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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3화 (23/176)
  • 23화

    먼저 준비가 끝난 윈터는 마차 앞에서 바이올렛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사이 그는 저택으로 돌아온 하옐에게 바이올렛의 소작료 수령인이 하나 더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설명을 듣고 난 윈터가 표정을 찌푸렸다.

    “칼슨 로우, 라.”

    윈터도 수도에서 일 관련으로 몇 번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칼슨은 예쁘장한 얼굴에 어딜 가도 인기가 많았다.

    하옐은 윈터가 언제 폭발할지 몰라 한 걸음 떨어져서 말을 이었다.

    “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뭐, 세금 문제라든가?”

    “재산을 왜 왕실 재산으로 나눴겠어. 왕실 재산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아.”

    “아직도요?”

    “그래, 아직도.”

    그러나 사유 재산과 왕실 재산으로 나눠 둔 것은 세금 문제라 하더라도 수령인이 하나 더 있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아내의 사유 재산을 몰래 알아보는 것은 불법이니, 섣불리 바이올렛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윈터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난 3년간 그녀를 외면한 결과였다.

    불륜 같은 걸 저지를 사람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지만, 혹시 알까. 윈터는 그동안 천사 같은 얼굴로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바이올렛의 오빠인 에쉬 로렌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닮은 얼굴로 윈터에게 방해될 일만 벌여 왔다.

    살다 보니 인간에 대한 불신만 가득 생겼다. 윈터가 머릿속 생각들을 휙휙 지웠다.

    만약 아내가 지난 3년 동안 외로움을 못 견뎌 불륜을 저지르기라도 한 거라면 그 칼슨 로우란 작자를 죽이든 쫓든 처리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윈터는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돈을 날린 것 정도는 용서해 줄 수 있었다. 어차피 그녀의 사랑은 돈으로 어찌 되는 게 아니니까.

    설령 몸을 섞었더라도, 집안을 한바탕 뒤집어 놓고 평생 아내를 감시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용서는 할 것이다.

    사랑만 하지 않으면 된다. 깊이 사랑에 빠져서 자신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용서할 수 있었다.

    그때, 문 너머에서 바이올렛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바이올렛이 묻는 말에 윈터가 대답 없이 마차만 턱짓했다.

    이제 겨우 그녀와의 관계가 조금 나아졌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녀에게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

    아들 부부가 식사 자리에 들어설 때부터 캐서린과 제임스는 아들 부부의 관계가 확연히 바뀐 것을 알았다. 그간 두 사람이 같이 움직이는 것을 본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격식을 갖춘답시고 얌전을 떨어도 무례함이 뚝뚝 떨어지던 윈터의 자세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언제나처럼 검지를 손잡이에 걸어 찻잔을 들지도 않았고, 스푼으로 부서져라 차를 젓지도 않았다. 부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캐서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가를 하면 이런 자리도 앞으로는 없겠구나.”

    그러자 제임스가 달래듯이 말했다.

    “바로 나간다는 것도 아니잖소. 너무 아쉬워 마요, 캐서린.”

    “그건 알지만…….”

    캐서린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그래도 나는 가능하면 너희 둘 다 좀 더 집에 머물러 줬으면 좋겠구나.”

    캐서린과 제임스가 분가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나타내자 바이올렛은 바짝바짝 입이 말랐다. 이 설득으로 윈터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은 요 며칠, 블루밍 부부가 윈터에게 티 타임의 간단한 예절조차 가르쳐 주지 않은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동안은 본인이 보통 고집이 아닌 사람이라 바뀌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윈터는 바이올렛이 말해 주는 것들을 바로바로 받아들였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생각보다 그의 부모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모진 말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제 부모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바이올렛, 넌 요즘 건강은 좀 어떠니?”

    “건강…….”

    바이올렛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하려는데 윈터가 끼어들었다.

    “안 좋습니다. 솔직한 말로 여기 와서 앉아 있는 것도 힘들 겁니다. 갑자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요.”

    꾀병 이야기를 돌려 가며 꺼낼까 했는데, 윈터가 확고한 투로 대답하자 블루밍 부부가 멈칫했다. 윈터가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의사 말이 두통이 심하답니다. 그 개 같은 돌팔이가.”

