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41화 (141/176)
  • 141화

    알리카로 갈 준비는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그사이 블루밍 공작 부부가 몇 번이고 만나 달라 연락을 했으나, 윈터는 무시했다.

    그는 극북의 알리카 행을 위해 바이올렛을 포장할 담요와 여러 개의 코트를 준비했다. 젠을 제외하면 전부 순혈 카닉 일족의 의사, 하녀 둘에 하인 셋, 호위 다섯 명을 뽑았고 하옐까지 따라붙었다.

    다행히 동행들을 모두 즐거운 얼굴이었다. 윈터는 이 여정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써 그들 모두 호사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상여금을 넉넉하게 챙겨주었으며 바이올렛이 잔소리할 것을 미리 걱정해 각자에게 고급 코트와 털신을 여러 개 제공했다.

    가문 회의로부터 일주일 뒤, 일행은 대륙의 서쪽 끝, 란치아령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서쪽으로 향하는 창밖 풍경은, 바이올렛이 윈터를 두고 혼자 도망치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침묵을 읽은 윈터가 말했다.

    “도망치던 날 생각하지?”

    “어떻게 알았어요?”

    “표정이 그래 보여.”

    바이올렛이 미소를 짓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솔직히 말하면 잘 기억이 안 나요.”

    “나도 그래.”

    윈터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잠시 후, 바이올렛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런 꿈을 꿔요?”

    “악몽?”

    “네.”

    “당신은?”

    윈터가 대답을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도 내가 눈앞에서 총을 맞는 걸 봤잖아.”

    “나는 그런 꿈은 안 꿔요. 당신이 회복하고 있는데다, 요즘은 거의 당신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다행이네.”

    “그래서 당신은요?”

    “안 꿔.”

    “거짓말이죠? 아까 말 돌렸잖아요.”

    “거짓말이면 어쩌게?”

    윈터가 대꾸하더니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이올렛이 곁에서 잠든 이후 악몽을 꾸지 않게 된 건 사실이었으나, 가끔 잠들기 전에 그 꿈을 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윈터는 바이올렛이 잠든 후에도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멀쩡한 것을 알면서도, 갑자기 불안해져서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가 꿈 생각을 하자 바이올렛이 살짝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윈터의 옆에 와서 나란히 앉았다.

    그러더니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윈터의 손가락에 고리를 걸었다.

    “내가 더 오래 살 거예요. 평균적으로.”

    “…….”

    “당신이 살아 있는 사이에 내가 죽는 걸 볼 일은 절대 없을걸요?”

    “……그렇겠지.”

    윈터가 대답하고는 약속을 하려고 걸어 둔 새끼손가락을 보았다.

    그녀의 이 위로와 약속이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좋아야 할 것을, 거꾸로 처박힐까 봐 겁을 냈다.

    제 것이 아닌 것을 억지로 차지한 것 같은 행복이었다. 이제 곧 서른인데, 이 행복을 감당하지 못하는 제가 유치하고 한심했다.

    이대로 손가락이 딱 달라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럴 수 없으니 윈터는 고리를 건 상태로 최대한 오랫동안 버텨냈다.

    그사이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란치아령에서 카닉사의 크루즈를 타고 대륙을 이동했다. 기차로 긴 시간을 이동하느라 지쳐 있던 바이올렛은 크루즈 특실에 들어서자마자 감상할 체력이 없어 정신없이 잠을 잤다.

    그사이 윈터는 하옐과 크루즈의 총지배인을 데리고 한 바퀴 돌며 하나하나 지적에 들어갔다. 무도회장을 먼저 확인하고 유행이 지난 것들 중 교체할 것을 적었다.

    그가 일하는 도중에 깬 바이올렛이 윈터가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은 해풍이 강해 겉에 두르고 온 숄을 직원에게 건넸다. 그 뒤 직원이 안내해 주는 자리로 따라 걸으며 윈터 쪽을 보니 그는 맞은편에 있는 손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유쾌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 직원들에게는 버럭버럭 성질을 내지만 손님들과 직접 마주할 때면 윈터는 썩 친절한 편이었다.

    그 낯선 모습을 바이올렛이 신기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지, 테이블에 있던 격식 있게 차려입은 손님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따라 같이 눈꼬리가 휘어지는 윈터의 옆모습이 신기했다.

