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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93화 (93/176)
  • 93화

    정작 사고를 당한 윈터는 부산하게 저택 안을 돌아다니는 사이, 바이올렛은 세상모르고 단잠을 잤다. 그녀 역시 윈터가 깬 것을 보고 안심한 데다 이혼을 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급한 불을 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윈터는 그녀에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옷을 갈아입을까 생각했으나 지금 필요한 건 예쁨이 아니라 동정심이라는 것을 판단하고 잠옷 차림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바이올렛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아마 사용인들이 애걸복걸해 겨우 먹인 감기약이 이제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들 그녀가 떠나지 않으리란 소식에 기뻐 날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윈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않으려고 해도 말이야. 만인의 사랑을 받는 공주님이란 말이지.”

    바이올렛이 잠결에 무언가 찾아 쥐듯 두 손을 오므리자 윈터가 제 손을 쥐여 주었다. 바이올렛이 안심해 다시 잠드는 것을 본 윈터가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그녀를 관찰했다.

    20일이 지났는데도 그녀가 제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의 온몸의 기관들이 여태 태업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문이고 창이고 다 걸어 잠그고 이렇게 둘만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싶어졌다.

    *

    바이올렛은 정말로 오래 잤다.

    중간에 잠깐 깨긴 했지만 그 이후로 다시 잠들어 다음 날 아침까지 잤다.

    바이올렛이 눈을 떴다가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동그래져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는데 침실 문이 열리고 하루 만에 지팡이에 익숙해진 윈터가 여전한 고통에 인상을 쓴 채로 걸어 들어왔다.

    “지독하게 자는군. 열여섯 시간을 잤어.”

    “내, 내가요?”

    본인도 믿기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너무 자서 허리가 아팠다.

    “이혼 취소에 관한 거, 계약서로 적으려고 당신이 깨길 기다렸는데 하루를 꼬박 자더군.”

    “내가 정말…… 그렇게 오래 잤어요?”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 계약서 쓰러 가자.”

    “아, 세수라도 하고 올게요. 너무 많이 자서 민망해요.”

    바이올렛은 정말로 부끄러운 듯 뺨이 붉어져 있었다. 윈터가 어딘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열여섯 시간 기다리나 열일곱 시간 기다리나 그게 그거지요, 우리 공주님.”

    “……너무 무안하게 하지 말아요.”

    그녀가 흘기고는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바이올렛은 저 성격 급한 남자가 중간에 쳐들어오기 전에 급히 단장을 시작했다. 젠은 그런 바깥 상황에 관심 없다는 듯 바이올렛의 머리칼에 집중했다.

    하도 잘 자서인지 피부도, 머리칼도 며칠 전보다 되레 매끈매끈했다. 그녀의 머리칼을 절반으로 갈라 꽃과 함께 땋아서 반묶음을 한 젠이 두 손으로 입을 감싸며 말했다.

    “작은 마님은 무슨 머릴 해도 재미있어요…….”

    “재미가 있는 거니?”

    바이올렛은 무슨 소리냐는 듯 웃었지만, 젠은 진심으로 제가 살면서 제일 잘한 것은 직업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오밀조밀 머리 모양을 바꿀 때마다 바이올렛의 아름다운 얼굴은 귀엽게 보이기도 하고, 우아하게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때 윈터가 들어서자 젠은 두 사람이 앉을 테이블에 계약서 종이를 올려 주고 나갔다.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는데 윈터가 급한 성격을 못 버리고 지팡이를 딱딱거리며 평소 같은 속도로 의자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아파 죽겠는지 테이블을 주먹으로 때리며 고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많이 아파요?”

    바이올렛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허벅지에 손을 대려 하자 윈터가 황급히 손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제발 좀 아무 때나 만지지 마.”

    “아픈 게 불쌍해서요.”

    “차라리 때려. 그게 덜 괴롭겠다.”

    “당신은 정말 내가 만지는 걸 거북해하네요.”

    바이올렛이 섭섭한 표정을 짓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한마디를 더 했다.

    “이기적이에요.”

    “뭐가.”

    “당신은 내가 못 만지게 해도 만졌잖아요. 원래 당신은 부부 관계를 그렇게 한다면서.”

    “……그건 다르지. 그건 밤이었잖아.”

    “낮이었어요. 해도 안 진 시간이었어요.”

    장난을 치는 걸 보니 기분이 아주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 계약서에 번갈아 필요한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바이올렛이 쓰고 있는걸 기다리는 동안 윈터는 묘기 부리듯 손으로 펜대를 빙빙 돌렸다. 그가 글씨를 쓸 때는 문진을 밀어 버리고 제 자세에 맞게 종이마저 삐딱하게 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두 사람은 계약서 위에 먼저 이혼 취소와 윈터가 앞으로 이혼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는다는 내용을 적었다.

    평소 바이올렛의 서체는 유려했고, 윈터는 그의 성격처럼 급하게 흘려 쓰는 글씨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또박또박 정자로 글씨를 적고 있었다.

    윈터가 말했다.

    “내가 결혼 유지를 받아들여 줬으니까 조건을 합의하지.”

    “좋아요. 말해 봐요.”

    “첫 번째, 앞으로 내가 가자는 파티는 다 가 줘야겠어.”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업적으로 도움이 되는 모양이군요.”

    “물론.”

    전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다만 윈터는 파티에 동네방네 다니며 바이올렛이 제 아내라는 걸 공고히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이곳에서 파티를 열며 사교계 권력을 손에 쥘 테고, 그 과정에서 이 저택에 수많은 청년들이 드나들 것이 분명했다. 그들에게 미리 경고를 해 둘 생각이었다.

