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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6화 (6/176)
  • 6화

    의사가 바이올렛을 진찰하는 사이,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 몸을 찾은 후에야 그녀는 슬슬 제가 미치지 않았으며,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의사가 진찰을 마치자 옆에서 기다리던 호텔에 소속된 하녀, 룰루가 그녀에게 따듯한 차를 내밀었다.

    “고생하셨어요, 작은 마님.”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다는 건가?”

    “진찰이 고생이지요!”

    룰루가 정색하고 하는 말에 바이올렛이 당혹감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입을 열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십니다. 심장이 안 좋으셔서 계속 약을 드셨지요?”

    “그랬네만.”

    “옛날에 나온 약은 두통을 악화시켜서 지금은 쓰지 않습니다. 새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까 드셔 보세요. 요즘 누가 그런 약을 쓰는지 모르겠네요. 의사 자격이 있는 자가 처방하긴 했습니까?”

    의사가 전임 의사를 있는 대로 비난했다. 늘 꾀병이라고 우기던 릭먼이 틀렸음을 말해 주는 것도 후련했지만 두통이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바이올렛에게는 가장 기뻤다.

    의사가 떠나고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룰루가 기겁을 해서 말했다.

    “대표님께서 절대 돌아다니지 못하시게 하라고 했어요, 작은 마님.”

    제 아내를 무슨 당장 죽을 사람처럼 묘사하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이 차분히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방 주인이 오기 전에 방을 옮겨야 할 것 아닌가.”

    “무슨 부부가 그렇게 내외를 하세요.”

    룰루는 왕족들은 유난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바이올렛을 일으켰다.

    바이올렛은 곧 안정적인 분위기의 크림색 벽지가 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크기는 윈터의 방보다 많이 작았지만 아늑하게 꾸며져 있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룰루가 다과를 가져다준다며 방을 나가고 잠시 후, 윈터가 데리고 온 하인인 플립이 문을 두드렸다.

    허락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플립이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죄송했습니다, 작은 마님.”

    “죄송하다니?”

    바이올렛이 의아해하자 플립이 대꾸했다.

    “제가 주제넘어 안마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허락만 해 주시면 이번엔 제대로 하겠습니다.”

    저택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던 플립은 꽃잎을 띄운 미온수를 들고 서 있었다.

    보나 마나 윈터가 저지른 짓일 것이다. 참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난처하긴 했지만 안마는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딱히 거절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남자가 발을 만진다는 건 좀 이상하지만 플립은 제 일을 하는 것일 뿐, 이상하게 여기는 제가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다.

    플립이 따듯한 물에 조심조심 바이올렛의 발을 담갔다.

    “아프시거나 너무 약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늘 작은 주인님께만 해 드리다 보니 힘 조절을 못 합니다.”

    “알겠네.”

    플립은 기가 막힌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발등을 먼저 손으로 부드럽게 눌러 풀어 주었는데, 벌써 온몸의 혈액 순환이 원활해지는 기분이었다.

    발바닥을 꼼꼼하게 누르고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빠짐없이 문질렀다. 발을 전체적으로 풀어 준 후에는 물기를 닦아 내고 장미유를 손에 발라 복숭아뼈와 발목까지 꼼꼼하게 다시 마사지를 했다.

    플립은 투지마저 느껴질 만큼 오로지 발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처음엔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하던 바이올렛은 금방 그것에 적응했다. 어찌나 몸이 풀어졌는지 바이올렛은 중간쯤에 깜빡깜빡 졸기까지 했다.

    그녀가 졸고 있는 모습을 본 플립이 서둘러 물기를 닦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바이올렛이 침대에 안기듯이 누우며 웅얼거렸다.

    “이렇게 시원할 줄은 몰랐네. 고마워.”

    사람을 부리며 돈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윈터에게 적응한 플립은 달콤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는 바이올렛 덕에 제가 여태 작은 마님의 발을 마사지했음을 상기해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 나가 보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으응…….”

    바이올렛이 눈을 감고 대꾸했다.

    그렇게 걱정이 많았는데, 오늘따라 잠이 솔솔 왔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룰루가 행거를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마님, 오늘 대표님과의 점심 약속에 입고 가실 옷 고르셔요.”