    돈에 미쳐 살긴 했지만 그는 제 일을 좋아하기도 했다. 다른 여러 가지 일을 벌여도 호텔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묘하게도 일에 집중한 저 사내가 제 것이라는 것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성실히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왜 이리 불순한 생각이 드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옐이 먼저 달려와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대표님 금방 오실 거예요. 중요한 단골이셔서요. 꽤 친하세요.”

    “즐겁게 일하는 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좋네.”

    “그렇죠? 저기선 굽히고 직원들에게 푸시죠.”

    하옐이 농담인지 웃으면서도 치를 떠는 과장된 시늉을 하자 바이올렛이 따라 웃었다. 하옐이 메뉴판을 직접 펼쳐 주며 말했다.

    “식사하실 거면 이 로스트 치킨 꼭 드셔 보십시오. 배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메뉴입니다. 주방장이 진짜 기가 막히게 만들어 주거든요.”

    “식사할 생각은 아니었네만 그렇게 들으니 궁금해지네.”

    “저희 직원들이 가끔 일부러 배 타러 오려 들 정도로 맛있습니다.”

    “그렇다면 안 먹어 볼 수 없지.”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메뉴를 신경 써서 추천해 준 하옐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윈터가 맞은편에 앉았다.

    “로스트 치킨 시켰어?”

    “시켰어요. 당신도 좋아해요?”

    “별로.”

    윈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곧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상태의 로스트 치킨이 테이블 위에 올랐다. 직원 하나가 테이블 위에서 솜씨 좋게 치킨을 썰어 접시에 놓은 후 그레이비소스를 올려주었다.

    육즙이 가득한 치킨을 입에 넣은 바이올렛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입에서 녹아요.”

    “맛있어?”

    “정말 맛있네요.”

    “이 주방장도 집에 데려가?”

    “아뇨, 손님들이 실망해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젓고는 로스트 치킨을 연달아 입에 넣었다. 맛있게 먹는 그녀를 보니 괜히 군침이 돌아 윈터도 포크를 들어 치킨을 먹었으나 여전히 그의 입에는 별로 안 맞는지 몇 입 먹다 말았다. 대신 늘 먹는다는 엄청난 크기의 샌드위치를 시켜 한 입에 크게 물어 우적우적 먹어 치웠다.

    전에 하옐에게 들어 보니 윈터는 제대로 식사하는 시간을 아까워해 회사에서나 출장지에서나 대부분 샌드위치를 먹으며 일을 한다는 듯했다.

    윈터가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먹어 치운 후 아무리 봐도 뜨거울 것 같은 커피까지 단숨에 들이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바이올렛이 그런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당신은 참 열심히 사네요. 대단해요.”

    “요즘 게을러졌는데, 공주님 때문에.”

    “당신은 평소에 너무 성실해서 좀 게을러도 돼요.”

    바이올렛이 다정히 말하자 윈터가 픽 웃더니 턱을 괴고 말했다.

    “당신이 자꾸 그렇게 좋은 점만 보는 바람에 당신과 이야기만 하고 오면 내 직원들이 기고만장해지잖아. 나도 마찬가지고.”

    “굳이 나쁜 점을 찾을 필요는 없잖아요.”

    “저런. 눈앞에 나쁜 점만 꼭 찾아서 얘기하는 사람이 있네. 어머나, 심지어 남편이네?”

    윈터의 짓궂은 말에 바이올렛이 연하게 웃었다.

    “내가 늘 그렇게 ‘어머나’ 하고 놀라나요?”

    “아니, 이것보단 훨씬 우아하지.”

    “있죠, 아까 단골손님과 이야기할 때 당신.”

    “응, 왜?”

    “보기에 좋았어요.”

    “어떤 의미로? 심미적으로?”

    “성실히 일하는 남편의 모습은 참 유혹적이더군요.”

    심미적이란 말을 놀리려고 꺼냈던 윈터가 바이올렛의 솔직한 대답에 그대로 굳었다. 바이올렛이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여상히 식사를 이어갔다.

    윈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입항까지 좀 남았는데.”

    “그럼 천천히 식사를 해도 되겠네요.”

    바이올렛이 놀리듯 말하자 윈터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세상에서 당신만큼 날 괴롭히는 사람도 없어.”

    그는 엄살을 부렸고, 바이올렛은 그게 재미있어서 웃음을 지었다.

