실 줄은 알았지만.”

    “정말 멋지시잖아요.”

    마티어스를 소문으로만 접한 아가씨들은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대공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다 큰 아들을 두었음에도 그의 외양은 미혼의 영식들만큼이나 한창때로 보였다.

    ‘대공님과 춤 한 번만 춰 봤으면!’

    대공비 자리가 비어있다 보니 그녀들의 마음은 한껏 기대로 부풀었다.

    “열네 살 아들이 있으면 어때요. 저렇게 젊고, 멋지고, 부유하신데.”

    “맞아요. 라카트옐 가 소문 때문에 좀 무섭기는 하지만, 따분해 보이시는 모습마저도 설레지 않나요!”

    마티어스가 오프닝 댄스의 파트너를 고르기 위해 귀족들을 쭉 둘러보았다.

    금세 마음을 정한 듯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마티어스의 모습에서 위압감과 아름다움이 뿜어나왔다.

    뭇 여성들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한 곡 함께 하는 영광을.”

    그가 완벽하게 각잡힌 태도로 여성에게 춤을 청했다.

    보통 여성에게 손을 내미는 것보다 조금 낮은 곳으로 손을 뻗은 것 말고는 완벽했다.

    손의 높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손을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법적 딸(daughter-in-law), 아리엘이었으니까.


    * * *


    사교계 귀족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떤 아름다운 아가씨와도 춤출 수 있는 대공이 열 살짜리 꼬마 며느리에게 춤을 신청했다.

    무슨 의미일까?

    이곳에 그와 춤출 만큼 고귀한 여성은 가족인 대공자비 뿐이라는 뜻?

    아니면 대공이 어린 며느리를 끔찍이 아낀다는 그 소문이 진짜였던 걸까?

    “제 기쁨이에요.”

    아리엘은 방긋 웃으며 마티어스의 손을 잡았다.

    란셀 후작 부인에게 듣기로, 그 날 데뷔한 영애가 월 플라워(wall flower : 벽의 꽃이라는 뜻으로 무도회에서 춤을 추지 못하고 그냥 서 있는 여자를 이르는 말)가 되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보통은 데뷔 날 전에 춤 상대를 모두 정해놓는데 아리엘은 그러지 못했다.

    ‘마티어스님은 그걸 배려해주신 게 분명해.’

    키 차이가 엄청난 시아버지와 어린 며느리는 홀의 중앙으로 나섰다.

    둘은 춤을 추기 전에 하는 몸짓 인사를 하고 가까이 마주 섰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조그만 손을 받쳐 들고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아리엘은 살짝 눈짓을 해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아리엘은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며 음악에 몸을 실었다.

    ‘연습한 대로, 연습한 대로.’

    이날을 위해서 란셀 후작 부인에게 얼마나 특훈을 받았던가!

    후작 부인은 열두 가지 사교댄스를 모두 가르친 걸로도 모자라 변칙 스텝과 동작까지 가르쳐 주었다.

    긴장하는 바람에 아리엘의 몸은 조금 뻣뻣했다.

    하지만 마티어스가 그녀에게 맞춰주자 금방 동작이 부드러워졌다.

    눈을 맞춘 채 박자를 맞춰서 빙글빙글 도는 두 사람의 모습.

    키가 맞지 않아도 사랑스럽고 그림같은 광경이었다.

    둘은 아빠와 딸 같이 다정해 보였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라도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아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에게 애정을 받는 아리엘에게 부러움과 경탄의 눈길이 쏟아졌다.

    꿈같은 오프닝 댄스가 끝난 뒤.

    음악이 바뀌자 모든 귀족 남녀들이 홀로 쏟아져 들어왔다.

    조그만 아리엘은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마티어스의 팔을 꼭 붙잡고 홀의 사이드로 나왔다.

    오프닝 댄스 직후에는 거의 모든 남녀가 댄스 홀로 나간다.

    그래서 아리엘은 잠시나마 다른 사람의 관심에 시달리지 않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눈치 빠르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어지럽지? 잠깐 테라스에 나갔다 와. 바깥 공기를 마시면 좋아질 거야.”

    역시 경험자라서 아는구나, 다이아나…….

    수백 개의 눈동자 앞에서 춤을 췄는데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아리엘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엘은 허락을 구하듯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와. 내가 몰래 나가게 해줄게.”

    다이아나는 사람들 틈으로 아리엘을 살짝 빼돌려 테라스로 이끌었다.

    다이아나 말대로, 바깥 공기를 쐬자 어지럼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다이아나. 난 괜찮으니까 가서 춤춰. 파트너에게 실례잖아.”

    “괜찮아. 널 혼자 두면 대공님께 내가 혼날걸.”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이아나가 첫 데뷔인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리엘은 다이아나를 문 쪽으로 데리고 갔다.

    “얼른. 난 잠시 여기 있다가 들어갈게. 모니카 공녀님이 춤을 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공작가 이름까지 꺼내자 다이아나가 마지못해 돌아섰다.

    “알았어. 대신 조심해야 해? 여기 못된 애들 많단 말이야.”

    친언니처럼 자신을 챙기는 마음 씀씀이에 아리엘은 살포시 미소지었다.

    “걱정 마. 나, 다이아나가 가르쳐준 거 다 기억하는걸.”

    “좋아. 얼른 가서 모니카 공작가의 위엄만 살리고 돌아올게.”

    다이아나가 휭하고 빠르게 나갔다.

    아리엘은 타박타박 돌아와 난간에 풀썩 기대어 섰다.

    평소와 다른 드레스의 무게가 느껴졌다.

    ‘조금 있다가 또 드레스를 갈아입어야 하겠지?’

    데뷔 드레스는 두 벌이다.

    하나는 지금 입고 있는 등장 드레스.

    첫 춤까지는 등장 드레스를 입는다.

    하지만 두 번째 춤부터는 무도회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아리엘은 춤 상대를 예약해놓지 않아서 당장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조금 있다가 마담 헬렌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가서…….

    달칵.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생각이 끊겼다.

    아리엘은 다이아나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춤곡이 다 끝나려면 멀었을 텐데……?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다이아나가 아니었다.

    “실례합니다만, 레이디.”

    정중한 인사를 한 사람은 금발에 녹안을 가진 미소년이었다.


    * * *


    소년을 본 첫인상은 이것이었다.

    ‘우와, 왕자님 같아.’

    그는 그야말로 책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은 모습이었다.

    금발에 부드러운 녹색 눈. 상냥한 미소와 정중한 태도.

    하지만 아리엘은 그가 황태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제국립 요하네스 아카데미의 규칙은 엄격했다.

    가족이 위독하거나 죽지 않는다면 아무도 학기 중에 나올 수 없다.

    그건 황태자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약해서 아카데미에 가지 못한 영식들도 있다고 했지.’

    아마 저 소년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분명 루시안 또래로 보이니까.

    소년이 입을 열었다.

    “잠시 테라스를 나누어 써도 괜찮을까요?”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이아나가 당부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라스에 남녀가 함께 있는 건 위험해. 자칫 소문이 날 수도 있단 말이야.’

    ‘하지만…… 난 이미 결혼했는데도?’

    ‘그러니까 더 재미있는 소문이 되지! 그런 상황은 가급적 피해, 아리엘.’

    아리엘은 단호한 태도로 말하며 문 쪽으로 향했다.

    “저는 충분히 바람을 쐰 것 같으니 테라스 전부를 사용하도록 하세요. 그럼.”

    예상된 반응이었는지 소년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잠시 루시안 이야기를 나눌까 해서요.”

    “…….”

    아리엘은 남편 이름을 편안하게 부르는 소년의 태도에 조금 놀랐다.

    여태까지 그녀가 본 사람들은 그녀가 루시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제 남편과 친분이 있으신 가요?”

    “친분……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아리엘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루시안에게 가까이 지내는 또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가 루시안에게 인간들은 벌레와 같다는 집사 알렌의 말을 떠올렸다면 멈추지 않았을 테지만.

    “두 분은 친구 사이이신가요?”

    “친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귀티가 흐르는 미소년의 얼굴에 쓴웃음이 어렸다.

    “저는 그를 이용하려는 축이랄까요.”

    디트리히는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황실은 라카트옐의 가호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빛의 축복을 받은 황가지만 라카트옐의 거대한 무력이 없다면 제국을 안전하게 다스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황가는 라카트옐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수록 더 큰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황족들은 항상 대공가에 질척거리고, 대공가는 그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황태자임을 밝히지 않았으니 눈앞의 소녀는 아마 그의 말을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대공가의 권력과 부에 기생하고 싶어하는 인간은 많다.

    ‘그런 하찮은 인간 정도로 취급하겠지.’

    그냥 대공자비를 가까이에서 볼 요량으로 말을 건 것이니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었다.

    조용히 그를 응시하던 아리엘이 분홍빛 입술을 달싹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걸요.”

    디트리히의 눈이 커졌다.

    “예?”

    아리엘은 디트리히를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진짜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 안 해요. 이건 다 널 위한 거란다, 이렇게 말하죠.”

    과거,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했었다.

    피가 섞인 아버지와 오빠에게, 마법사들에게, 악당인 '그'에게.

    그들은 아리엘을 이용하면서 한 번도 널 이용하고 있다고 인정한 적이 없었다.

    대신 그들은 아리엘을 후려쳐 값을 떨어뜨렸다.

    ‘너는 절름발이라 시집도 못 가는데 가문이 널 먹여 살려주지 않느냐.’

    ‘네 보잘 것 없는 마법 재능을 쓰게 해주는 것이 어디야.’

    ‘집 밖에 나가면 널 이만큼 대우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아니면 마법사들처럼 아리엘을 위하는 듯이 말하거나.

    ‘내 말대로 해라. 그러면 너는 큰 힘을 가지게 될 거다.’

    ‘공격마법을 가르치는 건 다 널 위한 거야.’

    ‘이번 일을 해내면 널 인정해주도록 하지.’

    사실 그들의 말은 틀렸다.

    아리엘은 집을 벗어나서도 충분히 살아갈 재능이 있었고, 그녀의 공격마법이 쓰인 건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아리엘은 이제 그녀를 이용하려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다.

    눈앞의 소년은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용하려는 상대에게 ‘내가 널 이용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건 그 사람이 스스로를 방어할 기회를 주는 거잖아요.”

    과거의 그녀처럼 이용당하면서도,

    ‘다 날 위해서 그러시는 거야.’

    ‘내가 모자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하고 바보처럼 속지 않을 기회.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 이용당할지, 아니면 거부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리엘은 그 점을 짚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남아있었다.

    “제가 아는 루시안은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닌걸요. 분명 영식과 관계를 끊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예요.”

    “…….”

    디트리히는 말문이 막힌 채 침묵했다.

    ‘놀라운 소녀군.’

    갓 열 살이 된 소녀에게서 나왔다기엔 깊이가 있는 말이었다.

    그는 속으로 감탄했다.

    ‘순간 대공자가 반했다는 말을 믿을 뻔했어.’

    그가 루시안을 알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디트리히는 대공자 루시안이 이 소녀에게 정말로 반한 게 아니기를 아주 잠깐, 진심으로 바랐다.

    그는 이만 물러나기로 했다.

    “오늘의 대화를 기억해 두겠습니다. 제 이름은…….”

    자신의 풀네임을 말하려던 디트리히는 마음을 바꿔 미들네임만을 말했다.

    “레온. 레온입니다.”

    “레온 영식. 기억할게요.”

    아리엘은 몸을 돌려 테라스를 벗어났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티어스나 다이아나가 자신을 찾고 있을 것 같았다.

    탁.

    문이 닫힌 후, 지척에 숨어 있던 시종장 데일이 나와 황태자 앞에 섰다.

    “전하. 진짜 성함을 알려주시는 건…….”

    “괜찮아.”

    “대공 각하나 대공자님이 알게 되신다면 전하께 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응징하는 라카트옐'은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별일 없을 거야. 그리고 나도 조금…….”

    디트리히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사라진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흥미가 생겼거든.”


    * * *


    아리엘은 홀로 들어가서 곧장 마티어스를 찾았다.

    무도회에 왔으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아리엘과 헤어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본의 아니게 마티어스를 월 플라워로 만든 셈이었다.

    “마티어스님.”

    “아리엘.”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던 건데, 금발 소년과 이야기를 하느라 꽤 시간이 흘러버렸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그녀에게 늦었다며 탓하지 않았다.

    “춤을 추고 계실 줄 알았어요.”

    “내키지 않아서.”

    짧게 대꾸한 마티어스가 말했다.

    “참. 디자이너가 네게 와 달라 전갈을 보냈더군. 이제 곧 무도회 중반이니 가 보거라.”

    “헬렌이…… 그렇군요. 어, 얼른 다녀올게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새로 드레스를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리엘은 멀리서 그녀 쪽을 보고 있는 다이아나에게 눈인사를 해준 뒤 뽀르르 자리를 떠났다.

    “저어…… 대공님.”

    아리엘이 간 뒤에 몇 명의 영애가 마티어스에게 접근해왔다.

    조금 전 왔던 영애들과는 다른 무리였다.

    그들 중 가장 화려하게 꾸민 영애가 볼을 붉힌 채 말을 건넸다.

    “여성이 남성에게 먼저 춤을 청하는 건 실례인 걸 알지만…… 함께 춤추지 않으시겠어요?”

    마티어스는 속으로만 쯧 혀를 찼다.

    아까 아리엘이 테라스에 나간 뒤 줄곧 싸늘하게 내쳤는데도 아직 용기 있는 자가 남아있었나 보다.

    아리엘이 있든 없든 그가 그들과는 절대 춤을 추지 않을 거란 것도 모르고.