    “이게 다 무슨 옷인가?”

    “하옐 비서님이 급하게 보이는 대로 결제하셨어요.”

    바이올렛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려하고 과감한 드레스가 가득 걸려 있었다.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간 블루밍 공작 부부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들이 없고, 알게 되더라도 윈터의 수족인 하옐이 고른 것이니 그냥 넘어갈지도 몰랐다.

    얼굴색까지 어두워 보이게 하는 우중충한 드레스만 입다가 화려한 드레스를 만난 바이올렛이 설렘을 느끼며 옷을 살피다 이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이럴 돈이 있는 건가?”

    그러자 룰루가 정색하며 되물었다.

    “무슨 소리세요?”

    “남편이 나와 결혼할 때 2,400만 라크네를 썼으니 하는 말이네. 그때 거의 파산 지경이었다고 들었는데…….”

    “그, 그랬나요?”

    룰루 역시 자세한 상황을 잘 모르는지 눈이 동그래져서 옷을 돌아보았다.

    “하옐 비서님은 돈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늘 옷을 사들인데요?”

    “늘?”

    “예. 늘 이렇게 행거 가득 드레스를 구해서 돌아오셔요.”

    “……드레스를?”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남편이 제 몫의 드레스를 사 온 적은 없었다.

    하옐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드레스를 사들였던 것일까.

    바이올렛은 잠시 씁쓸함에 잠겼으나 모처럼의 외출을 망치고 싶지 않아 성급하게 묻어 두고 미소를 지어 냈다.

    “뭘 입어 보는 게 좋을까…….”

    바이올렛은 망설이는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연한 다홍색 새틴 드레스를 쥐어 당기고 있었다. 블루밍 가문에서 그녀가 주로 입는 검은색이나 회색 드레스도 몇 벌 있었으나 오늘은 제가 좋아하던 색을 입을 생각이었다. 룰루가 옆에서 동조했다.

    “오늘 날씨에 딱 잘 어울리네요!”

    드레스를 골라 입고 허리에는 크림색 리본을 맸다. 그 후 행거 아래 바구니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신발들 중 하나를 골랐다. 뾰족한 앞코에 진주가 달려 있는 리본과 같은 색의 벨벳 슬리퍼였다. 바이올렛이 놀란 듯이 말했다.

    “이렇게 예쁜 슬리퍼가 있는 줄 몰랐네.”

    “자, 이제 머리 하게 앉으세요.”

    바이올렛이 의자에 앉자 룰루가 색이 연한 금발을 빗질하며 감탄했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대표님께선 정말 복받으신 분이세요. 예쁘지, 상냥하지…….”

    “말이라도 고맙네.”

    나름 남편과의 첫 데이트라는 생각 때문인지 덩달아 기분이 들뜬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붉은 리본으로 머리를 장식한 바이올렛은 전에 없이 경쾌해 보였다.

    룰루와 함께 호텔을 나서니 카펫의 끝에 호텔 마차와 집사 하나와 요리사 하나, 플립을 포함한 하인 셋이 서 있었다.

    오늘 아침 식사 후 바이올렛에게 칭찬을 받고 잔뜩 들뜬 요리사 투린이 앞서 나와 물었다.

    “작은 마님, 오늘 저녁은 무엇으로 준비해 둘까요?”

    “육류라면 무엇이든 좋네.”

    “그렇다면 총 열 가지 요리 코스로 순무가 들어간 수프와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넣은 파이, 버터를 바른 로브스터…….”

    요리사가 말하는데 룰루가 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육류라고 하셨잖나, 투린!”

    “파이 있잖나! 게다가 엄청나게 훌륭한 요리를 내놓을 생각이라니까?”

    “내 참 말이 안 통하네! 자기가 하고 싶은 요리는 집에 가서나 하시지!”

    “재료비가 들잖나, 재료비가!”

    “하, 이거 봐. 바로 본심 나오네!”

    두 사람의 충돌에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플립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늘 사이가 안 좋나?”

    “아주머니는 일을 시작하신 지 얼마 안 되셨는데 거의 하루도 안 빼고 아저씨와 다투신답니다.”

