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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42화 (142/176)
  • 142화

    “왜 그래?”

    윈터가 의아해하면서도 바이올렛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그녀의 머리에 잠깐 턱을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의 행동에 바이올렛이 웃자 윈터가 따라 유쾌하게 웃었다.

    아내의 귀여운 행동의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윈터가 방해가 됐는지 할린을 보며 말했다.

    “넌 눈치껏 꺼져. 우리 공주님은 그런 쓰레기 같은 곳으로 가기 전에 좀 쉬셔야겠거든.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

    “생각보다 쓰레기 같지는…….”

    “안 꺼져?”

    윈터가 제 재킷을 더듬거리며 집어 던질 걸 찾자 바이올렛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사이 기겁한 할린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먼저 제가 묵고 있는 호텔로 달려갔다.

    두 사람 역시 곧 마차에 올랐다. 키론은 아직 여름이라 윈터는 바이올렛의 옆에 앉자마자 재킷을 벗어 맞은편으로 던지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출발한 마차가 항구에서 호텔로 향하는 내내 바이올렛은 창문 밖으로 모처럼 돌아온 키론을 보았다.

    얼마 뒤, 높은 곳에 있는 호텔에서 내려서니 어디에 서도 바다가 보였다. 날이 쌀쌀해지며 라크라운드 사람들은 물론, 이 대륙 북쪽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여행을 와 호텔 전체가 북적거리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라크라운드와는 달리 1년 내내 경쾌한 활기가 느껴지는 키론을 돌아보며 새삼 중얼거렸다.

    “정말 좋은 곳이네요. 이런 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니, 운이 좋았어요.”

    “그런가.”

    윈터가 스윽 호텔이 우뚝 세워진 키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내가 없다는 사실을 잠깐이라도 잊기 위해 몰아치듯 추진한 결과물이었다.

    그가 호텔을 올려다보며 혼잣말했다.

    “……정신없을 때 지어도 이 정도는 짓지, 내가.”

    “응? 뭐라고 했어요?”

    “내 능력에 감탄하는 중이야. 기가 막히군! 관광객들은 이미 키론에 오기 위해 호텔을 찾는 게 아니라 이 호텔을 찾아서 키론에 오지.”

    윈터가 두 손으로 제 호텔을 가리키며 감탄하라는 듯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바이올렛이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매우 훌륭한 호텔이에요. 호텔 덕에 관광 수입이 늘어나 키론 경제가 급격히 성장한다더군요.”

    바이올렛이 아낌없이 칭찬해주자 윈터의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객실로 향했다.

    그 후 둘은 각자의 욕실에서 길게 목욕을 하며 해풍을 씻어 내고 얇은 여름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충분한 숙면을 취했다.

    다음 날 아침, 바이올렛은 들뜬 마음으로 윈터보다 먼저 잠에서 깼다.

    하얀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밀집으로 만든 모자를 꺼내 든 바이올렛이 드넓은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 앞 테이블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이 윈터가 다가왔다.

    “웬일이지? 잠 많은 공주님이 벌써 준비를 다 하고.”

    “날씨가 너무 좋아요. 아까워서 더 잘 수가 없네요.”

    “충분히 즐겨 두는 건 좋은 생각이군. 이제부터 끔찍하게 추운 곳으로 갈 테니.”

    윈터가 대꾸하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잠시 후, 두 사람 앞 테이블 위에 조식이 놓였다.

    부부는 모처럼 이 지역, 코르시카풍의 조식을 즐겼다. 바이올렛이 따끈한 하얀 빵에 꿀을 올리며 말했다.

    “모처럼 돌아오니 키론이 얼마나 좋았는지 다시 생각이 나네요.”

    “여기 살까?”

    “키론이 라크라운드 수도보다 모든 것이 좋은데도 나는 수도에서 살고 싶어요. 이상한 일이죠.”

    “이상하고, 이해도 안 가. 난 남부에서 태어났지만 남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거든.”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전혀. 난 특별히 원하는 장소가 없으니 당신 좋아하는데서 살면 돼.”