    ‘물론 그 애가 없었다면 여기 나올 일도 없었겠지.’

    마티어스는 성가신 기색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거절하겠소.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길.”

    무안을 당한 영애가 새빨개진 얼굴로 물러났다.

    마티어스는 그 후로도 주변에서 얼씬거리는 인간들을 날카로운 기세로 쫓아냈다. 지루함을 억지로 누르며.

    “아아, 정말 자존심 상해. 이게 무슨 창피람.”

    아리엘이 자리에 없는데도 마티어스에게 거절당한 영애들은 수치심에 어쩔 줄 몰랐다.

    비어있는 대공비 자리와 마티어스의 외양에 혹해 자신들이 저지른 무례를 되돌아볼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말이다.

    이들은 대부분 남자에게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가문 좋고 미모가 뛰어난 여자들이었다.

    그래서 난생처음 다친 자존심 때문에 매우 불쾌해졌다.

    더불어 이들은 13년 전의 마티어스에 대한 소문을 어깨너머로만 들었기에 대공가의 무서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마티어스를 포기한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표적을 바꾸었다.

    어리고 만만한, 아리엘라 라카트옐로.

    그들은 아직 미성년인 어린 영애들이 있는 자리에서 넌지시 아리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공자비님이 붉은 머리일 줄은 몰랐네요.”

    “그러니까요. 루실리온 후작가의 자손은 대대로 청동색 머리카락인데.”

    “흐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하녀발 뜬소문이 진짜였을 수도 있지요.”

    어린 영애들은 성숙한 영애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소문이라니요?”

    “아이 참, 마샤 영애는 못들으셨나요? 아리엘님은 전 후작 부인 블랑쉐가 부정을 저질러 낳은 딸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소문을 처음 접한 영애들은 충격에 빠져서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상에. 그럼 아버지는 누군데요?”

    “모르죠.”

    처음 이야기를 꺼낸 영애가 비웃듯 말했다.

    “저런 붉은 머리카락은 흔치 않으니…… 이국의 방문 상인 정도려나요?”

    “어머 어머. 그럼 귀족도 아니잖아요!”

    이야기를 하던 영애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국은 자녀가 아버지 신분을 따라가니까. 하지만 후작가에서는 딸로 인정하고 후작 부인의 부정을 덮었나 봐요.”

    “끔찍한 일이에요. 그런 근본 없는 소녀가 대공자비가 되다니.”

    들불처럼 번지는 이야기를 막은 건 모니카 공작 부인이었다.

    “확실치 않은 소문을 떠드는 건 귀족답지 못하네요. 성년인 영애들이 그러면 어린 영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떠들던 후작가, 백작가 영애들의 입이 싹 닫혔다.

    공작 부인이라는 권력 앞에서는 일단 기어야 했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세요.”

    모니카 공작 부인이 멀어지자 영애들 무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들은 예전처럼 어린 영애들끼리, 성년의 영애들끼리 나뉘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 * *


    춤을 추느라 뒤늦게 어린 영애들 무리에 들어온 다이아나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 영애들 중 꽤 성숙한 축인 16세의 마샤가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제가 들었어요. 대공가에는 저주가 있대요.”

    사실은 아까 성년의 영애들이 떠드는 걸 주워들은 거였다.

    “대공가에 들어간 여자들은 다 저주받아서 일찍 죽는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다 빨리 죽었고, 그것도 들어간 지 3년도 못 넘겼대요.”

    아리엘을 시기하게 된 몇몇 영애들이 숨죽여 웃었다.

    “불쌍하지 뭐예요. 저렇게 어린데.”

    방금까지 그 저주받은 자리에 못 들어가서 안달했던 게 자기 사촌 언니였다는 건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늦게 오느라 대화의 흐름을 끊지 못한 다이아나는 영애들의 반응을 살폈다.

    대부분은 재미있어하는 악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은근히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영애가 한 명 있었다.

    ‘세실 하이츠 영애. 기억했어.’

    저런 애라면 좀 친해져도 괜찮겠지.

    다이아나는 소문의 좋은 점을 깨달았다.

    ‘사람 거르기에 딱 좋네.’

    철없는 자스민 영애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아리엘라 대공자비님도 3년 안에 죽는 거예요?”

    음. 이건 너무 나갔다.

    다이아나는 끼어들려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때,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어머,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은발의 미녀로 유명한 실비아 후작 영애였다.

    그녀가 끼어드는 바람에 다이아나는 끼어들 틈을 놓치고 말았다.

    “어린 대공자비께서 그런 미신을 들으실까 겁나네요.”

    미녀가 소녀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대단했다.

    어린 영애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실비아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저 저희는 걱정이 될 뿐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마, 맞아요.”

    “그래요. 걱정이 돼서.”

    방금까지 막말을 한 주제에 ‘널 걱정해서 그런 거야’로 포장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저는 염려가 된답니다. 대공자비께서 어리시니 지금은 사랑받는 걸로도 충분하시겠지만…….”

    그녀의 입가에 붉은 미소가 그려졌다.

    “다들 아시다시피 루실리온 후작가에는 안주인이 오래도록 없었잖아요? 보통 집안 관리는 어머니께 배우는 건데 말이에요.”

    실비아가 운을 띄우자 나머지는 조무래기들이 처리했다.

    “그러게요. 라카트옐 대공가의 안주인이 저렇게 어리고 보고 배울 어머니도 없으니.”

    “대공가 살림이 어린애 소꿉놀이로 전락하겠지요. 호호호.”

    “시어머니인 대공비라도 계시면 다를 텐데요.”

    “실비아 영애처럼 집안 좋고 뛰어난 영애가 대공비라면 배울 게 많겠지요.”

    아리엘이 모친 없이 자란 것과 집안일을 배우지 못한 걸 강조하는 말이었다.

    은근슬쩍 실비아를 대공비로 추천하는 것 같은 말이기도 했다.

    실비아는 부드럽게 손사래를 쳤다.

    “어떻게 제가 감히요. 대공비는 대공 각하께서 정하시는 거지요.”

    어린 영애들은 아름다운 실비아를 칭송하며 그녀야말로 대공비 자리에 적합하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다이아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어머, 제가 언제 대공자비님 욕을 했나요?’ 하며 반격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이 뱀 같은 여자들을……’

    그때였다.

    무도회 드레스로 갈아입은 아리엘이 등장한 것은.


    * * *


    아리엘이 지나가는 길마다 멀리서부터 파문이 일었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말을 그쳤다.

    마치 자석으로 끌어당긴 듯 모두 아리엘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데뷔한 소녀가 두 번째 드레스로 갈아입고 오는 것은 사교계에서 즐겁게 여기는 행사 중 하나였다.

    등장 드레스는 모두 하얀색을 입어야 하니, 무도회 드레스로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엘처럼 이렇게 시선을 끈 소녀는 없었다.

    뭉쳐 서서 대공가와 아리엘 이야기를 떠들어대던 영애 무리는 웅성거림이 들려오자, 그 중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빽빽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아리엘이 등장했다.

    순백의 흰 드레스가 아닌, 분홍색의 무도회 드레스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영애들의 입술 사이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난 이제 여한이 없어. 좋은 인생이었다.’

    다이아나는 공작가 여식의 체통도 잊고 그 자리에서 녹아버렸다.


    * * *


    마담 헬렌은 무도회가 열리는 당일까지 아리엘에게도 드레스를 숨겼다.

    공을 들이고 싶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자신의 어린 뮤즈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헬렌의 계획대로 드레스를 오늘 처음 본 아리엘은 놀라고 말았다.

    등장 드레스도 무척이나 예쁘고 섬세했지만, 무도회 드레스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이 들어간 드레스였다.

    속이 비치는 연핑크색 천을 수백번 덧대어 사랑스럽게 물든 분홍색 드레스는 봄의 벚꽃을 떠올리게 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는 로즈 골드빛 금 문양이 화사하게 들어갔고, 중간중간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가 빛을 흩뿌렸다.

    움직일 때마다 사라락 흔들리는 치맛단은 흩날린 꽃잎이 떨어져 내려앉은 듯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 브루노어의 솜씨…….’

    아리엘은 은은한 마법이 느껴지는 드레스 자락을 어루만졌다.

    꽃잎같은 드레스 아랫자락은 브루노어의 마법 때문에 쉼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춤을 추기 위해 움직이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 분명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드레스는 아리엘이 걸고있는 다이아몬드 레이스 목걸이와 세트로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헬렌은 두 드레스 디자인을 모두 관통하는 목걸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아리엘은 숨죽여 말을 꺼냈다.

    “헬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대공자비님께서 입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겐 큰 영광이랍니다.”

    센스 있게 말한 헬렌은 아리엘이 드레스를 갈아입는 것을 돕고, 아이보릿빛 진주 귀걸이를 귀에서 살며시 흔들리는 벚꽃 귀걸이로 바꾸어주었다.

    머리 장식도 화환이 떠오르는 디자인의 티아라로 바꾸었다.

    “서두를게요. 늦으시겠어요.”

    아리엘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볼 새도 없이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란셀 후작 부인을 만나 이쪽으로 걸어온 참이었다.

    홀 안의 모두가 봄의 현신 같은 어린 소녀의 자태에 넋을 잃었다.

    아까 흰 드레스가 순수하고 청초하며 귀여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화사하고 생기있는 사랑스러운 분위기였다.

    영애들 틈으로 들어온 아리엘 옆에서 란셀 후작 부인이 말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 재미있게 하고 계셨답니까?”

    “…….”

    모두가 아리엘에게 정신을 파느라 대답이 없었다.

    색채가 화사한 아리엘이 오자 은빛으로 산들대던 실비아의 미모는 확 죽어서 밋밋해 보였다.

    방금까지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던 그녀이기에 그 대비는 더욱 격심했다.

    이래서야 아리엘이 자라면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기대감만 높여준 꼴이 아닌가.

    고작 열 살짜리 소녀에게 미모로 밀린 실비아는 당황한 나머지 표정관리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음, 음.”

    멍하니 있는 영애 무리 때문에 답답해진 다이아나가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영애들이 허둥대면서 드레스를 들어 올려 인사를 했다.

    “후작 부인. 대공자비님.”

    아리엘은 배운대로 우아하게 아랫사람들에게 취하는 예의를 보였다.

    조금전까지 아리엘을 두고 보고 배운 것 없다고 헐뜯던 영애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보았다.

    다이아나는 고소해서 속으로 웃었다.

    “영애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에 함께 듣고 싶더군요.”

    후작 부인이 유려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대공가 뒷말을 하던 영애들은 당황했지만, 실비아는 금방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 라카트옐 가에서는 언제쯤 안주인 맞이를 하나 궁금해하고 있었답니다.”

    란셀 후작 부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안주인 맞이라니.

    안주인 맞이란, 새로 안주인이 들어오면 사교계의 여자 귀족들을 초대해서 하는 실내 파티였다.

    그 파티의 품격으로 새 안주인을 평가하기도 하는 중요한 의식.

    생애 처음으로 파티에 참가해 본 어린 아리엘이 안주인 맞이를 치를 수 있을 리 없었다.

    겨우 오늘 데뷔한 소녀가 아닌가.

    란셀 후작 부인은 뱀 같은 실비아의 미소를 보고 얼른 혀에 기름칠을 했다.

    “오늘 보셨다시피 대공님께서 아리엘라 대공자비님을 무척 아끼셔서요. 그런 피곤한 일은 허락하지 않으시지요.”

    속뜻을 풀어내자면 이 정도였다.

    ‘대공님이 아끼는 소녀이니까 헛물켜지 말아라.’

    뜻을 단박에 알아들은 실비아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대공비 자리를 노리고 있는 그녀로서는 아리엘이 대공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비아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미혼 영애 중 사교계 서열이 가장 높은 여자였다.

    아름다운 미모, 혼기가 꽉 찬 나이, 좋은 집안.

    지금껏 두려운 것 없이 살아왔던 그녀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가요? 하지만…… 안주인 맞이는 대대로 안주인이 그 집에서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고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일 텐데요.”

    속뜻을 풀자면 이거였다.

    ‘그렇게 아끼는 소녀라면 안주인 맞이를 열어주는 게 맞지 않나? 사실은 대공님의 총애를 못받고 있는 거 아냐?’

    말을 마친 그녀가 비웃듯 미소지었다.

    “물론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요.”

    “실비아 영애. 그런…….”

    란셀 후작 부인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아리엘의 앳되고 낭랑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다들 제가 안주인 노릇을 잘할까 걱정되는 모양이에요, 란셀 후작 부인.”

    “…….”

    순식간에 무리가 조용해졌다.

    아리엘은 실비아와 란셀 후작 부인 사이에 오간 대화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사교계에 들어와 본 적은 없어도 과거 열일곱까지 살았던 경험이 있었고, 다이아나와 후작 부인에게 배워 말의 속뜻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아리엘은 자신을 공격하고자 했던 실비아의 의도를 손쉽게 간파해낼 수 있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들어 영애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들보다 한참 어리고 작은 그녀의 눈빛을 모두가 슬금슬금 피했다.

    ‘그래. 이런 사람들은 과거에도 많이 봤잖아, 아리엘.’

    전투 마법사로 살 때, 그녀는 어린 계집애라고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들은 아리엘이 직접 실력을 보여줘야 꼬리를 말고 물러나곤 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느껴야 입을 다무는 종류의 인간들.

    ‘여기 사교계도 다르지 않은 거야.’

    아리엘은 턱을 조금 들어 올리고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보여주면 되지.’

    마티어스는 그녀가 하는 일은 다 책임져 주겠노라 했고, 루시안은 그의 권한이 다 그녀의 것이라고 했다.