    “그랬군.”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다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마부가 마차 문을 열어 주어 바이올렛이 올라탔다. 함께 마차에 탄 룰루가 투덜거렸다.

    “하여튼 요리사들이란 다 자기 멋대로라니까요.”

    “그런가?”

    “예, 작은 마님. 그보다 제가 미트로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든답니다. 드셔 보시겠어요?”

    “응. 떠나기 전에 꼭 부탁하네.”

    바이올렛의 부드러운 대답에 룰루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작은 마님은 정말 대표님과 행동이 정반대시네요.”

    “그래?”

    “예. 작은 마님은 딱 수도 귀족 같으셔요.”

    좋게 말하면 예의 바르다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속에 있는 말을 잘 하지 않아 답답하단 뜻일 것이다.

    바이올렛이 수도 귀족처럼 고개를 적당히 끄덕이고 물었다.

    “남편은?”

    “대표님께선 아무래도…… 주장하시는 게 명확하시고요.”

    이기적이며 목소리가 크고.

    “결정이 빠르시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성질을 내며.

    “딱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예법을 좀 소홀히 여기신다는 걸까요?”

    이렇게 돌려 말하고 있는데도 단점이라고 말할 정도면 어느 정도로 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린지 짐작이 가시죠?

    고용주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어 빙빙 돌린 말 속에 함유된 뜻을 읽은 바이올렛이 그 맘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마차가 수도 끝자락, 강과 바다가 맞닿는 하구로 향했다.

    *

    수도는 3년 사이에 그다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창밖으로 보이는 제 친오빠 에쉬 로렌스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여동생을 윈터 블루밍과 결혼시키며 받은 돈으로 라크라운드는 위기를 넘겼다. 에쉬는 농가에서 손수 밭을 가꾸고 사는 모습을 연일 신문에 실으며 라크라운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모았다. 바이올렛은 그런 제 오빠가 너무도 꼴 보기 싫어 창문을 커튼으로 가렸다.

    마차가 멈춘 곳은 라크라운드를 관통하는 레클 강 하구의 자그마한 섬이었다.

    룰루가 앞장서며 말했다.

    “요즘 여기가 관광지로 유명해서요, 외국인 관광객들이 무조건 들른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근사하네.”

    다리 앞과 건너편 모두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있었다. 바이올렛은 모처럼의 세상 구경에 취해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

    날이 더워져 재킷을 벗어 한쪽 어깨에 걸친 윈터가 손목시계를 보며 인상을 썼다.

    “뭘 하느라 아직도 안 보여.”

    “아직 2분 남았어요, 대표님.”

    옆에서 하옐이 꿍얼거렸다.

    “게다가 옷도 10시 넘어서 보내 드렸어요.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하잖아요.”

    “넌 어제부터 왜 자꾸 바이올렛 편을 들어?”

    윈터가 생각해 보니 왜 그러냐는 듯 묻자 하옐이 냉큼 시선을 피했다. 윈터가 혀를 차며 말했다.

    “굳이 또 새카만 드레스를 골라 입고 나오겠지.”

    “그러게요. 정말로 작은 마님은 왜 늘 검은색이나 회색 울 드레스만 입으시는 걸까요? 그것도 무늬라곤 하나도 없는 것만.”

    “귀하신 공주님 취향…….”

    투덜거리던 윈터는 멀리서 바이올렛을 발견하고 말끝을 흐렸다.

    바이올렛은 윈터가 머릿속으로 예상한 것과 정반대의 드레스와 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올해 처음 핀 봄꽃 같았다. 싱그럽고 사랑스러웠다. 바이올렛 역시 윈터를 발견하고 여느 때처럼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바이올렛이 모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하러 갈까요?”

    “오늘도 어두컴컴한 걸 입고 올 줄 알았더니.”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좋아하잖아. 검은색.”

    그의 말에 바이올렛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곧 다시 다물었다.

    굳이 그에게 이런저런 감정들을 설명할 힘이 없었다. 말할 힘이 없는 게 아니라, 말한 후에 그가 보낼 냉대를 받아들일 힘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그냥 말을 돌렸다.

    “배고프네요. 어서 가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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