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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4화 (24/176)
  • 24화

    응접실 문이 열리자 걱정하던 바이올렛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번화가를 가져왔다고 해서 지난번에 호텔에 꽃을 사 오듯이 과하게 물건을 쌓아 놓은 건 아닌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다과만 준비되어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 안심하려는 찰나, 응접실로 물건을 한 짐씩 챙겨 온 상인들이 들어왔다.

    곁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윈터가 말했다.

    “적게 사면 상인들에게 실례란 것만 알아 둬.”

    “실례라고요?”

    “아주 무례한 거지. 여기까지 기껏 가져왔는데 한 개도 못 팔고 집에 갈 불쌍한 상인의 마음을 생각해 봐. 어때. 아프지?”

    그의 심각한 표정에 바이올렛은 정말 하나도 못 팔면 불쌍한 건가,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당신에게 얼굴 도장 찍어서 나쁠 게 없으니 투자 개념이기도 한 거죠?”

    “……쓸데없이 똑똑해 가지고.”

    윈터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은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차를 마셨다.

    한자리에 앉아서 번화가를 구경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남부 상인들은 굉장히 언변술이 좋아 몇 번이나 바이올렛을 홀리게 했다.

    중간중간 웃는 바이올렛을 보며 윈터는 이딴 데다 시간을 버리는 것도 가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뭐 하나 살 생각이 없어 보여 욱하려는데 화훼용품이 등장하자 바이올렛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쁘다……. 세상에, 이런 화분은 처음 봐요.”

    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아내를 보니 윈터는 어쩐지 안심이 됐다. 만에 하나 바이올렛이 제게서 도망을 쳐도 잡아다 정원에 가둬 놓으면 그럭저럭 만족하고 살 것 같았다.

    윈터는 바이올렛의 눈빛에 번지는 호기심을 보며 저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바이올렛이 장화를 가리켰다.

    “장화도 있어요.”

    “당신이 장화를 신을 일이 뭐가 있다고.”

    윈터가 핀잔했으나 이미 상인이 냉큼 장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요즘 귀부인들께서도 장화를 많이 신으시지요. 티 파티 대신 정원 관리를 하는 모임들도 생긴답니다.”

    “개소리하지 마.”

    “진짭니다! 요즘 남부 유행이잖아요.”

    상인이 동의를 구하듯이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지만, 그 이후로도 상인이 정원 관리에 필요한 도구를 설명하는 것을 경청했다. 윈터가 턱을 괴고 놀리듯 말했다.

    “정원사를 해고해야겠군. 여기 신참이 생겼으니.”

    “안 돼요.”

    안 그래도 원래 있던 사용인들 중 일부를 윈터가 해고해 버렸다. 처음으로 몸이 바뀌던 날 빠릿빠릿하게 제 말을 못 알아들어 짜증난다는 게 이유였다.

    정원사를 정말 해고할지 모른다고 생각해 바이올렛이 정색하자 윈터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농담이었지. 정원사 없이 저 넓은 정원을 어떻게 관리해? 당신이 혼자 힘으로 해 봐야 얼마나 한다고.”

    “내가 그렇게 약골로 보여요?”

    “그렇게 보여. 애초에 당신은 햇빛 아래 한 시간 서 있으면 쓰러질걸.”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인간은 생각보다 강했다.

    바이올렛은 정원 파티에서 자리도 없이 몇 시간이고 서성였던 적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쓰러지지 않았다.

    어차피 쓰러져 봤자 웃음거리만 되리라. 해서 그녀는 안간힘을 써 그 자리에서 버텼다.

    화훼용품을 산 이후에도 계속해서 상인들이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번화가를 가져왔다는 그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

    쇼핑에 지친 바이올렛은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가지고 싶은 걸 말하라고 강요하더니, 물건을 안기는 것도 강제였다.