    아리엘이 뭘 하든 괜찮다는 의미였다.

    ‘이참에 라카트옐 가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벗길 수 있다면. 파티도 나쁘진 않을 거야.’

    결심한 그녀는 작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이제 5월이니 곧 장미가 피겠지요?”

    아리엘의 미소에 분위기가 스르르 풀렸다.

    귀여운 소녀의 웃음은 사람들을 누그러뜨리는 힘이 있었다.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저희집 정원에 흰 장미가 가득 핀 장소가 있답니다. 화이트 가든이라는 이름과 참 잘 어울리는 곳이에요.”

    화.이.트.가.든!

    란셀 후작 부인을 포함한 무리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화이트 가든. 이름만 들어본 그곳.

    호화롭고도 은밀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비밀스럽다는.

    대공가의 안주인만을 위한 공간.

    다들 열살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아리엘은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조만간 작은 티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함께 해주시겠어요?”

    “…….”

    모두의 놀란 표정과 함께, 길지 않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실비아를 떠받들고 예찬해대던 영애 중 하나가 양손을 맞잡고 외쳤다.

    “무, 물론이죠! 이걸 안주인 맞이로 볼 수 있겠네요.”

    한 사람이 물꼬를 트자 다들 한 마디씩 보태었다.

    “맞아요. 어떤 형식이든 파티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대공가 안주인 맞이에 초대받다니, 엄청난 영광이에요!”

    급작스레 바뀌어버린 흐름에 실비아가 창백해졌다.

    아리엘은 그녀를 보고 방긋 웃었다. 이런 뜻을 담아.

    나를 열살 코흘리개로 봤겠지만, 사실은 잘못 본 거예요.

    아리엘은 흥분해서 떠드는 영애들을 내버려 두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다이아나에게 살짝 윙크해주었다.

    다이아나는 금방 걱정스러운 얼굴을 거두었다.

    그때, 무도회 홀의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와인을 들이켜던 황제가 기분 좋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왠지 다 알면서 묻는 것 같은 말투였다.

    홀 안의 모든 눈동자들은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것에 시선을 집중했다.

    수십 명의 시종들이 줄줄이 붉은색의 아름다운 튤립 화환을 안고 들어와 외쳤다.

    “라카트옐 대공자님께서 아내분의 사교계 데뷔를 축하하며 보내신 꽃입니다!”

    그 순간 안에 있는 모든 여자들은 ‘어머!’ 하며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 * *


    얼큰하게 취한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먼 요하네스에서 여기까지 보냈다고?”

    시종 중 하나가 정중하게 답했다.

    “예. 게이트를 통해 보내신 후 수도에서 행렬을 하게 하셨습니다.”

    “허어…….”

    데뷔탕트에 참석하지 못한 친척이나 가족, 약혼자가 화환을 보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보통은 꽃다발에서 작은 꽃바구니에 그치지만.

    끝도 없이 들어오는 붉은 튤립의 향연에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향기가 아주 좋군. 내가 알던 그냥 튤립 향이 아닌데?”

    “향기 마법이 걸려있는 꽃입니다. 무도회의 흥을 더욱 돋게 해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교계가 크게 한 번 들썩였다.

    황제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향기 마법은 비싸다.

    한 송이만 마법을 걸어도 비싼데, 저 어마어마한 양의 꽃에 전부 마법이 걸려 있다면?

    이 한 번의 꽃 선물을 위해 엄청난 재물이 쓰였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무도회의 목적에도 어긋나지 않는 선물.

    즐거운 연회가 되도록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향을 넣은 것까지 완벽했다.

    꽃 선물이 올 거라는 언질만 받았던 황제는 턱수염을 쓸며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대공자가 그 정도로 신경을 썼단 말이지…….’

    그는 조금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감탄한 건 황제뿐이 아니었다.

    어린 소녀들은 모두 뺨을 붉히면서 아리엘을 부러워했다.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대공과 함께 입장해서 오프닝 댄스를 춘 것으로도 모자라…….

    남편이 로맨틱한 꽃 선물까지 보내다니!

    아리엘과 함께 있던 무리의 영애들도 동경하는 눈빛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들었어? 수도 행진을 하셨대.”

    “어머나, 첫눈에 반해서 결혼하셨다더니 정말이었나 봐!”

    다이아나와 란셀 후작 부인은 자기 일처럼 으쓱해졌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아리엘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루시안이…… 내 편지를 읽었어.’

    편지를 읽었을 뿐 아니라 기억하고 꽃도 보내주었다.

    그것도 꽃다발 하나가 아닌, 엄청난 양을.

    게다가 꽃은 꼭 그녀의 머리카락 색을 의식한 듯한 붉은 튤립이었다.

    ‘전혀 기대 안 했는데…….’

    아리엘의 마음속이 간질간질해졌다.

    엄청난 꽃의 양이나 비싼 향기 마법보다는 색깔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았다.

    어느새 살그머니 옆으로 온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다이아나는 누구보다도 연애담에 흥분한 모습이었다.

    아리엘은 수줍음을 애써 감추며 속삭였다.

    “그런 거 아니야.”

    루시안이 이렇게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거나, 대공가 위신을 위해서라거나…….

    ‘그래도 기쁘다.’

    그녀만을 위한 꽃은 아리엘을 미소짓게 했다.

    황제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대공자가 아주 로맨티스트로군. 새신랑이 된지 얼마 안 되었으니 오죽할까!”

    “어린 대공자비가 벌써부터 행복하겠어요.”

    황후도 한마디 거들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무도회가 더욱 아름다워졌구먼. 이 영광은 대공자 내외에게 돌리도록 할까?”

    그가 잔을 들어올렸다.

    “아름다운 봄의 신부를 위해 건배.”

    모두가 황제를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건배!”

    아리엘은 그녀를 위한 건배에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황제가 와인 잔을 다시 채우며 박수를 쳤다.

    “자, 그럼 여흥을 마저 즐기세.”

    수십 명의 시종이 가지고 들어온 붉은 튤립의 행렬이 끝나가고, 오케스트라가 다시 음악 연주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잠깐.”

    서늘하고 첨예한 느낌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행렬의 마지막.

    흐드러진 붉은 튤립보다 천만 배는 아름다운 것이 등장했다.

    “……!”

    아리엘은 조그만 분홍빛 입술을 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어온 사람은 이 시각 요하네스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아리엘의 남편.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이었다.


    * * *


    “헉……!”

    대공자 루시안의 등장에 사람들은 모두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놀랐다.

    겨우 아홉 살에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된 루시안은 현존하는 마스터들 중 가장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말하자면 제국의 유명인사인 것.

    게다가 그가 부친 마티어스와는 달리 매우 잔인하고 호전적인 성격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아카데미에 가면서 그가 보여준 행보는 정확히 소문과 일치했다.

    루시안은 그야말로 라카트옐의 표본 같은 이미지였다.

    피와 광기, 파괴와 응징을 사랑하는 바로 그 ‘라카트옐’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건 다른 것이었다.

    다름 아닌, 그의 외모.

    라카트옐 남자들의 빼어난 외양은 건국 기록에도 나와있을 만큼 유명했다.

    기록에 의하면 라카트옐의 피를 이은 남자는 누구나 수려하고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루시안의 얼굴은 그들이 이전에 알던 모든 것을 잊을 만큼 놀라웠다.

    깊은 칠흑의 어둠 같은 흑발.

    대리석같은 흰 피부.

    소년임에도 무거운 위압감을 내뿜는 짙은 푸른색 눈동자.

    지상에 외유하러 내려온 천사같이 아름답고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서늘하게 뻗은 콧날과 오만한 붉은 입술까지 더해지자, 묘하게 관능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사람들은 잠시 그가 악마나 천사, 신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며 넋을 잃었다.

    무도회 홀은 작은 숨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

    갑작스러운 루시안의 등장에 황제마저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까지는 언질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이 뚜벅뚜벅 걸어서 황제 앞에 섰다.

    “본의 아니게 난입이 되어버렸는데.”

    그가 오만한 태도로 까딱 고개를 숙였다.

    “아내가 데뷔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멀리서부터 달려왔으니 양해를.”

    존댓말일 텐데 어쩐지 반말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겠지?

    아리엘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는 경어를 하대처럼 들리게 하는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겨우 제정신을 차린 황제가 다급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못 본 사이 대공자가 무척이나 애처가가 되었구만! 어린 신혼부부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탓할 리가 있나.”

    아직 홀린 상태인 듯한 황후가 거들었다.

    “더구나 아내가 저렇게 예쁘고, 아직 어리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겠어요.”

    황제 부부는 라카트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열심히 대공자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기왕 대공자가 들이닥친 것.

    황제가 그 일을 관대히 허락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황가와 대공가가 더욱 친밀해 보일 테니까.

    사람들을 둘러보며 황제가 친근하게 말을 꺼냈다.

    “다들 대공자와 대공자비의 춤을 보고 싶지 않나?”

    석상처럼 굳어있던 귀족들이 얼떨결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정말 춤이 보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그저 루시안의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으면 족하다는 반응이었다.

    “좋아, 좋아. 자, 그럼 대공자의 춤솜씨를 한 번 구경해볼까?”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루시안이 천천히 사람들을 가르며 아리엘에게 다가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리엘 주변의 영애들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리엘은 눈을 깜박거리며 멍하니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아리엘라.”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이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의 눈가에 촉, 입을 맞췄다.

    그 짧은 순간에 아리엘은 더듬거리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렇게 와도…… 괜찮은 거예요?”

    그대로 고개를 들려던 루시안이 동작을 멈췄다.

    그가 느리게 고개를 낮춰 아리엘의 귓가에 말했다. 위압적인 목소리로.

    “내 아내의 데뷔 날이야. 날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아?”

    음…… 오늘 황제 폐하의 태도를 보니 없을 것 같긴 하지만요.

    “그리고.”

    루시안이 시선을 올려 테라스 쪽 휘장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난 숨어서 지켜보는 짓거리는 적성에 맞지 않아서.”

    “……?”

    아리엘이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보자 그가 픽 웃었다.

    “이리 와.”

    루시안이 아리엘을 가까이 당기자, 음악이 시작되었다.

    오케스트라의 흥겨운 연주가 금방 무도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루시안은 자연스럽게 리드하며 제 손 위에 아리엘의 조그만 손을 겹쳐놓았다.

    다른 귀족들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들 자기 파트너보다는 대공자 부부를 지켜보는데 정신이 홀딱 팔려있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손에 이끌려 홀의 중앙으로 나갔다.

    그와 가까이 붙어 서자 키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아리엘의 키는 루시안의 명치에 겨우 닿을 정도였다.

    루시안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더 작아졌지?”

    “루, 루시안이 커진 거예요.”

    지레 찔린 아리엘이 얼른 대꾸했다.

    “알 게 뭐야. 작아졌는데.”

    윽.

    ‘……나도 컸는데.’

    루시안 쪽이 너무 빨리 크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차이가 커진 것뿐이지.

    하지만 루시안 입장에서는 자신이 작아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 더 반박할 수도 없었다.

    대체 루시안은 왜 그렇게 빨리 크는 건가요……?

    아리엘은 속으로만 한탄했다.

    타란, 타란, 타란. 음악이 조금 더 빨라졌다.

    덩달아 움직여야 하는 스텝도 좀 더 복잡해졌다.

    루시안에게는 춤이 아주 쉬워 보이는 반면, 아리엘은 자꾸만 발동작에 신경이 쓰였다.

    “앗.”

    결국 루시안의 발을 밟은 아리엘이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루시안이 작게 쿡 웃음을 터트렸다.

    “안 밟은 척해.”

    “네?”

    “새끼 고양이 같은 게 지나가봤자 느낌도 없으니까.”

    으윽. 또 놀린다.

    루시안이 팔을 들어 올려 그 아래로 아리엘을 한 바퀴 돌렸다.

    둘은 다시 마주보며 가까워졌다.

    몸이 바짝 붙은 김에 아리엘은 내내 걱정했던 걸 물었다.

    “루시안. 정말 이래도 안 혼나요? 황태자 전하도 아카데미에서 못 나온다는데…….”

    “황족이랑 라카트옐은 달라.”

    루시안이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황족은 규칙을 몰래 어길 수밖에 없지. 어긴 게 들통나면 벌레들이 시끄러워지거든. 하지만 라카트옐은 대놓고 어겨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해.”

    그가 붉은 입술을 비틀며 미소지었다.

    “그러니 대놓고 어겨주는 수밖에.”

    아, 대놓고 어겨……

    아리엘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구나.

    황제가 열심히 옹호해주어서 합법적인 것처럼 넘어가긴 했지만, 루시안이 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건 사실이었다.

    데뷔하지 않은 소년이 무도회에 와서 춤을 췄고, 나와서는 안 되는 아카데미를 탈출했다.

    ‘그런데도 정말 아무 일 없네.’

    자신에게 데뷔 따위 하지 않고 무도회에 가도 된다던 마티어스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친정인 루실리온 후작가도 제법 고위 귀족이었지만, 후작 영식 제롬이 이렇게 행동했다면 사교계에서 매장되었을 것이다.

    아리엘은 다시금 제국에서 라카트옐의 위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빙그르르.

    춤 동작에 따라 아리엘의 핑크색 드레스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기분 좋다…….’

    아리엘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예쁜 옷을 입고 있다는 게 기쁘게 느껴졌다.

    데뷔를 준비하면서 드레스에는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루시안과 함께 춤을 추게 되니 공들여 드레스를 만들어 준 헬렌이 고마웠다.

    아리엘은 목소리를 낮춰서 루시안에게 물었다.