    바이올렛이 물었다.

    “두 번째는요?”

    “이건 정말 중요한데.”

    “네.”

    “앞으로 브로콜리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채소를 좋아해서 남겨지는 걸 보면 안타깝거든.”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움찔했다. 말문이 막혔던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브로콜리를 남기는 게 싫다면 식사에서 브로콜리를 빼는 건 어때요?”

    “내 말 못 알아들었어? 내가 좋아한다고. 내가 좋아하니까 당신도 먹어.”

    윈터는 저항 말고 빨리 적으라는 듯 종이를 턱짓했다.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쉬고 물었다.

    “세 번째는요?”

    “그거 두 개야.”

    “정말요? 다른 건요? 당신이 집에 안 들어와도 언제 오냐고 물어보지 말라든지.”

    “그런 건 계약서에 적을 정도는 아니잖아.”

    “브로콜리는 적을 정도고요?”

    “조건 내가 정하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따지실까?”

    윈터가 눈썹을 추키며 말하자 바이올렛이 어딘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두 번째 조건을 적었다.

    브로콜리를 남기지 않을 것.

    그렇게 적고 난 후 바이올렛이 어떻게 봐도 빈약하고 중요도도 떨어져 보이는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별게 없군요.”

    “난 애초에 이혼을 원하지도 않았어. 당신이 나랑 살기 싫다며.”

    그가 토라진 아이처럼 말하자 바이올렛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먼저 숙려 기간을 제안해서 당연히 당신도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나랑 살기 싫다는 사람을 내가 왜 붙잡아?”

    “그랬군요. 소통이 잘되지 않았네요.”

    바이올렛이 계약서를 들어 확인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당신의 조건을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요?”

    “이미 계약한 거니 늦었어. 브로콜리 남기면 안 돼. 물론 다른 야채들도 가능하면 먹고. 어른이잖아.”

    결국 계약서는 브로콜리 이야기로 끝이 났다. 윈터는 곧장 그 계약서를 하옐이 데려온 변호사에게 넘겨주었다.

    윈터가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우리가 다음 달에 작위 계승식에 같이 나타나면 에쉬 로렌스 그 자식 표정 볼 만하겠군.”

    바이올렛은 안심했다. 윈터의 표정이 기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 윈터가 물었다.

    “아이는? 나와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잖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급한 불부터 끄자는 마음이라.”

    “그렇군.”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혼을 안 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를 무척 신나게 한 것 같았지만,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아이를 꽤 좋아했다. 키론에서도 처음엔 무서운 아저씨라며 벌벌 떨던 동네 아이들이 나중에는 부자 아저씨라고 부르며 까르륵까르륵 웃으며 도망 다니는 것을 놀이로 여겼다.

    하기야 윈터만 나타나면 마을 전체에 먹을거리가 풍족해지니 좋아할 만도 했지만, 그는 아이들이 놀아 달라고 매달리면 어른에게 하듯이 모질게 거절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칼리본 광산 지역의 아이들에게는 수도에 오고 싶다는 한마디에 직업까지 약속했다.

    바이올렛은 그런 모습을 보며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의 인생을 생각해서도 아버지가 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와 함께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윈터는 이것이 답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오답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윈터의 곁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가 비행선을 몰고 나갔을 때, 바이올렛은 확신했다.

    그에게는 다른 답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몸을 바꾸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말했고, 몸이 바뀌는 이유는 그의 혈통 때문이니 90% 정도는 믿었다.

    그러나 10%의 의심은 한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비가 오는 줄 모르고 자신을 찾아왔던 날, 바이올렛은 구두 신는 것을 잊고 맨발로 수도에 가지 말라고 윈터를 붙잡았던 저를 떠올렸다. 그날 의심은 늘어났고, 악몽에서 깨던 날 또다시, 그리고 비행선을 타고 나가는 그를 보며 그 의심은 절반까지 커졌다.

    절반은 큰 확률이었다. 그에게 별다른 정답이 없다면 제 답을 제시하기로 했다.

    바이올렛이 손을 내밀었다.

    “계약이 성사되었으니 악수를 하죠.”

    “부부가 무슨 악수를 해.”

    윈터가 친구에게 하듯 손을 툭 치고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불편해 미치겠네. 언제까지 지팡이를 짚어야 돼, 내가 노인도 아닌데. 나가고 싶어. 일하고 싶다고. 돌아 버리겠어.”

    “남 탓도 못 하죠.”

    “왜 못해, 부모님 탓이지. 젠장.”

    윈터가 투덜거리자 바이올렛이 스스로에게 결심하듯 말했다.

    “다신 그런 일 없게 할 거예요.”

    “당신이? 무슨 수로.”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테이블에 두 손을 겹쳐 올려놓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결심한 게 있어요.”

    “뭘.”

    “당신에게 잘해 줄 거예요.”

    “……왜?”

    “애초에 당신에게 당신 부모님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난 그럴 생각이었어요. 당신에게 잘해 주기로. 돈이 아니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쌓을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기로.”

    “…….”

    “당신도 알지만 난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책임감을 느껴요. 물론 지금 세상에선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죠. 아니면 나와 당신이 그냥 다른 걸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는 내가 믿는 걸 당신도 믿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바이올렛이 신중하게 이야기하자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해. 나도 내가 믿는 걸 당신이 믿어 줬으면 하는데.”

    “돈의 소중함이요?”

    “…….”

    바이올렛의 당연하다는 듯한 확답에 농담이라도 걸려던 윈터의 말문이 막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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