    *

    편안한 항해를 끝내고 두 사람은 키론에 도착했다. 그들을 알리카로 안내하기 위해 윈터의 이복동생인 할린이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할린은 이야기 들었던 것처럼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얼굴이 창백한 그를 발견한 윈터가 질색을 하며 물었다.

    “내가 돈 넉넉히 주지 않았나? 어떻게 최근에 총에 맞은 나보다 더 골골거려?”

    겁 많은 할린이 움찔하자 바이올렛이 달래듯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소?”

    “네, 네. 괜찮습니다.”

    할린이 바이올렛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 그러더니 바이올렛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하지만 작은 마님…… 아, 아니, 부인께서도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소?”

    “네! 형님께서 저에게 편지를 여러 장 보내 주셨어요!”

    편지 이야기를 할 때 할린의 안색이 더더욱 나빠지는 것을 보니 협박 편지라도 보냈던 모양이었다.

    윈터가 안 그래도 겁먹은 할린을 더욱 움츠리게 하는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히 들어갈 수 있어?”

    “네. 다들 허락하셨어요.”

    “스물아홉 살짜리 혼혈은 되는데 다섯 살짜리 혼혈은 왜 안 됐대?”

    윈터가 냉랭하게 묻자 할린이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아, 알리카 사람들이 20년 넘는 동안 많이…… 개, 개방적이 되었습니다. 그때 어른들도 샤먼들도 굉장히 보수적이셨기 때문에…….”

    “이제 나 말고 다른 혼혈은 들어갈 수 있나?”

    “그, 그건 아직 아니에요.”

    “그럼 그냥 내가 돈이 많아서 들여보내주겠다는 거잖아!”

    “그, 그렇지만은 않아요! 물론 일족분들 중에 가장 부자이시긴 하지만!”

    “그 다음이 누군데.”

    “카닉사 부대표이신 이글린 씨, 그 다음이 키론 호텔의 총지배인이신 니사 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그러니까 아무래도 일족에 기여하신 바가 크다고 어른들께서 판단하셔서…….”

    “더럽고 재수 없는 놈들.”

    윈터가 짜증을 내며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더니 바이올렛을 보며 말했다.

    “이 말 안 하기로 약속하긴 했는데. 나 당신만 건강하면 여기서 포기했어.”

    “이해해요.”

    바이올렛이 욱하는 윈터의 팔을 토닥거렸다. 그녀의 손길에 약간 안정을 되찾은 윈터가 신경질적으로 할린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건 진짜야?”

    “네? 아…… 네. 확률적으로는 가능할 겁니다.”

    “확률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망할 이방인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폐쇄적이야? 애도 상대를 골라 가면서 낳아야 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쥐뿔도 없으면서 예민하긴 또 왜 이렇게 예민해?”

    바이올렛 앞에서는 비교적 침착한 편이던 윈터의 분노가 제 일족 앞에서는 너무 큰 물건을 상자에 담는 것처럼 삐죽거리고 튀어나왔다.

    그 분노가 다 저를 향하는 것 같아 오들오들 떨던 할린이 얼른 바이올렛 쪽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그녀 역시 가지고 있는 본연의 분위기가 할린을 숨 막히게 했지만 부부의 저택에서 지낼 때 사용인들이 작은 마님에게 가지는 따듯한 사랑을 기억하니 덩달아 애정이 들었다.

    할린이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라크라운드에서는 아기가 은하수를 타고 부부에게 온다고 하지요?”

    그 말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할린이 겨우 따라 웃으며 말했다.

    “알리카에서는 불의 신께서 보낸 요정들이 부모로 삼고 싶은 부부를 발견하면 어머니의 배 속으로 쏙 들어간다고 한답니다.”

    “그렇소? 참 사랑스러운 이야기…….”

    즐겁게 반응하던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윈터를 보았다. 그러고는 눈 속에서 고개를 드러낸 표범 같은 그의 눈을 보며 저런 요정이 어디 있나, 생각했다.

    하기야, 그도 어릴 때는 요정 같았을지 모른다.

    바이올렛은 어린 윈터 블루밍을 제대로 상상하기 힘들었다. 시도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때 윈터가 그녀 쪽을 보더니 허리를 숙여 귓속말했다.

    “저 말대로라면 난 반은 우주에서 왔고, 반은 요정이겠군.”

    웃으라고 한 말일 텐데, 바이올렛은 이제 제가 이방인 혼혈이라는 걸 농담으로 삼기까지 하는 그가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윈터를 한 번 꼭 끌어안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