    “루시안. 루시안. 이 드레스 예쁘죠?”

    루시안이 아리엘을 조금 떼어놓고 바라보았다.

    드레스로 내려갔던 시선이 천천히 아리엘의 얼굴로 올라왔다.

    그가 손을 뻗어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툭 건드렸다.

    “그래. 예쁘네.”

    아리엘은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솔직하고 직선적으로 말해주는 건 루시안의 매력이다.

    역시 헬렌은 대단해.

    루시안한테 드레스 예쁘단 소리를 들었잖아.

    이제 아리엘도 거의 헤매지 않고 춤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루시안에게 리드를 맡겨놓으니 춤추는 게 한결 쉬웠다.

    “근데요, 루시안. 정말로 왜 온 거예요?”

    나는 루시안이 와서 좋지만, 오지 못했더라도 괜찮았는데.

    먼 아카데미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아리엘의 물음을 들은 그가 휙 속눈썹을 치떴다.

    “왜 오긴. 네 남편이 나라는 걸 확실히 보여줘야 하니까.”

    “사람들한테요?”

    그렇게 따지면 좀 말이 된다.

    대공가에 새 사람이 들어왔으니 대공가 위신을 세우기 위해 직접 나선 거구나.

    그런데 루시안이 아리엘을 보며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사람들? 내가 그것들한테 신경이나 쓸 것 같나?”

    “그럼요……?”

    그가 오만한 눈빛으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네가 확실히 보라고. 네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 * *


    한 곡의 음악이 드디어 끝났다.

    춤이 끝난 뒤, 루시안과 아리엘은 마티어스와 조금 떨어진 자리로 돌아왔다.

    사교계에 나와서 같은 가문끼리만 뭉쳐있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도회는 계속 이어졌다.

    몸이 약한 아리엘은 조금 쉬고 싶어서 벽 쪽에 기대어 섰다.

    신고있는 구두를 타박거리며 루시안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저…… 루시안. 언제까지 돌아가야 해요?”

    “오늘 밤까지.”

    “네에?!”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늘 하루는 자고 갈 줄 알았는데.

    그리고 마법 게이트를 여섯 개나 지나야 하는데 오늘 밤까진 무리잖아!

    뭐라고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서 아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대공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토레노 공작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공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루시안은 아리엘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붙여놓은 채 눈짓만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그 뒤에도 높은 귀족들이 찾아와서 루시안에게 인사를 했다.

    낮은 가문의 귀족들은 아예 다가오지도 못했다.

    마티어스의 철벽에 가로막힌 귀족들은 어린 차기 대공에게라도 잘 보이고 싶어 했다.

    아까 영애들 무리에 있던 실비아도 부친을 따라 인사하러 왔다.

    실비아는 비얀 후작가의 영애였다.

    실비아가 아까보다 훨씬 비굴한 태도로 머리를 숙였다.

    “존안을 뵈어 영광입니다, 대공자님. 실비아 비얀입니다.”

    후작가 또한 높은 위치임에도, 대공가의 권력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었다.

    루시안은 시종일관 눈짓으로만 성의 없게 인사를 받고는 사람들을 물렸다.

    라카트옐만이 가질 수 있는 오만함이 그에게서 넘쳐 흘렀다.

    거의 무시당하는 거나 다름없는데도 귀족들은 계속 루시안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그림자라도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이 인사를 하고 물러간 다음.

    아리엘은 루시안의 옷깃을 살짝 당겼다.

    “루시안. 인사받는 거 싫었어요?”

    “왜.”

    “그냥, 그런 것 같아 보여서요.”

    “귀찮으니까.”

    “그럼 마티어스님처럼 아예 접근을 못하도록 기세를 내보내면 됐을 텐데…….”

    루시안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며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난 네가 유리한 고지에서 싸우길 원하거든. 그러니 내가 널 싸고돈다는 걸 저것들에게 보여주는 거지. 일종의 위협으로서.”

    어라…… 조금쯤은 날 위해서였던 걸까?

    아리엘은 약간 헷갈려졌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봐서인지 루시안의 외모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리엘은 우월한 미색이 돋보이는 그의 얼굴을 너무 빤히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몰래몰래 보던 그녀는 발견했다. 그가 넥타이를 매고 있지 않은 것을.

    “루시안. 넥타이가 없네요.”

    근데 왜 여태 아무도 몰랐던 거지?

    얼굴만 보느라 몰랐나?

    자세히 보니 넥타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예복 앞섶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꽂혀있었다.

    “넥타이 매야죠.”

    루시안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딴 건 안 매도 상관없어. 내가 안 두르면 그게 관행이 될 거다.”

    “하지만…… 난 그게 관행이 되는 건 싫은걸요.”

    넥타이 한 남자가 더 멋있단 말이에요.

    아리엘이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루시안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워낙 비현실적인 외모라 찌푸리는 것조차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마침내 그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좋아.”

    아리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루시안이 칼같이 조건을 덧붙였다.

    “단, 네가 직접 매주면.”

    사악해!

    내가 넥타이 못 매는 거 다 알면서.

    아리엘은 억울함에 조그만 양 주먹을 꾹 쥐었다.

    루시안이 붉은 입술 끝을 올렸다.

    “맬 줄 모르겠지. 당연히.”

    “읏…… 매, 매주면 되잖아요.”

    아리엘은 한껏 발돋움을 해 루시안의 앞섶 주머니에 처박힌 넥타이를 끄집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란셀 후작 부인에게 물어봐 놓을걸.’

    넥타이 매는 법을 배워놓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후회가 들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요청했다.

    “고개 좀 숙여주세요.”

    “왜. 손이 안 닿나?”

    말투는 비뚜름한데 순순히 고개를 숙여준다.

    아리엘은 넥타이를 그의 목에 두른 다음 끙끙대며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그래. 타이도 그냥 매듭이잖아. 하다보면 쉽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보는 거랑 직접 매는 건 난이도가 천지차이였다.

    아무리 열심히 매듭을 지어보아도 봤던 모양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리엘이 완성한 넥타이는 나비매듭의 변종 같은 끔찍한 모양새였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루시안이 쿡쿡거렸다.

    “다 됐어?”

    “……네.”

    아리엘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거야 원. 오늘 데뷔한 내 아내가 넥타이때문에 망신을 당할 판이군.”

    루시안이 목에 걸린 이상한 매듭을 스르르 풀어냈다.

    “다시 해 봐. 도와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은근슬쩍 협박했다.

    “명령이야.”

    아리엘은 루시안의 말대로 다시 넥타이를 잡았다.

    “엇갈리게 놓고…… 그래. 뒤로 돌려 감아. 위로 빼낸 다음, 고리 사이로 넣고. 매듭부를 가리게 다시 한번.”

    여전히 버벅거렸지만 차근차근 루시안 말대로 따라하자 넥타이 비슷한 모양으로 매였다.

    “어, 됐나? 된 거예요, 루시안?”

    루시안이 입술을 비틀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래.”

    아리엘은 조금 떨어져서 그를 살펴보았다.

    넥타이를 매든 안 매든 예쁜 얼굴이었지만, 웃고 있으니 더 그림 같았다.

    “잘 어울려요.”

    그가 유혹적으로 속눈썹을 움직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다음엔 안 도와줄 텐데.”

    아리엘은 새빨개지며 대꾸했다.

    “무슨…… 나, 나도 루시안 도움 안 받을 거예요.”

    이때, 아리엘은 모르고 있었다.

    넥타이를 매주며 속닥거리는 어린 부부의 모습을 사교계의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사교계에는 난폭하고 잔인한 대공자를 길들인 대공자비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봄 황궁 무도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아리엘 또한 무사히 데뷔탕트를 마쳤다.

    “남편은 최연소 소드마스터고, 아내는 최연소 데뷔탕트 레이디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멋진 데뷔탕트는 처음 봐요.”

    황후는 특별히 아리엘을 불러서 귀한 향료병을 축하 선물로 내렸다.

    아리엘은 ‘이것도 제국에 두 개밖에 없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이번에는 황제가 라카트옐 남자들을 불러 세웠다.

    황제의 앞에 선 마티어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마치 작작 질척대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하…… 요하네스 소식이 궁금하니, 대공자만 잠시 남아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할까.”

    황제가 꼬리를 내려 마티어스 대신 루시안을 붙잡았다.

    ‘폐하, 그거 잘못된 선택이에요.’

    아리엘은 황제에게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갑고 불길한 미소를 머금은 루시안이 먼저 승낙해버렸다.

    “가 있어.”

    “……네.”

    아리엘은 뒤를 돌아 루시안을 몇 번 바라보다가, 마티어스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동그란 유리창 안으로 달빛이 흘러들어오는 마차 안은 고요했다.

    대공가 소유의 마차라서 내부가 무척 호화로웠다.

    반원 모양의 붉은 소파 좌석이 마련되어 있어 아리엘과 마티어스는 조금 떨어진 채 나란히 앉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용히 하나하나 돌아보던 아리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티어스님.”

    “그래.”

    “저, 제가 사실은…….”

    티 파티에 영애들을 초대해버렸는데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괜히 마티어스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런 걸 숨길 수는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작은 파티를 열겠다고 말했거든요. 해도 괜찮을까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물론이다.”

    “정말요?”

    “그런 건 안주인의 권한이니까.”

    휴, 아리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티어스가 그녀의 응석을 받아주듯 허락한 게 아니라 '안주인의 권한'이라고 확실히 이야기해줘서 더 안심이 됐다.

    마음을 놓은 아리엘은 곧 안색을 되찾았다.

    마티어스는 붉은 머리카락의 조그만 소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

    속이 상한 기색이 없군.

    보통의 열 살 아이라면 아까 인간들이 지껄인 말을 듣고 울음을 터트려도 모자랐을 터인데.

    사교계는 원래 비밀이 없는 곳이었다.

    드레스를 갈아입고 돌아온 아리엘이 그 사이에 퍼진 소문을 알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가 후작의 친자가 아니라거나, 대공가의 안주인에게는 단명의 저주가 내린다는 소문.

    어려서 집안 관리를 제대로 못할 거라는 무시까지.

    초월적인 감각을 지닌 마티어스는 인간들이 아리엘에 대해 떠드는 모든 말들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아리엘이 소문을 전해듣는 것도 똑똑히 들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마티어스는 헛소리를 지껄인 인간들의 이름을 모조리 알아내 둔 참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며 생각했다.

    ‘뭐…… 아리엘이 초대하기로 했으니 파티까지는 내버려 둘까.’

    도망가지도 못할 벌레들이니 언제고 눌러 죽이면 되겠지.

    분노한 마티어스와 달리 아리엘은 슬프거나 화난 티를 조금도 내보이지 않았다.

    마티어스가 물었다.

    “오늘. 힘들지 않았나?”

    아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달콤한 루비같은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힘들긴 했지만…… 마티어스님이랑 춤췄던 거랑, 루시안이 꽃 보내준 거, 다이아나랑 파티에서 만난 거 모두 다 즐거웠어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는 뺨을 붉힌 채 사르르 미소지었다.

    “같이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저 혼자였으면 못 왔을 거예요.”

    “…….”

    마티어스는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강하군. 이 애는.

    그는 손을 뻗어 천천히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은 기분 좋은지 그녀가 수줍어하면서도 마티어스 쪽으로 당겨 앉았다.

    마티어스는 무뚝뚝한 어조로 당부하듯 말했다.

    “넌 언제든 내 뒤에, 루시안 녀석 뒤에 숨을 수 있다. 그것만 알아둬라.”

    “……네.”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왠지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마티어스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마티어스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네 온실이 완성되어가고 있다. 안에 석류나무를 심었지.”

    “석류요?”

    “그래. 석류의 속열매가 네 머리 색과 닮았으니까.”

    “…….”

    아리엘은 석류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책에서만 읽어보았을 뿐.

    루시안은 붉은 튤립, 마티어스님은 석류……

    오늘은 선물이 많구나.

    “온실이 넓으니 석류 정원말고 다른 것도 만들 수 있을 거다.”

    아리엘도 새로 짓고 있는 온실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건 온실이라기보다는 유리 궁전에 가까웠다.

    “그럼, 마티어스님. 이번에 티 파티를 할 때 온실에서 해도 되나요?”

    “당연히.”

    짧게 허락한 그가 덧붙였다.

    “화이트가든을 구경하고 싶다면 온실로 이어진 길만큼 완벽한 길은 없을 테니까.”

    아리엘은 마차 바닥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로 조그맣게 발장구를 쳤다.

    “석류는 처음이에요. 제국에서 보기 드문 과실이라고 들었는데.”

    “이제는 다 네 것이지.”

    마티어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달빛이 긴 흑발 머리의 무뚝뚝한 미남자를 비추었다.

    “종자를 들여오면서 열매도 함께 들였으니, 하녀장에게 말해서 네 식사에 올려주마.”

    “네!”

    아리엘은 본 적 없는 붉은 열매를 상상하며 활짝 웃었다.


    * * *


    마차가 라카트옐 가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수잔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어머. 아기 마님이 잠드셨네요.”

    고단한 하루를 보낸 아리엘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제가 안아 내릴까요?”

    “아니. 내가 데려가지.”

    수잔을 막은 마티어스가 잠든 아리엘을 안아 들었다.

    주인의 귀가에 달려 나오던 사용인들이 아기 천사처럼 잠든 아리엘의 모습을 보고 발소리를 죽였다.

    마티어스는 복도를 지나 분홍색 일색인 아리엘의 방 침대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아리엘은 뒤척이지도 않고 고른 숨소리를 냈다.

    마티어스는 잠시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잠든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이마에서부터 귓가까지 쓸어넘겨 주었다.