    그녀의 침실에 뜯어 보지도 못한 엄청난 양의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바이올렛이 예쁘다고 말만 하면 사들여서 중간부터 입을 다물었더니 그때부터는 상인과 눈만 마주쳐도 사들였다.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 어찌나 물욕이 대단한지. 하기야, 바이올렛은 지금까지 윈터가 같은 옷을 두 번 입는 것을 못 봤고, 같은 시계를 차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지쳐 있는 사이, 하녀 셋이 들어와 그 많은 짐들을 뜯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도 짐이 많아 정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이혼이 정말 싫긴 한가 봐.’

    질린다는 듯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던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처음엔 이혼을 하지 않겠다던 그의 말이 그저 답답하게만 느껴졌는데, 이런 식으로 그와 조금씩 관계가 나아진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손을 잡았을 때, 그가 다시 제 손을 잡았다. 바이올렛이 3년간 줄곧 바라 왔던 일이었다.

    남편이 손을 잡아 주는 일.

    바이올렛이 그 감각을 다시금 떠올리는데, 하녀 하나가 상자에서 나온 유리로 된 백조 조각을 가져왔다.

    “작은 마님, 이건 어디 둘까요?”

    이 어린 하녀는 아까부터 상자 뜯기가 재미있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조금 웃으며 물었다.

    “젠이라고 했니?”

    “네!”

    “저 테이블 위에 놔 주렴. 고생이 많구나.”

    “아휴, 전 재미만 있는걸요?”

    “그럼 나도 같이 열어 볼까.”

    바이올렛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젠을 포함한 다른 하녀들이 바이올렛을 힐끔거렸다.

    작은 마님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먼저 있던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다. 그런데 정작 마주하고 앉아 보니 편안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작은 마님은 처음 들어온 하녀들의 이름도 곧바로 외웠고, 무엇이든 부탁한 후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오히려 성격이 이상한 쪽은 조금만 실수를 해도 버럭버럭 성질을 내는 윈터 쪽이었다.

    게다가 소문처럼 작은 주인님이 작은 마님을 원망만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새로 이곳에서 일하게 된 사용인들은 바이올렛에게 밉보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나갈 준비를 마친 윈터가 들어서자 그를 무서워하는 하녀들이 인사를 하고 후다닥 방을 나갔다.

    바이올렛이 뜯어 보려던 상자를 내려놓고 말했다.

    “부탁이니까 들어오기 전에 들어온다고 말 좀 해 줘요.”

    윈터가 신경도 쓰지 않고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하피트 지방에 다녀올 일이 생겼어. 보름 이상 걸릴 거야.”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웬일로 이렇게 자세히 말해 줘요?”

    “당신이 하도 꿍얼꿍얼거려서.”

    “그래도 말해 준다는 게 신기하네요.”

    바이올렛이 말하다 무심코 거울을 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느라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었다. 빗을 꺼내 머리칼을 정리하려는데 윈터가 손목을 붙잡았다.

    “그냥 놔둬.”

    “머리가…….”

    “빗질 안 하면 마주 앉아서 대화도 못 하는 게 무슨 부부야.”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윈터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우아하고, 단정하며, 인간이 아닌 왕족으로 있을 것. 그것이 라크라운드 왕실의 방침이었다.

    그러니 내가 단정하지 못한 것은 게으르기 때문에. 닥쳐온 상황을 못 이기는 건 내가 나약해서, 내가 감정적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다.

    바이올렛이 확인받고 싶었는지 다시 물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전혀.”

    “정말?”

    “안 이상하다니까. 도대체 뭐 어느 부분에서 이상함을 느껴야 돼?”

    그런 자신과 반대인 남자다. 불같고, 예의 없고, 언제나 지극히 인간적인.

    그게 신기하고, 가끔은 부러웠다.

    윈터가 손목을 놓아주며 투덜거렸다.

    “방이 엉망진창이군. 쓸모없는 건 다 가져다 버려.”

    “누구 때문인데요? 게다가 당신은 내가 가진 건 다 쓸모없다고 할 거잖아요.”