    윈터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키론은 놀러 오는 것으로 충분해요. 그나저나 여긴 수도 호텔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네요. 여행지 분위기라 객실에만 있어도 설레요.”

    그들이 묵는 객실은 다양한 색깔을 화려하게 이용한 곳이었다. 라크라운드 수도에서는 볼 수 없는 다채로움이 눈부신 키론의 날씨와 잘 어울렸다. 윈터가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음, 하지만 당신에게 이 호텔을 줄 수는 없어.”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여기 놀러 오고 싶은 거지, 가지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래? 난 그 건물이 좋으면 그 건물을 가지고 싶던데.”

    윈터가 그렇게 대화를 정리하고는 기지개를 켜며 의자 뒤로 기댔다.

    바이올렛은 거기에 대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가 좋다고 말하면 당장 사 줘야 한다는 압박을 남편이 받는다는 걸 최근 들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규모가 호텔이라 황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가 저에게 뭔가를 못 주겠다 농담 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정말 제 호텔을 좋아하는 게라고, 바이올렛은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

    북쪽으로 가는 길이 매우 멀었기 때문에 부부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곧장 북부로 향했다.

    하루를 꼬박 마차를 타고 코르시카의 북쪽 변경과 맞닿은 나라 하누스의 수도에 들어서니 다시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도 한가운데 번화가에 내려선 바이올렛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하누스에 한 번 초대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땐 내내 왕성에만 있었어요. 왕성 밖은 처음 구경하는군요.”

    바이올렛이 이렇게 아이처럼 설렌 표정을 짓는 건 드문 일이라 집중해서 눈에 담아 두던 윈터가 가판대에 놓인 신문을 발견하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당신 얼굴이 있어.”

    “네? 아…….”

    신문 전면에 바이올렛과 에쉬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윈터가 신나서 신문을 집어 들었다.

    “마도구가 이 대륙을 나가면 무용지물이 된다지만, 그 희미한 마법이 라크라운드 사진기보다 낫군.”

    “……혹시 당신 여기 대륙 공용어를 읽을 줄 아나요?”

    “잘 읽어. 이봐, 카닉 일족은 이 대륙 알리카에 산다고. 내 친모가 나와 둘이 다닐 땐 대륙 공용어로 말했어.”

    “…….”

    바이올렛이 수치심에 한숨을 쉬었다.

    라크라운드에서는 신문사들이 에쉬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정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여기 신문에는 바이올렛에 대한 찬사가 거리낌 없이 적혀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바이올렛 로렌스를 시민의 여신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 적혀 있었으며, 소작 관리인과 바이올렛이 원하는 로렌스가와 의회의 분리에 대한 내용 역시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윈터가 신문을 차근차근 읽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공주님이란 말로 부족하군. 여신이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하지 말아요.”

    “200부는 사야겠어. 아니지, 1만 부 정도 사서 수도에 뿌리자고. 당신은 마도구 상점에 가, 난 신문사에 다녀오지.”

    “제발 그만해요…….”

    바이올렛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윈터의 등을 떠밀어 두 사람은 겨우 가판대에서 멀어졌다. 그때, 뒤에서 조금 늦게 마차에서 내린 젠과 하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옐 씨, 환전 많이 했어요? 빌려줘요.”

    “네에? 몇 부나 사려고 돈을 빌려요?”

    “몇 부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돈 되는 대로 사야죠. 내 친척이 얼마나 많은데요.”

    젠의 말에 하옐이 잠시 지갑을 확인하고 대꾸했다.

    “미안해요. 돈 못 빌려주겠어요.”

    “네? 왜요?”

    “나도 사야죠. 기념으로.”

    “하옐 씨는 친척도 없잖아요!”

    “지금 우리 부모가 종신형 받을 거라고 놀리는 겁니까?”

    “무슨 소리예요? 종신형 나오라고 맨날 기도하면서!”

    “그건 그렇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걸 돌아본 윈터가 말했다.

    “하옐, 둘이 신문사 가서 이 신문 있는 대로 전부 사 와.”

    “네, 대표님. 가요, 젠.”

    그러자 젠이 신이 나서 폴짝거리며 신문사 쪽으로 하옐을 잡아끌었다.