    또래보다 작고 마른 소녀는 잠들었을 때 더 앳되어 보였다.

    그때. 창문으로 휘잉, 한줄기 찬 바람이 들어왔다.

    “…….”

    동작을 멈춘 마티어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루시안이 창틀에 앉아있었다.

    “손 떼.”

    루시안이 기세를 누르며 말했다.

    마티어스는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깬다. 조용히 해.”

    “…….”

    루시안이 맹수 같은 눈으로 날카롭게 침묵하자 마티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밤에 돌아오다니. 무슨 생각이었지?”

    마티어스의 질문을 들은 루시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더 참고 싶지 않았거든.”

    마티어스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비쳤다.

    루시안이 날 선 기세를 확 방출했다.

    “그러니까 꺼져.”

    마티어스는 누워있는 아리엘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곤해하니 조용히 있다 돌아가라.”

    끼이익. 달칵.

    마티어스가 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사라지자 방 안에는 오직 정적만이 남았다.

    루시안은 잠든 어린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가 이내 힘을 풀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서늘한 손끝이 아리엘의 뺨에 난 보송보송한 솜털을 따라 그리다 떨어졌다.

    “내가 겨우…… 인간들의 무도회 따위에 쫓아갈 줄은 몰랐지.”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이상해. 아리엘라 넌.”

    그깟 편지가 뭐라고 자신이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 딱 한 번이었다. 아리엘의 편지를 받은 것은.

    그런데 지금껏 눌러 놓았던 것이 그 순간 폭발해서 이렇게 돌아오고야 만 것이다.

    대륙의 끝에서 중앙까지. 게이트를 여섯 개나 넘어가면서.

    하루도 채 머물 수 없는데, 그저 이 얼굴 하나 보겠다고.

    “이상하다고.”

    그가 연거푸 말했다.

    소리가 들렸는지 아리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그만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작은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루시안은 그 물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보냈던 붉은 튤립의 꽃잎 한 장.

    어찌나 계속 쥐고 있었는지 아리엘의 손바닥 중앙에 붉은색 꽃물이 들어있었다.

    “……하.”

    루시안이 제 머리를 움켜쥐며 짧게 신음했다.

    한참만에 입을 뗀 그가 잇새로 낮게 말했다.

    “어쩔까. 돌아가서 그 놈을 죽여버릴까? 감히 네가 있는 테라스에 들어왔잖아.”

    어둠 속에서 그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냈다.

    “그놈이 황태자든 뭐든 상관 안 해. 황가와 전쟁을 해야 한다면 기꺼이 하지. 어차피 그놈들이 이기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루시안의 시선이 베개 위에 흐트러진 아리엘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가 사르륵 떨어뜨렸다.

    “아, 그리고 벌레들이 이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 비웃었댔지. 그것들도 다 죽여줄 수 있어. 쉽지.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피로 바다를 만들고도 남을 거야. 피에 젖어 그것들도 다 붉은 머리가 되겠지. 어쩔까?”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가 스멀스멀 뻗어 나왔다.

    그의 방식대로 처리하자면 오늘 무도회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엘을 본 눈, 아리엘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 것들, 아리엘의 이름을 담은 입술들.

    루시안의 살기가 베일 듯 날카로워졌다.

    그때였다.

    “으음…….”

    아리엘의 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흘러나왔다.

    아리엘이 짧은 팔로 베개를 끌어안으며 배싯 웃었다.

    “루시안…….”

    한계를 모르고 뻗어 나가던 루시안의 살기가 멈칫했다.

    형체가 보일 듯 공간을 가득 채우던 살기는 연기처럼 다시 소년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내 그에게서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실소가 흘렀다.

    “정말…… 못 이기겠군.”

    그는 고개를 숙여 아리엘의 꽃물 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잘 자. 내 크림슨 하트.”

    밤 인사를 건넨 루시안은 들어올 때처럼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려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 스치듯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아리엘은 칭얼거리며 이불을 끌어다 덮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고 나서야 아리엘은 루시안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루시안이 새벽에 돌아갔다고요?”

    “네, 아기 마님. 대공자님은 이미 아카데미에 계실 거예요.”

    “…….”

    아리엘은 아침식사로 나온 맑은 토마토 수프를 먹다 말고 시무룩해졌다.

    ‘인사도 못했는데…….’

    어제 일이 꼭 꿈같이 느껴졌다.

    사실은 루시안이 꽃을 보낸 것도, 직접 온 것도 다 꿈이었던 거 아닐까?

    그 합리적 의심은 화병에 가득 꽂힌 붉은 튤립을 보자 곧 사그라들었다.

    ‘그래. 내 상상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날 리가 없지.’

    아리엘은 수프에 들어간 부드러운 닭고기 조각을 오물거렸다.

    진한 치킨 스톡이 느껴지는 수프와 담백한 고기가 토마토를 만나 산뜻하게 어우러졌다.

    ‘그나저나 새벽에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묘하게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것이 애매한 기분이지만 분명 별 꿈 아니었을 것이다.

    아리엘은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흰 빵을 토마토 수프에 콕 찍어 냠, 입에 집어넣었다.


    * * *


    오후가 되자 다이아나가 찾아와서 어제 있었던 데뷔탕트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다들 네 얘기로 난리야! 미혼 영애들 중에 아리엘, 널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니까.”

    다이아나는 마치 자기 일처럼 뿌듯해했다.

    아리엘은 천장에 매달린 둥근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이아나는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아리엘의 드레스와 장신구, 대공가 남자들과의 춤, 황후의 선물까지.

    “황후 마마께서 주신 그 향료있지? 내가 듣기로, 그거 지난달에 프라키아 지역에서 두 병 바친 거라더라. 3년에 한 병밖에 안 난대.”

    진짜 제국에 두 병만 있는 거였다니!

    그냥 상상만 했던 건데……

    아리엘은 입을 뻐끔거리며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황녀 마마께서 안 계셔서 마지못해 너한테 주신 거라고 떠들어대는 못된 계집애들도 있는데, 그거 잘 모르는 소리야.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황가에 아무리 나눠줄 사람이 많아도 대공가 안주인이 먼저라더라. 어떨 땐 황후 마마께서도 가지시지 못한 걸 대공가에 내리는 경우도 있대.”

    “어째서?”

    라카트옐이 대체 뭐기에?

    “그야……!”

    다이아나가 그제야 고개를 갸웃했다.

    “음, 라카트옐이 제국의 수호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기에 다이아나는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얼른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리고. 네 목걸이 디자인있잖아? 그거 완전 유행이 될 것 같아!”

    아리엘이 데뷔 무대에서 걸고 나온 다이아몬드 레이스 목걸이는 온 사교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어린 영애부터 나이 든 귀부인까지 모두 다음날 아침부터 의상실에 모여들어 그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바빴다.

    내로라 하는 의상실 디자이너들은 눈에 불을 켜고 비슷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대마법사 브루노어만큼의 마법 실력을 가지지 못한 그들이 만들어 낸 건 값싼 모조품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게 얼마나 잘 팔린다고. 내 주변 영애들은 다 그 목걸이를 갖고 싶다고 부모님을 조르고 있어. 네 것이 훨씬 예쁘지만, 어떻게든 따라 해보고 싶나 봐.”

    한동안 볼드하고 무거운 목걸이가 유행했었는데 아리엘을 계기로 유행이 바뀌고 있었다.

    무작정 크고 굵은 것이 아니라, 작은 보석이 얇은 줄로 찰랑거리는 가녀린 디자인으로.

    다이아나는 이어 어제의 '티 파티 초대' 사건도 언급했다.

    “그게 다 실비아 후작 영애 그 뱀 같은 여자 때문이야!”

    다이아나가 팔짱을 끼고 씩씩거렸다.

    “그 여자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바람에…… 내 아리엘이!”

    “괜찮아, 다이아나.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는걸.”

    “그래도! 괘씸해 죽겠어.”

    다이아나는 자신이 아리엘 편을 들 기회를 놓친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실비아 그 여자는 지금 미혼 영애들 중 사교계 서열이 가장 높아. 혼기가 꽉 찬 나이거든. 비얀 후작가도 공신 가문이고.”

    다이아나는 실비아가 비어있는 대공비 자리를 노리고 혼담을 다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괜히 아리엘 마음을 어지럽힐 필요는 없겠지.’

    다이아나는 상냥하게 아리엘에게 말했다.

    “아무튼 티 파티 준비하면서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 이 ‘언니’한테 말하렴. 뭐든 도와줄게.”

    다이아나의 진심어린 말을 들은 아리엘은 가느다란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응! 다이아나. 고마워.”

    ‘귀여워!’

    순간 다이아나는 이대로 아리엘을 납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전율했다.


    * * *


    다이아나는 금방 돌아가야 했다.

    어머니인 공작 부인과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 있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친구를 배웅한 아리엘은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지는 앞뜰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원에 가득한 꽃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와!”

    루시안이 선물한 것과 같은 종의 빨간 튤립 꽃 수천수만 송이가 정원에 가득 심겨 있었다.

    아리엘은 곧장 정원사 우즈에게 달려갔다.

    “우즈, 우즈. 이 튤립 어떻게 된 거예요?”

    말수 적은 우즈가 고개를 느리게 꾸벅여 인사하고는 대답했다.

    “대공자…… 님께서.”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시안이?’

    꽃 선물로도 모자라 그녀의 방에서 잘 내려다보이는 정원 쪽에까지 튤립을 가득 심어놓다니……?

    아리엘은 자세를 낮춰 튤립 꽃잎을 쓰다듬었다.

    마음이 콩닥거렸다.

    “꽃이 참 예뻐요.”

    “아기 마님도…… 예쁘십니다.”

    한 문장을 다 말하는 걸 좀처럼 듣기 어려운 우즈의 말에 아리엘은 활짝 미소지었다.

    “우즈의 말이 더 예쁜걸요. 고마워요, 우즈.”

    그녀는 우즈와 헤어져서 정원 산책을 계속했다.

    정원 가득 아름다운 붉은 꽃이 만발해 있었다.

    타박타박 걷던 아리엘은 잠시 멈추어 서서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는 붉은색을 정말 싫어했었는데……’

    과거의 그녀에게 붉은색은 재앙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타고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했다.

    아버지 루실리온 후작은 아리엘에게서 머리카락이나 피처럼, 붉은 것을 볼 때마다 어린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렇게 자란 아리엘이 자신의 색깔을 사랑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법사 무리에 들어간 뒤에는 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살았다.

    달콤한 루비같은 눈동자도 마법으로 색깔을 감추었다.

    불꽃, 딸기, 장미꽃…….

    그 어떤 붉음도 아리엘에게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가에 와서 살면서 그녀는 바뀌었다.

    따스한 벽난로의 불꽃을 사랑하게 됐고, 영롱하게 빨간 딸기를 좋아하게 됐다.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의 꽃…….

    루시안은 그냥 빨간 꽃이 예뻐서 선물한 게 아니었다.

    붉은색이 아리엘의 색이기 때문에 일부러 붉은 튤립을 선택해서 선물한 거였다.

    사람들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리엘을 후작 부인이 부정하게 낳은 아이일 거라고 흉봤지만, 루시안은 보란 듯이 붉은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무도회를 가득 채우도록 만들었다.

    아리엘이 가진 붉은색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 자체를 보여주려는 듯이.

    그것을 깨닫자 아리엘의 작은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정원 산책을 마친 뒤, 아리엘은 덩굴 등나무 그네에 앉아서 레몬 조각을 동동 띄운 레몬수를 홀짝였다.

    수잔이 우유 푸딩으로 만든 케잌을 가져와 후덕한 솜씨로 크게 잘라주었다.

    아리엘의 호위인 헥터와 랄프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헥터.”

    아리엘이 헥터를 부르자, 몸집이 산채 같은 헥터가 드럼통만한 물통을 꿀꺽꿀꺽 비운 뒤 아리엘에게 달려왔다.

    “예. 아기 마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든 말씀하십쇼.”

    호쾌하게 말한 헥터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그 자신만만한 몸짓에 아리엘은 배시시 웃었다.

    “루시안 어린 시절에 대해 듣고 싶어요. 말해줄 수 있나요?”

    헥터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말씀드릴 수 있지요.”

    아리엘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 * *


    “제가 푸른 사자 기사단에 들어온 건 그러니까…… 14년? 정도 전이었습죠. 들어온지 얼마 안 돼서 대공비님의 장례식이 열렸을 겁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캄캄한 날이었구요.”

    아리엘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전 대공비가, 그러니까 루시안의 모친 되는 사람이 아기를 낳다가 명을 달리했다고.

    아리엘의 엄마인 블랑쉐 후작 부인도 그녀를 낳다가 죽었기에 그런 일들이 제법 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헥터에게서 그 날의 풍경을 듣자 스산한 슬픔이 느껴졌다.

    “저는 용병 출신이라, 그땐 어울리는 사람도 없고 겉돌아서요. 그날도 혼자 있다가 장례식 가는 무리와 떨어졌습죠. 근데 장소를 모르겠는 겁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라카트옐 가가 지닌 고유의 기사단이었다.

    라카트옐 가의 가주를 주군으로 모시는 기사단인만큼 대공비의 장례식에는 꼭 참석해야 했다.

    “헤매다가 저택 하인들한테 물어보려고 들어갔었습니다. 근데 이 넓은 저택에 사람은 없고 으스스한 바람 소리만 들리는 게…… 하핫, 꼭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습죠.”

    아리엘은 이 넓은 저택이 텅 빈 채 어두컴컴한 것을 상상해 보았다.