    “웬일로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군, 우리 공주님께서.”

    윈터가 비꼬며 벽장으로 걸어갔다. 그 안에 있는 것도 전부 버리라고 트집 잡을 생각이었다. 바이올렛의 물건들은 마치 누구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단조롭고 수수했다.

    아내는 누구나 알아볼 만큼 청아한 미인이었다. 어두운 것보다는 밝은 것이 단연 어울렸다.

    그가 벽장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가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검지로 문고리 안을 쓰다듬어 보았다. 금박이 되어 있는 손잡이 안쪽에 금박이 떨어져 나가고 흠집이 패어 있었다.

    “…….”

    “윈터?”

    바이올렛이 부르자 윈터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쁜 기억이 났다.

    윈터가 하인으로 일할 때, 고용주이던 식당 주인은 툭하면 그를 두들겨 패고 헛간에 가둬 놓았다. 윈터는 어떻게든 나가 보려고 문을 두들겨 댔고, 덕분에 문고리에는 사슬에 쓸린 자국이 남았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생일 파티 당일 보았던 바이올렛의 손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내가 제 몸을 훔치던 날, 손에 묻어나던 피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기껏해야 넘어진 정도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몸에 힘이 없으니 넘어지기도 잘하는 건가, 하고.

    그날 제 몸을 가지고 도망치던 바이올렛은 마치 헛간에서 도망쳐 바이델린 산맥으로 죽어라 달리던 날의 자신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런데 그럴 리 없지. 공주님을 그렇게 함부로 다룰 사람이 누가 있나.

    윈터가 그렇게 생각하며 손잡이 안쪽을 다시 꽉 움켜쥐었다. 잠시 뒤, 그가 돌아보며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 갇혀 본 적 없지?”

    그러자 바이올렛이 그가 쥔 문고리를 보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있기야 있죠.”

    “웃기지 마. 누가 감히 공주님을…… 아, 뭐 가정 교사 같은 건가?”

    “전 굉장히 훌륭한 학생이었어요.”

    “하긴, 딱 봐도 모범생 같은 얼굴이니까.”

    “네. 당신은 딱 봐도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고요.”

    “내가 뭘?”

    “어떻게 봐도 불량한걸요?”

    바이올렛이 웃고는 다시 인사했다.

    “다녀와요.”

    “말 끝내지 마. 누가 그랬는지 알려 줘야지.”

    “그게 뭐가 중요해요. 이제 와서.”

    “왜 여기서 이제 와서라는 말이 나와?”

    윈터가 언성이 높아지려는 것을 짓눌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혼하려고 든 게, 에쉬는 정말 싫었나 봐요. 그래서 어머님께 저를 어떻게든 바로잡아 달라고 말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무리 에쉬 그 자식이 부탁했더라도 우리 어머니가 당신을 벽장에 가뒀을 리 없잖아.”

    “제 주제에 이혼을 생각한다니까, 많이 화가 나셨나 보죠.”

    윈터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마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그가 갑자기 쉬어 버린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말 안 했어?”

    “하려고 했어요.”

    “언제?”

    “바로 직후에요. 당신이 일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때. 이야기 좀 하자고 말했잖아요. 몇 번이나.”

    아내가 자신을 붙잡을 때마다 윈터는 공주님이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려 제 일을 막는다고 생각했었다.

    3년 전 이야기를 하자고 말할 때 바이올렛은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중엔 화를 내다가, 요즘에는 포기한 얼굴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바이올렛은 지쳐 보였다.

    “그래서 그날 몸을 훔쳤어요. 미안했어요, 그건.”

    바이올렛은 오히려 조금 웃었다. 몸을 훔친 것이 우습지 않았냐는 듯이. 그러나 윈터는 그녀를 따라 웃지 못했다.

    언제나 완벽해 보이던 아내의 보이지 않는 어딘가가 망가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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