    “부족하면 더 찍으라고 해요, 우리!”

    “네, 네. 그렇게 하세요.”

    두 사람이 일을 받아 들고 떠난 후,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런 표정 하지 마. 내가 고작 당신 부끄럽게 하려고 신문을 사들일 것 같아? 라크라운드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개입 없는 신문을 보게 할 의무를 느껴서 그래.”

    “그런 건가요?”

    “달리 이유가 있나?”

    바이올렛에게 맞춤 설명을 해 주니 그녀가 바로 납득하고 얼굴을 감쌌던 손을 살며시 내렸다.

    물론 윈터는 라크라운드 사람들의 알 권리 같은 건 전혀 관심이 없었고, 수치심에 빨개진 바이올렛의 얼굴이 귀여워 놀리는 데 돈을 쓰고 있는 것뿐이었다. 거기에 순진하게 저를 믿어 버리는 모습도 사랑스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은 곧 난방 도구를 살 가까운 마도구 상점에 들어섰다. 2층짜리 거대한 상점 곳곳에 있는 물건들에 바이올렛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어떻게 쓰는 걸까…… 어머나!”

    바이올렛이 작은 상자를 열었다가 차가운 바람이 불자 놀라서 얼른 덮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바이올렛의 눈을 발견한 윈터가 물었다.

    “살까?”

    “라크라운드에 가져가면 그냥 상자일 뿐인 걸요.”

    “아주 가격을 높여서 사면 라크라운드에서도 쓸 수 있어.”

    “그 돈만 드는 게 아니라 라크라운드에서까지 마법을 유지하려면 한 번 쓸 때마다 엄청난 돈이 나가잖아요.”

    바이올렛이 핀잔한 후 알리카에 갈 때 필요한 난방 도구들을 골랐다. 특히 발열하는 쿠션과 태피스트리는 라크라운드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문양이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바이올렛이 그중 뭘 살까 고민을 시작하니 윈터는 곧장 불필요할 정도로 종류별로 골라 구매했다.

    바이올렛은 그런 윈터를 보니 묘한 궁금증이 들었다.

    그는 물건으로 애정을 사는 사람인데, 키론 호텔은 못 주겠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가 제 일, 그중에서도 호텔을 사랑하는 모습은 바이올렛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윈터를 놀리고 싶은 마음과 호텔에 대한 애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 그의 팔을 붙잡고 장난스레 말했다.

    “윈터, 키론 호텔은 나에게 줄 수 없다고 했죠?”

    “응. 안 돼.”

    “왜죠?”

    바이올렛이 거절을 오히려 기꺼워하며 물었더니, 윈터가 인상을 쓰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먼 호텔이 키론 지점이야. 그러니 안 돼. 당신이 일적으로 여기 종종 찾아와야 한다면 당연히 싫고, 반대로 당신이 여기에 아예 관심이 없다면 그건 더더욱 안 돼. 호텔은 내 자존심이야. 당신을 사랑하지만 무의미하게 내 자존심을 부수도록 두진 않을 거라고.”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멀어서, 그리고 자존심이어서. 두 가지 다 아주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그녀는 윈터가 얼마나 호텔을 사랑하는지 더 듣고 싶은 마음에 괜히 재촉하듯 말했다.

    “그래도 가지고 싶다면요?”

    그러자 윈터가 대답 없이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 무표정에 바이올렛이 더욱 즐거움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줄래요?”

    “…….”

    “싫죠?”

    “줄게.”

    윈터가 생각보다 쉽게 대답하자 바이올렛이 살짝 인상을 썼다. 그사이 윈터는 바이올렛의 시선이 닿은, 너무 높아 꺼내지 못한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라크라운드로 돌아가면 바로 서류 작업을 하지. 당신에게 줄게.”

    “당신 자존심인데요?”

    “방금 알았는데, 당신이라면 무의미하게 부숴도 돼.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달라고 조른 건 이제 겨우 두 번째잖아.”

    “첫 번째는요?”

    “시간.”

    윈터가 짤막히 대꾸하곤 그녀가 원한 상자를 열어 주었다. 달콤한 노래가 나오는 장난감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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