    부모의 놀란 눈을 본 윈터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무능력한 의사 녀석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질 나쁜 약을 쓰고 있었다더군요. 그 약이 두통을 유발한다고요. 그 돌팔이가 중간에 약값을 해 먹은 게 분명하니 어떻게든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

    “세상에, 그랬니?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캐서린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더니 바이올렛의 손을 감싸 쥐고 물었다.

    “아가, 이제 괜찮니?”

    바이올렛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블루밍 부부를 만날 때마다 그녀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결혼 초기에는 저는 멀쩡하고 세상이 미쳤다고 생각하다가, 점점 세상이 멀쩡한데 제가 미친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바이올렛이 떨리는 입매로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네, 이제 괜찮아요.”

    캐서린은 두 손으로 바이올렛의 손을 꼭 감싸 쥐고 걱정스럽다는 듯 연신 쓰다듬었다.

    분가를 말리는 설득은 계속되었지만 바이올렛의 걱정과 달리 윈터는 전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제임스가 오늘 이 식사 자리를 마련한 주목적을 꺼내기 위해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렇게 꼭 분가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니, 바이올렛?”

    “아버지, 분가는 제가…….”

    “감싸 줄 필요 없다, 윈터. 열두 살 때부터 여기 거처를 두었던 네가 먼저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을 거란 거, 아비인 내가 더 잘 안다. 바이올렛, 혹시 너…….”

    제임스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에 수도가 낫다고 생각한 거니?”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윈터를 보았다.

    그러자 윈터가 말했다.

    “아이는 안 낳겠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윈터.”

    바이올렛이 씁쓸한 얼굴로 이름을 부르자 윈터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

    “식사 끝나셨으면 먼저 일어나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그를 보며 바이올렛이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윈터가 나간 것을 확인한 제임스가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아이를 안 낳겠다니?”

    “남편은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그럼 네가 설득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저 애가 집에 마음 붙일 곳이 있었으면 저런 소릴 했겠니?”

    그러자 옆에서 캐서린이 말렸다.

    “윈터 고집 당신도 알잖아요. 한번 마음먹으면 누가 설득해도 듣지 않아요. 바이올렛, 넌 뭐 하니? 나가서 달래 주지 않고.”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바이올렛이 인사하고 윈터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모두 나가자 제임스가 말했다.

    “확실히 바이올렛은 윈터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걸 아직 모르는 것 같군.”

    “그래 보이네요.”

    캐서린이 동의했다.

    *

    윈터 성격이면 분명 먼저 가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의외로 앞에서 바이올렛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앞에 멈춰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 또한 물러설 생각이 없었기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이가 싫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고 끝이었다.

    두 사람이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다, 윈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돼.”

    “…….”

    “분가하고 싶다고 해서 들어줬잖아.”

    “설득할 거예요.”

    “그것까지 말리진 않겠지만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윈터가 대꾸했다.

    그래도 설득을 말리지 않겠다는 말에 바이올렛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게다가 아까 의사 욕을 해 준 덕에 당분간 그녀의 아픔이 꾀병이라고 비난당할 일도 없을 테니까. 바이올렛이 물었다.

    “바로 수도로 갈 거예요?”

    “가야지. 그보다, 내가 준 땅을 조금도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더군? 이러니 보석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지.”

    “제가 왕실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그럼 다 제대로 된 게 아니란 건가요?”

    “그래. 다 구식이야. 유행에 뒤처졌지.”

    윈터의 사납고 냉정한 말에 바이올렛의 눈이 가늘어졌다.

    윈터는 제가 ‘바이올렛 기준으로 무례한 말’을 할 때마다 아내가 짓는 저 표정만 보면 열이 확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얄미워서 보는 건데 그 표정이 왜 이렇게 내키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제가 정말로 이상 성욕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뻔뻔하기로 남부에서 따라올 자가 없던 그가 아내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무튼. 그러니 오늘 필요한 걸 새로 사.”

    “필요한 거 없어요. 물건 말고…… 꼭 해 보고 싶었던 게 있긴 한데.”