    생각만으로도 오슬오슬한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헥터의 어조가 조금 은근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사람을 찾아 다니다가 우연히 안쪽 깊은 곳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말입니다…….”

    “네.”

    아리엘은 긴장하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거기에 글쎄…… 귀신이!”

    “깜짝이야!”

    헥터가 갑자기 목소리를 키우는 바람에 놀란 아리엘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으으, 헥터…….”

    짖궂게 웃은 그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귀신이 아니라 아기였습죠. 제 주먹보다 조금 큰, 쬐끄만 사내 아기.”

    헥터가 제 바위만한 주먹을 들어올렸기 때문에, 쬐끄마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렸지만 아리엘은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있었다.

    “그게 루시안이었군요!”

    “예. 새까만 머리카락에 푸른 눈의 아기였습니다. 연하고 탁한 하늘색 눈이었죠.”

    하늘색?

    ‘지금이랑은 다르네. 어릴 때는 눈색이 달랐던 걸까?’

    헥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제가 아기를 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만…… 도통 아기같지 않은 눈이었어요. 소드마스터인 제가 핏덩이한테 공포를 느낄 정도였으니까 말입죠. 한참 눈을 뗄 수가 없었다니까요.”

    루시안은 어렸을 때부터 좀 무서웠나봐…….

    “근데 자세히 보니 숨소리도 거칠고 곧 숨넘어갈 것처럼 아파보이지 뭡니까. 주변에는 아기를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요.”

    “……?”

    아리엘은 조그만 미간을 찌푸렸다.

    14년 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아는 라카트옐 가는 아픈 갓난아기를 내버려두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기가 방치될 수 있었을까?

    하지만 헥터는 거짓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솔직해서 사람을 당황시킬 정도인걸.

    그때, 아리엘의 직감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혹시, 루시안이 혼자 있었던 게 대공가의 비밀과 관련이 있는 건가……?’

    비밀과 관련이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헥터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제가 들여다보니까 저와 눈을 딱 마주치는데,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기가 쫙 빨리는 느낌이 났습죠. 그리고 진짜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목소리를 낮추며 그가 말했다.

    “갑자기 대공자님 눈동자 색이 바뀐 겁니다. 탁한 하늘색에서, 맑고 진한 푸른색으로요!”

    헥터가 커다란 덩치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기들 눈 색이 크면서 바뀐다는 얘기는 용병단에 있을 때 들어본 적 있지만, 그렇게 찰나에 바뀌는 건 처음 봤습죠. 암요!”

    무슨 마법 같았다니까요!

    한참 신나게 떠들던 그의 눈이 약간의 추억에 잠겨들었다.

    “뭐, 다행히 대공자님은 금방 건강한 아기가 돼서 저택의 망나…… 아니, 저택의 말썽꾼이 되셨지요. 너다섯 살 무렵쯤엔 푸른 사자 기사단으로 와서 검을 드셨고요.”

    방금 망나니라고 하려고 했죠, 헥터.

    아리엘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의 어두운 기분이 사라졌다.

    더불어 자신보다 어린 루시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았다.

    루시안은 아기 때도 엄청 예뻤겠지?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헥터.”

    “아직 대공자님이 사고 치신 이야기는 3박 4일분도 더 남았는데요. 하핫!”

    아리엘은 두 손을 꼭 모아쥐고 눈을 반짝였다.

    “그것도 언젠가 꼭 듣고 싶어요.”

    그럼 루시안이 놀릴 때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아리엘은 레몬수 밑바닥에 깔린 투명한 젤리를 스푼으로 퍼먹으며 몰래 웃었다.


    * * *


    간단한 티 파티라도 라카트옐 대공가의 이름이 붙은 이상, 간단한 게 아니었다.

    란셀 후작 부인은 파티에 초대할 사람들을 고르느라 진땀을 뺐다.

    초대인원에 대해 묻기 위해 좀처럼 만나기 힘든 마티어스에게까지 찾아갔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마티어스는 위압적이게 눈을 내리뜨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개나 소나 우리 애를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안 퍼지게 잘해.”

    란셀 후작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일단 모니카 공작가의 다이아나를 초대 목록 1번에 올렸다.

    ‘다이아나 영애가 있으면 아리엘님도 안심하실 테니까.’

    그 다음으로는 아리엘이 초대하겠다고 말했던 영애들을 포함시키기로 했다.

    '개나 소나'에 포함되는 영애들이긴 하지만 아리엘이 직접 초대했으니 꼭 불러야 했다.

    다음으로는…….

    “하아.”

    란셀 후작 부인은 수백 명이 넘는 백작가 이상의 귀족 영애들 리스트를 훑어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규모가 큰 파티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 자리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대공가에서 마지막으로 파티가 열린 지 15년도 넘었으니, 사교계는 지금 굳게 닫힌 라카트옐 저택 속 부와 권력에 눈이 시뻘겋겠지.

    ‘아리엘님이 피곤해하시지 않도록 최대한 내 선에서 걸러야겠어.’

    란셀 후작 부인은 남편의 인맥을 동원해서 영애들 뒷조사를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 초대 목록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아리엘도 제법 할 일이 많았다.

    ‘티 파티로 안주인 맞이를 대신하기로 했으니까.’

    그녀는 예전에 수잔이 해줬던 말대로 안주인의 손길이 느껴지도록 집안과 정원을 꾸미기로 결정했다.

    그러려면 저택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리엘은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티 파티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녀, 하인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일만 하는 것보다는 이번 파티가 어떤 의미인지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큰 파티는 아니지만, 안주인 맞이 대신으로 하는 거라 신경 쓸 게 많을 거예요.”

    저택의 귀염둥이 꼬마 마님이 '안주인 맞이'를 하게 됐다는 소식에 사용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사용인들의 세계에서도 안주인 맞이는 민감한 것이었다.

    안주인 맞이를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모시는 마님의 대외적인 평가가 달라졌으니까.

    그들도 안주인 맞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리엘은 계단 몇 개 위에 올라가서 그들과 시선을 맞추고 차분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나이가 어려요. 그래서 모두의 도움이 필요해요.”

    실비아 영애의 말대로 그녀에게는 보고 배울만한 어머니가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그렇지만 루시안에게 아내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적어도 대공가 이름에 모자란 파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도움 청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주인이 해야 할 일까지 미루지는 않을 거예요.”

    안주인의 몫은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장식은 어떻게 할지, 음식은 무엇으로 할지, 음악과 분위기는 어떻게 할지.

    그리고 아리엘이 정한 뒤에 그것을 준비하는 것은 사용인들의 몫이었다.

    그 일을 지휘하는 건 하녀장과 집사, 주방장의 몫이고.

    “내가 결정해줘야 할 것이 있다면 꼭 말해줘요. 여러분이 하는 일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할 테니까요.”

    행사가 무사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부터 맨 위의 결정권자까지 서로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아리엘은 그것을 과거 마법사 무리에서 지내며 배웠다.

    비록 그녀는 저택 일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사소한 것이라도 최대한 많이 경청하고, 돕고 싶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나한테 물어도 괜찮아요. 자신이 하는 일이 뭘 위해서인지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리엘은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우리 집 사용인들을 존중하는 만큼 우리 집 사람들의 유능함이 보일 테니까요. 맞죠?”

    어린 아기 마님의 입에서 나온 깜찍하고 어른스러운 말에, 사용인들은 순간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병아리 같은 우리 아기 마님께서 이토록 생각이 깊으시다니!’

    “…….”

    그들이 놀라움에 침묵하자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혹시 내가 너무 이상하게 말했나?’

    그녀는 마지막으로 핵심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아리엘은 사용인들을 한 차례 둘러본 뒤에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팀이라는 뜻이에요!”

    “……!”

    사용인들의 가슴 속에 찡함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감동의 시선을 교환했다.

    ‘아기 마님께서 우리 모두를 아기 마님 사람으로 여겨주셨어!’

    사용인들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최고로 위신을 세워드리자!’

    그날부터 라카트옐 가 사용인들은 으쌰으쌰 함께 힘을 합쳐 아기 마님의 티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아리엘은 정원과 집 안을 차근차근 꾸며 나갔다.

    티 파티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먼저, 주방장 홀슨과 수잔의 이야기를 참고해 가며 홍차 종류와 티 푸드를 정했다.

    그 후에는 음식과 차를 담아낼 식기와 다구를 신중하게 골랐다.

    손님들에게 들려서 돌려보낼 작고 예쁜 선물은 다이아나와 상의했고, 음악은 노집사 알렌과 상의했다.

    아리엘이 복도를 지나가면 하녀, 하인들은 하던 일을 접어두고 달려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아기 마님, 이 은방울꽃 리스 정말 예쁜 것 같아요. 안목이 출중하셔요.”

    “웬디가 예쁘게 봤다면 나도 기뻐.”

    아리엘은 칭찬해준 하녀에게 방긋 웃어보였다.

    그러자 웬디라는 하녀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왜 그래, 웬디? 어디 아픈 거야?”

    겨우 이성을 되찾은 웬디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뇨, 그냥…… 아기 마님께서 너무…… 너무 귀여우셔서요. 품에 꽉 끌어안고 마구 쓰다듬고 싶은 걸 참느라.”

    아리엘은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려는 걸 누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쓰다듬는 건 안 돼, 웬디.”

    그녀는 웬디에게 총총 다가가 말했다.

    “대신 내가 꼭 안아줄게.”

    아리엘은 웬디를 폭 안아주었다.

    그 광경을 본 하녀들이 꺄아꺄아 외치며 너도나도 귀여운 아기 마님의 애정을 얻겠다고 몰려들었다.

    아리엘은 얼결에 몇 명을 안아주고, 또 다른 몇 명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이가 훨씬 어린 자신이 어른들 머리를 쓰다듬는 게 기분이 이상했지만 다들 기뻐해서 고개만 갸웃거리고 말았다.


    * * *


    티 파티 준비로 아무리 바빠도 아리엘은 마법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실력이 느니까 오히려 수업 시간이 기다려지고 재미있었다.

    브루노어는 아리엘이 물, 불, 바람, 흙 네 가지 원소를 각각 다룰 수 있도록 가르친 뒤에 원소들을 섞어서 사용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불 원소를 이용해서 물을 끓이는 법, 바람 원소와 불 원소를 섞어서 따스한 바람을 만드는 법…….

    원소 마법에 재능이 뛰어난 아리엘은 원소들의 기분을 자기 기분처럼 느낄 수 있었다.

    자신들을 알아주는 마법사를 만난 원소들은 달려와 애교를 부리고, 아리엘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칫. 넌 대체 언제쯤 마법을 잘하게 되는 거야?”

    브루노어의 손자이자 조수인, 자칭 대마법사 후보 히스는 항상 자기가 아리엘보다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고 툴툴댔지만 성실하게 아리엘의 연습상대가 되어주곤 했다.

    “네 연습 상대하는 거 귀찮단 말이야.”

    “하지만, 우리 거래했잖아. 히스.”

    “으…… 그건 그렇지만.”

    한바탕 마법 연습을 끝내고 간식 먹는 시간이 되었다.

    할 말이 있는 듯 아리엘 쪽을 힐끔거리던 히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뭔가 못마땅한 듯 나뭇가지로 땅을 긁고 있었다.

    “있잖아. 괴물이랑 사는 거 힘들지 않아?”

    “괴물?”

    “그래. 네 남편. 라카트옐 남자들은 다 괴물이잖아.”

    아리엘은 눈을 깜박였다.

    “괴물 같은 거 아닌데.”

    “괴물 맞아.”

    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리엘은 볼을 잔뜩 부풀렸다.

    “아니야. 그렇게 예쁜 괴물이 어디 있어?”

    “윽.”

    당황한 듯 히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너, 너 예쁘다고 다 착한 건 아니다! 예뻐도 나쁠 수 있는 거다!”

    “왜 화를 내고 그래?”

    아리엘은 과잉 반응을 보이는 히스가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한참 씩씩거리던 히스가 말했다.

    “아무튼, 이 집안 남자들은 이상해. 소드 마나를 타고 나는 것도, 비밀이 많은 것도. 할아버지, 흠흠, 아니 스승님한테는 물어봐도 대답 안 해주고.”

    스승님이라고 안 부르고 꼬박꼬박 할아버지라고 부르다 시도 때도 없이 지팡이로 얻어맞곤 하는 히스는 브루노어가 없는데도 눈치를 보며 호칭을 바꾸었다.

    잠깐 침묵하던 아리엘이 턱을 괴고 초연하게 중얼거렸다.

    “비밀이 있을 수도 있지. 그게 뭐가 문제라고 그래.”

    히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부부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어떡하냐?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결혼한 거야?”

    “…….”

    아리엘은 열 내는 히스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진짜 부부라면 히스 말대로 서로 비밀이 있다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루시안은 계약 결혼을 한 사이였다.

    그 계약에 서로 비밀을 만들지 말자는 조항은 없었다.

    아리엘도 지키고 싶은 비밀이 있었기에 그녀는 루시안의 비밀을 굳이 캘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대공가 비밀을 감당할 자신도 없고.’

    히스가 답답한 듯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뒤 말했다.

    “넌 네 남편 정체가 뭔지 궁금하지도 않아? 뭔가 흑막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 물음에 대한 아리엘의 대답은 명확했다.

    “응. 안 궁금해. 흑막이 있다 해도 안 궁금해.”

    “너……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니야?”

    이제 히스는 거의 경악한 어조였다.

    하지만 아리엘은 자신이 무방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과거에 루시안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루시안은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 줬는걸.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네 모습 그대로…….”

    히스가 아리엘이 한 말을 되뇌었다.

    늘 어린애 같기만 하던 히스의 눈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네 모습 그대로라는 게 뭔데?”