    “기다려 봐.”

    윈터는 제가 처음으로 아내에게 대화를 하자고 요청했을 때,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했던 때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

    뭐라고 했더라, 가지긴 싫고 버리긴 아까운 그런 물건 비슷하게 말했었는데.

    이 여자는 양심도 없지. 세상에 버리기 아까운 물건 때문에 이렇게 끔찍한 분노와 고통과 희열과 우울함을 감내할 머저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회피하는 사이,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윈터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그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손을 잡고 싶어요.”

    그 행동에 한심할 정도로 급격히 트라우마가 사라진 윈터가 힐끔 바이올렛을 보았다.

    “……이게 뭐?”

    “결혼식장에서 처음 당신 손 잡았을 때요. 그때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처음 보는 남자가 남편이라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을 몰라서, 그래서 손부터 잡았어요. 당신 손이 하도 커서 신기했어요.”

    “그래서.”

    “근데 그날 우리 오빠 때문에 당신의 전 재산이 날아갔잖아요. 그래서 그날 손을 놓친 게 아쉬웠어요.”

    바이올렛은 그게 후회가 되었다.

    그날 좀 더 꼭 잡고 있을걸. 따라 나갈걸.

    그랬으면 당신은 나를 조금, 덜 미워하게 되었을까.

    잡힌 손을 바라보던 윈터가 물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게 고작 이거야?”

    또 뭐가 성질을 건드렸는지 윈터의 표정이 폭발 직전이었다. 하여튼 지난 3년 동안 어떻게 저 불같은 성격을 이렇게 몰랐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바이올렛은 살면서 저렇게 심한 다혈질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남편이 화가 났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것 같은데 조금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화가 난 거 맞죠?”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버럭 소리쳤다.

    “안 났어! 이까짓 손을 왜 못 잡아? 그냥 이렇게 잡으면 되잖아!”

    “그게, 당신이 바쁘지 않을 때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바이올렛의 담담한 말에 성질을 내던 윈터가 뚝 멈췄다.

    윈터는 방금 전까지도 바이올렛이 손을 잡는 게 낯설지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바이올렛은 결혼식장에서도 그의 손을 잡았고, 잠깐만 자신에게 시간을 내 달라고 손을 잡았으며, 지난번 아버지의 생신 때에도 이야기 좀 하자며 상처가 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항상 먼저 그의 손을 잡았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낯설지 않았다.

    아내가 손을 잡을 때면 늘 자신이 먼저 그것을 놓았다. 그의 시간은 언제나 일에 맞춰져 있었으므로.

    보면 볼수록 아내와 자신은 어디 하나 맞는 구석이 없다. 가지고 싶은 건 다 사 주려고 했는데, 왜 아내는 원하는 게 고작 손을 잡는 것인가.

    이래서야 우리 둘이 무슨 사랑을 할까. 이렇게 서로 바라는 게 다른 사람들이.

    윈터가 이번에도 제 손을 먼저 빼냈다. 그에 바이올렛이 익숙한지 제 손을 품으로 당기려는데 윈터가 다시 꽉 움켜쥐었다. 바이올렛의 손이 윈터의 손에 안기듯 담겼다.

    “가자.”

    “당신 일하러 가야 할 것 같아요. 저기서 하옐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잖아요.”

    “알아서 하라고 해. 나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가면 그게 회사야? 동네 구멍가게지.”

    윈터가 대꾸하며 그녀를 끌고 마차로 향했다. 바이올렛은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하옐이 걱정스러워 자꾸 돌아보았지만 윈터의 고집에 못 이겨 마차에 탔다.

    그런데 유행에 뒤떨어진 구식 물건을 버리고 새 물건을 사자던 윈터가 마부에게 요구한 방향은 영지 밖의 번화가 쪽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는 저택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바이올렛이 물었다.

    “번화가 가려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자 윈터가 저택 2층의 가장 넓은 응접실로 향하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요 며칠은요.”

    “……아무튼 내가 거길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살 시간이 어디 있어? 번화가를 여기로 불러야지.”

    그가 툴툴거리며 마저 계단을 올랐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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