    “…….”

    아리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히스 예리하네.’

    그녀가 말하는 '내 모습 그대로'는 현재가 아니었다.

    과거, 회귀하기 전의 모습이었다.

    악당 무리에 속해서 무작위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어린 전투 마법사.

    시커먼 망토로 붉은 머리카락을 숨긴, 비쩍 마르고 병색이 짙은 소녀.

    루시안은 그녀의 인생이 최악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을 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도와주겠다고 했다.

    ‘잡아.’

    그리고 그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다.

    무력하게 얻어맞아서 복종하거나, 조종당해 억지로 한 선택이 아니었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 뒤에 곧장 죽었음에도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결국, 그녀를 구원한 건 루시안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비밀 같은 건 아리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루시안의 정체가 뭐든.

    루시안의 진짜 모습이 뭐든.

    그것 때문에 아리엘이 실망하고 그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실망할 것도 없는걸.’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계약 관계 이상을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확실한 건 그녀가 루시안의 마법사라는 것 한 가지뿐.

    그러니까 루시안이 뭘 숨겼든 그녀와의 신뢰를 저버리는 건 아니었다.

    ‘꼭 필요하다면 루시안이 알려주겠지.’

    아리엘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대공가에 와서 본 이상한 점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4층에서 뛰어내려도 털끝 하나 다치는 법 없는 루시안.

    십대 중반의 아들을 가졌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마티어스의 외모.

    대공가 남자들을 '사자', 다른 사람들을 '개미'라고 칭하는 집사 알렌.

    이번에 헥터가 해준 이야기도 범상치 않았다.

    ‘대공자님 눈동자 색이 바뀐 겁니다. 탁한 하늘색에서, 맑고 진한 푸른색으로요!’

    ‘갑자기 눈 색이 변했다고 했지.

    그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 거야.

    그런 건 보통 마법이 개입된 경우니까.’

    또, 소드 마나를 검에 두르지 않고도 쓸 수 있는 대공가 남자들의 능력도 신기했다.

    ‘루시안은 자기들 혈관에 우월한 피가 흘러서라고 말했었고…….’

    생각이 흐르는대로 내버려두던 아리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냐. 이런 생각해서 뭐해. 알려고 들지 말자.’

    그녀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화제 전환을 했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히스. 그건 그렇고 이번 티 파티에 마법등을 하나 놓으면 어떨까? 마나로 켜져서 색이 여러개로 바뀌는.”

    아리엘이 말을 돌리자, 히스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물건에 마법 거는 거야 식은 죽 먹기이긴 한데. 마나로 빛을 지속시키는 게 문제겠네.”

    이전부터 아리엘이 아이디어를 내면 히스가 뚝딱 만들어낸 적이 많았으므로 아리엘은 히스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히스라면 할 수 있잖아.”

    그 말을 들은 히스가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이런 말에 쑥스러워하는 걸 보면 딱 그 나이 대의 소년 같았다.

    “무, 물론! 할 수는 있지. 난 대천재 마법사님이니까. 좀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그럼 히스가 마법등 만들어줄래?”

    “내가 왜!”

    “부탁이야. 만들어 줘, 히스. 응?”

    아리엘은 손을 얼굴 아래에 받치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히스를 바라보았다.

    “됐거든! 윽…….”

    결국 아리엘의 눈빛 공격을 이기지 못한 히스가 홱 팔짱을 꼈다.

    “좋아! 나 참, 귀찮구만. 이건 절대 네가 부탁해서 해주는 거 아니다! 어…… 그래, 머핀! 이 머핀이 맛있어서 해주는 거야.”

    그는 건포도가 듬뿍 박힌 미니 머핀을 붕붕 휘두르며 외쳤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아리엘은 너그럽게 미소지으며 분홍빛 산딸기 머핀을 얌 깨물었다.

    복잡한 비밀과는 달리 촉촉한 머핀은 참 달고 부드러웠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새 티 파티 날이 되었다.

    티 파티는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위해 지은 거대한 유리온실 안에서 열렸다.

    말이 온실이지 소궁전만한 그곳은 라카트옐 가의 보관고인 별채만큼이나 크고 넓었다.

    유리온실은 전체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로서, 섬세하게 유리를 끼워놓은 하얀 석조 뼈대가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풍겼다.

    햇볕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유리온실 한 편에 차와 음식을 놓을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람 수대로 민트색 우단이 씌워진 푹신한 의자가 놓였다.

    우단 위에는 은사로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늘을 만들어 줄 크고 흰 차양이 마련되었다.

    온실 속의 그리너리한 분위기와 어울리면서도 따뜻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세팅이었다.

    아리엘이 오늘 입을 실내 파티용 드레스도 부드러운 민트색이었다.

    자수레이스로 만든 상체 디테일에 꽃장식이 가미되어 있고, 허리엔 짙은 색의 긴 허리띠를 아름답게 늘어뜨려 은은하게 퍼지는 치마 모양을 살리는 여성스러운 디자인.

    역시나 마담 헬렌의 의상실에서 만든 작품이었다.


    * * *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은 대공가 저택 응접실에 모여서 함께 티 파티 장소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초대받은 영애들은 상기된 얼굴로 약속시간보다 훨씬 먼저 대공가로 모여들었다.

    대부분 좋은 저택에 사는 영애들인데도 그들은 대공저의 크기와 화려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수대가 대체 몇 개인 걸까요? 작은 것들까지 세다가 포기했어요.”

    “석조물들은 또 어떻구요. 하나하나 예술 작품이 아닌 게 없던걸요.”

    “앞 정원에 가득한 튤립 보셨나요? 지난번 황궁 무도회가 절로 생각나더군요.”

    모인 영애들은 입을 모아 저택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부러워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딴 세상에 온 듯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응접실로 안내해주는 사용인들도 모두가 정중하고 예의 발랐다.

    영애들은 로맨틱한 유리문이 있는 소응접실에서 양탄자와 샹들리에, 벽에 설치된 금촛대를 구경하며 다시 흥분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들은 서로의 옷차림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어머. 르네 영애. 못 보던 드레스네요.”

    “이번에 드레스를 새로 맞췄거든요. 어떤가요?”

    “예쁘네요! 목걸이는 역시…… 레이스 디자인인가요?”

    “호호, 아무래도 유행이니까요.”

    다들 한껏 신경 써 꾸미고 온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값비싼 비단 드레스는 슬프게도 라카트옐의 양탄자만도 못해 보였다.

    보랏빛 머리카락의 다이아나는 도도하게 앉아 부채를 부치며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

    몇몇 못된 영애들 말고는 그다지 신경을 쓸 만한 영애가 없었다.

    란셀 후작 부인이 고심을 거듭해서 초대장을 보낸 까닭이었다.

    그녀는 눈을 굴려 맞은편에 앉은 세실 영애를 흘끔거렸다.

    세실은 지난번 무도회에서 실비아가 악의를 가지고 아리엘을 깎아내릴 때 얼굴을 찌푸렸던 영애였다.

    그녀의 풀네임은 세실 하이츠로, 고위 귀족은 아니지만 전통있는 무신 가문 출신이었다.

    물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묶은 세실은 하이츠 가문의 강직함을 물려받은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좀 친해지고 싶은데…….’

    다이아나는 잠시 망설이다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세실 영애. 티 파티에서 거의 뵌 적이 없는데 반갑군요.”

    세실이 중성적인 느낌이 나는 목소리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저는 무가 출신이다보니 파티 보다는 검 수련을 더 즐겨합니다.”

    “…….”

    무례할 정도로 짧은 대답이었다.

    다이아나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이 성의를 가지고 말을 걸었는데, 겨우 저 대답이 다라니!

    예의상 그쪽도 반갑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왠지 세실과는 성격이 상극일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다이아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마샤 영애가 호들갑스럽게 끼어들며 말했다.

    “어머어머. 다들 방금 세실 영애가 한 말 들으셨어요? 영애의 몸으로 검 수련을 한대요!”

    놀람과 비웃음이 한껏 담긴 목소리였다.

    “어차피 여자는 기사가 되지도 못하는데 뭐하러요? 괜히 손이 거칠어지거나 피부가 까맣게 타고 말 거예요.”

    마샤 영애의 말에 다른 영애들 몇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놓고 세실의 손을 힐끔거리며 눈짓을 주고받기도 했다.

    세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고, 다이아나는 완전히 낯빛을 바꾸었다.

    세실과 성격이 안 맞는 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나빴다.

    다이아나 또한 저런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넌 여자아이니까 공작위를 계승할 수 없어.’

    다이아나는 늘 그게 부당하게 느껴졌다.

    같은 이유로, 세실이 단지 여자라는 것 때문에 검을 드는 걸 조롱받는 건 옳지 않게 생각됐다.

    그 때, 은빛 뱀처럼 앉아있던 실비아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마샤 영애 말도 일리가 있어요. 세실 영애는 겨우 열 다섯이죠?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결국 철이 드는 날이 올 거랍니다.”

    해석하자면 이런 뜻이었다.

    ‘넌 지금 어리고 철이 없어서 검을 드는 거란다, 아가야.’

    다이아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숨을 고른 실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다이아나는 실비아가 곧 꺼낼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게 다 영애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겠지.

    흥.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줄 알고?

    다이아나는 실비아가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어머나. 제가 아는 철든 영애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지 않던데요. 그런 면에서 실비아 영애는…… 참으로 귀감이 되네요.”

    그 말을 들은 실비아가 입을 다물고 다이아나를 노려보았다.

    비꼬는게 확실했지만, 워낙 다이아나의 어조가 상냥해서 화를 내기엔 애매했다.

    다이아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진짜' 철 든 영애들은 자기 일에나 잘 신경을 쓰던데. 그렇지요, 실비아 영애?”

    동의를 구하듯 다이아나가 속눈썹을 깜박이며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붉으락푸르락하던 실비아가 가까스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예쁜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그럼요. 세실 영애, 내가 주제넘었다면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그럼 전 이만.”

    세실이 일어나서 사용인 쪽으로 걸어갔다.

    마실 물을 부탁하는 것 같았다.

    ‘후.’

    다이아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부채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지난번 아리엘을 헐뜯은 복수는 조금이나마 한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엘이 하녀장과 함께 등장했다.

    민트색의 청순하고도 여성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꼬마 아가씨는 사랑스럽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모두 와 주셔서 기뻐요.”

    ‘예뻐!’

    그 순간 다이아나는 방금의 기 싸움도 잊고, 반해버린 눈빛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 * *


    아리엘은 손님들을 이끌고 온실로 이동했다.

    저택을 나서서, 정갈하게 깔린 하얀 돌길을 따라 화이트 가든으로 가는 길.

    여느 때라면 수다에 여념이 없을 영애들은 모두 풍경 구경을 하느라 말이 없었다.

    화이트 가든 쪽의 조각상과 분수대는 다른 곳보다 훨씬 여성미가 물씬 풍겼다.

    꽃봉오리가 막 피어나는 듯한 모양의 분수대에서 여러 개의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시야에 유리온실이 보이자 영애들이 나지막하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저곳이…….”

    아리엘의 온실은 누구나 꿈꾸는 낭만의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온실 입구에는 아리엘이 말했던, 흰 장미가 탐스럽게 핀 장미 아치가 그들을 환영했다.

    꿈결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들어오세요.”

    아리엘이 상냥하게 손님들을 안으로 인도했다.

    온실에 발을 들이자 숲에 들어온 듯 싱그러운 나무 향기가 느껴졌다.

    온실수(樹)들 사이로 부서진 햇볕이 아른거렸다.

    티 파티가 열리는 장소인 흰 차양 아래에는 사용인들이 줄을 맞추어 서서 시중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리는 입이 떡 벌어진 채 티 파티 장소로 들어섰다.

    귀족 영애로 살면서 티 파티는 수도 없이 해 보았지만 이런 파티는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환상 속에나 있을 법한 아름다운 파티.

    테이블에 깔린 테이블보부터 청순한 분홍색 꽃이 꽂힌 화병, 백조 모양으로 접힌 냅킨, 초 하나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리엘이 경험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던 실비아는 똥 씹은 표정으로 파티를 둘러보았다.

    실비아가 아무말 못하는 것을 본 다이아나는 ‘깨소금이 한 바가지네.’하며 씨익 웃었다.

    아마 파티에 조그만 흠이라도 있었다면 실비아는 ‘역시 집안에는 어른 여자가 있어야 해요.’라면서 아리엘을 깎아내리고 자기 어필을 했을 것이다.

    그런 수작을 못 부리게 된 게 얼마나 고소한지 몰랐다.

    손님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자, 조용히 차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영롱한 홍차와 우유, 설탕, 크림이 그릇에 담겨 나왔다.

    은은한 미색 다기의 손잡이에는 금박문양이 들어가 있었고, 찻잔 안에는 복숭앗빛 꽃이 그려져 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이어서 사용인들이 삼단 티푸드 트레이에 디저트류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아리엘은 손님들에게 차와 티푸드를 권했다.

    “정원을 걸으시느라 다들 피로하셨겠지요?”

    삼단 트레이에는 딸기와 라즈베리가 듬뿍 올려진 레어치즈 타르트와 생크림 스콘, 설탕을 입힌 제철 과일꼬치가 있었다.

    그뿐일까?

    케이크 받침대에 올려져서 유리 뚜껑이 덮인 체리 가나슈 홀케이크가 중앙에 자리했고, 색색의 마카롱도 있었다.

    마카롱은 진주가 가득 담긴 투명한 유리그릇 위에 세팅되어 더 예뻐 보였다.

    항상 대공가 간식을 맛보는 다이아나를 비롯해서 파티에 참가한 영애들 모두가 황홀하게 디저트를 바라보았다.

    호로로록.

    영애들은 *골든링(질 좋은 홍차를 잔에 담았을 때 수면 가장자리에 생기는 금빛 띠)이 뜬 홍차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시고는, 붉은 소스가 올라간 레어 치즈 타르트를 한 조각씩 나누었다.

    디저트 포크로 조심스레 쪼개 먹자, 차가운 치즈 타르트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내렸다.

    차 맛은 훌륭했고 디저트들은 클래식한 홍차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이쯤 되자 아리엘에게 시기심을 품고 헐뜯었던 일부 영애들은 완전히 기가 죽어 찻잔만 저어댔다.

    반면 운좋게 초대받은 영애들은 입에 침이 마르게 파티를 칭찬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티 파티에 가도 감탄하지 못할 것 같아요.”

    “맞아요. 이미 최고의 티 파티가 어떤 건지 봐 버렸는걸요.”

    특히 히스가 마법을 걸어 만든 마법등을 본 영애들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엘프 숲에 켜져 있을 것만 같은 빛이에요. 과거에는 우리 제국에도 엘프가 있었다잖아요.”

    “불꽃의 색이 변하다니. 너무 신기해요!”

    “마법사들이 마법을 하는 건 봤지만 이건 정말 신비롭네요.”

    영애들이 히스가 만든 마법등을 칭찬하자, 아리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히스한테 꼭 전해줘야지.’

    확실히 그녀가 아이디어를 내는 족족 뚝딱 물건을 만들어내는 히스의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뒤에 아리엘은 손님들에게 온실 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온실에는 각종 꽃과 진귀한 나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가장 백미는 역시 마티어스가 선물한 석류 정원이었다.

    정원에 가득 열린 석류 열매들은 이제 반쯤 입을 열고 루비같이 붉은 속열매를 보여주고 있었다.

    “석류로 젤리를 만들었는데 함께 드실까요?”

    아리엘은 보석 같은 석류 젤리를 띄운 음료를 권했다.

    붉고, 달콤하고, 투명한 석류 음료를 맛본 영애들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맛있어요!”

    “상큼하면서도 입안에 계속 감도네요.”

    석류 음료를 한 잔씩 다 비운 영애들은 사양하지 않고 한 잔씩 더 마셨다.

    음료에는 석류 과육도 들어가 톡톡 터지는 식감을 안겼다.

    파티가 완연히 무르익어갔다.

    내내 조용하던 실비아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정말 훌륭한 티 파티에요, 대공자비님. 안주인 맞이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아요.”

    아부하듯 말을 하며 아리엘에게 당겨 앉는 실비아의 모습에 다이아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마워요. 실비아 영애.”

    아리엘이 상냥하게 대꾸해주자 실비아의 눈동자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음험하게 빛났다.

    그녀가 매우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이런 파티의 진가를 모두가 알지는 모르겠네요. 검이나 펜을 잡느라 파티의 품격을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영애들도 섞여 있는 것 같거든요.”

    순간 다이아나는 직감했다.

    ‘실비아 저 여자, 아까 나에게 당한 걸 앙갚음하려고 하고 있어!’

    그것도 어린 아리엘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때, 가만히 실비아의 말을 듣고 있던 아리엘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왜 특이하죠, 실비아 영애?”

    “예?”

    아리엘의 물음에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이런 질문이 다 있지?

    ‘당연히 그런 영애들이 이상하니까 특이한 거지. 역시 어려서인지 이런 기본적인 것도 이해를 못하는구나.’

    실비아는 최대한 아리엘을 무시하는 티를 감추며 대답했다.

    “그야 물론, 영애들이 검을 쥐고 펜을 드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니까요. 호호호.”

    아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실비아는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하며 다이아나와 세실 쪽을 경멸하듯 바라보았다.

    아리엘의 분홍빛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상하네요. 여자들이 검을 쥐고 펜을 드는 게 드물고 힘든 일이라면, 그건 특이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죠.”

    루비 사탕같은 눈동자가 실비아의 속마음을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저는 그걸 특이하게 여기는 사람이 더 특이한 것 같은데요.”

    “…….”

    실비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특이함'이라는 단어에 자신이 꾹꾹 눌러 담았던 부정적인 어감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그녀를 때렸다.

    실비아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계집애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아리엘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자신이 무언가를 감수하면서 선택한다는 거잖아요. 저는 오히려 응원해주고 싶어요.”

    그녀도 선택으로 삶을 바꿨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아리엘은 후작가를 탈출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과감하게 모험을 했다.

    그러기로 선택했으니까.

    그리고 그 선택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어머 저 시뻘게진 얼굴 좀 봐.’

    ‘완전히 망신 당했네.’

    영애들은 표정관리 못하는 실비아를 바라보며 숨죽여 비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비아를 칭송하던 무리들이었다.

    은발의 아름다운 미녀로 치켜세워지는데만 익숙하던 실비아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하! 정말 수준이 안 맞아서 못 견디겠군요.”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체통없이 씩씩거리다가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일어났다.

    자기 집인 비얀 후작가에서만 보이던 본모습이었다.

    “저는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돌아가 보겠어요!”

    실비아는 대공자비인 아리엘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무례하게 자리를 떴다.

    “…….”

    남겨진 영애들은 아리엘의 눈치만 보았다.

    파티 도중에 저런 식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건 그 집 안주인에 대한 모욕에 해당했다.

    더군다나 아리엘은 대공자비였다.

    후작 영애인 실비아를 당장 꿇어앉히고 벌을 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영애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실비아 영애가 돌아갔다고 해서 파티를 그만둘 필요는 없죠. 그렇지 않나요?”

    실비아에게 그만큼의 신경을 써 줄 가치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영애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때까지 얼마나 즐거웠는데요.”

    “저도요, 저도요. 파티를 더 즐기고 싶어요.”

    아리엘이 미소지었다.

    “그럼 우리 더 이야기를 나눠요.”

    파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매끄럽게 진행됐다.

    영애들은 웃으며 수다를 떨고, 차와 간식을 먹고, 음악을 즐겼다.

    어디에도 실비아의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티 파티가 끝나갈 무렵.

    아리엘은 파티에 참석한 모두에게 예쁜 상자에 담긴 선물을 나눠주었다.

    “안주인 맞이에 와 주신 보답이랍니다.”

    본래 이런 종류의 선물은 항상 비슷비슷했다.

    과자류의 식상한 선물.

    그런데 아리엘은 딸기 크레이프 케잌이 든 앙증맞은 케잌 상자와 더불어 선물을 하나씩 더 준 것이다.

    선물을 열어본 영애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어머나!”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예쁜 큐브 모양의 실링왁스 양초였다.

    편지를 보낼 때 보통 붉은 밀랍을 녹여 붓고 봉인을 하는데, 이 밀랍을 실링 왁스라고 불렀다.

    귀족들 저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이 선물한 실링왁스는 아주 특별했다.

    “이건…… 저희 가문 색깔의 실링왁스네요.”

    “게다가 아름다운 펄까지 들어있어요.”

    상자 속의 실링왁스는 은은한 펄이 든 색깔 밀랍이었다.

    모니카 공작가의 다이아나에게는 펄 바이올렛, 피벗 자작가의 헤이즐에게는 펄 브라운, 하이츠 백작가의 세실에게는 펄 스카이블루.

    각각의 가문색에 펄을 입힌 것이었다.

    영애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편지를 봉인할 때 쓰는 밀랍따위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 세심하고 획기적인 선물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심지어 소녀스러운 아이템이 어색해 보이는 세실도 자기 가문의 색깔을 입힌 실링왁스를 보고는 은근히 설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직감했다.

    ‘이거 유행 아이템이 되겠는걸?’

    아리엘이 선물을 고민할 때 다이아나는 어른들에게 배워온 대로 과자류를 추천했었다.

    호두 파이와 과일 크레이프 케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케잌을 추천했는데, 아리엘이 또 하나의 깜찍한 선물을 준비한 줄은 몰랐다.

    아리엘은 정말 센스가 대단하다니까!

    다이아나는 아리엘이 성공적으로 티 파티를 치르자, 마치 제 일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님들은 얼른 돌아가서 대공가 파티에 대해 떠들고 싶어 안달인 눈치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멋진 파티였어요!”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정말 영광이었어요.”

    흥분해서 떠드는 손님들을 아리엘이 전송했다.

    “조심히들 돌아가세요.”

    그녀는 멀어지는 손님들에게 미소지으며 조그만 손을 흔들었다.

    거대한 저택의 현관 앞에 편안하게 서 있는 열 살 소녀는 앳된 외모와 상관없이 그 집안의 어엿한 안주인으로 보였다.


    * * *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다이아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았다.

    아리엘의 성공적인 안주인 맞이를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세실도 떠나지 않고 앉아있었다.

    세실 때문에 다이아나는 아리엘에게 당장 달려가 호들갑을 떨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

    ‘아이, 참. 그런 건 둘만 있어야 할 수 있는데.’

    모니카 공녀가 라카트옐 대공자비와 가깝다는 건 이미 사교계에 널리 퍼진 얘기였지만, 둘이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 어색한 분위기로 서 있던 세실이 아리엘에게 와서 인사를 건넸다.

    “훌륭한 파티였습니다. 애를 많이 쓰신 티가 납니다.”

    아리엘은 빙그레 웃었다. 세실의 거짓없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고마워요, 세실 영애. 파티를 열어본 건 처음인데, 영애를 만나게 되어 무척 즐거웠어요.”

    “…….”

    세실 또한 아리엘의 진솔한 대답에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검을 쥐는 여자는 특별…… 하다고 하셨던 말씀도 새겨들었습니다.”

    세실이 조금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그 자리에서 제가 대응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건 제 마음 속에도 ‘정말로 내가 특이한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정을 정리하고 고개를 든 세실이 절도있게 말했다.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워가는군요.”

    ‘호오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이아나는 부채를 살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세실처럼 딱딱한 성격과는 잘 맞지 않지만, 그래도 나쁜 영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이만 돌아갈 줄 알았던 세실이 다이아나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모니카 영애. 아까 도와주어서 고마웠습니다.”

    세실이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뜻밖의 전개에 당황한 다이아나는 부채로 얼굴을 세게 부쳤다.

    ‘뭐, 뭐야.’

    감사 인사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까 실비아와 세실 사이에 끼어든 건 오직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세실 입장에서는 도와줬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저는 빚지는 걸 싫어합니다. 꼭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다이아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쌌다.

    ‘흐, 흠, 뭐…… 나랑 하나는 공통점이 있네. 빚지고는 못 산다는 거.’

    겨우 얼굴을 식힌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세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모습이 조금 새침해보였는지 세실이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이아나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럼 우리 친구 할래요?”

    “예?”

    당황했는지 세실이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다이아나는 확신했다.

    몇 달 전 아리엘에게 친구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꼭 저런 표정이었을 거라고.

    옆에 서 있던 아리엘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저는 좋아요! 세실 영애하고 친구가 되는 거.”

    “예에? 어…… 그게…….”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세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이아나가 새초롬한 말투로 물었다.

    “대답은요?”

    세실은 입술을 꾹 물고, 어쩔줄 몰라하며 다이아나와 아리엘을 번갈아보았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아리엘이 기쁨으로 팔짝 뛰며 외쳤다.

    “와아! 세실!”

    다이아나는 친구 모임에 먼저 들어온 사람으로서 엄숙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세실 영애도 반말을 해야 해요. 그게 우리 규칙이거든요.”

    “예. 아, 아니, 그래요. ……그래.”

    버벅거리던 세실이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저도 두 분과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가 되어 영광입니다.”

    다이아나가 키득대며 말했다.

    “세실, 반말 해야죠.”

    “다이아나, 그쪽도 마찬가집니다.”

    “어머, 난 지금 그쪽에 맞춰주는 건데?”

    “규칙은 선임들이 먼저 지켜야 하는 겁니다.”

    “…….”

    “…….”

    ‘역시 이 영애랑은 성격이 안 맞아.’

    둘은 동시에 생각하며 마주보았다.

    하지만 비슷한 성격은 친구가 되는데 꼭 필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두 소녀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럼 다이아나, 세실. 내 방에 가서 좀 더 머물다 갈래?”

    “당연하지. 실링 왁스 선물 얘기도 이 언니한테 다 털어 놔! 크레이프 케잌까지만 나랑 상의했었잖아.”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옆구리를 콕 찌르자 아리엘이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알겠어.”

    다이아나는 어색해하는 세실의 팔짱을 턱 하고 꼈다.

    세실이 뻣뻣하게 굳었다.

    “세실, 올라가자.”

    “……그래.”

    세 소녀는 아리엘 방의 넓은 침대에 엎드려서 수도 영애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꽃 책갈피 얘기에 빠져들었다.

    다이아나는 자기 꽃 책갈피를 보여주었고, 아리엘은 다이아나가 선물해준 것과 새로 만든 것을 꺼내들었다.

    “세실은……?”

    세실이 한참 머뭇대다가 주머니에서 책갈피를 꺼냈다.

    세실의 꽃 책갈피는 좀 투박했지만 귀여웠다.

    세실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무가 출신에 검 수련을 좋아하는 나한테 이게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엘은 세실의 손을 잡으며 밝게 말했다.

    “꽃과 검을 모두 좋아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다이아나도 말했다.

    “하나만 좋아해야 한다면 그거야 말로 선입견이지.”

    “……맞아. 그렇군.”

    세실은 자신의 꽃 책갈피를 꼭 쥐었다.

    앞으로는 검을 좋아하는것도, 꽃을 좋아하는 것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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